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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0/1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5 - 중국의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 6호 발사
중국의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가 12일 오전 9시(이하 현지 시각) 발사돼 약 10분 만에 지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2명이 탑승한 선저우 6호는 중국 서북부 간쑤(甘肅)성 주취안(酒泉) 발사기지에서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승무원은 페이쥔롱(費俊龍. 40세)과 니에하이성(?海勝. 41세)으로 2명이 함께 우주 비행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지관제본부는 9시 33분 승무원들과의 첫 교신을 시도해 비행 상태가 정상이라는 응답을 받았고, 유인우주선 프로젝트 총지휘자인 천빙더(陳炳德)는 발사 39분 만에 선저우 6호의 발사 성공을 공식 선언했다.
승무원들은 현재 초속 7.9㎞의 속도로 궤도를 비행하고 있으며, 약 5일간 각종 과학 실험을 진행한 뒤 17일 오전 8시쯤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쓰츠왕치(四子王旗) 착륙장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중국의 유인 우주 비행은 지난 2003년 양리웨이(楊利偉) 공군 중령이 선저우 5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21시간 동안 14바퀴 돈 이후 2번째이다.
/ 연합 2005-10-12
- Awarding of Nobel Peace Prize to Secretary
General Kofi Annan and UN
2001 - 코피 아난-유엔 노벨평화상 수상
올 노벨 평화상,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유엔(United Nations)과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63)이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맞은 올해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2일 아난 사무총장과 유엔이 국제사회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공로로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평화상 수상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1945년 10월 24일 설립된 유엔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간의 협력을 증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인 아난 총장은 1996년 유엔 사무총장(임기 5년)으로 뽑힌 뒤 올해 6월29일 연임에 성공했으며 뛰어난 지도력과 중재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것은 61년 다그 함마르셸드가 사후에 수상한 이후 2번째며 유엔 산하 기관이 평화상을 받은 전례는 있지만 유엔의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화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오슬로에서 34명의 역대 평화상 수상자들이 참속한 가운데 열린다. 상금은 900만크로나(10억3500만원).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동아닷컴 2001/10/11 23:16
http://www.donga.com/docs/intro/nobel/nobeltop.html
1999 - 5,000명의 환자에게 실험한 에이즈 백신(에이즈백스) 임상실험 성공
「에이즈백스(AIDSVAX)」가 5,000명의 환자에게 실험한 결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이 약품의 제조회사 백스겐이 99년 10월 12일 발표하였습니다. 이 실험은 6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돼 56개 병원이 참여했으며,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이 에이즈백스가 안전하고 효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봄 3년간에 걸친 대규모 에이즈백스 실험을 허용한 바 있습니다.
http://gtt.com.ne.kr/file1/health-menu2-1-24.htm
1997 - 미국의 컨트리 송 가수 존 덴버(Denver, John) 사망
덴버 [Denver, John, 1943.12.31~1997.10.12]
미국의 컨트리송 가수 존 덴버(Denver, John)가 1997년 10월 12일 저녁 자신의 단발 경비행기를 조종하던 중 캘리포니아주 북부 몬터레이만의 해안에 추락해 숨졌다. 53세였다.
존 덴버는 생전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는 찬사를 받던 컨트리 음악의 황제였다.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로키 마운틴 하이` `퍼햅스 러브` `선샤인 온 마이 숄더즈`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은 우리나라에서도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본명은 헨리 존 도이췬도르프 주니어. 뉴멕시코에서 공군조종사 아들로 태어나 1964년 포크 트리오로 데뷔 1969년 솔로가수로 변신했다. 이후 30년 가까이 세계적 슈퍼스타로 각광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대표곡 모음집 `존 덴버 히트곡` 앨범은 무려 1천만장 이상 팔릴 정도였다. 1985년에는 냉전 이후 미국 연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옛 소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1992년에는 서방 음악인으로는 첫 중국 본토 순회공연을 가졌다.
덴버는 지난 1988년과 1994년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음악활동뿐 아니라 기아추방운동, 동물보호운동, 환경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특히 1976년에 비영리단체인 `윈드 스타` 재단의 공동발기인으로 참여해 지구촌 환경보호를 위한 연구와 교육에 정열을 쏟아왔다. /조선
1987 - 대통령중심 직선제 개헌안 여야합의로 국회 통과
제9차 개헌 -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전에서 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선거공약의 하나로 내세웠으며, 1년 후인 1986년 2월 12일 신한민주당은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하여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여야 간에 정치적 공방이 벌어졌다. 이에 4월 30일 대통령과 각당 대표회동을 계기로 국회에 의한 여야합의개헌을 추진하는데 동의하였고, 6월 29일 노태우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 8개항에 관한 정치적 구상을 발표하였다. 7월 1일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하여 이를 확인함으로써 여야 간에 다시 합의개헌작업이 계속되었다. 7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각 정당의 협상대표들에 의하여 100개항 내외의 쟁점사항을 가지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새 헌법시행일과 국회의원선거시기에 관한 사항 등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한편,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헌법개정안소위원회는 9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 및 부칙 6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기초하였고, 9월 17일 헌법개정안이 정식으로 제안되었으며, 9월 21일에는 대통령이 이를 공고하였고, (10월 12일) 국회에서 재적의원 272인 중 출석 258인, 찬성 254인, 반대 4인의 압도적 다수로 의결되었으며,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도 93. 1%의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고, 대통령은 이를 10월 29일 공포하였다. /국가기록원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1417
1985 - 한국 최초의 시험관 아기 탄생
한국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 1985년 10월 12일 새벽 5시10분부터 5분간격으로 제왕절개를 한 결과 시험관 아기 남녀쌍둥이가 태어났다고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장윤석 교수팀이 발표했다.
천근엽(31.회사원). 서정숙(28)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이는 여자로 몸무게 2.63kg이고 두번째 아기는 남자로 2.56kg의 정상적인 몸무게였다. 결혼4년째 접어든 서부인은 1983월 1월 자궁외임신으로 왼쪽난소와 나팔관 절제수술을 받았고 오른쪽 나팔관 마저 막혀 불임진찰을 받은후 1985년 1월 시험관아기 시술을 시작해 2월 25일 호르몬검사로 임신 성공을 확인후 3월 21일 초음파검사로 정상적인 쌍둥이를 임신한 것을 확인했다. /조선
1981 - 까라소 오디오 코스타리카 대통령 방한
코스타리카 공화국 까라소 오디오(Carazo Odio, Rodrigo) 대통령 내외분이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1981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중미 대륙의 남부에 위치하여 파나마, 니카라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코스타리카는 1821년 9월 15일 독립하였고, 인구는 약 220만, 면적은 50900㎢이다. ...
이번 까라소 대통령의 방문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초의 국가 원수 방문이며 양국 수교 이래로 첫번째인데, 양국간의 기존 우호 협력 관계를 가일층 강화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체신부에서는 까라소 대통령 내외隙?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양국간의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를 기원하면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 designed by Diego Rivera
1968 -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개막
1968년 10월 12일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올림픽이 표고 2240m의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됐다. 125개국에서 5,498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고지의 산소부족 때문에 육상 중장거리 경기에서는 저조한 기록이었지만 단거리와 도약경기에서는 경이적인 기록이 속출했다.
대회의 스타는 소련군의 침공을 받은 체코의 여자체조 개인종합우승자 베라 카스라브스카였다. 일본은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축구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육상남자 200m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한 미국선수는 시상식에서 '블랙 파워' 데모를 일으켜 선수촌으로부터 추방되기도 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45개의 미국이 차지했으며, 소련(금메달 29개), 일본(11개), 헝가리(10개), 동독(9개)이 그 뒤를 이었다. /조선
1968 - 적도기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는 1778년에 에스파냐가 페르난도포섬(지금의 비오코섬)을 점령하였으며, 1827년 영국이 이 섬을 에스파냐로부터 조차(租借)하였다. 1843년 영국 해군은 시설을 침례파 교회에 양도하고 철수하였으며, 이듬해 에스파냐는 이 섬을 농업식민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그 후 1850년대에는 본토쪽 리오무니 지역의 식민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미 가봉을 식민지화한 데다 1880년대에는 독일이 카메룬을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므로 리오무니의 면적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식민지 정청(政廳)은 페르난도포섬의 산타이사벨(지금의 말라보)에 세우고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노본섬과 이 섬을 페르난도포주(州), 대륙의 리오무니와 그 연안의 엘로베이, 코리스코 두 섬을 리오무니주로 편성하여 통치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이 강화되어 1964년 1월부터 자치정부가 세워지고 1968년 10월에 UN 식민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적도기니 공화국(Republic de Guinea Equatorial)으로 독립하였다. /naver
- Vladimir Komarov, Konstantin Feoktistov, Boris Yegorov
1964 - 소련 우주선 보스호트 1호 발사
소련은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낸 보스토크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자 1명 이상의 승무원이 탈 수 있는 우주선을 개발했다. 1964년 10월 12일 보스호트 1호는 3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지구궤도로 올라갔다. 보스호트 1호는 초기 유인 궤도선인 보스토크 우주선에 비해 680㎏이 더 무겁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개선된 형태였다. 또한 최초로 이온 추진장치를 사용했으며, 매우 안전하게 설계되어 비행중에 우주복을 입지 않았다.
보스호트선의 비행을 위해 재진입(再進入) 방법도 역시 개선되었다. 보스토크 우주선의 조종사들은 재진입할 때 우주선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려야 했지만, 보스호트 우주선은 지상에 착륙할 때 특수낙하산과 역추진(逆推進) 로켓을 사용함으로써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선에 그대로 타고 있었다. 보스호트 1호는 중요한 생물의학적 자료를 지구로 보내는 최초의 우주임무를 띠고 있었다. ... /브리태니커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9b3575a
1962 - 북한-중국 국경조약인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체결
북한과 중국이 양국의 국경을 정하는 국경조약을 1962년 10월 12일 체결했다. 북한 김일성과 중국 주은래가 서명한 이 조약은 정식명칭이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다. 총 5조로 짜인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
조약문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鞍部-안장처럼 들어간 부분)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對岸)의 산마루인 262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남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이럴경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한다.
조약은 이밖에 백두산, 압록강-두만강의 섬과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이 조약의정서에는 압록강-두만강의 총451개 섬과 사주가운데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혀있다. 이 조약은 1964년 3월20일 양국이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됐다. /조선
1962 - 네루 인도 수상, 동북국경지대군에 중국군 축출을 명령
중국인도국경분쟁(中國印度國境紛爭)의 원인은 국경선에 대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인도측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영국이 그 실력을 방패로 해서 멋대로 그은 ‘맥마흔 라인’(1914)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보고 있는 데 대하여, 중국측은 영국 침략 이전의 전통적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주장하였다. 양국의 국경수비대가 최초로 충돌한 것은 1959년 8월 인도 북동부 국경지대와 라다크 지구에서였다. 이 때에는 1960년 4월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네루(Nehru, Jawaharlal, 1889~1964)의 회담에 의하여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봄이 되자 다시 인도군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여 7∼9월에 라다크 지구, 맥마혼 라인에서 중국군과의 사이에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동년 10월 인도군은 대규모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완패하였다. 중국군은 동년 11월 돌연 정전을 선언하고 평화회담을 제의한 후 일방적으로 철수하였다. 1962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서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의한 조정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국경지대에서는 군사적으로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나, 국경선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naver
1955 - 공자 탄신 2560주년 석전제
1955년 오늘 공자탄신 2560주년과 함께 성균관 설립 557주년을 맞이해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거행됐다.
제례악 연주에 이어 화관무, 초혼례 등이 엄숙하게 진행된다.
석전제는 성균관 대성전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과 함께 유학자 설총, 최치원 등 명현 16명의 위패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행사다.
석전제는 문묘제례악과 그 의식을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YTN
1916 -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사망
언더우드 [Underwood, Horace Grant, 1859.7.19~1916.10.12]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이자 격동의 구한말 한국 근대화에 힘썼던 언더우드 1세(한국명:원두우)가 1916년 10월 12일 고국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4살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원래 인도 선교를 지망하고 그를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미전도 개척지 한국의 소식을 접한 이후, 기도 중 "너 자신은 왜 못 가느냐 ?" 라는 응답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는 1894년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했고,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하며 성경번역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근대 한국 교육사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한국에 온 다음해인 1886년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 학교를 창설했는데, 이것이 후에 서울 경신고등학교가 됐다. 또한 그는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을 세웠다.
그는 한국에서 31년간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 발진티푸스병이 악화돼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는데,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04년 10월 원두우-원한경-원일한-원한광씨 4대에 걸친 119년간의 한국과의 인연을 뒤로 하고 언더우드가(家)가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2004년 현재 언더우드 1세부터 3세까지 모두 ‘제2의 고향’ 한국 외국인 묘지공원(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에 잠들어 있다. /조선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교육자, 성서번역가.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거쳐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했다. 1890년 뉴욕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12년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884년 7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이듬해 감리교 목사인 H. G.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1886년 한국 최초의 고아학교(고아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경신학교의 전신이다.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89년 한국예수교성교서회를 창설하여 문서를 통한 선교실무를 관장했으며 〈한국어문법〉을 편찬·간행했다. 1897년 〈그리스도 신문〉 창간, 1900년 기독교청년회 조직,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설치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에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세브란스 의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평양 장로교신학교 등의 설립에 주도... /브리태니커
1909 - 스위스의 사상가, 법률가 힐티(Hilty, Carl) 사망
힐티 [Hilty, Carl, 1833.2.28~1909.10.12]
베르덴베르크 출생. 독일의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과 철학강의를 들었다. 1855년 고향인 쿨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892년 이후는 육군재판장직을 맡았다. 한편 1890년에는 고향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또 1909년에는 국제법의 대가로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치적 저서로는 1886년 이후에 그가 혼자 편집한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종교적 ·윤리적 저작에 의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행복론》(3권, 1891∼1999)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2권, 1901∼1919) 등이 있는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사회개량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생활 자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naver
1902 - 중국의 정치가 펑전[彭眞] 출생
펑전 [彭眞, 1902.10.12~1997.4.26]
산시성[山西省]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타이위안[太原]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재학 중 타이위안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지도하였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방국 서기로 활약하였고, 1945년 중국공산당 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겸 정치법률위원회 부주임에 취임하였으며, 1951년 베이징[北京] 시장이 되었다.
이후 베이징 시장을 지내면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겸 비서장, 1956년 중국공산당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로 선출되었다. 또한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세계평화옹호위원회 부의장으로도 있었다. 1960년 중국공산당 대표로서 루마니아공산당대회에 참가하여 N.S.흐루시초프와 논쟁을 벌였고, 1961년 ‘스탈린격하대회’로 이름난 소련공산당 제22차 회의에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참석하여 중소(中蘇)이념논쟁의 불을 붙였다. 베이징 시장 및 베이징 시위원회 주석으로서 당내에 류사오치[劉少奇] 노선의 파벌을 만들었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뤄루이칭[羅瑞卿] ·루딩이[陸定一] ·양상쿤[楊尙昆] 등과 함께 반당 집단으로 몰려 1966년 6월 실각하였다. 그러나 1979년 복권되어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1983~1988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naver
1897 - 고종 황제 즉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1897년 10월 12일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은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이날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원구단으로 나아가는 길가에는 축기를 들고 환호하는 군중들이 늘어섰으며 원구단 주위도 인파로 메워진 가운데 고종은 천지에 올리는 제사를 지낸 후 황제의 자리인 금의상좌에 올랐다.
고종은 이어 13일 자신이 황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새로 대한제국으로 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14일에는 이같은 사실을 한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고종의 황제 즉위는 왕실과 조정, 국민의 삼자일치로 추진됐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 속에서 열강의 내정간섭이 중단된 상태가 유지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같은 주변정세를 배경으로 비교적 활발한 근대화 개혁 작업을 추진해 갔다. 광무개혁이라 불리는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은 경제-기술면에 집중됐다. 대한제국은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민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택했다. 내각의 폐지와 의정부 부활, 지방관제 복원 등 갑오개혁을 뒤엎는 조치가 잇달아 내려졌다. 대한제국의 정치적 성격은 1899년 반포된 '대한국 국제'에 "황제는 무제한의 군권을 소유하고 삼권을 장악한다"고 규정한 데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갑오개혁 때 취해진 왕실과 정부의 재정분리,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 왕권을 제약하려는 흐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기본성격은 기술적,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대개혁을 추진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균형적인 근대화 정책으로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급속한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 더구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개혁속도마저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조선
1896 - 이탈리아의 시인 몬탈레(Montale, Eugenio) 출생
몬탈레 [Montale, Eugenio, 1896.10.12~1981.9.12]
제노바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시를 습작하였으나, 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보병장교로 참전하였다. 1922년 《프리모 템포 Primo Tempo》지를 창간하고, 《소라리아》지의 편집에도 참여하였으며, 1925년에 발표한 시집 《오징어의 뼈 Ossi di seppia》로 일약 유명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전통적 시형(詩型)을 깨뜨리고 황폐한 현대세계의 내적 풍경을 거기에 어울리도록 복잡한 새 기법에 의하여 훌륭하게 정착시켰다.
그의 출현은 선배인 G.웅가레티의 그것과 더불어 현대 이탈리아 시(詩)의 빛나는 출발을 장식하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그의 작품에는 현대세계의 비참함을 읊는 동시에, 거기에서 포착된 불멸의 미의 순간이 솜씨 있게 시현되었다. 그는 20세기 이탈리아 시단의 주류인 ‘에르메티즈모(순수시)’로 군림하여 197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작에 《기회 Le occasioni》(1939) 《폭풍우와 기타 La bufera e altro》(1956) 등의 시집이 있고, W.셰익스피어와 T.S.엘리엇 등 영미문학의 번역물도 있다. /naver
슈타인 [Stein, Edith, 1891.10.12~1942.8.9]
슈타인은 독일 태생의 철학자이자 나치에 의해 처형당해 현대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카르멜 수도회의 수녀이다.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04년 신앙을 버렸다. 괴팅겐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에드문트 후설과 친해졌고, 인과관계로 현상을 설명하려는 어떤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의식으로 경험된 현상들을 기술하고자 한 후설의 철학, 즉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명성을 쌓아가다가 1921년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전기에 깊은 감동을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로마 가톨릭 철학과 현상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중 쾰른의 카르멜 수도회에 가입했다.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카르멜 수녀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치에 의해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가스실에서 최후를 마감하기 전까지 수용소 내의 다른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에 의해 1987년 5월 복자로 추증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브리태니커
"진리를 희구하는 이는 스스로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신을 희구하는 것이다."
- 에디트 슈타인
1880 - 프랑스의 소설가 에몽(Hémon, Louis) 출생
1872 - 영국의 작곡가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 Ralph) 출생
1870 - 이탈리아, 통일 완성
1870 - 미국의 군인, 교육자 리(Lee, Robert Edward) 사망
1860 - 미국의 전기기술자, 발명가 스페리(Sperry, Elmer Ambrose) 출생
1810 - 핀란드의 교육자 시그나에우스(Cygnaeus, Uno) 출생
1798 - 포르투갈의 국왕, 브라질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Pedro I) 출생
1573 - 이이, 기묘사화의 일을 들어 선조에게 정치 잘할 것을 상소
1537 - 영국의 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출생
1492 -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바하마 제도 발견)
1350 -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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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