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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기수 / 김혜순]
서울에 살면
태양도 배달 온다
구름도 배달 온다
바람도 배달 온다
나는 오늘 창문을 열고
퀵 서비스로 도착한 눈보라를 풀어 본다
정오엔 삼척에 사시는
엄마가 보낸 깊은 바다가 도착했다
여기가 깊은 바닷속 어느 집 안방이냐
심해에서 온 게들이 두 눈을 껌벅였다
잠결에도 들리는
집앞에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누군가 겨울밤을 집집마다
부려 놓고 가는 소리
아무도 받아 주지 않자
택배 꾸러미를 박차고 나온 초승달이
미끄덩거리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소리
식반을 머리에 인 아저씨가
빈 그릇 내놓으라
주먹으로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
지난 2010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82%입니다. 도시화율이란 전체 인구 중 도시 인구의 비율을 말하며, 도시 인구란 행정 구역상 '동'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요즘에는 행정 구역상 '리'에 속하지만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생활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도 꽤 많아서 실제 도시화율은 통계청의 수치보다 조금 높다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은 도시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도시화율이 100%인 도시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도시화율이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통계 수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요즘은 도시에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 보면 도시에 산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에 시골에서 도시로 거처를 옮긴 이들을 제외하면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명절 때 친척집을 찾거나 여행차 시골 마을에 들를 때 그런 차이를 느끼기도 하지만 금세 무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히려 도시가 아닌 곳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도시화가 막 시작될 무렵의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현대 도시의 삶은 화려하고 편리한 동시에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마치 낯선 이국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심정이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신기하고 편리한 것들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굳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도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가면 낯설어 하는 사람이 꽤 많으니까요. 도시도 규모에 따라 삶의 방식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죠.
도시와 시골의 삶은 많이 다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도시에서는 낯선 사람을 수없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인구가 많지 않은 곳에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뭅니다. 어르신들이 과거를 회고하는 말중에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네 규모가 작고 이웃끼리 많은 것을 나누다 보니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는 뜻이죠. 그와 달리 대도시에서는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하루에도 수많은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거리를 걷거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은 때로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 상상하는 것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처럼 두근거리는 일이죠. 그러나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낯선 사람과 마주쳐야 한다면 설렘보다는 피곤이 엄습합니다. 만원 전철을 탔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얼굴이 거의 닿을 듯한 자세로 꽤 오랜 시간 동행하는 일은 무척 불편합니다. 어떤 표정과 태도를 보여야 할지 난감한 마음에 얼른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전철과 버스에서는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눈을 감고 조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낯선 사람과는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니까요.
이와 관련해 게오르그 지멜(Georg Simmel)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는 대도시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둔감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감정적 자극에 혹사당해서 새로운 자극에 대한 반응 능력이 떨어지는 둔감한 모습을 보입니다. 강력한 자극에 노출되면 웬만한 자극에는 무덤덤해지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속내 감추기'라는 정신적 태도가 요구됩니다. 만약 무수한 사람과 쉴 새 없이 만날 때마다 매번 내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피곤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철과 버스에서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조는 척하는 것도 '속내 감추기'의 한 방법입니다.
지멜에 따르면 도시인들이 가진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입니다. 도시인들은 사물의 차이가 지니는 의미나 가치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지멜은 그러한 증세가 나타나게 된 주된 원인으로 대도시에 침투한 화폐경제를 지목했습니다. 돈은 사물의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합니다. 이로써 돈은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죠. 예컨대 A와 B라는 친구가 생일 선물로 공교롭게도 똑같은 모자를 선물했다고 칩시다. 두 개의 모자에는 각각 친구를 생각하는 A와 B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질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화폐경제에서는 가격이 같다면 두 모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으로 취급됩니다.
시적인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멜이 지적한 둔감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같은 모자라도 A가 선물한 것과 B가 선물한 것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둔감함에 익숙해지지만, 그러한 상태에만 빠져 있다면 주위의 시적인 것들에 눈뜨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시인은 도시에 살면서도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아침부터 시작되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얼마든지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침을 배달하는 소리
중학교 때 김동환 시인의 「북청 물장수」라는 시를 처음 접했습니다.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청각적 이미지가 선명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물장수란 직업은 생소했습니다. 상하수도 시설이 잘 갖춰진 환경에 살던 저로서는 물을 배달해 먹는다는 것이 봉이 김선달 시절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들렸죠. 그런데 오히려 요즘에는 물장수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커다란 생수통을 나르는 배달부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편의점에서는 외국에서 수입했다는 비싼 생수도 파니까요.
사실 「북청 물장수」는 물장수가 사라져 가던 시절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24년은 상수도 시설이 정비되고 수도에 계량기가 설치되면서 물장수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물장수는 1800년대 전후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08년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물장수를 직업으로 삼았던 이는 2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서울의 인구는 23만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만 3천여 명이었습니다. 즉, 서울에서 장사하는 사람 수의 15%를 차지할 만큼 물장수는 흔한 직업이었습니다. 특히 함경북도 북청 출신의 물장수가 많았는데, 이들을 '북청 물장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물장수의 수는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1970년대 초반에 명맥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이 작품에서 물장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있습니다. 또 김동환 시인의 고향이 함경북도 경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북청 물장수」에서 물장수는 매일 아침을 소리로 열어 주는 존재입니다. 아직 잠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장수가 맨 물동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어 물을 퍼붓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물장수가 사라집니다. 마치 자명종처럼 물장수는 매일 같은 시각에 자신만의 소리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물장수가 내는 소리는 자명종 소리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지 않습니다. 그 소리는 단번에 사람을 깨우는 험악한 소리가 아니라 서서히 커지는 발걸음 소리처럼 사람들을 조금씩 깨어나게 만들고 찬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음과 몸을 상쾌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슬그머니 사라짐으로써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침을 맞도록 유도합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는 물장수의 소리를 흉내 낸 '인공지능 알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북청 물장수의 소리처럼 기다려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언제나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소리와 아침에 잠깐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다릅니다. 또 북청 물장수의 소리에는 찬물의 시원함과 함께 아침을 배달하는 사람의 온기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가슴을 디디면서" 나는 소리 마냥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죠. 시인이 사라져 가는 물장수를 다시 기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물장수는 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온기와 아침의 활력을 배달하는 사람이니까요.
물장수는 보기 힘들지만 요즘도 아침을 깨우는, 아침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유배달부, 신문 배달부가 바로 그러한 이들이죠. 조현설 시인의 「신문 배달 소년이란 작품도 청각적 이미지가 풍부합니다. 물장수나 신문 배달부나 주로 청각을 통해 느끼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북청 물장수가 발걸음 소리, 물동이의 삐걱대는 소리, 물을 쏟아 붓는 소리로 다가온다면, 조현설 시인의 작품에서 신문 배달부는 계단을 쿵쿵 뛰어오르는 소리와 신문을 던질 때 나는 '툭' 소리로 느낄 수 있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흔한 소리들이지만 시인은 그 소리를 민감하게 포착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시인은 그 소리가 밤새 있었던 소식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아침 햇살처럼 배달부가 던지고 간 신문은 신선한 새 소식을 선물합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과 같이 빠르고 편리한 매체가 많아서 신문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신문보다 효율적인 매체는 훨씬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새로운 소식에 더 둔감해졌습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무엇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소식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졌죠. 어쩌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속에는 배달부가 전하는 아침을 여는 소리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문 배달 소년」에서 계단을 '쿵쿵' 뛰어오르는 소리와 신문을 '툭' 던지는 소리는 신문 배달부가 내는 소리인 동시에 새 소식을 기대하는 가슴이 울리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신문은 둔감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침 햇살처럼 깨웁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에도 가슴이 '쿵쿵'거릴 수 있다면, 낯선 풍경도 '툭' 하고 마음에 얹힐 수 있다면, 우리는 도시인의 둔감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과 구름을 배달합니다
앞에 소개한 김혜순 시인의 배달의 기수는 물장수와 신문 배달 소년을 비롯한 모든 배달원들을 위한 시입니다. 우리 겨레를 '배달민족'이라고 합니다. 배달은 '밝은 산'이라는 뜻의 상고 시대 고유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한자의 음을 빌려 '배달(達)'로 적기도 하고, 한자의 뜻을 빌려 '백악(白岳)' 혹은 '백산(山)으로 적기도 하죠. 최근에는 유독 배달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특성을 가리키는 우스갯소리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배달의 기수'는 원래 1975년부터 국방부가 제작한 홍보 영상물의 명칭이었습니다. 국군의 활약을 영웅적으로 그려 낸 이 프로그램은 1989년까지 의무적으로 방송됐으나 군 생활의 긍정적인 면만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폐지되었습니다. 그 뒤 개그 프로그램에서 이를 패러디해 거리를 누비는 배달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했죠. 이 작품에서도 각종 배달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배달의 기수」에서도 청각적 이미지가 두드러집니다. 3연에는 각종 배달원들이 내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지만 시인의 예민한 감각 속에서 그 소리들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특히 "택배 꾸러미를 박차고 나온 초승달이 / 미끄덩거리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소리"라는 구절에 눈길이 갑니다. 분명히 택배 꾸러미에 담긴 것은 어떤 물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 담긴 것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 보내온 초승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배달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속해 있던 자연 전체입니다. 어머니가 보낸 게 상자 속에는 바다가 담겨 있고, 또 어떤 상자 속에는 태양과 구름과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물장수와 신문 배달부가 전하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아침과 새 소식인 것처럼, 이 작품 역시 택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그저 물건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물의 차이에 마비된 도시인들의 둔감한 시선 속에서 그것들은 물이고, 신문이고, 게일 뿐입니다. 그러나 둔감함에서 깨어난 시선 속에서는 수돗물과 물장수가 길어 오는 물이 같을 리 없습니다. 홈쇼핑에서 파는 게와 바닷가에 사는 어머니가 보낸 게 사이에는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의 차이가 있죠. 이 작품에서 시인이 배달원들을 '배달의 기수'로 치켜세우는 것은 그러한 까닭입니다. 그들은 돈으로 환산되어 고유성을 잃어버린 물건들이 아니라, 돈으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것들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태양과 구름과 바람의 가치를, 어머니가 보낸 바다의 가치를 어느 누가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아마 화폐경제에 익숙한 도시인들이라도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엄두는 쉽게 내지 못할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오늘 하루도 수많은 소리와 낯선 얼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 음식을 배달해 먹고, 기다리던 택배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전철이나 버스 안의 풍경에도 눈길을 보내기 바랍니다. 택배 상자 안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해 보기 바랍니다. 거기에 시가 있습니다.
소래섭 교수와 함께 읽는 일상 속 이야기
『우리 앞에 시적인 순간』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