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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미인대회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아름답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미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영광일 것이다.
미인의 조건은 일정하지 않으나 예로부터 미인이라고 평가받는
여성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유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라마다 미인을 뽑는 행사가 보편화되었고, 세계의 미인을 뽑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는 지구상의 모든 여성들의 가슴을 숨막히도록
설레게 하는 행사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우리나라 초창기 미인 선발은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유발을
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도 않았다.
1930년 파인 김동환은 그가 창간한 월간 잡지 삼천리에 사진을
통한 미인 선발을 시작하였다.
첫 미인으로 뽑힌 여성은 최정희였는데, 이 사실이 발표되자 삼천리 잡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1940년 8월 일본의 여성 잡지인 모던니뽄이 일본 황제(皇紀)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여성을 대상으로 미스 조선(Miss 朝鮮)을
선발한 바 있었다. 전남 목포의 정명여고를 졸업한 열 아홉살
김영애가 이 대회에 응모하여 미스 조선으로 선발되었다.
김영애는 그 후 화가 문재덕 씨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6·25때 남편이 납북되는 바람에 홀몸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1949년 월간 잡지 신태양은 인기투표로 미스 대한
(Miss 大韓)을 선발한다는 대대적인 광고를 낸 바 있었다.
응모 방법은 1차로 사진을 찍어 보내는 일이었다.
아름다움에 자신있다고 생각한 여성 47명이 사진을 보내왔다.
응모자의 대부분은 세일러복의 여학생들이었다.
사진의 모습도 다양했다.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한복 차림, 양장 옷에 고무신 차림, 댕기 머리,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파마 머리, 볼품없이 양 다리를 벌리고 찍은 사진, 뒷 배경만 살리느라고 정작 자신의
모습은 좁쌀보다 작게 찍어 보내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사진들은 커다랗게 확대하여 덕수궁 뜰에 진열되었다.
이 진풍경을 보러 온 관람객들이 종이 한 장씩이 전해졌다.
사진을 다 보고 나서 그 중 제일 예쁜 미인 한명만을 골라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비심사에 통과한 미인은 8명이었다. 주최측인 신태양 잡지사는 8명만을 놓고 미스 대한을 뽑는다는 것은 행사가 초라하고 자칫하면 웃음거리밖에 안된다며 전 사원들한테 인근 다방과 요정
출입하여 본선에 진출할만한 후보 미인들을 물색해 오도록 했다.
이런 야단법석 끝에 본선에서 심사할 후보 미인은 20명으로 늘어
나게 되었다. 그런데 본선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심사석에 앉기도 전에 뒤로 나자빠질뻔 했다. 다방과 요정에서 모셔오다시피 한 본선 진출 후보 미인들이 심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담배를 꼬나물지를 않나, 허벅지가 다 드러날 정도로 치마며 양장을 걷어 올리고 다리를 꼬지
않나, 차마 맨 눈으로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미스 대한으로는 명동의 다방 마담인 임현숙이 뽑혔다.
임현숙은 그 후 영화배우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말이 미인 선발대회이지, 미인 대회의 본질을 살렸다거나 대외적으로 평가 받을만한 성격의 미인대회였다고 말하기에는 꽤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미인선발 대회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 5월의 제1회 여성경염대회때부터였다.
1953년이라면 6·25 남침으로 인하여 임시로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왔는가 하면 서울의 언론사며 대학교들이며 각 단체들
조차 부산으로 옮겨와 전쟁의 악몽을 인내로 달래면서 하루빨리 휴전이 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무렵 언론인 이북(李北)씨가 임시 수도 피난지 부산에서 대판 2면의 조간신문인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다름)
를 창간하고 전쟁의 암울한 늪에서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시켜 보려는 의도로 제1회 경염대회를 개최하였다.
비록 전쟁중에 개회되기는 하였지만 과거에 있었던 맛보기식 미인대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회의 본질면에서나,
대외적 관심도면에서나, 심사방법 등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 대회에서 1등으로 선발된 미인은 강귀희(姜貴姬)였다. 그 당시에는 미인 선발대회를 가리켜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라고 하지 않고 여성의 아리따움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경염대회(競艶大會)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대회를 통해 강귀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 코리아가 되었다.
강귀희는 누구인가?
강귀희는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장래 여성 외교관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숙명여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한 지 불과 석달 만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강귀희도 피란민 대열에 합류하여 고향 대구까지 내려오고 얼마 후 부산으로 또 피난을 갔고 그곳 부산에서 대학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은 숙명여자대학이 부산 피난지로 옮겨와서 부터였다.
강의내용은 정규 학과 과목보다는 전쟁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1953년으로 들어서면서 피난지 부산의 화젯거리는 휴전 문제였다.
이 무렵 부산 피난지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화젯거리가 등장하였다. 그것은 중앙일보 주최 경염대회였다.
이 대회를 통해 전국의 최고 미인을 뽑겠다는 중앙일보의 광고는 피난지 부산 바닥을 삽시간에 웅성거리게 하였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염대회에서 뽑힌 미인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잘생긴 여자일까?"
"무슨 표현이 있겠나. 말 그대로 절세가인이랄 수밖에."
부산 바닥 어디를 가나 흔히 들을 수 있는 화젯거리였다. 특히 숙명여자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염대회의 화젯거리가
극성스러울 정도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대회에 4학년에 재학중인 여대생 한 명이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뻔뻔한 계집애. 그 얼굴이 뭐 잘났다구 경염대회에 나가냐?"
"맞다. 역전에 꿀꿀이죽 파는 아줌마가 훨씬 더 이쁘지."
4학년 여대생들은 동료가 경염대회에 참가한 것에 대하여 몹시 질투하였다. 그런가 하면 후배 학생들은 경염대회에
참가한 선배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 선배 언니라면 경염대회에 나가볼만 하지."
"나가볼만 하지가 아니라 틀림없이 미인으로 뽑힐 거야."
학년이 하나씩 아래로 내려갈수록 경염대회에 관한 호기심이 많았으며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선배 언니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내일 부산 시청에서 예선전이 있대. 우리 모두 응원가자."
"후배들이 가만있는 대서야 말이 되겠니?"
그 속에는 강귀희도 끼어 있었다.
"두말하믄 잔소리데이. 경염대회에서 선배 언니가 뽑히고 안 뽑히고는 내사 알겠나. 하지만 우리 대학에 그만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자랑스럽노. 안그렇나, 말 좀 해보그래이."
강귀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선배 언니가 참가하는 경염대회에 관하여 적극적이었다.
아무튼 경염대회는 부산 피난민들한테는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와 불안에서 산뜻하게 벗어날 수 있는 청량제와도 같았다.
경염대회 열풍 때문에 부산 바닥 여대생들은 틈만 있으면 하나같이 손거울을 꺼내 놓고 자기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
보다가 문득 쑥스러워하며 손거울을 얼른 감추기가 예사였다.
경염대회 미인 선발과정은 예선심사와 본선심사로 구분하였다. 예선심사에서는 외모와 얼굴 윤곽을 보고
본선심사에서는 비공개로 수영복 차림의 맵시를 심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예선심사는 부산 시청 강당에서 있었다. 몰려든 구경꾼들 때문에 부산 시청 강당은 심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북새통이었다.
강귀희와 숙명여대 응원팀들은 아예 강당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경염대회에 참가하는 선배 언니의 아름다운 얼굴도 얼굴이려니와 난생 처음있는 경염대회의 기록적인 모습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예선심사가 한창 진행되는지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오는것이었다. 그때마다 발돋움으로 강당 안을
기웃거려 보지만 코털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양복을 잘 차려 입은 남자 한 명이 강당 출입구를 헤치고 빠져나와 숙명여대 응원팀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강귀희를 찾았다.
"숙명여대에서 오셨죠? 강귀희 양이 누구시죠?"
숙명여대 응원팀들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서로 눈만 굴리자 그 남자는,
"아, 저는 경염대회 관계자올시다. 급한 일로 강귀희 양을 뵈러 왔습니다."
하며 숙명여대 응원팀을 쭈욱 훑어보는 것이었다.
"제가 강귀희인데 무슨 일잉교?"
강귀희가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이유를 물었다.
"역시 미인이시군요. 다름 아니라……."
그 남자는 강귀희가 묻는 이유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밝혔다. 유난히 얼굴이 보송하고 하얀 강귀희는 예쁜 여대생으로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런 강귀희가 이번 경염대회에 참가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예선심사를 시작하고 보니 강귀희는 참가하지 않고 엉뚱한 여자들만 수두룩하게 참가한 꼴이 되고만 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급히 의견을 모았다. 강귀희가 부산 바닥에 미인 여대생으로 소문이 퍼져 있는 이상 이번 경염대회에 꼭
참가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등 미인을 뽑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예선심사에 강귀희를 올려놓아야
한다는 의견이 심사위원들의 절대적인 주장이었다.
그 남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숙명여대 응원팀들은 뜻하지 않는 사건에 대하여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강귀희가 예선심사에 통과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예선심사에선 강귀희를 포함하여 본선 진출자 열 명이 선발됐다.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미인을 뽑는 심사 조건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미인으로 선발되기 위한 첫 관문인 예선심사의 조건으로서는 미혼 여성일 것, 키는 다섯 자 정도일 것, 몸뚱어리는 키에
맞춰 깡마르거나 뚱뚱하지 않아야 할 것, 얼굴의 형태는 둥그스름하고 복이 있다고 느껴질 것, 옷을 입었을 때 등이
반듯하고 걸음을 걸었을 때 다리가 휘어지지 않아야 할 것, 웃을 때 이빨이 반듯하고 하얗게 반짝거려야 하며, 전체적인
몸의 균형은 장래 현모양처로서 품위가 있을 것 등이었다. 객관성을 갖춘 심사기준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인 기준이
더 많았다.
이렇게 해서 예선을 통과한 예비 미인들은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본선심사의 하일라이트는 수영복 차림의 심사였다.
본선심사는 예선심사와는 달리 비공개로 진행키로 했다. 이유는 바로 수영복 심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공개로 진행키로 한 본선심사는 개회식조차도 하지 못한 채 취소되고 말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몰려든
인파 때문에 심사장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주최측에서는 부랴부랴 본선심사를 취소하고 며칠이 지난 뒤에 예선심사를
통과한 열 명의 예비 미인과 심사위원만을 따로 불러 놓고 1, 2, 3등을 뽑았다.
1등 미인은 강귀희였다.
본선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강귀희를 우리나라 1등 미인으로 뽑게 된 심사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실시한 미인 뽑기 대회에서 1등으로 선발된 강귀희 양은 이 대회가 요구한 미인의 조건을
모조리 갖춘 절세미인입니다."
그러면 절세미인으로 뽑힌 강귀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동그스레한 얼굴이며, 넓은 이마며, 뚱뚱하지는 않으나 마냥
건강해 보이는 체격, 그런가 하면 목을 타고 다리까지 뻗어 내려온 각선미는 선녀도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강귀희의 앞가슴은 비록 수영복에 가려지기는 하였지만 한 올의 비단실이 미풍에 흔들리면서 그려낸 곡선과도
같았다. 또한 수영복을 입은 그녀의 옆 모습은 흡사 마지막 어둠을 지우면서 동이 트는 싱그러운 새벽 능선을 연상케 했다.
이쯤되면 강귀희는 심사위원들의 표현대로 절세미인이자 그 가문에게 커다란 영광을 안겨다 준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런 영광의 뒤에도 말못할 괴로움들이 성가시게 따라 다녔다.
"후회도 참 많이 했지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만난 것처럼 내 뒤를 쫓아 다년 바깥 출입을 아예
삼가했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게 되면 몇 번이고 학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돈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화초
며느리를 삼겠다는 제의가 학장실을 통해 빗발치는 바람에 수업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애로 결혼을 하였지만 얼마 못가서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혈혈단신으로 베트남에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 코리아답지 않게 군부대를
상대로 텔리타이프 수리업을 차렸다. 여기에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녀는 베트남의 패망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최고급 한식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그후 건축중장비 중개업을 했었고 프랑스 알톰스사의 로비스트로서 경부고속철도에 프랑스제 TGB를 유치하는데 성공
하므로서 국내에 알려지는 국제적인 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부락희. 제3대 김미정(가수 현 인의 미망인)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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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