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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어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살전 5: 18을 보시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해결되어도 감사하지만, 어려움이 없어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들이 들어오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감사한 일이 생겼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집에 오다가 사고가 나서, 차가 일곱 바퀴나 굴렀지만 상처 하나 안 생겼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나는 너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혹시나 해서, “아버지는 여덟 바퀴 굴렀어요?”하자, 아버지는 “아니.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라고 했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감사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감사하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시니 감사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에 활성산소가 가득한 것과 같습니다. 몸에 활성산소가 가득하면, 건강이 위협을 받게됩니다. 그러므로, 활성산소를 제거해야 하듯,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만과 불평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본질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감사로 가득채워 지시길 바랍니다.
1860년 9월 8일,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385명이 탑승한 유람선 한 척이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287명이 호수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학 수영선수였던 에드워드 스펜서가 힘을 다해 17명을 구출했습니다. 스펜서의 구조소식은, 연일 언론을 통해, 그의 영웅적 행동을 대서특필했습니다. 하지만, 스펜서는 그 후유증으로 7년 후인 3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임종하기 직전 그의 곁에 있던 토레이 목사님이 “목숨을 구해 준 17명중에 몇 명이나 당신에게 감사를 표시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펜서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이요. 어린 소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 아이는 지금도 성탄절이 되면, 어김없이 감사카드와 선물을 보내오고 있어요.”
토레이 목사님을 통하여 전해지는 스펜서의 이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묻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성경에 나오는 질문 가운데,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스며드는 질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것은 기적이요,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기에, 기적이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감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 11 -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가시던 길의 피로를 잠시 풀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났습니다. 나병환자에 대해 성경의 배경으로 이해하기 좋은 자료가 “벤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루 윌리스는 자신의 소설인 “벤허”에서 나병환자에 대해 “나병환자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송장처럼 성 밖으로 버려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할 때도 일정 거리를 두어야 했다. 나병환자들끼리만 살아야 했으며, 모든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성전의식과 회당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해진 옷을 입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칠 때 외에는, 입을 가리고 다녀야 했으며, 황량한 광야나 버려진 무덤에서 거처를 찾아야 했다. 힌놈의 골짜기와 게헨나의 살아있는 유령취급을 받아야 했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탄하며 살아야 했다. 죽기는 두려웠지만, 죽음 외에는 소망이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나병환자들은 통증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몸에 상처가 나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불에 데어도 고통을 모릅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며, 봉사했던 폴 브랜드는 말하기를, “우리 몸이 조금이라도 아픈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양쪽에서 격리된 중간마을에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건강했더라면, 서로를 냉대했겠지만, 같은 나병을 앓고 있었기에,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나병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진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소외와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복음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라는 자가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들이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자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레 13: 46을 보시면,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는 정상인에게 접근불가였습니다. 약 2미터 이상 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도, 자칫 정상인에게 보이면, 길거리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으로부터까지 격리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자신들의 병이 치료할 수 없는 병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희망보다는 절망이 가득했고, 그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병을 치료해 줄 가능성이 있는 예수라는 자가 자신들의 마을에 직접 왔다고 하니, 그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 자신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자를 치료해 준 사례가 있음을 이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라는 자가 자신들의 병을 반드시 치료할 수 있음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절규에 가깝게 부르짖었습니다. 특히, 나병은 성대를 약하게 하기에,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들을 발견하여, 치료해 주길 간절히 바랬기에, 소리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절규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정작 힘들 때, 고통이 바닥을 칠 때, 우리의 입에서 미사려구의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때의 기도에는 기도 순서도, 단어의 고상함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고통스러움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서 해결받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때의 기도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 나 좀 살려주세요.”입니다. 이보다 자신의 간절함을 더 잘 나타낼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생활이 언제나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날마다, 1년 내내, 일평생 모두 평안하고, 형통하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내 문제,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아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독백은 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아뢰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출발한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응답하십니다.
본문 14 - 16절을 보시면,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즉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5: 12 - 13을 보시면,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손을 대었다고 하는 데, 본문에서는 손은커녕 “치료되었다”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냐.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야.”등 내 고집으로 응답을 받으려 한다면, 응답이 와도 알지 못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구하려고 해경이 왔습니다. “구명대를 잡으세요.”하고는 해경이 구명대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길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입니다”하며, 해경의 구명대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해경이 돌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구조대 헬기가 왔습니다. “줄사다리를 내릴 테니, 잡고 올라오세요.”라며, 줄사다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입니다”하며, 구조대의 줄사다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구조대 헬기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그는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구조해 준 것이 아닙니다. 삶을 마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가 구해달라고 했는데, 왜? 구해주지 않아서 결국, 삶을 마치게 했습니까?”하고는 불평조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의 기도에 응답했다. 해경을 보냈고, 구조대 헬기를 보냈다. 그런데, 네가 받질 않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최선의 방법으로 옵니다. 하나님께 응답이 오면, 좋던 싫던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이 다른 동네에서처럼, 자신들에게 오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심을 고집했더라면,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치료했다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율법에 명시된 것처럼,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라고만 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혼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또, 성도들에게 복과 은혜를 주실 때도, 감나무 밑에 누워, 입만 쩍 벌리고 있듯이,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복과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노력하는 자에게 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한 것은,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순종은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약 1: 6 - 8을 보시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씀에 얼만큼, 어떻게 순종하는지입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힘들지만, 또, 사람들의 눈에 보이면, 위험을 당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제사장에게로 간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와 함께 한 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자, 그 말에, 자신들의 경험, 지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그대로 순종함으로,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묶인 것이 있죠? 풀려야 할 것이 있죠? 그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17 - 19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나병환자 중 사마리아 사람만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제사장으로 가던 중, 자신들에게 있던 불치의 병인 나병이 깨끗이 치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반응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서, 제사장에게 보일려는 유대인들과 되돌아서 예수님께 가서 먼저, 감사를 드리려는 사마리아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과 같은 시대를 지낸 존 라일 목사님은, “감사는 깊은 겸손의 뿌리가 없이는 결코 피어나지 않는 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병이 치료됨을 알고, 자신을 고통 속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로 돌아가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켜 “이 이방인 외에는”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시켜 홍해를 건너게 했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광야 길에서는 만나를 주셨고, 생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옷이 헐지 않았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율법교육이 엄격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 속에는, 그들이 아는 것만큼의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듣는다면서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는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십니다.
동족이지만,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랬기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아팠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해 배은망덕함과 배신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또, 훗날 예수님이 대 제사장 집으로 끌려가 고초를 당할 때, 베드로의 부인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머리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었지, 가슴은 정작 이방인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배은망덕”에 대해 “불어라 불어라 겨울의 찬바람이여, 네 아무리 차다해도 배은망덕보다는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는 유대인의 배은망덕, 교만함이 아닌, 사마리아인의 감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그 사랑, 그 긍휼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지나온 날들 속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그 분의 자취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 날마다, 삶 속에서,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난 주간의 기독공보를 보니, 예수 소망교회의 김명배 전 브라질 대사는, 북한을 가리켜 “감사”와 “은혜”가 없는 곳이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복음이 들어왔고, 가장 큰 부흥성회가 이루어졌던 평양을 비롯하여, 북한 전역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가 없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만 기억하고,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풍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