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봉실기(八峯實紀)
[저자] 29世 이희복(李希福)
[세계] 익재 이제현의 후손
[영천 입향] 이희복의 아버지 이응백(李應伯)이 임진외란전에 영천 고경면으로 입향했다.
[간행] 이상밀(李相密)
[내용] 李希福,1562(明宗 17)-1592(宣祖 25)의 실기(實紀)를 엮은 책.
[향년] 30세
[서(序)] 重光赤奮若(1961)...權五燮: 庚子(1960)...李宗基
[발(跋)] 辛丑(1961)... 孫 宗熙 相密
[간기(刊記(推定)] (墓誌銘),...[1592士辰]검送于本家: (跋)...무所以石卽...始出~於四百年 ...辛丑(1961)
[간행연대] 1961년
[책수] 2권 1책 석판본
[크기] 28.8㎝ x 19.1㎝
"임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영천(永川) 출신 이희복『李希福, 1562(明宗 17)~1592(宣祖 25)』의 實紀이다. 이호대(李好大)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이희복(李希福)의 後孫 李致雨가 先祖의 事蹟이 행장 1편으로 미비하자, 여러 사료를 조사하고 家藏했던 기록들을 수집하여 1961년에 實紀 1책을 만들었다 한다.
한편 이 책의 行狀과 遺事 등에 의하면, 이희복의 本貫은 月城, 자는 而聖, 호는 八峰이며 아버지는 응백(應伯)이다.
어려서 역사책을 즐겨보다가 남제운(南霽雲)의 忠義 古事를 보고 감동되어, 붓을 던지고 弓馬를 익혀 1592년 별시 무과에 합격하였다.
여름에 왜구가 永川 열읍에 쳐들어오자 의병을 모집, 綾城과 架山 사이에 진을 치고 왜적을 방어하였다.
후일 權應銖가 永川城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남쪽에 진을 치고 왜적의 食水가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火攻으로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니 이희복의 전략이었다. 그는 이 공으로 沃川郡守를 제수받았으나, 곧이어 權應銖와 함께 雞淵을 공격하다가 순국하였다.
실기의 구성은 먼저 權五燮(1961년), 李宗基(1960년)의 序文 2편이 있으며, 권1에는 ≪永川郡誌≫ ≪永川會盟錄≫ ≪永川倡義會盟錄≫ 등의 史籍에서 이희복의 순국 사실을 抄錄하고, 이어서 이희복의 <遺事><行狀><傳><墓誌銘> <墓碣銘>및 이희복을 모신 旌忠閣 관련 기록(告由文·碑銘 ·記文 등)을 수록하였다.
권1 마지막에 유생들이 올린 狀文 몇 편이 있는데, 이희복의 忠節을 기리자고 청하는 내용이다. 권2는 <旌忠閣詩>로 孫啓東의 시 등 여러 사람이 이희복의 忠誠을 추모하여 읊은 100수의 시가 수록되었다. 말미에 발문 수편(李好大, 李宗熙, 李相密 등 撰)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김 호)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절한 李希福(1562-1592)의 事蹟을 기록한 책이다.
이희복의 字는 而聖‚ 號는 八峯이다. 永川城을 탈환하고 兵馬虞侯가 되었던 권응수(權應銖)의 막하(幕下)에서 활동하였으며 1604년 宣武三等功臣에 봉하여졌다. 이희복이 순절한 후부인인 동래 鄭氏도 목숨을 끊었다. 영조대와 1832년 경에 거듭 褒典을 베풀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에 실기로 만들어져 가전되던 것을 1961년 간행한 것이다. 卷首에 權五燮과 李宗基의 서문이 있다.
권1에는 <永川郡誌>‚ <永川會盟錄>‚ <永川倡義會盟錄>‚ <西岳同苦錄> 등 영천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것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과‚ <遺事>‚ <行狀>(1636년‚ 李顯英 撰)‚ <傳>(鄭煥國 撰)‚ <墓誌銘>(辛檍‚ 金榥)‚ <旌忠閣開基時告由文>‚ <旌忠閣梁頌>‚ <旌忠閣記>‚ <呈狀文>(道儒狀‚ 鄕儒狀‚ 子孫狀) 등이 있다. 권2에는 <旌忠閣詩>와 <倡義韻>이 있다. 卷末에 李好大‚ 李宗熙‚ 李相岱의 跋文이 있다.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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