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 내물왕릉. 내물왕릉미면 내물왕릉이지 왜 전 내물왕릉일까요? 내물왕릉이라고 전해 오지만 내물왕릉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 남서쪽에 왕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지만 이 주위에도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몇 기가 있고 묘표나 묘지석이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내물왕릉이라고 추정을 할 뿐입니다.
↑ 주지하다시피 신라는 박씨와 석씨와 김씨 세 성이 연합하여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박혁거세를 필두로 하여 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이어 석씨가 왕위를 이어갑니다. 그러다가 미추왕에 이르러 김씨가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고 내물왕 이후에는 김씨들에 의하여 왕위가 세습됩니다. 신라 전체를 보면 박씨가 10명으로 232년 간, 석씨가 8명으로 174년 간, 김씨가 38명으로 587년간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
내물왕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썼습니다. 이사금은 연장자라는 뜻이지만 마립간은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내물왕부터 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다고 봅니다. 내물왕은 국토도 많이 넓혔지만 그 결과로 백제의 침략이 잦게 되어 고구려의 원조를 청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그때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광개토대왕 시절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 들여 백제와 연합한 왜의 침입에 원군을 보내 이를 격멸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야 했고 내정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후 몇 십년 동안 신라는 거의 고구려의 속국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계림. 계림의 원래 이름은 시림(始林)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납니다. 김알지는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그 7세손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이가 미추왕입니다.
'탈해 이사금 9년에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황금궤짝이 걸려 있고 그 아래서 흰닭이 울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왕이 친히 가서 궤짝을 내려 열어보니 그 안에 용모가 수려한 아이가 있어 데려와 태자로 삼고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로 삼았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탈해이사금은 알지를 태자로 세웠지만 알지는 유리이사금의 아들인 파사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 계림 숲 속에 있는 계림비각. 이 비는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계림은 신라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신성한 숲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였을 때 계림 숲을 크게 파괴하였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가 신성시하는 숲을 파괴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계림을 훼손하거나 이곳에 밭을 경작하면 곤장 80대를 치고 관리의 경우는 삭탈관직을 한다는 법령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향약에도 계림에 말이나 소를 매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 신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 비각 안에는 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이 비에는 김알지 탄생 신화와 신라의 개략적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신라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역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역사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한 번 곱씹어 봐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김알지라는 이름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해석이 약간 다릅니다. 삼국사기에는 '아이가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알지라 하였다' 하였고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일과 같으므로 알지라 하였는데 알지는 신라 말로 애기라는 뜻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말로 남자아기는 '알지' 여자아기는'알영'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 1963년도 1월 21일 계림은 사적 제 1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그늘이 시원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가을에는 단풍이 고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경주의 계림은 문화재와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는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문화재라고 무조건 보호만 하고 사람들을 멀리한다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비각 주위의 담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 담은 최근에 보수한 듯합니다. 김알지 신화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알지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이 주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이 되었는데 그 학설이 이외로 지금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기록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입니다.
↑ 이제 계림을 돌아서 남천을 건너 오릉으로 갑니다. 문천교에서 내려다본 남천은 아주 맑고 시원합니다. 그런데 남천이 왜 문천이 되었을까요? 문천은 모기내라는 뜻입니다. 모기가 많거나 혹은 모기와 관련되는 고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천은 모기와는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 월성교에서 본 남천. 여기서도 흔적이 약간 보이지만 과거 남천은 모래가 아주 고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사금이 많이 채취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사금은 순도가 높고 개체가 굵어서 바로 공예품으로 제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경주사람들은 이 내를 모갱이내라고 불렀습니다. 모갱이는 몰개 즉 모래에서 온 말입니다. 모갱이를 아마 모기로 잘못 알고 문천(蚊川)이라고 표기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추정을 합니다.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왕왕 일어나는 일입니다.
↑ 오릉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신라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 아이들이 정문을 들어서서 오릉으로 향합니다.
↑ 오릉은 넓어서 시원한 느낌한 느낌을 줍니다. 오릉 숲은 과거 남정수라고 불렀습니다. 오릉 북쪽 문내 건너편에 남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남정수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 정자는 없습니다. 다만 오릉교와 문천교에 사이에 다리가 있었고 남천 북쪽에도 천경림이라는숲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지금 천경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아이들 어깨 뒤로 아직도 백일홍이 붉게 피어 있습니다.
↑ 오릉 앞에는 삼문 형식의 숭의문이 있습니다. 가운데 길은 신도(神道)이므로 문이 당연히 닫혀 있습니다.
↑ 숭의문을 들어서면 정면 다섯 칸의 일자 모양 제각이 웅장하게 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제각은 2004년 2월 20일에 준공된 건물입니다. 여기서 제를 지내니 흔히 제각이라고 하지만 정식 명칭은 침전입니다. 조선의 왕릉 앞에도 제각이 있습니다만 이는 정자각입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했으니 제후의 제각인 정자제각을 세웠지만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의 고종황제의 홍릉과 순종황제의 유릉 앞에는 일자침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후가 아닌 황제의 능에 맞는 격식을 취한 것입니다. 2004년 건립된 오릉의 제각 역시 일자침전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 전면에서 본 오릉. 맨 앞이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능이라고 추정합니다. 이곳에는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 그리고 남해왕와 유리왕, 파사왕이 안장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삼국사기와는 다릅니다. 왕이 운명한지 이레만에 하늘에서 왕의 시신이 사지와 머리 다섯부분으로 나뉘어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이를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다섯 군데로 나누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릉은 박혁거세 일인의 능인 셈입니다. 뱀이 나타나 시신을 한테 모으는 것을 방해했다고 하여 오릉을 다른 말로 사릉(蛇陵)이라고 합니다.
↑ 박혁거세의 시신이 오체로 나뉘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에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이는 박혁거세가 정변에 의하여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남해왕이 즉위하고 이어 그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보아 정변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원주민이 아닌 혁거세 일족들의 장례 관습이 아니었나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 아이들에게는 사릉인지 오릉인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아이들도 자식들의 손을 잡고 이곳에 들러 사릉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겠지요. 역사란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의미없는 어떤 과거의 일이 어느 순간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겠지요.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역사는 단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대주의사관이 우리 고대사를 실종시킨 한 원인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 그래서 어느 한 집단이 역사를 독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의 역사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사대부들의 역사가 정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야사나 일사가 되었습니다.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일은 역사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말살하는 입니다. 더구나 국가가 역사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 자 다 모여서 기념촬영. 어 한 녀석이 없네.
↑ 다시 윤석이가 들어와서 기념 촬영을 마쳤습니다.
↑ 오릉 주위를 한 바퀴 돌아 알영정 안내판 앞에 섰습니다.
↑ '문화답사를 가거든 안내판은 무조건 읽어라.'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안내판 앞에서 열심히 읽습니다.
↑ 비각 앞에 모여서 비문을 같이 읽습니다. 그런데 알영정이라면 우물이 있을텐데 우물은 어디에 있지요?
↑ 비각 안에는 유허비가 서 있습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날 알영이라는 우물에 계룡이 나타났는데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로 딸애를 낳고 죽었다고 합니다. 아이의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처럼 생겨 월성 북쪽 냇가에 데려가 씻으니 부리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뒤 사람들이 혁거세와 함께 남산 서쪽에 궁궐을 짓고 두 아이를 길러서 십삼세가 되자 왕과 왕비로 추대하였다고 합니다.
↑ 비각 뒤로 우물이 있습니다. 장대석을 덮어 놓아 우물의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알영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났다고 알영이라고 하였는데 알영은 여자어린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룡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용은 물을 관장하는 신성한 동물이니 농경사회의 토템이고 닭은 어둠을 물리치는 동물이니 샤머니즘과 관계되는 동물로 볼 수가 있습니다.
↑ 알영각을 나서는 아이들
↑ 알영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나타나는데 삼국유사보다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알영정에 용이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자 지나가는 할멈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 키웠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덕행이 뛰어나 시조가 이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 삼국사기에는 용의 오른쪽 옆구리(삼국유사에는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 났다고 하고 태어날 당시 닭부리 모양의 입술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는데도 기록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료들은 서로 보완적일 수도 있지만 왕왕 모순되고 대립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여집니다.
↑ 알영정을 돌아 나와 이제 숭덕전으로 갑니다.
↑ 오후가 되니 햇살이 따갑습니다.
↑ 숭덕전 입구 홍살문이 보이고 그 뒤로 외삼문인 영숭문이 보입니다. 영숭문 오른편 건물이 숭덕전을 관리하는 사람이 머무는 참봉관사이고 왼쪽 건물인 박혁거세의 신도비를 세운 숭성각입니다.
↑숭덕전 안내판을 먼저 읽고 있습니다. 숭덕전은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입니다. 그런데 격이 높으니 제전이라고 부릅니다.
↑ 숭덕전은 현재 출입이 통제되어 있습니다. 봄과 가을의 제전과 청명제전을 제외하고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여기는 숭덕전 왼쪽에 있는 숭성각입니다. 숭성각은 신라 시조왕의 신도비를 봉안한 곳입니다.
↑ 신도비 전면. 붉은 글씨로 맨 위에 '신라시조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숭덕비라는 편액이 보이고 신도비 뒷면에는 묘비명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앞뒷면을 이어 보면 '신라시조왕묘비명'이 됩니다.
↑ 숭성각을 나섭니다.
↑ 나오면서 다시 돌아본 숭덕전 전경. 막 이울고 있는 배롱나무 꽃이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음을 알려 줍니다.
↑날씨가 더워 그늘을 골라 밞고 나옵니다.
↑ 간지럼을 진짜 타는지 아이들이 백일홍 가지를 긁어보고 있습니다. 사당이나 재실 주위에 심은 백일홍은 자손이 백일홍처럼 번창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이제 오릉을 나서서 나정으로 출발합니다.
↑ 나정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삼국사기는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의 나정 숲에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가보니, 말은 문득 없고 큰 알이 있어 살펴보니 그 속에서 한 아기가 나왔다. 집에 데려와서 길렀는데 용모와 자질이 비범하여 13세에 왕으로 추대하였다. 처음 알에서 나왔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서 성을 박씨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삼국유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하지만 정황이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부촌장들이 3월 초하루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서 회의를 하는데 양산(남산) 밑 나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웠다. 그곳을 찾아 가 보니 우물 곁에 백마가 한 마리 꿇어 있다가 사람을 보고서 길게 울며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큰 자줏빛 알이 있었다. 알을 쪼개자 그 속에 아이가 있어서 동천에 목욕 시키니 아이의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함께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런 신화적인 요소로 후대 학자들은 신라의 건국신화를 역사에 편입하지 않고 단지 신화로만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나정이 실지로 우물이었고 그 위에 건물이 건조된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 우물 위의 건조된 건물은 아마 시조왕을 기리는 신궁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21대 소지왕 9년 487년에 신라시조가 태어난 곳에 나을신궁을 지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입니다. 역사가 신화적인 언어로 기록되었다 하여 역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이상한 풍토입니다.
↑ 발굴 작업 이전의 나정의 모습. 비각 안에는 '신라시조왕탄강정기비'가 있습니다. 지금은 발굴 작업으로 모두 철거 되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복원이 될지 궁금합니다.
↑ 나정 옆에는 양산재가 있습니다. 박혁거세 당시의 육부촌장들을 추모하는 재실입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안을 살필 수도 없었습니다. 재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다음 목적지로 향합니다.
↑ 이쯤 오니 자건거 여행 맛이 납니다. 아이들은 서남산 산록 아래 농로를 신나게 달립니다.
↑따가운 가을 볕 아래 벼들이 여물고 있습니다.
↑ 제법 자건거 타는 기분이 납니다.
↑ 이 길은 '삼릉 가는 길'의 한 구간입니다.
↑ 진욱이와 희주가 후미를 지키고 있습니다.
↑ 왼쪽 산기슭으로 창림사지가 보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 박혁거세가 궁을 짓고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사서에 나오는 금성이 이곳이라고 주장합니다. 월성으로 옮기기 전의 궁궐이 이곳에 있었던 셈입니다.
↑ 포석정에 도착하였습니다.
↑ 지금은 포석정이라고 불리지만 당시에는 포석사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포석사는 신성한 곳으로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들의 화상을 봉안하거나 왕실의 혼례식을 치르는 곳으로 화랑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에는 8세 풍월주 문노의 화상을 포석사에 봉안하고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석사는 화랑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이곳에서 비빈 · 왕척들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견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베풀고 향락에 빠져 있는 신라 말기 풍조를 비판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곳은 왕실의 제사 장소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이곳은 박, 석, 김 삼성 가운데 박씨들이 신성시하는 장소로 추정됩니다. 이 주변에 박씨 시조왕의 탄생지인 나정이 있고 초기의 금성이 있었고 또 이 주위로 하여 박씨 왕들의 능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타당한 추리가 아닌가 합니다.
↑ 물론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의 풍류를 즐기는 시설이 맞지만 이는 큰 제사를 지낸 후 군신들의 화합하는 자리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추정 학설일 뿐 결정적인 증거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신궁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도 지금 학계에서는 위작 여부를 두고 논쟁 중에 있습니다.
↑ 포석정을 돌아나와 삼릉으로 이동합니다. 지마왕릉에서 삼불사로 가는 길에 조그맣고 예쁜 연못이 있습니다.
↑ 연못 주위를 잘 정비하여 쉬어 갈 곳이 많이 있습니다.
↑ 자세히 보면 노란 어리연꽃이 보입니다.
↑ 삼불사를 지나 삼릉을 지나 경애왕릉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삼릉이 먼저지만 우리는 경애왕릉에 자전거를 세우고 걸어서 삼릉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 왕릉 입구로 들어서는 길이 경사가 있어 아이들이 힘들게 올라 오고 있습니다.
↑ 그래도 윤석이는 아주 여유있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 경애왕릉. 신라 55대 왕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견훤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하고 자결을 강요당하여 자진하였다고도 합니다. 삼릉에 안장된 신덕왕의 둘째 아들로 기울어져 가는 신라를 지탱하기 위하여 고려 왕건과 동맹도 맺고 하였지만 이미 국운은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 박씨 마지막 왕으로 기록됩니다. 다음 왕은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고 여기서 신라는 종말을 고합니다.
↑ 삼릉. 박씨 왕들의 능입니다.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입니다.
↑ 삼릉을 돌아보고 다시 경애왕릉 쪽으로 나옵니다.
↑ 경애왕릉과 삼릉 사이에 있는 석교 위에서 아이들이 이벤트를 벌이고 있습니다.
↑ 누가 주인공이야?
↑ 누가 더 높이 뛰나? 아이들의 얼굴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 안녕, 지수의 귀여운 표정.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면 이제는 남산 냉골로 오르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