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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오늘날과 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첫 번째가 1929년이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1929년 개최 예정인 만국박람회를 바르셀로나에 유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1923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조직위 원회를 설치하여 지금까지 개최되었던 어느 만국박람회보다 규모가 크고 성대한 박람회를 위하여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 다. 바르셀로나가 항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최대한 할용 하였다. 마치 처음으로 도시계획을 하는 것처럼,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계획으로 공사를 시작하였고 바르셀로나는 비로서 새로운 도시로 탄생하였다. 두 번째는 1992년이었다. 바르셀 로나는 1992년 개최될 하계 올림픽 경기를 유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야심적인 새로운 도시 재편문제를 심도 있게 진행하 기 시작하였다. 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인구는 농촌에서 도시로 집중되고, 도시는 유입되는 인구 증가율에 미처 따라가지도 못하고 항상 새로운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차제에 하계 올림픽 경기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부분인 수도, 전기, 에너지 공급, 쓰레기 처리, 교통, 통신 등 근본적인 문제를 마치 신도시를 건설하는 기분으로 새로이 착수하였다. 여기에다 올림픽 경기를 치를 대단위 스포츠 시설, 선수촌과 아울러 경기 참관인을 위한 호텔시설 등 엄청난 대단위 건축물이 필요 하게 되었다. 도시 전체가 공사장이라 할 정도로 땅은 파헤쳐졌고 그리고 그곳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우뚝우뚝 서기 시작 하였다. 도시는 활기가 넘치게 되고 새로운 신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도시는 아름다워야 하고 아름답기 위하여서는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워야 한다. 바르셀로나가 새로 태어나게 된 두 번의 기회, 즉 1929년과 1992년을 비교해 본다면 그 사이에 60여년이라는 시대적 간격은 있었지만, 이때의 노력과 열정은 동일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1929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로 인하여 독일의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독일 파빌리 온’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세워지게 되었고 이는 스페인에 모더니즘운동이 펼쳐지게 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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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1886년 3월 27일 독일의 동부 지방인 아헨(Achen)에서 태어 났다. 미스의 아버지는 석공(石工)으로서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상급학교로 진학도 하지 못한 채 바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미스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스터코(Stucco:석고 종류의 마감재의 일종) 시공업체로서 이 회사의 제도실이었고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건축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채석장 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몇 페니씩을 벌었던 그는 어린 나이에 현장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고 익힌 돌, 벽돌 등의 성질, 이것을 정확히 쌓는 방법 등을 확실히 알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미스가 건축가로서 성장을 했을 때는 건축 재료 및 현장 감각에 대해서 정규교육을 받은 건축가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나는 아버지로부터 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나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도 이와 같은 말을 자주 인용하였던 것으로 탁상(卓上)이나 사무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현장의 거친 분위기 속에서 익힌 건축의 기초지식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그는 19세 때 청운의 뜻을 품고 베를린에 있는 건축 사무소로 옮겼다. 일반적으로 이 때는 대학에서 한창 공부할 나이였지만 미스는 현장에서 설계도 작성법 등의 건축 지식을 익히고 있었다. 베를린의 첫 직장인 이 회사의 대부분의 일은 목조였다. 미스는 돌, 벽돌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목재에 대해서는 일반상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스 는 얼마 있지 않아 이 회사를 그만두고 목재를 배우기 위해 당시 유명한 가구디자이너인 부르노 파울(Bruno Paul)을 찾아 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년간 목재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습득하게 되자 부르노 파울을 떠나 첫 작품을 설계하게 되었다. 이것은 철학교수였던 리일(Alois Riehl)박사의 개인저택으로서 베를린 교외의 노이바벨스베르그(Neubabelsberg) 에 건립하였다. 이 주택은 전통적 양식에 의한 것이었지만, 21세라는 나이에 비해 뛰어난 작품이었다. 미스의 건축에 임하 는 진지성과 그의 천재성을 예견하는 작품이었다. 이때 미스는 독일의 권위있는 건축가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제의를 받고 그의 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행운을 얻었다. 베렌스 사무소에는 이미 월터 그로피우스가 수석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고 있었고 미스가 들어가고 난 뒤 얼마 있지 않아 르 꼬르뷔제(1910년)도 이곳에 합류하게 되었다. 현대 건축의 거장 4인 - 로이드 라이트, 그로피우스, 미스, 르 꼬르뷔제 - 중 3인이 베렌스 사무소 출신이라는 것을 보아도 베렌스의 명성은 짐작할 수 있다. 미스는 3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건축에 관한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미스는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몇 가지 안을 발표했다. 글라스 마천루 계획안(1921), 콘크리트 오피스 빌딩 계획안(1922) 등은 당시의 건축사조로 보아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건축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였다. 외피(外皮) 전부를 글라스로 싸고 기둥과 보는 내부로 설계한 ‘피부와 뼈의 구축물’을 세계 최초로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미스의 근대주의 사조의 선두를 내딛는 첫 거보(巨步)였다.1차 대전 후 미스의 사회적 활동이 독일사회에서 인정받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독일공작연맹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1929년에 개최되는 바르셀로나 만국 박람회 독일관 설계자로 미스를 주저 없이 선정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 세워진 독일 파빌리온은 진열품을 일체 전시하지 않고, 건물 자체만으로 건축하여 만국 박람회 개최식 때 스페인 국왕이 참석하여 개최 선언을 위한 의전적 기능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어려운 기능적 요구 가 없이, 오직 순수한 공간의 구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예산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할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강점 이었다. 이렇게 설계된 독일 파빌리온은 근대 건축사상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고, 미스의 위대한 천재성이 확인된 현장이기 도 하다. 미스는 로마의 트라버틴(Travertine), 티니안의 대리석, 회색으로 착색된 투명 글라스, 크롬으로 도금된 강철주 등 최상의 재료를 사용하여 최신, 최고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건물의 구조는 트라버틴의 넓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고 기단 일부에는 검은 글라스로 주위를 두른 연못이 만들어졌다. 한 개의 수평 지붕 판이 여덟 개의 크롬으로 도금된 금속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이 금속기둥의 단면은 십자형 모양으로 하였다. 지붕판 밑에는 대리석 벽과 글라스 칸막이가 있고, 칸막이에 의해 구획된 장방형의 공간은 서로 연속되어 있어 글라스 유리벽을 통해 옥외의 공간과 서로 교차되도록 하였 다. 파빌리온의 실내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티니안 대리석의 녹색 벽이 배경 벽이 되어 있고 바닥의 거의 전부는 연못으로 만들어져 반사효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연못 코너에 게오르그 콜베의 여인 조각품이 장식되어 있어 한층 아름답고 평온 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내부 장식품으로서 콜베의 조각품 이외에 미스 자신이 직접 설계한 ‘바르셀로나 의자’와 6개의 바르셀로나 스툴(Stool) 및 2,3개의 글라스 테이블이 있다. 바르셀로나 의자는 X자형 다리의 우아한 곡선, 크롬으로 도금된 겉면, 가죽 매트의 실내 장식 효과, 전체의 프로포션 등, 한 시대를 초월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독일 파빌리온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해체되어 독일로 반송되어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미스의 탄생 100 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당시의 위치에 동일한 모습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고증을 거치긴 했지만, 건축 자재만은 당시의 것과 품질이 떨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독일 파빌리온은 보석처럼 아름다 운 건축으로서 아름다움을 아는 세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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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세계적인 화가들을 3명이나 낳은 곳이다. 쉬르레알리즘(Surrealisme)의 대표적 화가 살바도르 달리 (Savardor Dali:1904-1989),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태어나 14세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청소년기 를 보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화가, 조각가, 판화가로 20세기 화단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후안 미로(Joan Miro:1893-1983), 이들 세사람이 20세기 미술계에 남긴 업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 미로는 바르셀로나와 가까운 몬트로이그(Montroig)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4세 때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몇 년을 다니지도 못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19살에 그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아카데미 가리’에 들어갔다. 그는 25살에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를 바르셀로나에서 가졌는데 당시의 작품 경향은 미로가 평소 좋아했던 고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당시 유럽의 화단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포비즘의 경향도 다분히 띄고 있었다. 전시회를 마친 미로는 그 다음 해에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진출하여 피카소와 어울려 큐비즘 운동에 도 가담하였다. 이때의 미로 작품은 포비즘과 함께 큐비즘의 경향을 동시에 띄고 있었다. 미로는 독일의 화가 막스 에른스 트(1891-1976)와 어울려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의상디자인 및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한편 에른 스트와 함께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참가하여 선언문에 서명과 함께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에는 잠시 네덜란드를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베르메르의 작품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고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미국, 파리,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미 세계적인 화가였다. 미로는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전에서 판화 국제상도 받기도 하였다. 미로의 작품은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생물, 불가사리, 초승달, 별, 뱀 등이 기호로 된 모습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독자적인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농촌」 (1922)은 고향 몬트로이그의 어린시절 아름다운 시골풍경을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인간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미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미로는 바르셀로나 시 당국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 할 기념 미술관을 건립하여 줄 것을 제안했다. 시당국은 즉각적으로 환영 의사를 발표했고 기념 미술관 건축부지로서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몬주익 공원의 한적한 중턱을 제시하였다. 미술관 건립 위원회가 조직되고 이 위원회는 설계자로 조셉 루이스 설트(Josep Lluis Sert:1902-1983)를 지명했다. 설트를 지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설트는 미로와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출신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설트와 미로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미로가 설트보다 10여 살 연상이지만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설트는 파리에 살고 있는 삼촌의 소개로 미로, 피카소를 알게 되었 고, 설트는 파리에 살면서 자코메티, 칼데르 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1936년 설트가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 파빌리온 설계를 맡고 난 후, 설트의 권유로 파카소가 게르니카 벽화를 그렸고, 칼데르의 분수조각, 미로의 회화가 동시에 전시되었 다. 설트와 미로는 그 후에도 미로 스튜디오, 마에(Maeght)재단, 미로 기념 미술관 등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설 트의 전시 포스터를 미로가 직접 그려주기도 하였고, 설트의 집 벽면은 미로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었다. 설트가 설계를 할 때는 미로가 조언을 하였는데 특히 바르셀로나 미로 기념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로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하였다. 미술관은 미로 자신이 기증한 300점의 회화와 판화, 타피스트리, 도기 오브제 등 미로의 예술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층 진입 부분은 중정을 접하고 있어 중정을 통해 미로의 조각을 배경으로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진입부 좌측에는 기획전시실, 중앙에는 미로의 기념전시실, 우측은 지원시설인 카페, 락카, 기념품 판매점, 책방, 도서실, 강당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이들은 두개의 중정을 둘러싸고 있다. 자료실과 도서실에는 미로와 관련되는 자료 이외에도 동시대 예술가들의 자료도 함께 구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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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대 미술관은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 경기를 대비한 도시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이 지역은 카사 디 라 카리다드(Casa de la Caridad)로 수도원이 위치하였던 곳이며 특히 박물관이 세워진 자리는 수도원이 있었을 당시 가장 성스러운 기도실이 있던 장소였다. 카사 디 라 카리다드 지역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 현대적인 양식의 미술관을 세워 서로의 특징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수도원 양식의 고색창연한 색상과 분위기 가운데 우뚝 솟은 백색의 현대식 건물은 마치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건축가 치고 한결같이 라이트나 르 꼬르뷔제, 미스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축가는 한사 람도 없으며, 이들의 이론을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의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을 설계한 마이어 (Richard Meier:1934-현재) 역시 르 꼬르뷔제의 이론에 사로잡혀 Pilots, Ramp, Skylight, Roof, Terrace 등을 즐겨 응용해 왔다. 마이어가 설계한 프랑크푸르트의 장식 미술관(1979-1984)과 하이 미술관(High Museum:1980-1983)에서도 외부 전경과 내부 전시공간을 램프를 이용하여, 산책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법을 자주 이용해 왔다. 바르 셀로나 현대 미술관도 상기한 내용의 동일한 기법으로 각층마다 공간개방과 평면의 자연스러운 변화, 자연광을 끌어들이 는 등 르 꼬르뷔제의 이론에 충실했다. 또한 마이어 작품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어지는 외장의 백색처리는 주변의 다른 건축물과 색채로서 구별 짓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색은 순결과 명백의 상징이다. “백색은 가장 아름다운 색이며 항상 빛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 다른 색은 그들의 배경에 의존해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백색은 절대성을 간직하고 있다.” “백색은 가장 인상적인 색채이므로 나의 작업에서 가장 개성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리챠드 마이어는 백색의 찬미자였고 예찬론자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백색이 늘 강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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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Exhibition(1923-1929) Parque de Montjuic-Plaza de EspanaBus 13, 27, 30, 55, 61, Metro L1, L3(Espana) Sant Medir parish church(1958-1960) C/de la Constitucio, 17Jordi Bonet Armengol, architectBus 91 Canodromo Meridiana(1962-1963) C/Concepcion Arenal, 165Antoni Bonet Castellana and Josep Puig Torne, architects Bus, 11, 12, 34, 62, Metro L1(Fabra i Puig) Hispano Olivetti Office Building(1960-1964) Ronda de la Universitat, 18Ludoviceo Belgiojoso, Enrico Peressutti and Ernesto N. Rogers, architectsCollaborators:J.Soteras(site supervision) and R. Casals(engineer)Bus 14, 16, 17, 24, 55, 58, 59, 66, Metro L1, L3(Catalunya), L2(Universitat) FF.CC.Generalitat(Catalunya) Fundacion Miro(Centro de Estudios de Arte Contemporanea) (1972-1974) Palaza de Neptu. Parque de MontjuicJosep Lluis Sert, Jackson & Associates(Project)Jaume Freixa Janariz(Project architect)Estudio Anglada/Gelabert/Ribas(site supervision)Bus 61. Metro L3(Paral. lel). FunicularPlaza dels Paisos Catalans(1981-1983) (Sants railway station)Helio Pinon Pallares and Albert Viaplana Bea, architects(with Enric Miralles, architect)Bus 27, 30, 43, 109, 544, Metro L3, L5(Sants-Estacio) Fregoli Il apartment Building(1981-1983) C/Brusi, 19Esteve Bonell Costa, architectBus 16, 17, 27, 30. FF. CC. Generalitat(Placa Molina-Sant Gervasi) Velodromo de Horta cycle track(1983-1984) Paseo de la Vall d’Hebron;paseo de CastanyersEsteve Bonell Costa and Francesc Rius Camps, architectsBus 27, 73, 76, 85. Metro L3(Montbau) Casa Pascual i Pons(La Catalana de Seguros)(1984) Paseo de Gracia, 2-4;ronda de Sant Pere, 1;c/Casp, 2-4Reform and restoration:Oriol Bohigas, Josep Martorell, DavidMackayMiquel Espinet y Antoni Ubach, architects;Lluis Pau, interior designerBus 16, 17, 22, 47. Metro L1, L2, L3;FF. CC. Generalitat(Catalunya) Palacio de la Musica Catalana(1982-1990) C/Sant Francesc de Paula, (unnumbered)Oscar Tusquets Guillen and Carles Diaz Gomez, architectsBus 16, 17, 19, 45. Metro L1, L2, L4(Urquinaona) Fundacion Antoni Tapies(1986-1990) C/Arago, 255Roser Amado Cercos and Lluis Domenech Girbau, architects Bus 7, 16, 17, 22, 24, 28, 43, 544, Metro L3, L5(Passeig de Gracia) Teixonera senior citizens’ residence and day centre(1988-1992) C/Josep Sangenis, (unnumbered);plaza de la ClotaJosep Emili Donato Folch, architectBus 19, 86Hotel Juan Carlos Ⅰ(1988-1992) Avenida de la Diagonal, 661-671Carles Ferrater Lambarri and Josep M. Cartana Guber, architectsBus 7, 75. Metro L3(Zona Universitaria) Collserola Telecommunications Tower(1989-1992) Turo de Vilana, Tibidabo Norman Foster&Partners, architectsFunicular del Tibidabo(Peu del Funicular) Montjuic Olympic Ring(1985-1992) Av. de l’Estadi;paseo de Minici NatalCarles Buxade, Federico Correa,Joan Margarit and Alfonso Mila, architectsBus 13, 61. Metro L1, L3(Espanya, Paral. lel). Funicular de MontjuicThe Olympic Village(1985-1992) C/de la Marina;c/Moscou;c/Doctor Trueta;av. Bogatell;c/Bisbe Climent;ronda del Litoral.Oriol Bohigas, Josep Martorell, David Mackay and AlbertPuigdomenech, architects(general urban design and Parks)Bus 6, 36, 71, 92. Metro L4(Ciutadella, Bogatell) Sant Abraham parish church(Abraham Ecumenical Centre) (1990-1992)C/Jaume Vicens i Bives, 2; c/Bisbe ClimentJosep Benedito Rovira and Agusti Mateos Duch, architectsBus 36, 41, 71. Metro L4(Ciutadella-Vila Olimpica) Barcelona Airport Terminal Building(1989-1992) El Prat de LlobregatRicardo Bofill-Taller de Arquitectura RENFE railway station(Aeroport) (departures from El Clot, Arc de Triomf, Placa de Catalunya and San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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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