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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9)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5구간 (현풍→합천) ③ [회천-만귀정·대가야·해인사·도암서원]
2020년 11월 01일 (일요일) [독보 33km]▶ 백파
* [현풍 홍시호텔]→ (가을비 속에서)→ 도동서원→ 구지하얀가람→ 강둑 길→ 수변공원 길→ 구지오토캠핑장→ (대구교육청 낙동강수련원)→ 긴 강둑길→ (중앙119구조본부→ 구지면 대구국가산업단지)→ 창동1제→ 대암4제→ (넥센타이어)→ 내동배수문→ 강변 구비길→ [이노정}→ 전원교회→ 쌍용부페식당→ 고갯마루 점심→ 강변 테크길→ 대암교회→ 목단2리→ 곽재우장군 묘소→ 우곡교→ 강변길→ 송곡제→ 무심사→ 무심사 임도→ [북쪽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에서 ‘회천(會川)’ 합류]→ 중마→ 우산리→ 장천 제방길→ 합천-창녕보→ [기원섭 이상배 마중]→ 황강→ 합천(읍)→ 합천 가고파식당
*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 북쪽에서 ‘회천(會川)’ 합류(김천 수도산 / 합천 가야산 발원, 고령 경유)
회천(會川)
회천(會川)은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 산곡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이 성주호를 경유하여 성주군 가천면, 대가면, 수륜면, 고령군 운수면, 대가야읍, 개진면, 우곡면을 경유하여 흐르는 긴 하천이다. 고령군청이 있는 대가야읍 본관리(本館里)에서 가야산 동쪽 덕곡면 산곡에서 발원한 소가천(小伽川)이 흘러들고, 대가야읍 동남 하부지역에서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발원한 가야천(伽倻川)이 합천군 야로를 경유하여,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에서 오도산 동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묘산천과 합류하여 안림천(安林川, 일명 용담천)을 이루어 쌍림(면)을 경유, 대가야읍에서 회천(대가천)에 합류한다. 이렇게 본류인 대가천과 지류인 안림천이 합류한 회천(會川)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德谷面) 유지리 경계)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총 유로길이는 78km이다.
큰 물줄기로 말하면, 김천시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합천군 가야산에서 발원한 가야천-안림천이 고령군 대가야읍에서 합류한 것이 회천(會川)이다. 회천의 하구 맞은편 바로 무심사(無心寺)가 있다.
회천의 상류, 성주(星州)의 대가천(大伽川)
회천(會川)의 최상류 대가천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무흘구곡(武屹九曲)’이 있다. 무흘구곡은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에서 성주군 수륜면까지 약 35킬로미터 대가천에 있는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절경이다. 그리고 성주군 수륜면 대가천에는 한강 정구를 배향하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있고, 대가천의 지천에 있는 수륜면 소재지에는 고려 말의 문장가 도은(道隱) 이숭인(李崇仁)을 기리는 청휘당(晴暉堂)이 있다. 모두 회천의 상류인 성주군에 속해 있는 명승유적지이다.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에서 대가천에 합류하는 화죽천 최상류 포천계곡(布川溪谷)에 만귀정(晩歸亭)이 있다.
그리고 회천(會川)의 지류인 가야천(伽倻川) 상류에 천년 고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회천(會川)의 고령(高靈)
또 고령(高靈)의 회천(會川) 유역 일대가 예전 대가야(大伽倻)의 중심지가 였기 때문에 강을 따라 중요한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양전동 알터마을의 회천대교 아래 자리 잡은 고령 양전동암각화(보물 605호), 안림천변에 자리한 고령 안화리암각화(경북기념물 92호)가 있다.
주위에 가야산, 주산, 대가야유물전시관, 김면장군유적(金汚將軍遺蹟, 경북기념물 76호), 고천원고지 등 문화재와 관광명소가 많다. 물 양이 많고 강가에 기름진 토양이 쌓여 있어 유역(流域)을 따라 곳곳에 충적평야가 발달하였지만, 여름철 장마 때는 순간적으로 강물이 불어나서 자주 수해를 입기 때문에 하천 양쪽에 제방(提防)을 쌓았다.
성주의 응와 이원조와 만귀정(晩歸亭)
- ‘늦게나마 귀향 꿈 이뤄 자연과 하나 되니 무릉도원 부럽잖네’ -
만귀정(晩歸亭)은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에서 대가천에 합류하는 화죽천 최상류인 포천계곡에 있다. 포천계곡(布川溪谷)은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있는 가야산 북쪽의 계곡이다. 짙푸른 물과 바위가 마치 베(布)를 널어놓은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이 계곡에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년~1872) 가 아홉 곳의 경승지에 이름을 붙이고 경영한 ‘포천구곡(布川九曲)’이 있다.
약 7km에 이르는 구곡은 너럭바위와 소(沼), 작은 폭포가 수도 없이 펼쳐지는 절경이다. 이원조는 구곡(九曲)마다 이름을 붙이고 굽이마다 시(詩)를 지어 ‘포천구곡가’를 완성했다. 포천구곡은, 제1곡은 ‘법림교’, 제2곡은 ‘조연’, 제3곡은 ‘구로동’, 4곡은 이 계곡의 주인 격인 ‘포천’, 제5곡은 ‘당폭’, 6곡은 ‘사연’, 제7곡은 ‘석탑동’, 제8곡은 ‘반선대’, 제9곡은 포천구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홍개동’이다.
[만귀정 옆의 폭포]▶ 만귀정(晩歸亭)은 포천 구곡의 절경인 ‘홍개동’에 있다. 만귀정을 지은 이원조(李源祚)가 말했다. ‘홍개동은 내가 터를 잡아 집을 지은 곳이다. 두 폭포가 나뉘어 흐르며 돌들이 바둑알처럼 놓여 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쳐 있으며 숲속으로 나무들은 무성하다. 내 정자는 서쪽 벼랑에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수석의 아름다움과 은거의 즐거움은 별도로 기록해 두었다. 이곳은 지나면 가야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나온다.’ 이원조가 말한 가야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칠불봉(1432m)이다. 정자에서 보이는 울퉁불퉁한 산꼭대기가 칠불봉이다. 이원조는 이 정자를 짓고 그 기쁨을 ‘복된 건축’[福築]이라고 했다.
[공조판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이원조는 본관이 성산(星山)이다. 호는 응와(凝窩). 응취정신(凝聚精神, 정신을 한 곳에 모음)과 지덕응도(至德凝道, 지극한 덕으로 도를 이룸)에서 따왔다. 양반촌으로 유명한 성주 대포리 ‘한개마을’에서 출생했다.
증조부 돈재 이석문은 무관이었다. 영조때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사도세자를 구명하다가 파직됐다. ‘한개마을’로 돌아와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벼슬에 나가지 않아 ‘북비공’으로 불린 충절의 선비다. 한개마을에 있는 응와종택을 북비고택으로 부르는 이유다. 조부는 사미당 이민겸이다.
이원조의 아버지는 형진인데 백부 규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원조는 입재 정종로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0살 때 사서(四書)와 시서(詩書)에 통했으며 18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산간벽촌의 이름 없는 집안의 18세 소년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로서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소년등과는 세 가지 불행 중의 하나라고 했다. 오만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는 19세 때 가야산을 유람하고 빠른 출세를 경계한다는 의미로 ‘만와(晩窩)’라고 자호를 지었다. 스무 살에 벼슬길에 나갔지만 소년등과를 경계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이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판의금에 이르렀다. 당시에 유학과 문장에 있어 유림의 으뜸으로 추앙받았으며, 지방관으로서도 많은 치적을 올렸다. 정헌(定憲)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과거급제 후 근 40년간 관직생활에 몸담고 있어 학문과 후학양성에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양과 강학에 전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건물의 이름을 만귀정이라 한 것도 이에서 연유한다.
만귀정(晩歸亭)은 경사지에 북동향하여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만귀정과 평삼문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이자형(二字形)으로 놓여져 있으며, 평삼문 입구에는 이원조의 학문진흥에 대한 의지를 담은 철제로 된 흥학창선비(興學倡善碑)가 세워져 있다.
[‘晩歸亭’(만귀정) 현판]▶ 59세 때 늦게 돌아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는 벼슬을 하는 내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48세 때 군수품을 관리하던 군자감정이 됐다. 숙소에 ‘不忘歸室’(불망귀실)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그는 59세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주부사로 재직하던 중 경상도좌도 암행어사 김세호의 탄핵을 받았다.
청천 수렴동에 터를 잡았다가 조암의 강 언덕으로 갔다가 세 번 만에 아령의 폭포가 있는 곳에 만귀정을 지었다. ‘만귀(晩歸)’는 도연명의 ‘귀거래(歸去來)’를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부끄러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만귀정에서 본성대로 남은 생을 마감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현판 글씨는 이원조가 자산부사로 근무할 때 당시 예서의 대가인 소눌 조석신에게 미리 받아두었다.
[이원조의 만귀정기(晩歸亭記)] ▶ “벼슬길에 종적을 거두고 고요한 곳에 몸을 쉬려한다. 성인의 경전을 안고 구름과 달 속에 노닐면서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 즐기지 못한 것을 음미하고 즐기려 한다. 죽는 날까지 구양가 태자소사로 벼슬을 그만 두고 영주에 돌아가 만년을 마친 절의를 보존한 것처럼 위나라 거백옥이 자신의 얌심에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한 것을 따라 인정(人定)의 종이 친 후에도 밤길을 다닌다는 기롱(譏弄, 70세가 넘어서 벼슬살이를 하는 것을 놀림)을 면하여 바야흐로 이 정자의 이름에 저버림이 없으려고 이 내력을 기록하여 맹세한다.”
[만귀정 전경] 앞 건물이 관리사 뒷 건물이 만귀정이다 [커다란 암석을 이용해 만든 담장]
[철판으로 만든 ‘고판서응와이선생창선비(故判書凝窩李先生彰善碑)’]▶ 만귀정(晩歸亭)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만귀정과 평삼문이 이자형(二字形)으로 놓여 있다. 평삼문에는 ‘晩歸山房’(만귀산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평삼문 입구에는 철제로 된 ’창선비‘가 서 있다.
이원조의 학통을 이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이원조의 학문과 덕행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철판(좌측 사진)에다 새겼다. 정자 담장은 거대한 바위와 바위를 석축으로 연결해 쌓았는데 구불구불한 곡선이 아름답다. 낭떠러지 쪽에 길을 따라 낭떠러지가 생긴 대로 담장을 들일 곳은 들이고 내밀 곳은 내밀어서 생긴 자연의 미학이다. (우측 사진)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온갖 사물의 다른 현상이 한 가지 원리로 통한다’는 뜻이다. 정자에서 계곡 쪽으로 작은 정자가 하나 더 있는데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다. 만귀정에서 계곡의 폭포나 산 정상을 보고 싶으면 이곳에서 즐겼다. 일종의 부속 건물이다. 온 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결국 하나의 폭포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온갖 사물의 서로 다른 현상이 하나의 원리로 귀결된다는 만수일리(萬殊理一)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일통(一通)이면 만통(萬通)인데 만통(萬通)을 하려다가 일통(一通)도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경계이다.
만산일폭루에서는 포천계곡을 가르는 폭포가 장쾌하게 들린다. 소리가 맑고 물이 깨끗해 ‘귀를 씻을 만(洗耳)’하다. 삼단으로 펼쳐지는 폭포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가야산 정상 칠불봉이 병풍처럼 막아선 모습도 보인다. 산마루에서 계곡을 타고 달려가는 바람소리,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 울려오는 폭포 소리가 통쾌하다. 이 아름다운 정자를 이원조는 이렇게 노래했다. ☜ 김동완 「정자(亭子)」(경북일보) 참조
늦게 돌아옴을 한탄치 아니하네
올해가 육순이 되는 해라네
참으로 세상의 생각을 잊음이 아니오
애오라지 한가한 몸을 기를 수 있네
벽지에 처하니 심신이 평온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니 안목이 새롭네
산림에 사는 것이 본분이니
조물주는 나에게 성내기 마시길
— 이원조의 시 「만귀정(晩歸亭)」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회천의 상류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천이 발원하는 가야산(伽倻山)에 있다.(사적 제504호) 순천의 송광사, 양산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로 꼽힌다. 삼보(三寶)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인사는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해인총림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해인사(海印寺)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華嚴)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義湘)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해인사 소장 중요 문화재]▶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十三, 국보 제265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제279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73호),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 법당이다. 창건 이후 건물의 자세한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霽月)과 성안(聖岸)이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은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으로 불린다.
[해인사 장경판전(藏經版殿)]▶ 장경각[장경판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 주는 건물이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 장경각은 1995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그 안에 소장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 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고려대장경판의 영인본은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전산화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경(經)·율(律)·논(論)을 말하는데, 즉 불교의 경전을 종합적으로 모은 것을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16년간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간행되었으며, 판수가 8만여 개에 8만 4천 개의 경전(經典) 말씀이 실려 있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민심을 모으고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최씨 무신 정권은 먼저 ‘대장도감’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천만 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고 잘못된 글자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거란, 여진, 일본의 불교 경전까지 두루 모아 정리했기 때문에 현재에는 없어진 중국이나 거란의 대장경 내용도 담겨 있다. 그리고 오늘날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大藏經板)이다.
[팔만대장경 조성과 목적]▶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1236년(고종 23년) 대장경 조성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 9월 무오에는 “국왕이 성의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모든 관료들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 때 판본(초조대장경)이 임진년(1232, 고종 19) 몽골 병사에 의해 불타 버렸다. 국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팔만대장경의 조성사업이 1236년부터 시작되어 1251년 9월 강화경(江華京,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대장경판당에서 경찬의례의 개최로 일단락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담당 관청의 설치와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 와 같은 사전작업, 경판의 취합 및 경찬법회의 개최 등의 마무리 작업과정까지 포함한다면, 조성사업은 거의 16년 동안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조성 목적은 ‘몽골 침략군의 격퇴’(이규보,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 『동국이상국집』, 권 25)에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왕실의 안녕, 국태안민(國太安民) 및 풍년, 불법(佛法)의 보급, 극락정토의 왕생 등도 기원하고 있었다.
팔만대장경,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팔만대장경 이운(移運) 과정]▶ 몽골과 전란 중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로 이룬 고려재조대장경 8만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조선이 개국하면서 한양의 지천사에 옮겼다가 바로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 “...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擧動)하였다. 대장경판을 강화(江華)의 선원사(禪源寺)로부터 운반하였다. (중략) 검교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五敎) 양종(兩宗)의 승려들에게 독경하도록 하였으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인도하게 하였다...” 하였다.
고려재조대장경은 잇단 왜구의 침략으로 강화도 선원사에서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 잠시 보관하게 된다. 이 기사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대장경을 맞이하러 용산강(지금의 새남터)에 거둥한 사실을 「태조실록」에 기록한 것이다. 지금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근처에 있던 지천사에 모신 대장경은 곧 합천 해인사로 옮겨지게 된다. 82,140권의 부피에 무게만 280톤이나 되는 방대한 양(量)의 대장경은 육로와 수로를 통해 해인사로 운반해 간다. 해인사 대적광전에 있는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벽화(이운벽화)는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태조실록에 나온 위의 기사는 강화에 있던 팔만대장경이 당시 서울로 옮겨진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에서 다시 해인사로 옮긴 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 정월조의 기사에는 “경상감사에게 명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이 서울에 도착한지 9개월 뒤의 기록이므로 대장경은 그 사이에 해인사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반 과정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육로(陸路) 이동설이다. 해인사 대적광전에는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 운반 행렬의 맨 앞에는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내고, 그 뒤를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행렬을 인도한다. 스님의 뒤로는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도 싣고 지게에도 졌는가 하면 머리에 이기도 한 채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강화도를 떠나 한강에 다다른 배는 다시 남한강을 거쳐 충주에 도착하여 경판 이운 행렬이 문경을 경유하여 상주 낙동강변에 이르면 대장경을 다시 배에 옮겨 싣고 고령 개산포까지 이동하여 육로로 해인사에 들어간다는 추정이다. 여기서부터는 해인사의 벽화에서처럼 많은 인력을 동원 하여 운반을 한다.
둘째는 해로(海路) 이동설이다. 실록의 태조 7년 5월 12일 기사에는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고 되어있다. 이는 대장경판이 서울에 도착한지 이틀 뒤의 기록이다. 조운선이란 조세로 거둔 쌀을 운반하던 선박으로서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하기 쉬우며, 해변을 항해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1척 당 경판 5천 장을 실을 수 있어, 총 20척 정도면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기록 속의 조운선은 이틀전 서울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의 운송수단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 합천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강화도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을 ‘육로(陸路)→낙동강 물길’로 혹은 ‘해로(海路)→낙동강 물길’로 고령군 낙동강 개산나루[開經浦]에서 내린다. 그리고 승려와 불자들이 각각 한 장씩의 경판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가야산 해인사까지 100리가 훨씬 넘는 험한 길을 걸어서 옮겼다. 그 이운(移運) 과정에서 한 장의 낙장이나 유실이 없었다. 그 뒤 조선시대 세조는 장경각(藏經閣, 藏經版殿)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팔만대장경, 낙동강 개경포에서의 이운(移運) 과정]▶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앞의 낙동강변의 나루가 개경포(開經浦)이다. 달성군 도동서원 낙동강 맞은편에 있다. 조선 초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고려대장경'을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옮겼다. 그 후 대장경을 옮긴 나루라 해서 '개경포'란 이름을 얻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지리지나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를 '개산강(開山江)' 또는 '개산포(開山浦)'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는 강창(江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을 모아 낙동강을 통해 한양으로 옮겼다.
개산포는 선사시대부터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지역과 교통하는 가장 중요한 물길로 대가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주요 나루터로 이용됐다.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의 이동 경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번째는 "개경포에서 서쪽으로 열뫼재라는 고개를 넘어 회천을 따라 신안리~ 반운리~양전리~회천교~고령읍으로 들어왔다. 고령읍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중화리~저전리~신리를 거쳐 미숭산의 나상재 고개를 넘은 후 합천군 야로면의 나대리에서 월광리로 내려와 해인사로 진입하는 길을 택했을 것"(40km)이라는 설과, 또 다른 경로는 고령읍으로 진입하기 전 고아리에서 안림천을 따라 쌍림면을 거쳐 합천군 야로면 지금의 26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안림천-가야천을 따라 해인사로 진입할 수 있다. 나상재를 넘는 길은 고개가 가파르고 안림천을 따라가는 길은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좀 멀지만 높은 산을 넘지 않고 (쌍림면의 신촌리―야로면 덕암리 경유하는) 안림천-가야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유력해 보인다. (거리 45km)
방대한 양의 팔만대장경을 운송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10리, 5리씩 릴레이 하듯 머리에 이고, 안고. 지고 대장경을 해인사로 운반하였다.
[위기와 보존] [1]▶ 해인사의 건물들은 여러 차례 화재(火災)와 전란(戰亂)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장경판전은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면한 것은 극적인 일이었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및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 창녕, 거창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송암 김면(金沔, 1541~1593),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을 걸고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면서 해인사와 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위기와 보존] [2]▶ 또 한 번의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전쟁 때이었다.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와 함께 1950년 발생한 6・25전쟁 때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었는데, 이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이들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1921~1954) 공군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 내렸다. 김영환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이러한 대령의 문화유산에 대한 식견과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해인사 묘길상탑(妙吉祥塔)]▶ 해인사 일주문 못미처 사적비와 부도비가 늘어선 비석거리 한옆에 고색창연한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다. 묘길상탑(妙吉祥塔)이다. 그냥 ‘길상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체 높이 3m로 크기는 작지만 이중기단에 3층 탑신, 5단의 처마받침을 가진 전형적인 신라탑이다.
탑이라면 으레 법당 앞마당에 자리하게 마련인데, 이 탑은 많은 사람 오르내리는 길가에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여느 탑과는 달리, 당시의 해인사를 지키려다 전몰한 승병을 위로하는 일종의 추모기념탑이다.
1966년 여름 일단의 도굴꾼들이 검찰에 검거되고 아울러 탑 안에 안치했던 지석(誌石) 4매와 157개의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탑 따위가 압수되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해인사 입구의 작은 삼층석탑에서 꺼냈다’고 자백했다. 4매의 탑지에 적힌 내용도 그들의 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탑지 4매는 모두 규격과 재질이 같았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에 두께가 2.5㎝쯤 되고 전(甎), 곧 벽돌처럼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 두 장은 앞뒤 양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두 장은 한 면에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첫 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뒷면에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가 새겨져 있다. 「해인사묘길상탑기」는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 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운양대길상탑기」에는 탑의 높이, 소요 자재와 경비, 그리고 공사 관련 인물들의 성명 등이 밝혀져 있다. 두 번째 지석에는 「백성사(百城寺) 길상탑」 안에 공양물로 봉안하려던 불경 목록이 적혀 있다. 세 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와 같은 취지로 오대산사(五臺山寺)에 길상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4자씩 떨어지는 운문으로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전몰한 치군(緇軍), 곧 승병들에게 바치는 조사(弔詞)가 「승병을 애도함」(哭緇軍)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지석에는 전란 중 해인사에서 사망한 승려들과 일반인 56명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이상의 지석에 새겨진 글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탑의 정식 명칭이 ‘해인사 묘길상탑’이라는 것, 묘길상탑은 불사리를 안치한 예사 탑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일종의 위령탑이라 할 수 있다는 것, 또 하나 승병 혹은 승군이 적어도 통일신라 말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끝으로 동일한 취지의 탑을 해인사를 비롯한 몇 군데 세우려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해인사에만 건립하게 되어 나머지 탑지들을 여기에 함께 넣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탑 하면 으레 불탑, 사리탑이라고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와는 전혀 건립 배경을 달리 하는 탑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승군 하면 조선이나 고려시대를 떠올리던 우리에게 신라 승군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점도 여간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최치원과 해인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살생을 무엇보다 꺼려하는 절집이 무슨 연유로 승속을 합쳐 56명이라는 많은 목숨을 희생한 전란에 휩쓸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이유는 석연치 않다. 요컨대, 묘길상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 상황을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의 하나이다. 묘길상탑,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큰 탑이다. 보물 제1242호이다. 도굴꾼의 손아귀에서 되돌아온 탑지 4매와 석탑 공양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해인사 홍류동(紅流洞)과 제시석(題詩石)
해인사로 올라가는 가야천의 막바지 골짜기가 ‘홍류동계곡’이다. 홍류동은 골짜기 양옆으로 솟아있는 가파른 산세가 빼어나고, 계곡을 뒤덮은 푸른 소나무 숲이 장하고, 첩첩이 포개져 골을 가득 메우고 있는 바위들이 변화무쌍하다. 그 기암계곡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언제나 청랑하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홍류동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九曲飛流激怒雷 (구곡비류격노뢰) 아홉 굽이 날아 내리는 물, 격노한 우레런가
落紅無數逐波來 (낙홍무수축파래) 떨어진 붉은 꽃잎, 끝없이 물결 따라 흘러오네
半生不識桃源路 (반생부식도원로) 무릉도원 가는 길 이제도록 몰랐더니
今日應遭物色猜 (금일응조물색시) 오늘에야 산빛 조차 시샘하는 그곳에 다다르리
또 조선 초 형 강희안(姜希顔)과 더불어 선비화가이자 문신으로 이름났던 강희맹(姜希孟)은 남쪽으로 여행을 하다 이곳에 이르러 “이런 곳에 이름이 없으니 어찌 시인이나 글쓰는 이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그 물과 바위를 각각 ‘시를 읊조리는 여울’[음풍뢰(吟風瀨)], ‘붓에 먹물 찍는 바위’[체필암(泚筆巖)]라 이름 짓고 시(詩) 한 수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음풍뢰(吟風瀨)를 읊은 시는 이렇다.
濺沫跳珠急 (천말도주급) 급한 물살 튀는 물방울 알알이 구슬이요
驚瀾皺縠深 (경란추곡심) 놀란 물결 깊어지니 주름 고운 명주일레
臨風看不足 (임풍간불족) 이는 바람 맞으며 보고 또 보면
泓下有龍唫 (홍하유용금) 저 검은 물밑에서 들려오는 용 울음소리.
비단 이 두 곳뿐만이 아니다. 홍류동의 기이한 바위, 경치 좋은 물굽이치고 이름이 붙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 ‘도원경에 드는 다리’[무릉교(武陵橋)], ‘옥구슬 흩뿌리는 폭포’[분옥폭(噴玉瀑)], ‘비 갠 달이 비치는 못’[제월담(霽月潭)], ‘신선들이 모여앉는 바위’[회선암(會仙巖)]····. 그리고 여기에 시(詩)가 보태어진다. 그리하여 홍류동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문자향(文자향)이 흐르는 자연이 된다.
홍류동의 절경(絶景)을 노래한 시인의 으뜸은 아마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일 것이다. 그는 이미 쇠락해 가는 신라를 떠나, 이곳 가야산에 들어와 숨어살다 일생을 마감했다 한다.
僧乎莫道靑山好 (승호막도청산호)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山好何須出山外 (산호하수출산외) 산이 좋다면서 어찌하여 산 밖으로 나오려고 하시는가
試看後日吾蹤跡 (시간후일오종적) 뒷날 내 자취를 시험삼아 보시게나
一入靑山更不還 (일입청산갱부환)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이런 시를 남겨 스님네들조차 들뜬 세상을 향하여 치닫는 현실을 풍자하고 자신의 결의를 다진 것이다. 과연 그가 입산 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의 형으로 해인사에 머물던 현준(賢俊), 정현(定玄) 스님 등과 이따금 오가며 서로 사귀었다는 것이 사실로 전해질 뿐, 죽음조차도 홍류동 어느 바위 위에 신발 한 켤레, 지팡이 하나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전설로 남았을 따름이다. 그런 그가 홍류동에 베푼 시 한 수,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지척간의 말소리조차 분간키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시비 소리 들릴까 저어하노니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농산) 흐르는 물 시켜 온 산을 감쌌네.
부조리한 세상을 만나 자신의 포부를 맘껏 펴보지 못한 회한이 처연하기도 하지만, 홍류동의 시 가운데 이보다 멋진 절창은 없다. 홍류동 한 굽이 바위벽에 이 시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제시석(題詩石)’이라고 한다. 글씨는 초서에 가까운 행서인데, 단숨에 써내려간 듯 매우 속도감이 있으면서 힘차다. 그러면서도 글자 크기의 변화나 획과 획,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과 짜임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28글자를 세 줄에 나누어 쓴 까닭에 첫 줄은 10자, 나머지 두 줄은 9자로 글자수가 다른데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포치(布置)가 정확하다. 대단한 달필의 무르녹은 솜씨다. …
그러나 이 시가 과연 최치원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다. 이중환이 그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최치원의 작품임을 말한 뒤, 한강 정구가 「유가야산록」에서 ‘매년 장마 때마다 거센 물결에 깎여 이젠 거의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최치원의 작품임을 단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후, 낭선군 이우나, 우담 정시한, 김민택 등도 한강의 견해를 따른다. 그러나 고려 말의 시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해인사로 떠나는 친구에게 부친 시(詩)가 있다.
伽倻之山最奇絶 (가야지산최기절) 가야산이 기묘절경(奇妙絶景)하여 천하의 으뜸이라면
千載孤雲罕儔匹 (천재고운한주필) 천 년의 외로운 구름[孤雲] 짝할 이 드물어
我欲從之竟不能 (아욕종지경부능) 내 그를 따르고자 하나 끝내 그러질 못해
空讀遺編桂苑筆 (공독유편계원필) 부질없이 『계원필경(桂苑筆耕)』만 들척이누나.
請君細訪孤雲蹤 (청군세방고운종) 청컨대 그대 고운(孤雲)의 발자취 낱낱이 밟았다가
歸來洗我塵胸臆 (귀래세아진흉억) 돌아와 내 가슴의 티끌을 쓸어주소.
孤雲孤雲千載鶴 (고운고운천재학) 고운(孤雲), 고운이여 천 년의 학이여
目送君歸倚高閣 (목송군귀의고각) 눈으로 그대 보내며 다락에 기대노라.
이처럼 해인사 가는 길은 고운을 만나러 가는 길이자 고운(孤雲)의 발자취를 뒤밟았던 숱한 소인묵객(騷人墨客)과 선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 [해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홍선,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참조 인용
회천의 고령(高靈), 대가야의 얼이 서린 곳
대가천과 가야천(→ 안림천)이 합류하는 회천(會川)의 중심에 고령(대가야읍)이 있다. 고령(高靈)은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대가야의 도읍지였다. 세월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래도 그 자취는 아주 지워지지 않았다. 특히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 그 유적이다. 현재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북도 곳곳에 가야시대의 고분군이 산재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상주 증촌리 고분군, 성주 성산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김해 양동리·예안리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 이 중에서 입지와 규모 그리고 학술적 가치 등 모든 면에서 가야 고분을 대표하는 것이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다. 그러므로 고령 읍내(지금 대가야읍)를 굽어보며 말없이 솟은 주산의 대가야 옛무덤에 오르면, 1,500년 전의 가야인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고령 읍내에는 지산동 고분군 말고도 가야시대의 무덤이 하나 더 있다. ‘고아동 벽화고분’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야시대 유일한 벽화고분이 그것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높은 산등성이에 많은 무덤이 무리지어 있지만, 고아동 벽화고분은 산자락의 끝에 외따로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고령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숨길 수 없는 역사의 숨결이 남아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고령 장기리 암각화’이 있고, ‘가야의 무덤’ 고분군이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가 있고, 고려의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경상우도의 대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는 가야의 역사를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伽倻古國山連塚 (가야고국산연총) 가야 옛나라 무덤, 뫼인 듯 이어지고
月器荒村亡且存 (월기황촌망차존) 허무러진 월기마을 남은 듯 스러진 듯
小草斑斑春帶色 (소초반반춘대색) 잔풀 무리무리 봄빛을 띠었건만
一年銷却一村魂 (일년소각일촌혼) 해 바뀌니 또 한 마을 가뭇없이 사라지네
— 남명(南冥) 조식(曺植) 「월담정(月潭亭)」
[고령 지산리 고분군]▶ 지산리 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동 주산(310m)에 있는 대가야 원형봉토분이다.(사적 79호). 고령에서 가장 큰 산인 주산의 남록으로 뻗은 구릉의 동남쪽 경사면을 따라 200기가 넘는 크고 작은 대가야시대의 무덤들이 있다. 윗부분에는 지름 20m 이상의 큰 무덤이, 중간에는 지름 10m 안팎의 중간 크기의 무덤이, 그리고 아래쪽에는 작은 무덤들이 주로 모여 있다. 대가야 고분은 주로 낙동강의 서쪽과 하류 쪽에, 대개는 능선의 정상부 등에 위치하며 주위에는 하천과 평야가 펼쳐져 있고 산성 등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지산동고분군이 있는 주산의 산정에는 주산성이 있다.
이곳 주산의 남쪽 제일 큰 무덤은 금림왕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아래로 있는 큰 무덤들도 대가야의 왕들의 능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1977년과 1978년에 걸쳐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에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함으로써 이들 무덤의 성격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78년 계명대학교에서 발굴한 제32호 무덤에서는 철제의 갑옷, 금동관 등 중요유물이 출토되어 지배계급의 무덤임이 밝혀졌고, 아울러 주인공을 위해 생매장된 순장무덤임이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있었던 순장제도를 실제로 밝힐 수 있는 중요 무덤이 되었다.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 1963년 무덤 안에서 그림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벽화무덤이다.(사적 165호) 시체를 넣어두는 돌방은 북쪽의 좁은 벽은 똑바로 쌓아올렸고, 동쪽과 서쪽의 긴 벽은 위로 갈수록 차츰 좁게 쌓아올려 천장에는 판자 모양의 큰 돌을 한 줄로 나란히 덮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연도는 돌방의 천장보다 낮게 남쪽으로 만들었다. 돌방의 벽면에는 회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모두 벗겨져버렸고, 돌방과 연도의 천장에는 붉은색·녹색·갈색을 사용하여 그린 연꽃그림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옛 가야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벽화무덤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무덤의 구조상 공주에 있는 백제 송산리 벽화고분과 비슷한 점이 있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지산리 당간지주(幢竿支柱)]▶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다. 이것은 본래의 위치에 동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당간지주이다.(보물 제54호)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幢, 불화를 그린 기)을 걸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이다. … 지주의 정상부는 첨형(尖形)으로 하고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3단의 굴곡을 이루게 하여 호선(弧線)으로 처리하였다. 지주의 안쪽에는 간공(竿孔) 2개가 있는데 이들은 장방형의 형태로 구멍을 뚫어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화려 단아한 조각이나 만든 솜씨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인 8세기경에 건조된 우수한 당간지주의 하나로 평가된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당(幢)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간지주는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특히 관련성이 많은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보물 제605호인 고령 장기리 암각화는 장기리 알터마을 길목의 나지막한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은 높이 약 3m 너비 6m쯤 되는데, 그림들은 폭 1.5m 길이 5m 정도의 면적 안에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내용은 겹동그라미[同心圓], 십자무늬, 그리고 양전동식 기하문이라 불리는 특이한 문양,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겹동그라미는 모두 4개가 남아 있고, 주위에 네모진 테를 두른 십자무늬는 1개가 있으며, 양전동식 기하문은 처음 조사자는 17개로 보고하고 있으나 많게는 29개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처음 알려진 뒤로 풍화도 많이 진행되었고, 특히 탁본 등 인공적인 훼손이 심해 이것들을 모두 맨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게 현재의 실정이다. ☜ [고령] (답사여행의 길잡이13-가야산과 덕유산, 2000.2.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홍선,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참조
의병 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 장군의 유적지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경상도 3대 의병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면(金沔)은 경북 고령이 낳은 걸출한 의병장(義兵將)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칠등길 138)에는 ‘김면 장군 유적지(金沔將軍遺蹟地)’(사적 제76호)가 있다. 특히 도암서원(道岩書院)을 장중하게 보수하여 새로 단장해 놓았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의 유적지에는 장군의 묘소(墓所), 신도비(神道碑), 도암사(道巖祠), 도암서원(道巖書院), 도암서당(道巖書堂)이 있다. 김면(金沔)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 거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수십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59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선산대전을 앞두고 충청·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지금의 금릉 김천 지역), 개령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병을 얻었다. 장군은 “오직, 나라 있는 줄 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只知有國 不知有身)는 말씀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현종 7년(1667) 지역의 유학자들이 고령읍에 추모사당을 건립하였다. 정조 13년(1789) 사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높은 충절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의병대장 송암 김면 장군의 승전지 중 김천 대덕에서 거창 웅양으로 넘어가는 우두령이 ‘우척현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창(居昌)에서는 해마다 8월에 ‘우척현전투 전승기념제’를 올리고 있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송암(松菴) 김면(金沔)은 고령 김씨로 시조 고양부원군 남득(南得)의 7세손이다. 조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낸 탁(鐸)으로 중종조의 문신이고, 김면은 부사 세문(世文)의 맏아들로 1541년(중종36) 고령현의 양전동(量田洞)에서 출생하였다. 김면(金沔)의 자는 지해(志海)요, 호(號)는 송암(松菴)이다. 어려서 총명하여 가학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낙천 배신(洛川 裵紳)에게서 학문을 읽히고 성장하여 17세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에게 경의지학(敬義之學)을 공부하고, 20세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정자와 주자의 학문에 심취하였다. 송암(松菴)이라는 호는 남명(南冥)으로부터 받았다.
송암 김면(金沔)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는 막역지우(莫逆之友)이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등 당대 영남의 이름난 선비들과 널리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친밀히 교유하였다. 동강과 한강은 모두 이웃 성주(星州) 사람인데 나중에 둘 다 대사헌을 지낸 인물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년~1603년)은 본관이 의성(義城). 조식(曺植)의 문인이며 외손사위이다. 성균관대학교의 초대총장인 심산 김창숙이 그의 후손이다.
김면(金沔)은 벼슬에 뜻이 없어 오로지 학문연구와 저술로 살았는데 조정에서 효렴(孝廉)으로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유일(遺逸)로서 월천(月川) 조목(趙穆), 한강(寒岡) 정구등과 동시에 6품직인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여 부임을 재촉함으로서 나아가 취임하였다가 곧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처음과 같이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김면(金沔)은 효행이 출천하여 부친 부사공이 북방의 임소 경원(慶源)에서 별세하니, 음력 6월 염천에 도보로 천리 길에 운구하여 고향 선산에 안장하고 그 앞에 회선대(懷先台)를 축조하고 조석으로 망배함을 평생토록 거르지 않았다.
1592년(선조25) 壬辰 4월에 왜적 수십만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니 열진(列陳)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관군(官軍)은 뿔뿔이 흩어지니 적은 불과 15일에 서울에 진격하고 국왕께서는 멀리 북쪽 의주로 파천하였다.
김면(金沔)은 강개(慷慨)한 사람으로서 “나라가 위급한데 신하된 사람으로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야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김면은 자기 집에 있는 곡식을 군량미로 다 내어 놓고, 본인의 돈으로 창과 칼, 화살 등 무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박성(朴惺), 곽준(郭䞭), 박정번(朴廷璠)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낙동강 연안에서 싸우다가 고령은 소읍이라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1592년 5월 큰 고을인 거창(居昌)으로 이진(移陣)하였다. 이때 거창에서는 이미 선비들이 약간의 의병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이에 김면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문위(文緯), 곽준(郭䞭), 윤경남(尹景男), 류중룡(柳仲龍), 박정번(朴廷璠), 오장(吳長) 등을 참모로 하여 영계(營溪)에 본진을 두고 박성(朴惺)을 수속관(授粟官)으로 하여 군량을 모으고 격문(檄文)을 각 읍에 돌려 의병을 모으니 불과 수일에 2천여의 의병이 모여서 큰 군단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전술(戰術) 또한 뛰어나 적과 싸울 때는 넓은 곳[開活地]에서 싸우면 총 보다 불리하니까 골짜기로 유인해서 싸웠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소총은 도화선에 불을 붙여 화약에 닿아야 발포가 되므로 비가 오는 날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알고, 주로 비 오는 날 저녁에 전투를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때 적은 낙동강을 그들의 군수보급과 약탈의 통로로 삼아 오르내리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보급의 기지로 삼으려고 혈안이었다. 6월 김면(金沔)의 의병군은 낙동강의 개산포(開山浦)에서 적을 섬멸하고 정진(鼎津)과 무계(茂溪)에서 적을 격파하여 크게 이기고, 적의 병선을 나포하여 약탈해 가는 궁중(宮中)의 많은 보물을 노획하여, 초유사에게 보내어 임금의 행재소에 전하게 하였다.
7월 금산(金山, 지금의 금릉)에 집결한 왜적은 남으로 내려와서 거창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려고 위세 당당하게 거창 우척현(牛脊峴)에 들어왔다. 이에 김면(金沔)의 군은 산악을 이용하여 군사를 사방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내려치니 적은 혼비백산하여 여지없이 북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는 거창지방의 산척(山尺, 산에서 짐승을 잡고 약초를 캐어 사는 사람)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또한 이 전투는 임진란 산악전투의 대표적 사례이다. ‘우척현전투’는 송암 김면 장군이 싸운 최고의 승전지로, 김천 대덕에서 거창 웅양으로 넘어가는 우두령이 그 현장이다.
금릉 지례(知禮), 사랑암(沙郞巖), 성주(星州), 두곡(豆谷), 변암(弁巖) 등 크고 작은 30여의 전투를 치르면서 김면은 주야로 갑옷을 벗지 않았고, 혹한의 눈서리에 노출되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단기간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일은 김면장군의 전술전략이 단연 으뜸이었음을 증명한다. 8개월의 전투에서 7번이나 승리를 했다하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1년도 되지 않는 수차례 전투에도 김면 장군의 의병들은 혁혁한 전과를 올렸었다. 조정에서는 김면의 전공을 높이 인정하여 8월에 합천 군수를 제수하였으나 나중에 대장이 한곳에 머물 수 없다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9월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리고, 이어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가 11월에 그 공적이 우뚝 뛰어남으로 경상도 의병도대장에 특채하여 그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너를 경상도 의병대장으로 봉하니 도내의 의병을 모두 관할하고 통섭하라” 하였다.
그 당시 김성일(金誠鎰) 순찰사가 김면 장군의 전황을 선조임금께 보고하자, 선조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김면 장군을 ‘경상우도 의병대장[都大將]’에 제수하였다. 그리고 정인홍(鄭仁弘)을 좌대장에, 곽재우(郭再祐)를 우대장으로 임명했다. 김면 대장은 감읍하고 더욱 분발하여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계사년 정월에 조정에서는 김면(金沔) 장군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하여 관군과 의군을 모두 통솔케 하였다.
의병도대장(義兵 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은 의령에서 왜적을 물리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조식의 외손 사위)와 합천에서 의병을 창설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함양에서 창의한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함양군수)와 진주의 이정과 이로, 거창의 문위(文偉), 현풍의 박성, 성주의 이준민, 삼가의 이흠과 노흠, 단성의 이유경, 초계의 의병장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와 탁계(濯溪) 전치원(全治源), 변희옥 등과 함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주축을 이루었다.
2월에 왜적(倭賊)은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와서 평양을 수복하고, 겨울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하니 물러나면서 선산(善山)에 집결하였다. 김면 대장은 적을 섬멸할 계획이 다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쌓인 피로가 겹쳐서 병을 얻어 애석하게도 계사년 3월 11일 금산 진중에서 순국(殉國)하였다.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은 장계를 올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은 맑고 훤하기가 단사(丹沙)와 같았고, 그 가솔이 10리 밖에 있어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장성(長城)이 한번 무너지니 삼군이 모두 눈물을 삼키고 하늘이 돕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하였다. 선조는 곧 그 공적을 높이 사서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였다가 선조 30년에 원종 1등공신에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가증하였다.
송암 김면 선생은 저명한 학자로서 임진왜란에 의분(義憤)으로 일어서서 적을 물리침에, 백성 속에서 백성의 도움을 받아 백성을 위하여 싸우니 그 지지와 도움에 의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기율이 엄정하니 위엄과 존경받은 장수였다. 또한 관군과 관군, 관군과 의군, 의군과 의군사이의 불화를 조정하여 통합을 이룩한 덕장이었다. 특히 의병대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가 서로 격문을 띄워 상대방의 죄를 주장하였으나 김면이 두 사람을 설득하여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도록 하였다.
다른 의병장들은 임진왜란 7년에다 정유재란 이후까지 살아남아서 그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려졌지만, 김면 장군은 의병을 일으킨 지 8개월 만에 전쟁 중 역질(장티푸스)에 걸려 금산[금릉] 전투에서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선생이 운명하실 때에 “나의 장례는 아무도 모르게 치르도록 하라!” 이순신 장군처럼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몸과 마음을 오로지 흉악무도한 왜적을 물리치는데 다 바쳤다. 그가 임종에 앞서 참모와 장좌들에게 “나와 그대들은 왜적을 물리침에 있어서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다.”(只知有國不知有身) 고 한 말씀이 장렬하다. 장군의 죽음을 접한 선조는 밥상을 물리며, 사흘 동안 식음을 들지 않았다 한다. 임금은 김면 장군을 병조판서로 증직 추서하였다. 윤선거(尹宣擧)가 행장(行狀)을 짓고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썼다. 그리고 선생은 후손이 한명도 없어 고령 유림에서 고령 연조리 관음사 자리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을 건립하여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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