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슨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 일상의 일과 놀이에서 행복찾기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예전에 두 번 읽었지만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 동네 도서대여점에 들려 보았다. 사회과학 분야의 스테디셀러 중의 하나라고 들었기에 당연히 동네 도서대여점에 있으려니 했는데 너덧 군데를 들려 봐도 없다는 답뿐이었다. 단지 그런 책이 없다는 말만 들었으면 덜 섭섭했을 텐데 늦은 저녁 때 들린 곳에서는 <몰입의 즐거움>이 아마 낯 뜨거운 비디오나 연애소설인 줄 알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도 이런 걸 찾으시네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점원도 있었다. 제목만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혼자 웃음을 참고 나왔다.
사실 “몰입의 경지”는 우리의 일상생활 어떤 활동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주장이다. 당연히 섹스나 비디오 게임, 만화 읽기에도 해당되는 현상이다.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신체의 감각기관은 모두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한 쾌락(pleasure)과 몰입을 통한 즐거움(enjoyment)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몰입의 경지는 단순한 감각 자극에 대한 쾌감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섬세한 관심과 집중된 노력을 들이는 과정에서 얻는 행복한 체험이라고 한다. 몰입 이론에 대해서는 차후에 설명을 하기로 하고 우선 칙슨트미하이 교수와의 첫 만남부터 기억해본다.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인간적인 면모
198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를 마친 나는 미시적인 심리학 말고 좀 더 큰 시각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없을까 진로를 찾다가 컬럼비아 대학원의 지도교수였던 존 브로튼 박사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시카고 대학 박사과정에 응시를 하였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후 인터뷰를 하러 시카고 대학에 가서 만난 분이 당시 시카고 대학 인간발달학과 과장이었던 칙슨트미하이 교수였다.
그 때는 그 분의 명성도 몰랐고 시카고 대학의 독특한 학풍도 몰랐다. 나의 이력서를 본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한 해 단 몇 명만 뽑는 박사 과정에 조건부 입학이라면서 그 “조건”이란 시카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다시 하는 것이라 했다. 아니, 방금 석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그것도 단 1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한 학생에게 석사 과정을 다시 하라니! 아무리 78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한 콧대 높은 대학이라지만 좀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이해가 된다. 시카고 대학의 인간발달학과는 심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의 다학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학생들은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한 30대와 40대 초반들이 주류였다. 그 때 나는 겨우 만 25세도 채 안된 그야말로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이만 적은 게 아니라 인생 경험 자체가 미달이었다. 학교와 공부 빼고는 직장 경험도 없었고 결혼, 출산, 양육 등도 해 보지 않았기에 출생부터 사망까지 긴 인생의 성장 변화 과정을 다루는 인간발달학을 공부하기엔 역부족이었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 뜻도 모르고 학부부터 석사까지 거의 다 A 학점만 받았던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시카고 대학원의 공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해낼 자신이 있다고 우겼다. 그랬더니 칙슨트미하이 교수님은 미소 띈 얼굴로 “우리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이 아주 높아요. 하지만 졸업 후 얼마나 장기적으로 성공하느냐는 성적과는 무관 합니다.”하시며 온화하게 나의 외골수 주장을 반박하셨다. 그래서 또 여쭤 보았다. “그럼 무엇이 장기 성공을 결정합니까?” 비장한 각오로 물었더니 동기(motivation)라면서, 그러나 동기는 상당히 주관적이며 폭이 넓기에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알쏭달쏭한 답을 하시는 것이었다. 한참 그렇게 뜸을 들이던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만일 박사 학위를 받는다면 그 후에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서슴없이 평소 생각했던 대로 학습기, 가족형성기, 중년기, 노후까지 세워놓은 나의 인생계획에 대해 말했다. 흥미롭게 듣던 그는 그 자리에서 조건부 입학을 취소하고 곧바로 박사 과정으로 입학을 허락하였다. 물론 그때는 칙슨트미하이 교수님께서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몰랐다. 나의 답이 몰입의 즐거움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근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머리 속에 환히 떠오르는 그의 커다란 연구실은 늘 여유와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연구중심 대학 교수들이 그렇듯이 바쁜 연구에 지장을 줄까봐 제한된 면담 시간에 겨우 배정을 받아 들어가도 빨리 나가 주기를 바라는 듯한 초조하거나 따분한 표정을 짓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교수와의 면담 요청은 과사무실 비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신청하면 거의 언제나 바로 면담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방대한 연구와 저술활동, 교내 보직 등 일속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학생을 최우선순위로 여겨준 진정한 교육자였구나 하는 생각은 훗날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말 많은 달변가가 아니었다. 콸콸 쏟아내는 대형 수도관같이 다량의 정보와 지식으로 학생들을 압도하는 여느 교수님들과는 달리 그는 한 수업에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아주 천천히, 조용히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묻고 답하는데 할애하고 자신의 생각은 퍽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밖에는 표현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셨는데 수업 전에 미리 읽도록 과제를 내어준 책이나 논문을 미처 읽지 않은 게 분명한 학생이 설혹 본 주제와 동떨어진 말을 하더라도 “틀렸다. 도대체 그 책도 안 읽고 이 수업에 들어 왔냐?!”며 꾸짖기는커녕 한참 거리가 먼 그 답에서 어떤 가치라도 발견하여 본래의 주제와 연결을 시켜주었다. 연결하는 과정에 언어학, 역사학, 물리학, 유전공학, 신학, 철학, 문학 등을 섭렵하는 그의 방대한 지식에 학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러면서도 결코 과장하거나 뽐내지 않는 그의 약간 어눌하고 수줍은 표정에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 수업이 끝난 뒤까지 한참 남는 여운은 문제를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길러주었고 교육이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실 밖 실생활에서 더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논문과 책을 읽고 학기마다 50쪽 넘게 끙끙대며 소논문을 제출했던 과목이지만 학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잊혀지는 수업도 많았는데 칙슨트미하이 교수님의 강의는 큰 그림 몇 개만 가지고 별로 배운 것 없이 지나간 듯 했다. 하지만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흐른 뒤에도 아주 선명히 기억날 뿐 아니라 수 만 가지 현상과 연상시켜주면서도 구심점이 뚜렷한 지식으로 남아 내 생활 속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시간의 주관성에 대한 그의 수업이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시계 바늘이 가르키는 객관적 시간과는 무관할 수 있다. 몰입의 경지에 빠져 있을 때는 긴 시간도 아주 짧게 느껴지지만 불안하거나 따분할 때의 시간 감각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이런 요지의 수업 내용은 아직까지도 전철 안에서나 학회 참석할 때, 또는 음식을 만들 때나 책을 쓸 때, 심지어 말이 통하는 친구와 밤새워 얘기할 때에도 종종 떠오른다.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몰입 이론
그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일반인들에게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몰입(Flow Experience) 이론이란 무엇일까?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몰입을 체험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 집중(focused)하며, 몰두한 상태(engaged in)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할 일 없이 히히덕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은 몰입을 체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정상을 향하여 힘겨운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산악인이나 상대가 될만한 맞수와 마주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몰입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추출법“(Experience Sampling Method, ESM)이라는 독특한 관찰방식을 고안하여 연구에 사용하였다. 아직 개인용 휴대폰이 보급되기 한참 전인 1970년대에 의사들이 쓰던 호출기를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을 2시간 단위로 쪼개어 각 시간대마다 무작위로 정한 시간(random time interval)에 호출을 보내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기입하고, 그 순간의 자기의 심리상태를 점수로 평가하도록 했다. 가령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충동을 느끼는지, 어떤 자신감을 느끼는지 등을 미리 배부한 소책자에 해당사항을 적어놓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세계에서 수년 동안 약 6천 명이 넘는 대상으로부터 무려 21만 장이 넘는 경험추출을 얻었다. 성별, 연령, 직업, 수입, 활동 내용과 행복감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사람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질적으로 아주 다른 체험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경우 수동적으로 텔레비전을 볼 때 편하다고는 하지만 실은 약간 우울한 느낌을 받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쇼핑몰에 몰려다니며 놀 때 주관적으로는 기분이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충족감을 주는 깊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몰입을 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기본 요소를 갖추었다고 한다. 첫째, 일을 하건 공부나 독서를 하건 아니면 취미 활동을 하던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다. (TV를 목적의식을 갖고 보는 사람이 몇 될까? 친구와 할 일 없이 몰려다니는데 어떤 목표의식이 있는가?) 둘째, 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즉각적인 피드백을 스스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구 치는 사람은 자신의 서브가 잘 되었는지 아닌지를 본인이 즉각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세째,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현재 능력에 적합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점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보다 버거운 과제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끼며, 반대로 도전감을 주지 않는 너무 쉬운 일을 반복할 때에는 따분함을 느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몰입’이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이 (flow)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몰입을 할 때 사람들은 하는 일에 푹 빠져 왠만한 고통이나 배고픔, 시간감각조차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을 경험하며, 한 시간이 일 분처럼 금방 흘러가고,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쓴다고 한다. 하는 일이 화초 가꾸기이던, 고난도의 외과수술이건, 뜨개질이던, 악기 연주나 스키타기, 흥미로운 연구, 봉사활동이던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삶이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또한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되고 삶의 질을 높게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깊은 수련을 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예술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 심지어는 마약에 취한 상태와도 흡사하다고 한다. 흔히들 무언가에 열광하는 사람을 ‘00에 미쳤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뇌와 신체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과 타인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이런 몰입의 경험을 불행하게도 미국인의 15%는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3%에 그친다. 일상생활에서 하루에 한 번 정도라도 몰입을 해 본 사람이 20%도 안 되며 자주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칙슨트미하이 박사는 몰입을 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생각은 산만하게 흩어지고, 행동은 무질서하며, 기분은 저조하고 따분함과 짜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학생이나 맡고 싶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흐트러져 있고 삶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칙슨트미하이 연구의 파장
몰입이론의 핵심은 참으로 간단명료하지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실로 엄청났다. 우선 심리학 분야에서만 보더라도 프로이트로부터 비롯된 근대 심리학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주로 강박증, 우울증, 신경증, 불안증, 공격적이거나 이상심리를 가진 불행하고도 병든 사람들에 대한 연구 위주였다. 겨우 그것을 벗어났다고 하는 행동주의 또한 인간을 기계나 하등 동물 수준으로 끌어내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단순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주류 속에서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예외적인 인간으로 도외시 되었고, 행복이라든가 삶의 질 따위는 아예 학문적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삶을 흥미롭고 가치 있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프로이트의 이론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고, 남이 알아주거나 보상을 주지 않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전심전력으로 암벽타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을 행동주의자들은 설명하기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칙슨트미하이 박사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삶을 즐겁고 가치 있게 사는 사람들은 물론 똑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인류에게 크게 공헌할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몰입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낸 것이다.
칙슨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은 심리학의 주류를 불행한 사람들의 연구에서 행복하고, 강인하며, 뛰어난 사람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180도 방향 전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1998년에 결성된 <긍정심리학>이라는 새 분야일 것이다.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펜실베니아 대학의 마틴 셀리그만과 함께 긍정심리학의 선구자이며 꾸준히 “예외적”으로 행복하며 삶의 질이 높고 사회와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연구하여 그 비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해왔다.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방대한 연구는 심리학을 넘어서 교육, 정치, 문화, 미디어, 기업, 예술 분야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의 예를 들어보자. 수많은 교육자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어떤 학생들이 시험 볼 때 불안감을 보이는지, 수업 중에 따분해서 하품을 하는지, 아니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집중하는지를 무수히 보아왔겠지만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지를 잘 몰랐다. 단지 지능, 동기 유발, 학습 태도 등을 논하던 교육자들은 <몰입 이론>을 적용하여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며, 학생 개개인의 수준에 맞는 도전을 줌으로써 일부의 “우등생” 뿐 아니라 대다수의 학생들의 질적 향상을 얻고 있다.
창의력 개발에 있어서도 몰입 이론은 아주 유효적절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예술가들의 일상을 면밀히 관찰하던 칙슨트미하이 박사는 창의력이 뛰어난 예술가들은 이미 몰입의 체험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창의력이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시대인지라 그의 몰입 이론은 기업에서도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다. 큰 돈 들여 힘들게 채용한 사원들이 금방 다른 직장으로 떠나가 버리거나 아니면 지겨움에 찌든 상태로 겨우 최소한의 일만 하려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그러나 몰입의 이론을 경영에 도입해보면 신입 사원을 가려내는 기준을 명확히 세울 수 있고 생산성을 몇 배로 올릴 수 있다. 즉 이 사람은 목표가 뚜렷한가? 스스로 피드백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가? 그리고 그 일을 할만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도전을 찾아 한 단계 더 높은 능력과 기술을 키워나가려는 태도인가? 그렇다면 그는 맡은 일을 단지 잘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하고, 새로운 일을 추구함으로써 본인과 주변 사람에게까지도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인재라고 봐도 거의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몰입 이론이 21세기에 갖는 의미
앞으로 그의 업적은 어디로 확산될까? 아무도 단정할 수 없지만 20세기 기계와 물질 본위의 패러다임에서 21세기 인간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는 과정에 그의 방대한 연구는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21세기 교육 정책의 틀을 짜는 일이나 기업의 사활을 거는 생존전략을 세우는 데, 또 환경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그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수뇌부에 직접, 간접적으로 핵심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한편 지난 1995년부터 현재까지 긍정심리학의 대가들인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와 스탠포드의 윌리엄 데이먼 등 세 그룹의 연구 팀들로 구성된 <훌륭한 일에 관한 프로젝트> (Good Work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 대상은 저널리스트, 유전공학자, 사업가, 재즈 음악가, 연극인, 자선사업가, 대학교수, 의사 등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뛰어난 능력과 실력을 지니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긍정적이고도 책임 있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워낙 방대하고도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진행될지 모르는 장기 연구라서 아직 그 성과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초기 연구 결과만 보아도 이 연구가 사회와 인류 발전에 어떤 공헌을 할지 짐작할 수 있다. 일예로 한 연구에서는 뛰어난 유전공학자와 최상급저널리스트를 대상으로 과연 어떤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에 입각해 그 직업을 선택했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수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녔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자신의 일이 자기가 속한 직장이나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확고한 믿음과 책임감이다. 예를 들어 기자나 방송인의 경우 초년생 때부터 자신의 보도 내용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했고 그런 마인드로 사건을 취재하는 사람들일수록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는 일에 즐겁게 몰두하고 질 높은 기사를 쓴다는 것이다.
둘째, 일과 사생활의 균형감각이다. 때로 우리는 불행한 천재라던가, 일을 위해 개인 생활을 완전 희생한다는 사람을 보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자기와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며 균형감각을 잃은 그들의 삶은 대체로 고독과 불행감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장기 성공자들은 가정, 교우관계, 취미와 일에 조화와 균형감각을 잃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행복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셋째, 그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인생에 깊이 존경하고 따르는 멘토(mentor)를 최소한 한 명 이상 가지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훗날 그들은 다시 자기보다 젊은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는 멘토가 되어줌으로써 가르침과 배움의 연결고리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몰입은 자기충족만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 전체와 이어주는 끈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연구 결과는 일반인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테면 졸부들의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배어있는 따분함과는 반대로 서울과 부산 외각에서 갖은 사정으로 맡겨진 아이들을 돌보는 마리아회 수녀님들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을지라도 한결같이 얼굴이 기쁨에 빛나 보이는데 그 이유를 칙슨트미하이 교수의 <굿 워크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고,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게 키운다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으며, 자기를 더 큰 공동체와 연결짓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여가나 인간관계, 심리치료, 문화, 게임 산업, 미디어 비평, 정치외교, 의학, 종교학, 뇌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몰입의 이론이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몰입이론의 한계와 대안
지금까지는 몰입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만 소개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하면 몰입의 즐거움이 주는 부정적인 현상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공부하라면 5분도 안 되어 하품하고 얼굴을 찡그리던 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할 땐 배고픈 줄도 모르고 시공을 초월한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 무던히도 말리고 야단치고 싸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칙슨트미하이 교수도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 오락, 도박, 심지어 바람둥이의 탐닉까지도 몰입의 세 가지 조건 (뚜렷한 목표, 즉각적인 피이드백, 그리고 실력과 도전이 계속 맞물리면서 고조되는 스릴감)을 완벽히 갖추었기에 그토록 쉽게 열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몰입의 즐거움 그 자체는 돈이나 에너지처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중립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즉 관심을 모으고 행동을 일으키는 몰입은 정신력의 원천이지만 다른 형태의 힘과 마찬가지로 건설적 목적으로도 파괴적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이 몸을 녹여 추위를 견디는 데도 쓰이지만 집을 태워 없애기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기에 몰입의 즐거움을 주는 목표를 찾아나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세상의 무질서를 줄일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원래 인간 세상에 무질서를 초래하는 행위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종교의 몫이었다. 탐욕, 살인, 혼외정사 등을 ‘죄’나 ‘악’으로 규정하고 금기시 했던 이유는 몰입의 에너지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며 모두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무질서를 일으키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오늘, ‘개인의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더 이상 내세적인 설교나 촌장의 훈계 같은 방식으로 인류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도록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그 몫을 과학자, 작가, 언론인, 예술가, 기업인, 교육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과 역량 속에서 맡아야 한다. 과학적 진리와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벗어나지 않되 자기탐닉이나 이기주의보다 더 큰 초월성을 지닌 목표를 세우는 데 새로운 터전을 발굴해야 한다고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제안한다. <훌륭한 일에 관한 프로젝트>도 그런 의미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보인다.
몰입이론이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칙슨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이 오늘 한국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시사할까? 세계에 유래 없는 초스피드 고속성장 속에 우리는 점점 속수무책으로 삭막해지고 이기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마치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희생할 수 있고,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와 이기주의 밖에는 다 사치스런 허세라고 세뇌하는 현 세태에 잠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는 것 같다.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혹은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 신호등만 보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인파에 떠밀려 타고내리는 전철 속에서, 그리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가까스로 취업한 직장에서 우리는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끼는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도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일에 흠뻑 취해 일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까지 사지선다형 문제를 평균 100만 개 이상 풀어본다는 한국의 학생들은 몰입의 경지에 빠져드는 수업을 단 한 번이라도 받아본 적이 있을까? 걸음마도 배우기 전부터 수영, 영어, 읽기, 셈하기 등 “학습”을 강요당하는 우리의 아기들은 놀이에 흠뻑 “몰입”하는 자연스러운 행복감을 너무 일찍부터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맺음말
21세기 오늘, 우리는 싫든 좋든 전 세계인을 유사한 경험으로 몰고 가는 거대한 오락(entertainment) 산업, 무진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소비물품과 소비욕구를 끊임없이 부추기는 광고, 그리고 쉴 새 없이 눈과 귀로 입력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자기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사람, 사물, 자연에 대해 세심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집중된 노력을 들여야 진정한 즐거움 (enjoyment)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 심리학이나 얄팍한 자기개발서 따위가 현혹하는 끝없는 자기애나 턱없이 오만한 자아중심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발달 (Human Development)은 일상의 평범한 일에 쏟는 관심과 정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나아가 자기보다 더 큰 공동체와 일체감을 느낄 때 얻을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칙슨트미하이 교수는 현대인의 공통어인 “과학”적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월간 NEXT 2005년 11월호 <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101-109쪽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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