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탈 없이 잘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큰 목표를 이루는 것? 흠 잡을 데 없는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것? 아니면 은인을 만나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 예,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탈 없이 잘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이 세가지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졌느냐, 얼마나 아름다우냐, 얼마나 똑똑하냐 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갓 태어난 영아든 아니면 죽음 직전의 노인이든 그 누구라도 이 세가지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인생은 난리가 난 것입니다. 하지만 일생동안 이 세가지만 잘 하면 가진 것이 많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나중 일입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변비로 고생하는 줄 몰랐습니다. 변비약 ‘아락실’ ‘둘코락스’ 이런 광고들의 모델들이 다 여자들이잖아요. “변비 조심하세요” 라고 광고하면서. 평소에 이쁜 척하는 자매들이 그렇게 속 깊은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변비 한번 없이 먹고, 싸고, 자는데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왔습니다. (마치, “목사님 너, 잘 났습니다.” 하는 표정이군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 면회간 것 빼고 제 몸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간 적은 딱 세 번. 한번은 잠자다가 어디다 찧었는지 일어나보니까 손가락이 부어 있더군요. 그래도 꾹 참고 한 일주일을 지냈는데 그동안 고름이 생기고 많이 부어서 아파서 도저히 못견디겠더군요. 그래서 고름 빼러 병원에 간 것. 두 번째는 사랑니 빼러 간 것. 마지막 세 번째는 고시원에서 삼겹살 먹다가 고기에 붙은 돼지털을 방심해서 먹다가 목구멍에 걸려서 병원에 간 것. 이렇게 세 번입니다. 생선 가시가 목구멍에 걸리면 숟가락에 가득 밥을 떠서 목구멍에 삼키면 가시가 넘어갔는데 돼지털이 목구멍에 걸리니까 아무리 밥을 삼켜도 이게 탄력이 좋아서 구부러졌다가 펴졌다가 하는데... 안 빼자니 따끔따끔 목구멍을 찌르고, 빼자니 민간기술로는 도저히 안되고 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간호원이 환자같지도 않은 사람이 와서 귀찮게 한다는 듯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면서 핀셋으로 간단하게 뽑는데 그때 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구멍에 돼지털이 걸려서 아픈 것도 아픈건 아픈건데 어떤 건 심각하게 아픈거고 나 같은 돼지털은 우습게 여기고 불친절하게 대하니 기분이 몹시 나빴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이정윤 자매님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많이들 문병가세요.
이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이 세가지는 건강의 척도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동물들도 이 세가지로 건강한 동물과 비실비실한 동물을 구분합니다. 사실 동물들은 그들의 일생 동안 다른 것은 모르고 이 세가지만을 추구합니다. 동물에게는 인생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고귀한 가치가 없습니다. 사자가 다른 동물 잡아서 고기는 먹고 가죽은 팔아서 부자가 되려는 목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자의 목표는 하루에 한번씩 사냥해서 잘 먹고 잘 싸고 20시간 가까이 잘 자는 것 그것이 모든 사자들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라이언 킹에 나오는 그런 스토리? 실제 사자 세계에는 없습니다. 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사람들 가운데 일생동안 다른 고귀한 인생의 목적없이 이와 같은 지극히 동물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삶이 고귀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체족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동물들을 봐라. 벌거벗고 다니지 않느냐? 얼마나 자연친화적이냐. 우리도 동물들처럼 벌거벗고 살아야 한다.” 이런 나체족들이 추구하는 인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옷 벗고 명동거리를 활보하겠습니까 아니면 여의도의 고층 빌딩에서 벌거벗은 채로 넥타이만 목에 걸고 일하겠습니까? 나체로 우리 교회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인생에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나체족들끼리 모여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 그것이 다 아니겠습니까? 한심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거룩한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으로 낮추는 한심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소개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있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의 인생은 예배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둘째로 사람의 인생은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며 셋째로 사람의 인생은 각자가 처한 곳에서 전도하는 삶을 살며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인생을 존귀한 인생이다 고귀한 인생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30년을 사시던 본처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에게로 오셨습니다. 다 같이 9절로 11절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를 베푸는 예배의 자리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세례란 죄씻음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하는 거룩한 종교행위인데 이로써 예수님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공생애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참고로 마가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며 또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의 신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복음서입니다. 마가복음의 첫 번째 기록은 세례 요한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기록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첫 번째 기록으로 예수님이 예배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에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자문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혹시나 상습적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일주일 중에 일분이라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고 거룩한 예배에 나오고 있습니까?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나에게 주실까를 기대하며 예배에 나왔습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주일이니까 예배하러 나왔습니까? 일주일에 개인예배이든지 가정예배이든지 아니면 공중예배이든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습니까?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거룩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가치있고 존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천천히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10분 전에 미리 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는 분입니까? 오늘 예배를 위해서 일주일 중에 일분이나 한번 이상 기도를 심었습니까 아니면 잊어 먹고 살다가 부랴부랴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평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에 대한 사모함 없이 사십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까를 기대하며 예배에 나왔습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주일이니까 혹은 맡은 직분이 있으니까 다른 멘티들 때문에 예배하러 나왔습니까? 일주일에 개인예배이든지 가정예배이든지 아니면 공중예배이든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남이 가니까 혹은 가족들 눈치 때문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예배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에 따라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인생도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한 기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응답되기를 기대하면서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혹은 좋은게 좋은 것이여” 하면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데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배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예배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열정의 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배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마지못해서 예배드리고 아니면 게으름 피우다가 예배에 늦고 그러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학업이나 사업, 직장 때문에 너무 바빠서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 일주일에 예배를 한번 드리는 사람과 두 번 드리는 사람과 세 번 드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열정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예배를 많이 드리는 순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치 못할 사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중에 예배를 한번만 드리는 사람은 TV를 보거나 다른 필요 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예배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만큼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를 사랑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사랑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헌신하기를 사모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사랑하는 사람은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 연합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라는 음성을 듣고 예배를 통한 감격을 얻게 됩니다.
예배하는 인생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가치있게 만듭니다.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법도 간단합니다. 다른데 한눈 팔지 말고 예배와 공부에 집중하면 여러분도 합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한 교회에서는 이렇게 해서 두 형제가 동시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었습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또 다른 교회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서 한 해에 20여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시에 합격했던 사람들 주일에는 완전히 예배에 삶을 드렸고 수요예배와 금요철야예배에 거의 빠지지 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시고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존귀히 여기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존귀히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 예배에 감격을 누린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여러분을 가치있는 인생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축복받을 인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참된 청년들은 예배로 승리하는 성공하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5부 예배에만 참석하지 마세요. 다른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 1부부터 4부 중에 다른 예배에도 참석하세요. 설교를 이해할 수 있는 청년임에도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그분의 영성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4부 예배에 참석하면 2시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애매해서 5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는 청년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청년들이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더 큰 사랑과 열정을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생명을 걸고서 하루에 세 번씩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사모했던 그를 얼마나 높이셨습니까? 3개국이 흥망성쇠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다니엘을 계속해서 총리의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 젊은 청년의 때부터 예배에 집중하고 예배에 성공하고 예배에 열정을 가진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성공적인 인생으로 인도하십니다.
두 번째로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의미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배를 마치신 예수님을 성령님이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의 위협속에 계셨는데 천사들이 이 예수님을 수종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위험한 들짐승들이 있는 곳입니다. 독사와 독전갈이 득시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놀라운 음성을 들으신 예수님을 성령님은 그 예배의 자리에서 옮겨 광야로 이끄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광야의 온갖 위험 속에 노출되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예수님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충만한 은혜를 받은 우리를 다음으로 하나님은 마귀의 온갖 유혹과 위험이 가득한 세상으로 몰아내듯이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드리는 삶이 좋다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몇날 몇일이고 머물러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우리를 세상으로 내 보내서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혼자만 간직하고 죽은 송장처럼 살게 하시지 않고 그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는 온갖 위험한 것들이 많습니다. 나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성적 유혹과 퇴폐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거리로 한번 나가보십시오. 밤거리에서 여러분이 바라보는 네온사인의 50%이상이 여러분을 성적 타락으로 인도하는 것들입니다.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언제든지 포르노 사이트나 자살 사이트, 저질 사이트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면 직장과 여러분의 사업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리떼 같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나를 넘어뜨리려고 사사건건 시비 걸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인간적으로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크게 상처주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더 짓밟으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면서 예배의 자리에만 있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우리를 성령님은 죄악된 세상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무작정 내몰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모든 위경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 성령님의 임무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동행과 보호하심으로 세상에서 승리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있든지 군대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뜻대로,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었던 경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다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혹은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인간관계에서 갈등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대로 살려고 했고 하나님의 임재속에 살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로 24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우리 모두는 광야 같이 위험하고 살벌한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입니다. 거기가 어느 곳이든 누구와 함께 있든 장소와 함께 있는 사람과 관계없이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 속에 살면서 우리가 속되게 살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뭐하러 다른 사람과 다툽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오해도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의 임재의식 속에 살려고 하지만 때때로 성령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령님은 제가 실패하지 않도록 저와 동행하시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승리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위험하고 험난한 세상속에서 실패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을 살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성령님의 동행하심과 보호하심을 얻는 인생이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본처인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14절과 1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서 예수께서 전도하셨던 본처인 갈릴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일 수 있고 학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그 어디이든 갈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혹은 다른 여러 가지 모임으로 위로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한 다음에는 우리가 처한 본처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만 받으려는 사람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과 허무입니다. 예전에 제가 선교단체에서 함께 사역했던 한 자매는 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한 것 같애, 잉” 그녀는 바쁘게 살았지만 항상 자기 연민에 빠져서 힘들고 지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힘들고 함께 일하는 저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의욕과 열정을 갖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계속 위로만 받으려하지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위로만 바라는 사람은 쉽게 허무에 빠집니다. 위로만 받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뭔가를 하려는 의욕이 약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허무로 이어집니다. 무엇을 해도 헛되고 헛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도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허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무서운 적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져서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교활한 계략입니다.
여러분 상처없는 새는 없습니다. 어떤 새이든지 하늘을 날다 보면 전기줄이나 벽이나 혹은 다른 새와 싸우다가 다친 상처로 가득합니다. 맹금류로 다 자란 새의 왕 독수리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날개로 가려진 곳곳에 온갖 상처들이 새의 왕이 되기까지 사투를 벌인 훈장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상처없는 새는 오로지 태어나자마자 죽은 새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태어나자마자 죽은 새처럼 그렇게 위로만 바라며 나약하게 살겠습니까 아니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며 세상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목적이 이끄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우리 가운데에는 계속 위로나 받으며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인생은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대로 예배하는 삶,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 죽기까지 사명감당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