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나 간절히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이어줘야
화두․염불 삼매는 다르지 않아 호흡 유의․단전에 의식 집중을
ꡒ일어나는 망념 무엇이든 상관말고 두려워도 말라
ꡐ옴마니반메훔ꡑ 진언염불 말법시대 알맞은 수행법
◇정공스님은 ꡒ아미타불의 미묘본심을 깨친 자라야 능히 미묘한 법을 깨닫고 자재함을 얻어 중생제도에 나설 수 있다ꡓ고 강조한다.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근대의 선지식인 전강(田岡 永信, 1898~1974) 선사의 맏상좌로 염불삼매와 화두삼매를 동시에 체득하고서도 평생 울력만 하며 30여년간 극락사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정공스님. 8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구경각을 이루기 위해 홀로 치열하게 정진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행자 스님이 준비해 준 저녁 공양을 먹으며, 정공스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이번 걸음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다담을 한 참 나눈 7시경 밖에서 나는 인기척, ꡒ주지 있는가?ꡓ
ꡒ네, 스님 들어오세요. 손님이 왔어요.ꡓ
이윽고 들어선 노스님. 극락사 조실 정공스님은 기자가 상상하던 근엄한 모습의 큰스님이 아니었다. 남루한 작업복에 줄로 멘 바지끈. 방금 울력하다 온 차림 그대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자비스런 미소를 띤 스님에게 3배를 올리고 가르침을 청했다.
ꡒ참선과 염불은 다 공도리(空道理)야.ꡓ
참선이나 염불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무슨 방편이든지 100% 몰입해야 견처를 얻을 수 있다는 정공스님은 ꡒ지극히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 받았을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는 마음으로 쉼없이 정진해야 한다ꡓ고 말했다.
신도들로부터 받는 보시의 무서움을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스님은 ꡐ시주만 축내고 공부하지 않은 스님들이 지옥에 많이 있다ꡑ며, 철저하게 스님들의 의식주를 직접 해결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시사철 혹독한 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가까이서 모시는 상좌들이 배겨나기 힘들다는 것이 시봉하는 스님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1920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한 정공스님은 여느 스님과는 다른 특이한 수행이력을 갖고 있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 김일순 보살의 영향으로 영문도 모른 채 다섯 살부터 ꡐ나무아미타불ꡑ을 따라 부르며 절에 다녔다. 11세때 대구로 전학하고 서당에도 다니면서도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염했다. 나이가 들면서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을 알게 되면서 더욱 염불 정근에 힘썼다. 나중에는 ꡐ나무아미타불ꡑ을 얼마나 외웠던지, 꿈속에서도 염불이 이어져, 18세에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한다(그 내용은 기사화하지 말라는 스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생략).
염불삼매를 얻은 후 스님은 성인이 되자,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고자 출가를 발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년간 전국을 떠돌며 선지식을 만났으나, 스승을 만나지 못해 방황하다 근세의 선지식인 전강 선사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출가인연이 맺어졌다.
해인사 설법전에서 처음으로 전강스님의 법문을 우연히 듣게 된 정공스님은 전강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고, 법문이 끝난 뒤 스님이 계신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ꡒ누구냐?ꡓ
ꡒ큰스님을 친견하러 왔습니다.ꡓ
ꡒ들어와라.ꡓ
정공스님은 삼배를 올린 뒤 간절한 마음으로 전강스님께 여쭈었다.
ꡒ스님, 제가 출가하려고 3년동안이나 스승을 찾아 헤매었는데, 오늘에야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꼭 제자로 받아주십시오.ꡓ
전강선사는 정공스님을 보고 한눈에 법기(法器)임을 알아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활구선(活句禪)으로 한국의 근세 선풍을 드날린 전강선사는 이 때만해도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덕숭산문의 가풍을 잇는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정공스님은 전강선사를 따라 곡성 태안사에서 계를 받은 후 6년간 무주 안국사에서 홀로 정진했다. 이 곳에서의 수행은 ꡐ내가 곧 부처ꡑ라는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했다.
공부를 마친 후 인천 용화사로 스승을 찾아가니 전강선사는 ꡒ이제 정공은 용화사에서 나를 시봉해야 한다ꡓ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정공스님은 전강선사를 모시고 수행하며, 스승으로부터 ꡐ판치생모(板齒生毛)ꡑ라는 화두를 받고 화두일념에 빠졌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ꡒ어떤 것이 ꡐ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ꡑ 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ꡓ하니 답하시되, ꡒ판대기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板齒生毛)ꡓ 하셨다.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ꡐ판치생모ꡑ라 했을까? 이 화두도 ꡐ무자ꡑ 화두와 같이 ꡐ판치생모ꡑ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ꡐ판치생모ꡑ 라고 말한 조주 스님의 뜻에 있는 것이니, 정공스님은 이를 참구해야 했다. 스승인 전강선사는 화두드는 법을 이렇게 설하곤 했다.
ꡒ화두가 잘 된다, 잘 안된다, 망상이 생긴다, 마음이 산란하다 등의 생각이 있으면 화두의 순일지묘(純一之妙)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일어나는 망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상관도 말며 두려워도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는 그저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간절히 간절히 일으킬 것이며, 없어지거든 또 일으키고 부지런히 끊어지지 않게 자꾸 이어주어라.ꡓ
스승의 가르침대로 화두를 지어감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정공스님은 화두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ꡐ판치생모ꡑ를 타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수월하게 본참공안을 타파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공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ꡒ이미 염불삼매로 득력한 선정력이 화두삼매마저 용이하게 터득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하고 보니, 화두삼매와 염불삼매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ꡓ
정공스님은 학인들에게 화두와 염불에 있어 호흡법에 주의하고 단전에 의식을 집중할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ꡐ판치생모ꡑ 타파로 스승의 인가를 받은 후, 전강문하에서 절차탁마하던 정공스님은 전강선사의 열반이후 인천 용화사를 떠나 토굴정진에 들어갔다.
23세에 견성한 후 당시 6대 선지식인 혜봉, 혜월, 한암, 용성, 보월, 만공 선사들과 거량하며 인가를 받은 전강 선사. 25세에는 만공 선사로부터 법맥을 전수, 전법게를 받았던 스승은 1975년 1월 13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신도 49재를 회향한 후, 법상을 차리라 명하고 법문을 하실 때에 ꡒ무엇이 생사의 큰 일인고(如何是生死大事)? 억, 구구는 팔십일(九九飜成八十一)이로다ꡓ 하고 열반송을 읊은 후 열반하셨으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였다.
전강선사의 임종을 지켜본 뒤 정공스님은 사제인 송담스님(용화선원 원장)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후 미련없이 떠났다. 스님은 일신의 편안함을 버리고 한국전쟁으로 터만 남아있던 무주 원통사를 복원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정진하는 치열한 일과를 계속했다.
스님이 원통사와 장수 극락사를 오가며 울력수행에 매진한 세월이 어언 27년이 지났다. 수년전 원통사는 상좌인 진오스님에게 맡기고 정공스님은 극락사에서 ꡐ옴마니반메훔ꡑ수행을 인연닿는 소수의 수좌들과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스님은 전강문하의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참선수행보다는 정토사상, 그 중에서도 ꡐ옴마니반메훔ꡑ 육자진언을 전하고 있다.
정공스님이 염불수행 가운데서도 굳이 ꡐ옴마니반메훔ꡑ진언을 강조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은 ꡐ나무아미타불ꡑ로 염불삼매에 들었지만, 말법시대에는 ꡐ옴마니반메훔ꡑ이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에서다. 나뭇잎에도 중음신(中陰神)이 붙어있을 정도로 천도되지 못한 무수한 영가들이 염불을 방해할 수 있지만, 육자진언에는 중음신이 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ꡐ옴마니반메훔ꡑ진언수련으로 견처를 얻었던 용성스님 역시 ꡒ무슨 주문이든지 다 제일이라고 했으나, 오직 6자진언은 삼세 대각과 모든 정사(正士)의 본심이며,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의 본원성품(本源性品)인고로, 모든 주문중에 으뜸이다ꡓ고 말한 바 있다.
정공스님은 오늘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력을 하며 염불삼매에 든다. 미래의 불국토인 용화세계가 지상에서 이뤄져 수많은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발원한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신 지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여 3회에 걸친 설법으로 모두 272억의 중생들을 성불시킨다고 한다. 정공스님은 전강 선사가 용화세계를 그리며 용화선원을 창건했듯이, 용화세계에서 다함께 성불하자는 간절한 바람에서 아득한 과거세로부터 지어온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는 ꡐ십악참회ꡑ를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정공스님
수행경력 특이…田岡문하서 화두 타파
근세의 선지식인 전강선사의 맏상좌이자, 인천 용화선원 원장 송담스님의 사형인 정공스님은 염불삼매와 화두삼매를 함께 터득한 특이한 수행이력을 갖고 있다.
1920년 11월 19일 경북 성주군 용암면 구룡리에서 태어난 정공스님은 5세부터 ꡐ나무아미타불ꡐ을 염했으며, 18세에 염불삼매를 이루었다. 염불삼매를 이룬 후, 이 세상을 정토의 세상으로 가꾸고자 출가를 발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간 전국을 떠돌며 선지식을 만났으나, 자신을 인도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해 몇해동안 방황하다 29세에 전강(田岡)선사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출가하기에 이르렀다. 전강문하에서 ꡐ이뭣고ꡑ 화두와 ꡐ판치생모ꡑ 화두를 타파한 후 ꡐ정공은 이미 오후사(悟後事)를 마쳤다ꡑ는 인가를 받았다.
1975년 전강선사 열반후 무주 원통사를 복원하고 장수 극락사에서 주석하고 있다. 법명은 정공, 법호는 지공이다. 수원포교당 주지 성관스님 등 30여명의 상좌를 두고 있다.
첫댓글 도사님 덕분에 여러 선지식을 지면으로나마 만나봅니다. 도사님 감사합니다요...*^*^*_()_
그런 한편, 이런 기사에 많은 안타까움이 듭니다.
기사에 나타난 말씀이 그대로라면, 정공스님은 전강큰스님의 법제자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어찌하랴, 전강큰스님도 제가 보기엔 완전한 도인은 아닌 것을...
자타가 인정하는 전강선사의 법제자 송담큰스님이, 지금도 세간에 잘 나서지 않으시며 토굴 수행을 멈추지 않는 그 뜻을 저희들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사에 나타난 정공스님의 일화를 보면, 비록 보잘 것 없는 범부인 제 눈이지만, 수행도 참 잘 하셨지만, 그래서 금방 화두에 한 소식 이루셨겠지만, 그리고 자비심도 깊으시지만, 감히 한 말씀드리면, 수행의 문제점(?)이 한 간극 사이지만 그래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참 자기 인연을 벗어나기 힘든가 봅니다. 저도 보현행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님도 당신 견처를 벗어나지(?) 못하시고.. 큰스님도 선지식도, 깨달음도 인가도, 모두가 부질없는 것을...
제가 이런 코멘트를 올리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이런 기사에 속으면(?) 아니 된다는 것이지요! 스님이야 훌륭하시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아마 스님도 그것을 아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기자에게 당부도 하신 걸게고, 그러니 스님이야 더욱 훌륭하신 수행자이겠지만...
정공스님이 하신 염불은, 제가 보기엔 청화큰스님의 염불선과 같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와서 일을께요.()()()
나무 관세음 보살 !!!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 옴마니 반베훔에 빠질뻔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