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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필(宋翼弼)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송자대전 제172권 / 묘갈명(墓碣銘)
구봉 선생(龜峯先生) 송공(宋公) 묘갈(墓碣)
지난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나에게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이 율곡 이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게 되었는데, 그가 관건(關鍵)을 열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 준 분이 구봉선생(龜峯先生)이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오. 선생의 문하에서 상당수에 달하는 명현(名賢)ㆍ거공(巨公)이 배출되었는데도 선생이 세상을 뜬 후 70여 년이 되도록 묘도에 비갈이 없으니, 아마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하였다.
나도 일단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원위(源委)를 캐 보았더니 자손들이 미약하여 겨우 있는 정도일 뿐 그 원위를 캐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얼마 후 동춘마저 세상을 뜨고 말아 그 일을 함께 추진할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선(李選 이택지(李擇之))이 바로 김 선생의 외증손(外曾孫)으로서 일찍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조야(朝野)의 기록을 모두 들춘 끝에 사실의 자초지종과 제공들이 자세히 논의해 놓은 것까지를 다 찾아내어, 한 통의 장문(狀文)을 써 가지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옛날 홍경로(洪景盧)가 전대(前代) 사람이 저술하지 못하였던 것을 저술하여 도술(道術)의 원류(源流)를 밝혔던바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熹)를 말함)이 말하기를, “사기를 기록한 사람은 이러한 일에 공로가 있다.”하였는데, 지금 택지가 아마 그러한 사람이리라.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이루게 될 것인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성은 송(宋)씨요, 휘는 익필(翼弼)이며, 자는 운장(雲長)인데 집이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아래 있어 그곳에서 학자들을 교수하였으므로 학자들이 구봉 선생이라 칭하였고 그의 친구들도 구봉이라고 불렀다.
그의 선대는 여산인(礪山人)인데, 현조(顯祖)로는 고려의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가 있으며, 그후로는 미진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조부 인(璘)이 처음으로 잡직(雜職)의 직장(直長)이 되었고, 아버지 사련(祀連)은 위계가 통정(通政)이었는데 그 사실이 율곡 선생이 쓴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사련이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선생은 셋째 아들이었다. 나이 7, 8세 때 이미 시(詩)에 소질을 보여 ‘산속의 초가지붕에 달빛이 흩어지네.’란 시구를 읊었고, 조금 자라서는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높은 성적으로 발해(發解 향시(鄕試)에 합격한 것을 말함)되어 그때부터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제일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는 이산해(李山海)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최립(崔岦)ㆍ이순인(李純仁)ㆍ윤탁연(尹卓然)ㆍ하응림(河應臨) 등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팔문장(八文章)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과거 이외에 달리 마음 써야 할 곳이 있음을 알고 성리(性理)에 관한 모든 서적을 가져다 밤낮으로 읽고 연구하였는데,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서도 이해하였다.
문(文)은 좌씨(左氏 좌구명(左丘明)ㆍ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의 문을 주장하고, 시(詩)는 이씨(李氏 이백(李白)ㆍ백씨(白氏 백거이(白居易))의 시를 주장하였으며, 이치를 논설함에 있어서는 이론이 투철하여 조금도 막히는 데가 없었다.
배우러 온 학자들이 종일 그칠 사이가 없었지만 응대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중에는 아는 것 없이 왔다가 많은 것을 알고 돌아간 자들이 매우 많았고, 율곡 이 선생ㆍ우계 성 선생도 그에게 학술(學術)이 있음을 알고 마음으로 깊이 사귀어 의리(義理)를 변론하면서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선생이 한번은 과장(科場)에 들어가 천도책(天道策)을 보고 찾아와 묻는 거자(擧子)에게 말하기를,
“송운장(宋雲長 송익필(宋翼弼))이 고명(高明)하고 아는 것이 넉넉하니, 그에게 가 묻는 것이 옳다.”
하여 장옥에 있는 거자들이 물결처럼 몰려갔다.
선생은 그들을 좌우로 수응(酬應)하여 묻는 대로 대답하니 그 많은 거자들이 서로 돌려 가며 베꼈는데, 그것은 과거 시험에만 응용되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자신이 고도(古道)를 지키는 입장에 서서 제아무리 공경(公卿)ㆍ귀인(貴人)이라도 이미 그와 허교를 했을 경우 모두 대등한 위치에서 대하였고, 호칭도 그들의 자(字)를 부르고 관직으로 부르지 않았으므로 욕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에 율곡 선생이 군소(群小)들의 미움을 사 그들이 소성(紹聖)시대보다 더 모함하였는데, 때마침 성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으므로 글을 올려 누가 옳고 그른가를 소명(昭明)하려다가 ‘산야(山野)에 묻힌 사람으로서는 언제나 염퇴(斂退)하는 것이 의리인데 갑자기 이때 와서 시사(時事)를 극론하는 것은 아마도 어묵(語默)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있는데, 선생이 서신을 보내 권하기를, “존형(尊兄)이 성주(聖主)의 인정을 받고 이미 조정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사람으로 자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선과 악이 판가름이 나게 되는 이때 왜 분명히 선(善)을 주장하여 공의(公議)가 펴지게 하지 못하십니까.”하였다. 성 선생은 그의 말을 따랐고, 상도 간사한 무리들이 어진 이를 시기하고 있는 정상을 깊이 알아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성 선생은 크게 헐뜯김을 당했고, 선생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드디어 그들로 하여금 보복을 꾀하는 마음을 먹게 하였던 것이다. 마침 이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이 선생을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하려 하였는데 선생이 그 소본(疏本)을 기초(起草)하였다.
그러자 군소배들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어 다투어 선생을 해치려 하였으나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의 자손들을 부추겨 ‘선생의 조모가 원래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는데, 천적(賤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안당 가족을 멸살시킨 것이다.’라는 구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은 정민공의 숙부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여종이 있었는데 정민공의 아버지 사예공(司藝公) 돈후(敦厚)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다. 그런데 그 딸이 바로 선생의 조모로서 사련(祀連)을 낳았고, 천문학(天文學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었는데, 안씨 자손들의 주장은 사련의 어머니가 사예공의 딸이 아니라 바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양녀(良女)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산해(李山海)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오늘의 화근을 아는가? 이게 모두 그 원인이 율곡에게 있는 것이네. 그대가 만약 남들을 따라 율곡을 헐뜯는다면 화를 면할 것이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비록 죽을지라도 어떻게 차마 그 짓을 하겠습니까.”하였다.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키자 선생은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닥칠 것을 알고 형제가 모두 피신하였고, 이산해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 제공과 함께 서로 감싸 주었다. 그러나 그때 산해는 시배(時輩)들에게 붙어 있었고 또 권신들과 결탁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굳히려고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시를 읊어 조롱하였는데, 그 시 속에 ‘여지(荔枝)ㆍ연리(連理)’ 등의 말이 있어 산해의 뜻을 크게 거슬렸다. 또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율곡ㆍ우계의 억울함을 끝까지 밝히면서 시배들을 기척(譏斥)했으므로 산해는 더욱 앙심을 품고 드디어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 말이 대궐 안에 들어가게 하였다.
하루는 상이 형조(刑曹)에 하교하기를,
“사노(私奴) 송모(宋某) 형제가 조정에 원한을 품고 일을 저지르려 하는데 조헌이 소를 올린 것도 그 자가 부추긴 것이 분명하다. 매우 통탄할 일이니 잡아들여 엄히 다스리라.”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옥(獄)에 나아가 아우 한필과 함께 극변(極邊)으로 정배되었다. 한필 역시 시에 능하고 의론(議論)을 좋아하여 남에게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귀양살이 하던 희천(煕川)에서 적을 피하여 명문산(明文山) 속으로 들어갔다가 계사년에 사면을 받았다. 그 고을에 김한훤당(金寒暄堂 김굉필(金宏弼)ㆍ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두 선생의 사당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분들이 화를 입었던 당시를 회상하고 감개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려 자신의 뜻을 나타낸 후 돌아왔다.
그때부터 선생은 온 집안이 근거를 잃었고 또 시배들이 안씨들을 종용하여 마지않으므로 비록 임금이 억울한 정상을 알게 되었는데도 선생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처세에 조심을 다하였다. 그러나 친구와 문인들은 서로 다투어 처소를 제공하였고 학도들은 쉴새없이 몰려들었다.
한번은 면천(沔川) 사는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성 선생이 서신을 보내오기를,
“주인은 인자하고 어질며 후생들은 모두 따르는데, 늘그막까지 떠돌다가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도 다행이오.”하였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32) 8월 8일, 면천 우사(寓舍)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마치니 문인들이 당진(唐津) 북녘 원당동(元堂洞)에 장례를 모셨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선생보다 먼저 죽었는데 묘는 같은 곳에 있다. 아들 취방(就方)과 서출(庶出)인 취대(就大)ㆍ취실(就實)이 있다.
선생은 높은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처음에는 문지(門地)에 구애를 받고 중년에는 세상에서 번거로움을 당하다가, 끝내 성우계ㆍ이율곡 두 선생 사건에 연루되어 사방을 떠돌며 갖은 곤욕을 다 겪고서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오직 의리를 강명(講明)하여 자기 자신을 닦았고, 또 그것을 후세에까지 전함으로써 지금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의 학문이 세상의 으뜸이 되고 있으니, 선생은 사문(斯文)에 간접적으로 큰 공을 남겼다 하겠다.
그 밖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성취(成就)된 사람들로서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ㆍ수몽(守夢) 정엽(鄭曄)ㆍ약봉(藥峯) 서성(徐渻)ㆍ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ㆍ감사(監司) 강찬(姜澯)ㆍ처사(處士) 허우(許雨)ㆍ참판(參判) 김반(金槃) 같은 이들이 혹은 도학(道學)으로 혹은 환업(宦業)으로써 후생들에게 도를 전하거나 나라를 돕고 있으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선고(先考)인 군수 이창(爾昌)도 선생에게 수학한 나머지 동춘을 가르쳐 결국 명유(名儒)가 되었으니, 선생의 육신은 비록 세상에서 시달림을 받았지만 그의 도(道)는 빛을 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제공들이 선생에 대하여 논술(論述)한 것을 살펴보면 중봉(重峯)은 말하기를,
“늙도록 학문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성우계ㆍ이율곡 두 선생이 다 외우(畏友)로 대하였고, 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대를 잘 일깨우고 분발시켜 느껴서 뜻을 세우게 하였다.” 하고는, 자기 관급(官級)을 모두 바쳐서라도 그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싶다고까지 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말하기를,
“천지의 이치를 가슴속에 간직하였으니, 공자ㆍ맹자의 도(道)도 진실로 멀지 않았다.”
하였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말하기를,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文章) 또한 절묘했다.”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투철하고 영리하여, 정미(精微)한 이치를 분석 정리하였다.”
하였고, 고청(孤靑) 서기(徐起)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알고 싶으면 송구봉을 보면 될 것이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과 비슷했으리라 여긴다.”하였다.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이 매양 자기 형 영원군(寧原君) 가신(可臣)에게 충고하기를,
“형은 무엇 때문에 송모와 가까이 지내십니까? 내가 그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습니다.”
하니, 영원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송모를 모욕할 수 있겠느냐. 필시 못할 것이다.”하였다.
그후 그가 선생을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고 맞아들였는데 ‘내가 절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꿇어지더라.’ 하였다 한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어렸을 때 자부심이 강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했는데, 어느 날 절에서 우연히 선생을 만나고는 자기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선생의 말에 심취(心醉)되어 오래도록 떠날 줄을 몰랐다.
그가 결국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장상(將相)을 겸하게 되었을 때 말하기를,
“나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구봉에게서 직접 받은 영향력 때문이다.”하였다.
당시 선생에 대한 이러한 말들이 이루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상 몇 가지 말만 보더라도 선생의 대략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선생은 포부가 크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여 세상을 바로잡는 데 뜻을 두었다. 언젠가 김 선생이 말하기를,
“재앙을 부르는 실마리가 될까 염려됩니다.”하였으나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종2)에 김 선생이 수몽(守夢) 정엽(鄭曄)과 함께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등이 어렸을 때 송익필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익필의 문장과 학식이 당대에 당할 이가 없었고, 이이ㆍ성혼과는 서로 강마(講磨)하는 사이였습니다.
이이가 죽고 난 후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의 무리가 이이ㆍ성혼을 미워한 나머지 그 여파가 익필에게까지 미쳐 꼭 사지(死地)에다 몰아넣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갑(甲)에게 품은 화를 을(乙)에게 분풀이 하는 것치고는 너무 심한 일이었습니다.
사련(祀連)의 어미는 이미 양민이 되었고 사련 또한 잡과(雜科) 출신(出身)이어서 2대가 양역(良役)일 뿐 아니라 연한(年限)이 지난 사람은 도로 천민(賤民)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발 등이 사련이 상변(上變)한 것을 안씨 자손들의 큰 원수로 삼아 기회를 타 사주하여 법을 무시하고 다시 천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송관(訟官)이 혹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 이발 등이 즉시 논박하여 송관을 두 번 세 번 갈아 내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뜻대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련이 비록 선류(善類)에게 죄를 얻었고, 또 익필이 비록 대중에게 미움받는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시의 사분(私憤)을 가지고 조종조 금석(金石) 같은 법을 어기면서 자기 마음을 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다시 개석(開釋)의 실마리를 열어 놓으셨으나 익필은 곧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해와 달이 다시 밝아 당시의 억울했던 일들이 모두 펴졌는데도 유독 죽은 이 스승의 억울함만은 펴지지 않아 아직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그 스승은 살아서 성주(聖主)의 지우를 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또 천례(賤隷)의 이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신 등만의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국법(國法)이 한번 무너지면 말류(末流)를 막기 어려운 것이어서 식자(識者)들로서는 그것을 깊이 염려하고 또 탄식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문집(文集) 몇 권이 세상에 간행(刊行)되고 있는데, 신상촌(申象村)이 일찍이 평론하기를,
“그 소재는 성당(盛唐)에서 따 왔기에 그 음향이 맑고, 그 의의는 격양(擊壤)에서 취했기에 그 말이 정연하다.
나그네의 궁색함과 귀양살이 속에서도 화평하고 관박(寬博)한 정취를 잃지 않았고, 풍화(風花)ㆍ설월(雪月)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으니, 때에 편안하고 순리대로 살아 애락(哀樂)에 동요되지 않을 만한 이였다 하겠다.”하였다.
또 《현승집(玄繩集)》 한 편이 있는데 그것은 이율곡ㆍ성우계 두 선생과 주고받은 서(書)를 모은 책이다.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일찍이 논하기를, “율곡의 말은 솔직 평탄하고 우계의 말은 따스하고 공손하며 자세한 데 비하여 구봉은 의지와 기상이 높고 깨끗하며 자기 자신을 매우 무겁게 다루었기에 그 말이 조리가 있고 그의 학문도 해박하였다.”하고, 또 말하기를,
“그의 의론(議論)을 보면 그 늙은이의 가슴속이 그렇게 초초(草草)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시문(詩文)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 됨됨이까지 알 수 있다.”하였다.
내가 동춘(同春)과 함께 오랫동안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있으면서 선생의 언행(言行)에 대하여 익히 듣고 보았다. 그 선생에 대하여 지적할 만한 흠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안 되겠지만 만약 일부러 흠을 꼬치꼬치 찾아내어 이발ㆍ백유양의 무고에 동조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한 이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성 선생이 평소 선생에 대하여 전혀 불만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춘추(春秋)》의, 현자(賢者)를 책비(責備)하는 뜻이었으니, 이에서 선생이 더욱 높고 위대했음을 볼 수 있다. 평소 노선생이 말하던 것으로 보면 뜻이 우주(宇宙)를 감싸고 용기가 고금(古今)을 덮는 것이 바로 선생의 마음이었고 세세한 일에는 다소 소홀했던 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선생이 재주가 높고 학식이 해박하며 세상일에 능숙하여, 선생 생각에는 이것이면 성현(聖賢)의 문정(門庭)에 들어갈 수 있고 또 황왕(皇王) 사업도 할 수 있으리라 여겨 근본을 함양(涵養)하는 공부에는 다소 등한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 선생에 대하여 혹 비슷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끝>
[註解]
[주01] 홍경로(洪景盧) :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이다. 이름은 매(邁), 경로(景盧)는 그의 자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사기법어(史
記法語)》ㆍ《남조사정어(南朝史精語)》ㆍ《경자법어(經子法語)》ㆍ《야처유고(野處類稿)》ㆍ《이견지(夷堅志)》ㆍ《용재수필(容
齋隨筆)》 등이 역저로 평가되고 있다.
[주02] 거자(擧子) : 향시(鄕試)에 급제하고 다시 중앙에서 치르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사람이다. 전하여 과거 볼 자격이 있는 자를 말한
다. 거인(擧人)이다.
[주03] 소성(紹聖)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이다. 철종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 고씨(高氏)가 함께 청정(聽
政)하면서 사마광(司馬光)ㆍ여공저(呂公著) 등을 탁용하여 왕안석(王安石)이 행하던 신법(新法)을 모두 혁파하였다.
그 뒤 고황후가 죽고 제(帝)가 친정(親政)하면서는 장돈(章惇)ㆍ여혜경(呂惠卿) 등을 기용하고 신법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붕당(朋黨)의 화가 생겨났다.
[주04] 성당(盛唐) : 중국의 당(唐) 나라가 융성했던 시기이다. 당(唐)의 시체(詩體)를 논할 때 대체로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중당(中
唐)ㆍ만당(晩唐)의 4기로 나누는데 성당은 서기 712년인 현종(玄宗) 원년부터 대종(代宗) 초기까지의 약 55년 동안을 말한다.
[주05] 격양(擊壤) : 송(宋)의 소옹(邵雍)이 지은 《격양집(擊壤集)》을 말하는데, 시법(詩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논리(論理)를 근본으
로 삼고 수사(修詞)를 끝으로 다루었다.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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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龜峯先生宋公墓碣
曩同春宋公浚吉謂余曰。文元公金先生師事栗谷李先生。以至道成德尊。然考其抽關啓鍵。導迪於一簣之初。則自龜峯先生不可誣也。然其門下名賢巨公。不爲不多。而沒世七十餘年。墓道無刻。豈有待於吾儕耶。余諾其文而欲考其源委。則其子孫僅有存者。而亦不足徵也。旣而同春又沒。則無與成其事者矣。今刑曹參議李選擇之。卽金先生外曾孫也。嘗爲史官。遍考朝野載籍。仍得以悉其事之本末及諸公議論之詳。遂爲狀文一通以示余。昔洪景盧爲作前人所未作者。以明道術源流。則朱先生以爲作史者於此爲有功矣。擇之抑其人乎。諸老先生所未遑者。將有成乎。謹按先生姓宋。諱翼弼。字雲長。家在高陽龜峯山下。敎授學者。故學者稱以龜峯先生。其知舊亦以龜峯稱焉。其先出自礪山。其顯者高麗貞烈公松禮也。其後微弊不振。祖璘始爲雜職直長。父祀連受通政階。事載栗谷先生所撰安貞愍墓碑。娶延日鄭氏女。生四子。先生其第三也。年七八歲。詩思淸越。有山家茅屋月參差之句。稍長。與弟翰弼俱發解高等。自是聲名著聞。首與友善而推許者。李山海,崔慶昌,白光勳,崔岦,李純仁,尹卓然,河應臨也。時人號爲八文章。然先生知科擧之外有用心處。遂取性理諸書。日夕講討。不由師承。刃解氷釋。其文主於左馬氏。詩主於李白。至其論說理致。則通透洒落。無所礙滯。學者帖帖於前者。終日不絶。而酬酢不倦。其中虛往實歸者甚多。栗谷李先生,牛溪成先生知其有學術。投分相交。論辨義理。切磨甚篤。李先生嘗入場屋。對天道策。謂擧子來問者曰。宋雲長高明博洽。宜就而問之。於是擧場奔波。先生左酬右應。愈扣而愈無窮。擧子轉相傳錄。不但爲取應之具也。先生以古道自處。雖公卿貴人。旣與之友。則皆與抗禮。字而不官。人多竊罵。而亦不以爲意也。嘉靖癸未。栗谷先生慍于群小。其所構誣。甚於紹聖之世矣。成先生適被 召至京。欲上章以明淑慝之辨。而又慮山野之人。常以退爲義。忽於此時極論時事。無乃非語默之道耶。先生以書勸之曰。尊兄受聖主知遇。旣陟朝端。則不可以不出自處矣。何不於陰陽消長之際。明言善議。使公議得伸耶。成先生從其言。上益知讒邪媢嫉之狀。明示好惡之典。於是成先生大被詆毀。而於先生愈甚。遂謀所以報之者。會李先生遽棄後學。延平李公貴欲爲李先生訟冤。先生爲草疏本。於是群憾益怒。爭欲甘心於先生而無言可執。遂嗾安貞愍子孫。謂先生祖母本安氏家婢。欲還其賤籍而滅其家。蓋貞愍公叔父監司寬厚有婢。侍貞愍考司藝公敦厚而生女。是爲先生祖母。生祀連而屬天文學。安氏子孫謂祀連之母。非司藝女。卽前夫所生而未良者也。李山海謂先生曰。君知今日之禍乎。祟在栗谷。若隨衆訾謗則免矣。先生曰。雖死何忍。安氏旣起訟。先生知禍且不測。遂與兄弟避仇。山海與鄭松江澈諸公互相保納。時山海附於時輩。又結奧援以固寵。先生嘗作詩以譏之。詩中有荔枝連理等語。大忤山海。又重峯趙文烈公憲。上疏力辨栗谷,牛溪之誣而譏斥時輩。山海益銜之。遂有飛語入內。一日上下于刑曹曰。私奴宋某兄弟畜怨朝廷。期必生事。趙憲陳疏。無非此人指嗾。此極痛惋。捉囚窮推。先生遂自就理。與其弟翰弼俱竄極邊。蓋翰弼亦能詩好議論。多怨於人也。壬辰倭變。先生自煕川謫所。避賊明文山中。癸巳蒙宥。郡有寒暄,靜菴兩先生祠。先生感慨當日遭罹。爲文以祭。以見其志而歸。自是先生擧家失所。又時輩慫慂安氏不已。先生雖蒙上意覺察冤狀。猶畏約懾處。知舊門人。爭相館待。學徒坌集。嘗寓沔川金僉樞進礪家。成先生寄書曰。主人仁賢。後生向風。晩暮漂泊。得此於人。可謂幸矣。萬曆己亥八月八日。卒于沔川寓舍。壽六十六。門人會葬于唐津治北元堂洞。其配昌寧成氏前卒而同原。子就方。側出就大,就實。先生以高才邃學。始拘於門地。中被世累。終爲成,李兩賢之株連。流離厄窮以沒其世。可勝惜哉。惟其講明理致以修其身。且以傳之來世。今金先生之學。爲世所宗。則先生之於斯文。亦可謂與有功焉。其餘開導成就者。如金文敬公集,守夢鄭公曄,藥峯徐公渻,畸翁鄭公弘溟,監司姜公澯,許處士雨,參判金公槃。或以道學。或以宦業。傳道後生。輔毗王家。同春之先考郡守爾昌。亦受學於先生。以斅同春。卒爲名儒。則先生之身。雖困於世。而其道則不可謂不有光矣。若考於諸公論述。則重峯以爲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足蓋父愆。故成李兩賢。皆作畏友。且其敎誨。善於開發。使人感奮有立云。而至願納其官級。以雪其冤。李土亭之菡則曰。玄黃方寸間。鄒魯亶非迥。象村申公欽則曰。天稟甚高。文章亦妙。澤堂李公植則曰。天資透悟。剖析精微。徐孤靑起謂其學者曰。爾輩欲知諸葛孔明乎。惟見宋龜峯可也。仍曰。吾以爲諸葛似龜峯也。洪參議慶臣每諫其兄寧原君可臣曰。兄何爲與宋某友乎。吾見宋某必辱之。寧原笑曰。爾果辱宋某乎。必不能也。其後見先生。至不覺降階迎拜。曰非我拜也。膝自屈也。昇平金相公瑬少自負。不肯下人。一日邂逅先生於山寺。爲撤其業。日聽其言議。久不能去。及其成大勳業。身都將相。謂曰吾之得至今日。繄當日親炙於龜峯之力也。一時稱道。不可勝記。而於此數者。足以知其大略也。惟是抱負旣大。自任甚重。頗有志於世道。金先生蓋嘗微諷曰。恐爲厲階。先生不以爲然。天啓甲子。金先生與鄭守夢上疏略曰。臣等少從宋翼弼受學。翼弼文章學識。超絶一世。與李珥,成渾爲講磨之交。李珥旣沒。李潑,惟讓輩。仇嫉珥,渾。延及翼弼。必欲置之死地而後已。可謂怒甲移乙之甚者也。翼弼之父祀連。乃故相安瑭孼妹之子也。祀連之母。旣已從良。祀連又雜科出身。連二代良役。且過年限者。不得還賤。昭載法典。而潑等以祀連上變。爲安家子孫之大讎。乘機指嗾。蔑法還賤。其時訟官或爲守法之論。則潑等輒駁遞之。至再至三而後。始得行其志。祀連雖得罪善類。翼弼雖犯衆怒。豈可以一時之私憤。而屈 祖宗金石之典。以快其心哉。肆我宣祖大王復發開釋之端。而翼弼尋亦淪亡。至于今日。日月重明。幽枉畢伸。而獨此亡師之冤。尙不暝目於泉下。噫。亡師生未爲聖主之知。死不免賤隷之名。此豈但臣等隱痛於心。國法一壞。末流難防。此亦識者之深慮永歎者也。先生有文集若干刊行於世。象村嘗評之曰。材取盛唐。故其響淸。義取擊壤。故其辭理。和平寬博之旨。不失於羈窮流竄之際。優游涵泳之樂。自適於風花雪月之間。其庶乎安時處順。哀樂不能入者矣。又有玄繩集一編。所與李,成二先生往復書也。谿谷張公維嘗論之曰。栗谷之言。眞率坦夷。牛溪之言。溫恭懇到。而龜峯則意象峻潔。自待甚重。其言辨矣。其學博矣。又曰。觀此議論。此老胸中。殊不草草。此不但可知其詩文。而亦可以知其爲人矣。余與同春久在老先生門下。得聞先生言行熟矣。其以先生爲無一疵可指者。固失於稱停。而若乃吹毛索瘢。以助潑,讓之誣者。亦非平心之論也。成先生平日。固不無不滿之意。而此則春秋責賢者備之義也。益見先生之高且大也。蓋嘗以老先生所言而論之。則志大宇宙。勇邁今古者。實先生之所心。而其於細密隱微。不能無疏脫者。豈先生才高識博。鍊達世務。謂此足以入得聖賢門庭。做得皇王事業。而或少涵養本源之功耶。以是權度。則其於先生。或庶幾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