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교육 지원 시스템'이 엄마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학기부터, 늦어도 내년 초까지는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이 시스템을 본격 가동하겠다며 밀고 나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이를 통해 쌓인 독서와 독후 활동의 실적이 아이의 대학 입학에 적용된다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독서 교육 지원 시스템'이란, 한마디로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 독후감 노트, 또는 독서 이력서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원하는 책을 읽고 누리집에 접속해 퀴즈를 풀거나 독후감을 올리면, 시나브로 쌓인 이 기록들은 학교생활기록부와 연계해 대학 입시 전형 자료로 쓰겠다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 즐기면서 독서와 독후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굳이 책 읽는 것까지 기록으로 남기고, 게다가 쌓여진 독서 이력을 면접 과정에서 사고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이용하느냐는 불만도 적지 않다. 그게 결국 고스란히 엄마 몫이 아니냐 지레 짐작에 불안까지 느낀다. 봉사와 체험 활동에 더해 독서 이력이 또 다른 입시용 '스펙 쌓기'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도 크다.
이런 틈을 비집고 서울 강남 등 일부 학원에서는 독서 이력을 관리하고 독후감을 대필해 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생긴 배경을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제껏 독서 교육은 입시 공부에 밀려 뒷전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런 풍토를 딛고 부산교육청이 2004년 도입한 게 독서 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 실시 이후 부산 지역 초등학생과 중ㆍ고교생 누적 독후감 수가 900만 건을 넘었고, 사고력 기르기에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재미있는 책 읽기'를 유도하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독서 이력철을 만든 게 대박을 친 것이다.
이제 엄마들은 한숨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독서 교육 지원 시스템'을 알고, 대처에 나서야 할 적기이다. 엄마들의 이해와 실천을 돕기 위해, 이 시스템을 활용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어린이 2명의 사례와 초등학교 2곳을 소개한다. 이 시스템의 진원지인 부산시교육청의 변상돈 장학사로부터 도움말도 들어 본다.
“독서이력철 관리 돈 된다” 사교육시장 들썩
[중앙일보] 입력 2010.08.30 02:23 / 수정 2010.08.30 02:30
학생 독서교육지원시스템, 내달 시행 앞두고 벌써 부작용
9월부터 독서이력철이 본격 가동된다. 독서를 권장하는 좋은 취지지만 대입과 연계되면서 사교육 조장등 부작용도 우려된다. 사진은 학생과 학부모가 한 대형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 맞벌이 주부 박모(37·서울 양천구)씨는 요사이 초등 6학년인 아들의 독후감 문제로 고민이 생겼다. 9월부터 아들이 읽은 책의 독후감을 인터넷에 등록해야 특목고 입시나 대입 때 유리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퇴근이 늦어 일일이 독후감을 지도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걸 베껴서 올릴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독후감 때문에 또 학원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S독서논술학원은 1년 반을 기다려야 등록이 가능할 정도다. 대기자만 100여 명이다. 이 학원은 교육과학기술부가 도입한 초·중·고생 대상 ‘독서교육지원시스템’ 때문에 기대 밖의 호황을 맞고 있다. 이 학원에서는 책을 읽고 독후감이나 논술을 쓰게 한다. 대치동 I학원은 최근 독서이력철을 관리하는 초등생 대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엄마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대치동 H독서논술학원장은 “대형 학원은 물론 소규모 보습학원에도 독서이력을 관리하고 독후감까지 대필해주는 상품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교과부가 다음 달부터 전국 초·중·고생 745만 명을 대상으로 도입하는 ‘독서교육지원시스템’(www.reading.go.kr)이 또 다른 사교육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고, 읽은 책의 목록과 독후감을 인터넷에 기록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공부에 찌든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부산시교육청이 2004년 이 제도를 시행해 호평을 받자 교과부가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키로 한 것이다. 초·중·고생들은 인터넷에서 회원 등록한 뒤 자신의 독서 내용을 입력하면 된다. 독후감 분량에도 제한이 없어 글쓰기 연습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특목고나 대입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독서이력이 주요 반영 요소로 활용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초등학생부터 스펙 관리에 들어가는 등 벌써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서학원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제도 자체의 허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독서이력철 관리는 투명성이 생명이다. 실제 학생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부모나 학원 강사가 대필을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고, 입시에서도 이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학부모 이모(46)씨는 “학원이나 부모가 대신 입력하고 아이에게 나중에 외우도록 하자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제도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행 당시부터 14개 대학과 대입에 독서이력을 활용한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부산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이 때문에 2005년 전국학교도서관 교사모임 등 17개 시민단체가 모여 부산시교육청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교과부는 일단 시행과정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안명수 학교운영지원과장은 “입학사정관제의 교과 외 활동을 보강하려 ‘창의적 체험활동 종합지원시스템’(www.edupot.go.kr)에서 체험학습보고서를 인터넷으로 누적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가장 주요한 활동으로 독서이력철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제로 책을 읽게 하는 게 아니라 권장하려는 것인 만큼 입학사정관 연수 등을 통해 책 숫자나 독후감 양보다는 면접과 토론을 통해 책이 학생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토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입학사정관에게 익숙한 소위 ‘전시용’ 고전에만 쏠림 현상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숭문고 허병두 교사는 “정부가 강요하는 획일적 독서교육이 학생의 자생적이고 다양한 독서활동을 막는다는 걱정이 국어교사들 사이에 팽배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입학사정관이 좋아할 독서목록이 이미 정해져 있어 독서교육이 그 길로 고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독서기록이 입시와 연관돼 그대로 노출되면 학생들이 향후 독립적 사고를 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원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