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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중추부사 신공 신도비(判中樞府事申公神道碑銘)
신하의 노고는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큰 법이다. 길에서 고삐를 잡는 것은 당연한 본분인데, 천자의 사신을 맞이하는 경우에는 식견이 두루 통하고 성의가 간절한 자가 아니면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으니, 이것이 판서 신공이 임진왜란에 호성 공신에 봉해진 까닭이다.
공은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휘는 점(點)이고 자는 성여(聖與)이니,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조부 휘 원(援)은 사직서 영으로, 아들 일곱 명을 두었다. 장남 준미(遵美)는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을 지냈고, 차남 정미(廷美)는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기묘년(1519년, 중종 14)에 드러났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섯째 순미(順美)는 성균관 진사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판서공(判書公,신정미)의 둘째 아들인데, 의정공(議政公신순미)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가정(嘉靖) 경신년(1530년, 중종 2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 보통 아이와 달랐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써 갑자년(1564년, 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명경과(明經科)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전례대로 7품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차례대로 승진하여 예조 좌랑을 지내고, 대성(臺省)을 거쳐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상례(喪禮)는 한결같이 경문(經文)을 따르지만, 대상(大祥)을 치른 뒤에 갓의 제도만은 어떤 이는 참색(黲色)을 쓰고 어떤 이는 흑색을 써서 정해진 법식이 없었다. 공이 길흉의 변화를 절충하고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백포립(白布笠)으로 통용하는 법규를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여 마침내 국법으로 정해졌다.
무신(武臣) 하정(河艇)이 기묘년(1519년, 중종 14)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있을 적에 김식(金湜) 공을 숨겨준 일에 연좌되어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묘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졌으나 하정(河艇)은 그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공이 임금의 앞에서 그의 원통함을 진술하여 복관(復官)되자,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또 강관(講官)을 맡아 경연에서〈육신전(六臣傳)〉의 간행을 주청하자, 임금이 엄한 교지를 내려 남효온(南孝溫)에게 뒤늦게나마 벌을 내리라 하였는데,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구명해 주어서 결국 중지되었다. 그 후에 외직으로 나가 남양(南陽)에 보임되었고, 또 진주 목사(晉州牧使)와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맡아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얼마 후에 통정대부에 올라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발탁되었으며, 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였다. 당론이 한창 횡행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공은 진퇴에 편안하여 조정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기에 십수 년 동안 늘 고을 수령으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묘년(1591년, 선조 24)에 승진하여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얼마 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왜국의 우두머리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외교문서를 보내 반드시 명나라를 침범할 것이라는 말을 하자, 임금이 너무나 놀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아뢰게 하였는데, 명나라에서 가상히 여겨 칭찬하는 칙서를 내렸다. 임금이 또 공을 임시로 참판에 임명하여 연경(燕京, 오늘날의 중국 베이징) 에 가서 사례하게 하니, 왜적의 정황을 자세히 아뢰었다.
연경(燕京)의 관사에서 지내는 몇 개월 동안 공은 멀리에서 나랏일을 염려하여《초씨역림(焦氏易林)》으로 점을 쳤다가 송괘(訟卦)의 점사(占辭)를 얻었는데, “송장이 삼대처럼 늘어질 것이고, 피가 흘러 넘쳐 방패가 떠 다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본국에서 왜국의 침입을 받았다는 보고가 도착하자, 일행이 신묘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부와 예부의 아문에다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는데, 목놓아 눈물을 흘리다 목이 메이고 관복이 다 젖자, 명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신포서(申包胥)가 진(秦)의 조정에서 통곡했던 일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요좌[遼左=요동(遼東)]의 와언(訛言)은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심지어 우리나라가 왜적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입하려고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조정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는데, 오직 병부 상서 석성(石星)만이 구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힘껏 주장하였으니, 이는 공의 성의에 감동했기 때문인데 공에 대한 예우 역시 지극하였다. 공은 밤에도 말을 달려 돌아와 7월에 의주(義州)의 행재소에 도착했다.
임금이 맞이하여 위로하고 즉시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가 우부승지로 바꾸었다. 유격 심유경(沈惟敬)이 빈접사(賓接使)를 보고는 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또 말하기를
“내가 올 적에 석 상서(石尙書)가 ‘조선의 신 참판이 충성과 의리로 남을 감동시켰으니, 그대는 가서 늘 반드시 그와 상의하라.’ 하였소.”
하였다. 유격이 돌아갈 적에 대신 이하가 글을 올려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심 유격이 공에게 별도로 석 상서에게 보낼 글을 요구하니, 임금이 체문(帖文)을 갖추어서 뒤따라 보냈다.
심 유격이 돌아가 보고하자, 조선으로 구원병을 보내는 일이 더욱 굳게 결정되었다. 임금이 하교하여 신 아무개가 연경에 갔을 때 지성으로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무기 역시 많이 사왔으니, 특별히 가자하라고 하였다.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좌부승지로 옮겼다가 곧 병으로 체직되어 호군이 되었으며, 비국의 당상으로 차임되었다가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주사 애유신(艾維新)이 감운 어사(監運御史)가 되어 황제가 내린 군마와 꼴 및 양식을 가지고 왔는데, 평안도가 한창 피폐하여 접대하는 모든 일이 대부분 기일에 맞추지 못하였다. 애 주사가 노여워하여 검사(檢使) 김응남(金應南) 이하를 곤장 쳤고, 성화와 같이 운반을 독촉하였는데, 공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결국 아무 일이 없었다.
애 주사가 행재소에 도착하여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 아무개가 늙고 병든 처지에도 삼가고 조심하니, 왕은 마땅히 예우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명을 내려 가의대부로 가자하고 형조 참의에 임명하였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능을 개수하는 도감의 제조로 차임하였는데, 공역을 마치고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구원병을 청한 공로를 논의하여 정곤수(鄭崐壽)를 제1등으로 삼아 정일품직을 제수하였고, 또 공을 자헌대부로 가자(加資)하였는데, 공이 힘껏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얼마 후에 형조 판서에 올렸다. 심 유격이 왜적과 화친을 약속하자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의 철수를 논의하였는데, 공이 청하여 사은하는 상주문을 고쳐 짓고, 아울러 적의 실정을 아뢰어 황신(黃愼)으로 하여금 가져가게 했다. 또 송 경략[宋經略=송응창(宋應昌)]의 진영으로 나아가 자문(咨文)을 올려 간절히 요청하여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갑오년(1594년, 선조 27)에 낙 총병(駱摠兵) 연접도감 제조로 차임되었고,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접반사가 되었다. 경리가 직책이 바뀌어 돌아갈 때에 중국에서 또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을 보내왔는데, 공이 공조 참판으로 명을 받아 의주로 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가 참람한 예를 썼고, 또 왜적의 요동 침략을 기회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도리어 왜군을 받아들인다고 무고하자, 임금이 놀라고 분하여 합문(閤門)을 닫고 정무를 보지 않았다. 공이 즉시 급사중의 관소에 나아가 국가의 원통함을 통렬히 아뢰자, 급사중이 자문을 보내어 임금으로 하여금 정무를 보게 하였다.
얼마 후에 급사중을 따라 영남으로 내려갔는데, 당시에 도내에 네 차례나 천자의 사신이 행차하여 온 지역이 피폐해져 거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 공이 여러 고을을 검칙하여 필요한 물품을 빠짐없이 제공하게 하였다. 급사중이 이미 오래도록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터라 우리나라의 전말을 잘 알아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우리나라가 다른 마음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고 아뢰어 특별히 조사를 면하였으니, 대체로 모두 공이 힘써 호소하고 변론한 공로였다.
급사중이 임금을 만나 공의 공로를 극구 칭찬하여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하자, 숭정대부로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급사중을 전송하여 의주에 이르자, 또 양 급사(楊給事)를 위문하러 갔다. 공은 이미 칠순이 넘은 몸으로 남북을 다니며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 일 년이 넘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수고를 꺼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임금이 그간의 공로를 생각하여 여러 차례 가자하여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고, 예조 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신축년(1601년, 선조 34) 12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안산(安山) 당정리(當正里) 술향(戌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그 후 갑진년(1604년, 선조 37)에 임금이 중흥한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여 공에게 효충장의 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의 칭호를 소급하여 내리고, 영의정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으로 추증하고 전례대로 겸대하게 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 또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장사랑 자봉(自芃)의 따님으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순일(純一)은 통정대부로 부사를 지냈고, 수일(粹一)은 감찰을 지냈으며, 딸은 판관 정흠(鄭欽)과 정랑 이채(李𦸂)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부사의 아들 율(塛)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흠의 아들 효준(孝俊)은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고,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정직하였으며, 기운과 모습이 강하고 엄격하여 관직에 있을 때와 집안을 다스릴 때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평온함을 위주로 하는데 힘써서 부모의 마음을 순종하여 따랐다.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받들 때에는 정성과 예의를 극진히 하였으며, 늘 묘소에 가서는 애통해하여 슬픔이 옆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친족을 대할 적에는 친소의 구분이 없었고, 궁핍한 이를 구휼하여 곡진한 은혜와 의리가 있었으니, 독실한 집안 행실이 이와 같았다. 사론이 분열된 때를 만나서는 홀로 초연히 자립하여 색목의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한 시대의완인(完人)이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임진년에 사신의 일을 맡았던 것은 애초에 군사를 요청하기 위한 일이 아니었으나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어 제일 먼저 석 상서의 칭찬을 얻고 마침내 대규모 구원병을 불러들였다.
이는 진실로 선조 임금이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서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지만, 만약 국가를 회복한 공적을 논한다면 분주히 다니며 정성을 다하여 상하를 감동시킨 일은 공과 견줄 만한 이가 없으니, 아! 위대하도다. 공의 후손 감(鑑)이 나의 외삼촌 지재(趾齋) 민공(閔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신도비명을 청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의주에서 / 往者龍灣
국가가 환란을 겪을 적에 / 天步艱難
같은 덕을 지닌 신하가/ 有若同德
충성스런 마음 다하였네 / 咸竭忠丹
장절공의 후손으로 / 壯節之後
재주가 있고 기국이 넓었네 / 才練器寬
홀로 사신으로 나가 시를 읊느라 / 專對誦詩
국경을 나가 돌아오지 못했네 / 出疆未還
《초역(焦易)》이 흉한 소식을 알리니 / 焦易報凶
의사는 마음이 철렁하였네 / 義士摧肝
칠 일 동안 곡을 하느라 / 七日之哭
젖은 관복 마를 길 없었네 / 朝衣不乾
여러 아문에 호소하여 / 歷籲衙門
중국 땅에 묻히고자 하였네 / 欲埋燕山
석씨 어른이 감격하여 / 石老感激
천자를 알현하게 해주자 / 天子賜顔
천자의 군대가 구원하러 와서 / 王師出援
파괴된 나라가 회복되었네 / 破域復完
아, 황제의 은혜 / 於戲皇恩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구나 / 天高海漫
그 공로를 논하자면 / 若論其功
누가 공에게 견줄 수 있을까 / 孰與公班
대려(帶礪)의 맹세예전과 같건만 / 帶礪如昔
영락한 후손이 한탄스럽네 / 零替堪嘆
바닷가의 외로운 무덤 / 海上孤墳
구름과 물이 공허하고 쓸쓸하네 / 雲水空寒
내가 그 공적을 기록하노니 / 我銘厥績
후대 사람들이 이를 보리라 / 億代是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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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판중추부사 신공 신도비:
이 글은 신점[申點, 1530년(중종 25)~1601년(선조 34)]의 신도비이다. 신점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汝)이다. 1564
년(명종 19)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을 비롯해 부교리, 부응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일본의 침입 사실을 듣고 명의 요동병(遼東兵) 3천 명을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주02] 육신전(六臣傳):
남효온[南孝溫,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이 지은〈육신전〉을 말한다.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순으로 한 사람씩 전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에 찬(贊)을 붙였다. 각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일화를 곁들이고 있다.
[주03] 초씨역림(焦氏易林):
한(漢)나라 초연수(焦延壽)가《주역》을 바탕으로 쓴 역서(易書)이다. 64괘를 겹쳐 4096개의 변괘(變卦)를 만들어 풀이한다.
《초공역림(焦貢易林)》이라고도 하고《초공역림(焦贛易林)》이라고도 한다.
[주04] 신포서(申包胥)가 …… 일:
춘추 시대 때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명을 받들고 진(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
는데, 진백(秦伯)이 곧바로 허락하지 않자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밤낮을 통곡한 끝에 마침내 구원병을 얻어낸 고사를 말한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주05] 완인(完人):
사화나 당쟁 같은 혼란 속에서도 지조와 목숨을 모두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말한다.
[주06] 같은 …… 신하가:
임금과 생각과 행동을 함께하는 신하를 말한다.《서경》〈태서 중(泰誓中)〉에 “나에게는 정치를 잘 보좌하여 다스리는 신하 열 명
이 있는데, 그들과 나는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7] 대려(帶礪)의 맹세:
공신을 녹훈하는 맹세를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개국 공신들을 봉작했는데, 그 서사(誓詞)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영원히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
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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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判中樞申公神道碑銘。
人臣勞勩。莫大乎國家危難之際。道路執靮。乃其常分。而至於儐接天子之使則非有識慮周通誠意懇至者。莫可能之。此尙書申公所以爲壬辰護聖之功者也。公平山人。諱點字聖與。壯節公崇謙之後。祖諱援。社稷署令。有七丈夫子。長曰遵美賢良科翰林。次曰廷美中司馬兩試。亦著名己卯間。早卒贈吏曹判書。六曰順美成均進士。贈議政府領議政。公判書公之仲子。而議政公子之。公以嘉靖庚申生。幼而雋拔異凡兒。稍長力學。甲子生員。仍以明經擢甲科。例授七品官。序陞禮曹佐郞。歷踐臺省選入玉堂。我國喪禮。一從經文。而惟祥後笠制。或黲或黑無定式。公折衷吉凶之變。參酌情文之宜。請以白布笠爲通行之䂓。上從之。遂成國典。武臣河艇己卯爲金海守。以匿金公湜坐死。至是己卯諸枉已盡昭洗。而艇獨不與焉。公於前席陳其寃而復其官。士論韙之。又以講官筵白請刊行六臣傳。上有嚴旨。命追罪南孝溫。賴盧相國守愼救解事遂寢。後出補南陽。又爲晉州東萊。皆有聲績。尋擢通政吉州牧使。又爲江陵府使。黨論方橫潰。朝著不靖。公恬於進退。不樂在朝。故十數年間常多在郡邑。辛卯進拜江原道觀察使。旣而還朝。翼年倭酋秀吉以書契來。有必犯上國之語。上駭痛。卽遣使具奏于天朝。天朝嘉之。降勑褒美。上又命公假參判銜詣京謝。備陳賊情。留燕舘累月。公遙念國事。以焦易筮之。得訟之繇曰。僵尸如麻。流血漂鹵。未幾本國被兵之報至。一行稱其神。公哀籲請救於兵禮衙門。無晝無夜。聲淚逬咽。朝衣盡濕。華人義之。比諸申包胥秦庭之哭云。時遼左訛言叵測。至謂我國導賊入寇。以故天朝論議不一。惟兵部石尙書星。力主發兵。蓋有感於公之誠意。而其所以禮遇公者亦備至。公星夜馳還。七月到義州行在。上迎見勞慰。卽拜同副承旨轉右副。遊擊沈惟敬見儐使。問公安在。且曰來時石尙書云朝鮮申參判忠義動人。汝往每事必與之相議。遊擊之歸。大臣以下呈文乞救。沈要公別具文於石爺。上命具帖。追付遊擊。歸報東援之議益决。上敎曰申某赴京時。至誠請兵。軍器亦多貿至。特爲加資。陞嘉善階。轉左副。旋以疾遞付護軍。仍差備局堂上。除兵曹參議。艾主事維新爲監運欽賜軍馬芻糧而來。西路方凋弊。接待凡事多不及期。主事發怒。杖檢使金應南以下。仍令星火督運。公竭力周旋。竟得無事。及主事詣行在。請於上曰申某老病謹愼。王宜優禮。命陞嘉義。拜刑曹參議。差宣靖二陵修改都監提調。役竣授本曹參判。上論請兵之功。以鄭崐壽爲第一。除正一品職。且加公資憲。公力辭不獲命。俄陞本曹判書。沈遊擊與賊約和。天朝議將撤兵。公請改撰謝恩之奏。兼陳賊之情實。令黃愼齎去。且進宋經略營下。呈咨懇乞。以感其心。甲午差駱摠兵延接都監提調。丁酉爲楊經理鎬接伴使。及經理革職去。天朝又遣給事中徐觀瀾來。公以工曹判書承命往儐于灣上。丁應泰誣奏我國用僭禮。且因倭犯遼東。欲復舊土。反受兵。上駭憤。閉閤不視事。公卽詣給事舘所。痛陳國寃。給事移咨。使上視事。尋隨下嶺南。時天使四行在道內。一路蕩殘。殆不成樣。公檢勑列邑。供需無闕。給事旣久住于東。備諳東事顚末。累上本陳本國保無他。特免査勘。大率皆公宣力籲辨之功也。給事見上盛稱公勞勤可賞。命加崇政。送給事至灣上。又問慰楊給事之行。公年已躋七袠。而儐役南北。經年跋涉。不憚勞悴。人以爲難。上念公前後勤勩。累加階至輔國崇祿。歷禮曹判書,判中樞府事兼判義禁府。辛丑十二月七日卒。壽七十二。葬于安山當正里戌向之原。後甲辰上大封中興功臣。追賜公效忠仗義協力宣武號。贈領議政平城府院君。兼帶如例。至肅宗朝又贈諡忠景。配貞敬夫人高靈朴氏。將仕郞自芃之女。生二男二女。男純一通政府使。粹一監察。女適判官鄭欽,正郞李𦸂。內外孫曾以下不能盡載。而府使男塛文科。鄭子孝俊知敦寧有五子皆文科。公天姿俊正。氣貌剛嚴。居官理家。人皆敬憚。而至其事親之節則務主怡愉。順適其心。居喪奉祭。克盡誠禮。每上墓號慟。哀動傍人。待宗黨。無間疎戚。周恤窮乏。曲有恩義。其篤於內行如此。當士論分裂之際。獨能超然自立。不入於色目之中。世以一代完人歸之。立朝一以忘身殉國自期。壬辰專對之行。初非乞師。而倉卒聞變。血泣叫號。首蒙尙書之矜賞。遂致大兵之出援。是固宣廟至誠事大。有以孚格天心。而若論恢復之績則其奔奏殫竭。感動上下。未有與公比者。嗚呼偉哉。其後孫鑑。以舅氏趾齋閔公所撰狀來示縡。仍請樹墓之文。不敢辭。銘曰。
往者龍灣。天步艱難。有若同德。咸竭忠丹。壯節之後。才練器寬。專對誦詩。出疆未還。焦易報凶。義士摧肝。七日之哭。
朝衣不乾。歷籲衙門。欲埋燕山。石老感激。天子賜顔。王師出援。破域復完。於戲皇恩。天高海漫。若論其功。孰與公班。
帶礪如昔。零替堪嘆。海上孤墳。雲水空寒。我銘厥績。億代是觀。<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