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산자락을 끼고 도는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수십 리씩 걸어 학교에 다니면서 오가는 길가에 새겨진 아름답고 순박한 추억들은 마흔 고개가 넘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길모퉁이 바위 턱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다가 주변을 기웃거리는 산새랑 다람쥐들이 안쓰러워 먹다 남은 강냉이 밥(강냉이 밥은 산골 오지의 주식으로 손색이 없다)을 한 술씩 던져 주기도 했다. 맑은 물 속을 노니는 송사리들에게도 밥알 몇 개씩 던져주면 서로 차지하려고 몰려드는 모습들에 재미있어 하던 그 시절은 아마도 어느 교과서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었다.
닷새에 한 번씩 서는 장날이면 한적하던 시골길은 당연히 분주해지기 마련이다. 시장에 내다 팔아 입성이랑 생필품을 구해 오려고 잡곡이랑 더덕, 고사리 등을 챙겨 이고 지고 분주히 걸어가는 시골 아낙네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낮잠을 즐기던 토끼들이 놀라 도망치기 십상이었고, 길가 주막에서 한 잔 거나하게 취해 흥얼거리며 걷는 남정네들의 시름겨운 노랫가락에 석양도 못내 아쉬운 듯 기웃거리며 산너머로 숨어 비리곤 했었다.
시골길, 오솔길, 정겹고 순박하기만 했던 산골 사람들의 온갖 애환이 꾸덕꾸덕 붙어 있던 이 길이 어느 결에 '신작로'라는 유식한 이름이 붙여지고 달구지, 도락꾸( G.M.C)들이 가끔씩 드나들 때만 해도 해맑은 산골 아이들은 그저 신기하고 좋아만 했었다. 시커먼 매연과 함께 굉음을 울리며 덜컹덜컹 달리는 도락꾸 뒤를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간혹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만나 뒷칸에라도 타게 되는 날이면 하루 종일 별나라에라도 다녀온 양, 기분이 들떠 있던 기억들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따뜻한가.
시골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애고?
새마을 운동이라는 기치아래 '시골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애고'라는 노래가 한창 유행하는가 했더니 어느덧 시멘트 포장에서 아스팔트로 변신한 번 듯한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그렇게도 소박하고 인심 좋던 마을들이 왠일인지 하루가 다르게 변해 버린지 오래다. 동네 꼬마들이 모여 놀던 공터는 온갖 자동차들의 차지가 돼 버렸고, 정적만 감도는 마을엔 개 짖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다.
어쩌다 영주나 봉화쯤에 볼일이 있어 나가게 되면 도로를 따라 조금씩 걸을 때마다 폭주하는 자동차들의 물결 속에 도무지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고 번 듯하게 잘 닦여진 큰길을 따라 갓길로 조심조심 걷노라면 머리속엔 언제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질 않는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걸어가다가 어쩌다 자동차 근처에 잘못 얼씬거리기라도 하게 되면 "X새끼 죽을라고 환장했냐?'는 소리가 날아온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전에도 없는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니 이게 어디 사람사는 세상인가 싶어 울화통이 치민다.
옛사람들은 한평생 살아가는 과정을 길에 비유하며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말을 곧잘 쓰기도 했으려니와 해지는 저녁에 들길을 걸으며, 뽀드득 뽀드득 눈길을 걸으며, 곱게 빨아 신은 버선 자락을 물들이는 황톳길을 걸으면서도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곤 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현대화된 반 듯한 길은 오직 죽음의 길이요, 경쟁의 길이며, 오직 앞만 향해 나아갈 뿐 걸어온 길을 유유히 되돌아볼 수 없는 막다른 길이 되어 버렸다.
인생길, 나그네길
화엄경의 계송을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 삶이 길 위에 있을진대 / 내가 어느 스승을 찾으랴 / 길이 내 어버이, 길이 내 스승이메 / 이 길 위에서 나고 죽어서 / 길이여 길이여 내 길이여.'
성현의 가르침이 이러할진대 기고만장한 뭇 중생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뜨자면 이 산 저 산 코밑에다 값비싼 승용차나 들이대고 자연을 즐긴다는 핑계로 쓰레기나 흩날리며 고래고래 고함이나 질러 대니 신성한 자연이 병들고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 사람들이여. 이젠 그 지각 없는 행동들을 집어치우고 논둑길, 밭둑길 유유히 거닐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름 속에 살아가는 농사꾼 만나거든 땟국물 흐르는 거친 손일지라도 따뜻이 잡아 주며 '당신들 보다 돈푼 깨나 더 있는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요.'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시라고, 이러한 마음으로 보시 힘써서 하다 보면 심신 또한 건강해져 무병장수 하오리다.
자연은 그들들 농락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섬겨야 할 거룩한 존재임을 명심하시고 혹시 산자락에 들거들랑 산짐승들 놀랄세라 조용조용 걸어가며 불경에 있는 이 한 말씀 깊이깊이 새겨 보소.
"삼라만상 실개성불"
이 말은 즉, 하늘과 땅에 가득한 것들이 모두 부처를 이루었다는 가르침의 한 구절이오.
- 2004년 10월 11일 아침 태백산맥(太白山脈)
- 강문필의 <<서면 쌍전에서 사는 이야기>> 중에서
- 강문필 : 54년 봉화생, 울진 쌍전에 살고 있는 농부
- 출처/'울진21닷컴'(http://uljin21.com)
- 음악/Antonio Vivaldi - 사계 (四季 La quattro stagioni) Autumn 2악장 Adagio molto 太白山脈
세상의 중심에서
싱그러운 하루 맞으십시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Photographer - keith laban
▷Caption - Autumn Walk
▷Views 156353 times Ratings 108 ratings, Aesthetics: 6.51/7 Originality: 5.82/7
▷Equipment Camera Hasselblad 501CM
▷Film / Media Fuji Velvia 50 (RVP)
첫댓글 추억은 아름다븐거 맞어 나이묵응게 더 생각나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