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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들판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무데서나 살지만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
들풀이 있기 때문이다.
쑥은 정해진 때에 쑥 잎을 내고
씀바귀는 뜻에 따라
쓰디쓴 씀바귀 잎을 내고
냉이는 명령대로 냉이 꽃을 피워낸다.
작은 꽃일망정 정성껏 피우고서
있는 힘을 다하여 향기를 발하면 산다
우리는 이름 모를 들꽃을 싸잡아
잡초라고 부르지만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고
벌과 나비들이 외면할지라도
서러워하지 않고
그냥 더불어 있음을 감사하며
장미나 백합이 자리를 시기하지 않고
들풀은 들풀대로
아무데서나 들풀로 살아간다.
들풀은 아무데서나 살지만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습니다. 쑥은 정해진 때에 쑥 잎을 냅니다. 씀바귀는 지으신 이의 뜻에 따라 쓰디쓴 잎을 냅니다. 냉이는 명령대로 꽃을 피워냅니다. 작은 꽃일망정 정성껏 피웁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향기를 발합니다. 누구도 자기 이름을 불러 주지 않고, 벌과 나비조차 외면할지라도 서러워하지 않습니다. 장미나 백합의 자리를 시기하지도 않습니다. 더불어 있음을 감사합니다. 아무데서나 다른 들풀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지으신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에, 여호와의 뜻에 따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잎을 냅니다. 꽃을 피웁니다.
향기를 발합니다. 지으신 대로 존재함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합니다. 들판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나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단풍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뭇잎이 형형색색 옷을 입으면, 낙엽이 되어 떨어질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신호입니다. 실제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명으로 주어진 일을 모두 마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으신 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명입니다. 지으신 대로 존재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지으신 대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난 평범하지 않아
특별한 하나님 작품
믿음으로 바라보면
소중함을 알게 돼
나를 통해 이룰 특별한
하나님 계획 있어
믿음으로 시작해봐
하나님 맡기신 일
하나님께 영광 되는
주님 뜻대로
세상을 축복하는
주님 도구로
이렇게도 특별하게
지으신 대로
하나님 크신 손에
나를 드리리 - 파이디온 선교회
사람은 누구나 다 여호와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특별한 작품입니다. 절대로 평범하지 않습니다. 창세전부터 작정된 여호와의 거룩한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그대로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라고 외쳤습니다. “은사χάρισμα”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허락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물론, 얼마든지 비슷한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가진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각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은사는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 사용할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사용할 때 아름답습니다. “청지기οἰκονόμοι” 같은 자세로 서로를 극진하게 섬기며 필요까지도 채워줄 때 풍요로워집니다. 지으심 받은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 가장 향기로워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종하게 여기는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아낌없이 희생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그녀Mother Teresa는 “당신이 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기자에게 “천만에요. 전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하나님은 저에게 성공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지으심 받은 대로 존재하기 위해서 선물로 주어진 은사를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습니까?
그Jeremiah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꿈속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살펴보면, 오히려 전혀 가당치 않은 일로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어떤 사전 예고나 징조도 없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하는 선지자로 세웠다.”(렘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아셨습니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형질形質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 하나만을 증거 하기 위한 거룩한 도구로 구별하셨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물론 세계 열방으로 보내실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모든 환경, 상황, 조건, 사건, 사고 등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통곡하며 절규해도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나날도, 오히려 절망의 정도가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는 하루하루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물도 없이 메마른 웅덩이에 내동댕이쳐지는 일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하거나 구할 수 없는 외롭고 곤란한 사면초가의 상황도, 나라와 민족의 진멸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반역자로 내몰리는 일도, 도망간 이집트에서 동족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처참하게 죽는 일까지 단 한 가지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불가능이 전혀 없다는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당신이 창세전부터 지명하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선지자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해주시기는커녕 오히려 너무나도 처참하게 죽도록 버려둘 수 있느냐고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습니다.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보여 주어야하는 존재로 창세전부터 이미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은 어떤 방해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무조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여호와의 영원하고도 거룩하며 위대한 경륜經綸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혹 그가 사명을 받은 즉시 자신은 순종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버틸 만큼 버티다가 결국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요하게 설득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환경과 조건까지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면서 자신은 절대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며 버티던 모세가 백기를 들고 완전히 투항할 때까지 오랫동안 참고 견디며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 작정된 여호와의 뜻은 다른 누구도 절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내적, 외적 능력과 함께 필요한 환경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선지자 한 사람의 거룩한 희생과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종종 언제까지 중국과 북한 선교를 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선교 활동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지만, 중국과 북한 선교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는 질문입니다.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때마다 “빚을 졌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비록 지극히 적어서 내놓을 것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제가 반드시 순종해야 할 만큼의 양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여호와께서 주신 마음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정말) 그만두자.’ (단단히 결심)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렘20:9)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않고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뜻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불쑥 할 수 없다고 말하기는 했었지만, 결국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뜨거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여호와의 영원하고 거룩하며 위대한 경륜 속에 작정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러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도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당당하게 내놓을 것 하나 없고, 이루어놓은 일 하나 없는 것 같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묵묵히 존재하다 사라진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엄연奄然한 사실입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여호와의 거룩한 뜻이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놀라운 하루입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는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여호와는 물론 여호와께서 허락해주신 말씀에 놀랐습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일을 하기에 조금도 합당하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거절했습니다. 부르심을 피해 도망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를 여호와의 말씀이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마치 거칠고 사나우며 천방지축 날뛰는 야수를 한방에 고꾸라뜨리는 화살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과 몸부림만으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여호와의 올가미에 완벽하게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결코 놓아 주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없이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죽으나 사나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만 걸어갈 수 있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민이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하였던, 인기와 함께 부와 명예와 권세까지 얻을 수 있었던 평화와 구원을 외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입에 넣어주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끔찍한 전쟁과 나라와 민족의 완벽한 진멸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료 선지자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백성들로부터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로 내몰렸습니다. 멸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는 굴욕과 조롱과 잔인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철저하게 무시당했습니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 기회만 엿보며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외롭고 곤란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그의 삶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도 인정사정보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매를 흠씬 맞았습니다. 손과 발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차꼬에 단단하게 채워졌습니다. 그 상태에서 베냐민 족속의 땅과 연결되어 있는 성전 북쪽 편 성문에 마련돼 있었던 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그는 “여호와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당신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렘20:7)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인생에 깊이 간섭하셨습니다. 그를 붙드시고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어느 날, 어떤 예고도 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던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음을 온전히 다 드릴 수밖에 없도록 그를 완전히 사로잡으셨습니다. 당신이 창세전부터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간절한 바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려주셨습니다.
당장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과 완벽한 파멸이었습니다. 궁극적인 결과는 완전한 구원이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바람을 구체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해주셨습니다. 당신 안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사랑이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핍박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절대로 끊어놓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랑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낼 수 있는 전능하심이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능력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의지가 필요할 때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그가 자신의 전부를 당신께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설득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를 송두리째 장악하셨습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정복하셨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연약했던 그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지워버리셨습니다.
당신이 그의 전부가 되셨습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얼마 아픈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치열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혹독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손해가 되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 절절하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의지 역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물론 자신의 삶을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조율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비록 (당신 백성을) 근심하게 하지만, 당신의 풍부한 인자를 따라서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닙니다.”(애3:32-33)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비록 혹독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내라고 외쳤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진멸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었던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었습니다. 눈이 완전히 짓무를 정도로 울고 또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齒가 잇몸도 없는 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서 환영幻影처럼 환하게 펼쳐지고,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나라와 민족의 진멸과 죽음 앞에서 차마 음식을 넘길 수 없어서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어버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진멸하신 다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회복시키려는 여호와의 작정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다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안위와 고난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불신앙을 고수하며 진멸의 길을 걷고 있었던 나라와 민족을 여호와처럼 아프고, 치열하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혹독하면서도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친히 이끌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창세전부터 품으셨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치 있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조각가였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작품 활동 하나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날도, 하루 종일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제작하며 보냈습니다.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따뜻하게 덥힐 난방 도구 하나 없는 방은 대단히 추웠습니다. 극도로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려는 순간, 거의 완성된 작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추운 날씨에 점토에 섞여 있는 물이 얼어서 작품을 버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밀려들었습니다.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불과 모포로 작품을 덮었습니다. 자신은 추위를 달래기 위해서 웅크린 자세를 취했습니다.
잠을 청했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했던 천재 작가가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고 했었던 위대한 작품은 오늘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지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담아두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 나팔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 완성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천재 작가 이상으로 저와 여러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작정한 당신의 거룩한 뜻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십니다. 당신이 저와 여러분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되는 날이 하루라도 빨라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십니다. 그 결과, 저와 여러분이 가장 저와 여러분다운 모습으로 곧 지으심 받은 모습대로 존재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존재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지고 향기로워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때를 위해서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더러움은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Dirty is out of the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연못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침대에 있을 때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흙이 논밭에 있을 때는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방바닥에 있을 때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즉시 닦아냅니다. 물고기와 흙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있어야할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합당치 않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저마다 주어진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무조건, 꼭 지켜야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진정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환경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향기로워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사명으로 주어진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혹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기꺼이 믿음으로 받고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지으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온갖 재해 때문에 피곤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하고 향기까지 나게 하는 복된 삶,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가 되는 복된 삶,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