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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러셀스트릿 교회 이야기...
화려한 쉬카고의 어느 골목...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이 거리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거의 다 미혼모가 출산한 아이이다.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만큼 돕지 않고는 도저히 안될 절박한 마음으로 그들과 교회가 되고자하는 이들의 이야기와 저자 필립 얀시의 고민이 묻어 있는 오래된 책입니다.
어떤 분이 책을 잘 요약해 두셔서 발췌했습니다.
제1장 왜 교회를 붙들고 번민하는가?
빌, 여기 크고 오래된 배가 있다네, 이 배는 낡아서 삐걱거리며, 상하좌우로 심하게 요동친다네. 그래서 자네는 이따금씩 이 배를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 배는 자기가 갈 길로 간다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네. 자네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일세. - 파워스(J.F.Powers)
나는 조지아주에서 성장했으며, 나는 교회에 열심이었고 교회의 채색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그 때의 내 삶은 교회가 규정했다. 교회의 우리는 스스로를, 위험 가득한 세상에서 그나마 단결해 모인 소수라고 보았다. 세상으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맹렬한 불구덩이로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흉악한 바깥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성벽과 같았다. 그런 만큼 선민의식은 나의 크나큰 위안이요 만족이었다.
당시의 근본주의의 엄격성이 적어도 나를 (문제아가 될 수 있는) 더 큰 위험에서 지켜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자 한다. 예컨대 가끔씩 아이들과 어울려 볼링장을 드나들긴 했지만 술이나 약물 같은 것에 손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의 장점은 그 정도뿐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어떤 규칙들은 대단히 전횡적이고 그릇된 것이었음을 나는 결국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당원증을 소지한 공산주의자’로 믿었다. 남부의 경찰들이 곤봉으로 킹 목사를 구타하고 감옥에 가둘 때마다 우리는 내남없이 환호작약했다. 외적인 행위에 근거를 둔 종교는 얼마가지 못한다. 나는 유년시절의 경직된 율법주의적 환경과 결별했다. 남부의 근본주의 영토에서 나올 때, 불행히도 나는 위선의 껍질뿐 아니라 신앙이라는 몸통까지 내던졌다.
버팀벽을 배회하다
왜 교회를 붙들고 번민하는가? 기독교인에게 교회는 진정 필요한 것인가? 윈스턴 처칠은 언젠가, 자신은 일종의 버팀벽 같은 방식으로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직접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버팀벽처럼 외부에서 교회를 지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얘기다. 성소에 나가지 않아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젊은 시절 내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건대, 나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게 한 몇 가지 장벽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첫째로 꼽을 것은 저들의 위선이었다. 누구든지 털끝만큼이라도 위선의 냄새를 피우면 나는 거의 기계처럼 거부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교인들 모두가 나처럼 행동한다면 교회는 어찌되는가?”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위선을 판단하신다. 가족구성원들이 완벽하지 않다 해서 가족이라는 제도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럴진대 왜 우리가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둘째, 본질적으로 문화적인 문제였다. 한 주일 어느 시간에도 내가 딱딱한 나무 의자에 3~40분씩 등을 대고 앉아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 일이란 없었다. 일곱날 가운데 백년이나 이백 년 전에 지어진 노래를 부르는 일이란 추호도 없었다. 천편일률의 순서와 반복, 법석이는 회중, 주보, 광고, 별 의미 없이 앉고 일어서는 이 모든 과정들을 나는 참아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화적 장벽들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 교회에 대한 태도를 바꿨는가? 첫째, 기독교란 철학이나 내향성만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전적으로 공동체라는 기반 위에 서는 것이 기독교다. 내가 교회를 끝내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잠시 교회를 떠나 있을 때면 고통 받는 쪽은 언제나 나다. 나는 이 점을 마음으로 느낀다. 한동안 교회를 떠나 홀로 편력하던 시절 나는 언제나 안으로만 퇴행했다. 공동체라는 더 큰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둘째, 나는 교회에서 과연 무엇을 찾아야 할지 오랜 세월 배웠노라 대답할 것이다. 여기에는 보는 방식이 포함된다. 이 전망의 방식이 우리 모두에게 교회의 본령, 곧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위를 보고
예전의 나를 말하자면 꽤 똑똑한 체하는 소비자의 태도로 교회를 대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일러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극장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극장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주연배우가 아니라,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무대 좌우편에서 배우들에게 은밀히 이것저것 일러주는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중들의 마음에서 발생한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내가 여러 교회에서 당면했던 재능부족이란 문제에 대처하도록 도와주었다.
성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예배의 핵심에 분명한 강조점을 둔다.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라고 월터 윙크는 말한다.
주위를 보고
나는 러셀 스트리트 교회에서 위뿐 아니라 주위 또한 보는 법을 배웠다. 나는 나와 현격하게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예배했다. 주일 아침이면 자원봉사들이 무료로 배식한 밥을 먹고 노숙자들은 아침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의자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 이 교회 회중에는 또한 시카고 대학이나 노스웨스턴 대학 같은 유명한 학교의 철학박사 과정 대학원생이나, 의사, 변호사, 기타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학력자들이 있었다. 몇 천만 원씩 버는 고학력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든 일자무식의 노숙자들에게든 복음은 동일했다. 그 때부터 나는 교회를,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는 장소로 희구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다. 기독교의 근본 토대, 곧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사랑은 세상의 모든 민족, 인종, 계급, 나이, 성을 초월한다. 공동체가 먼저다. 우리를 갈라놓는 갈등과 문제는 나중이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일치를 추구하되 획일이 아니며, 다양성을 추구하되 분열이 아닌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남자와 여자를, 노예와 자유인을 예수의 발 앞에 동등하게 불러 모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기구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망각하는가!
이제 나는 교회를 찾을 때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 위를 보고 주위를 본다. 나는 흑인들이나 오순절 교회의 분방한 예배에서, 노인들의 웅숭깊은 신앙에서, 날마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들의 노고에서 배운다. 나는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회중을 애써 찾는다.
밖을 보고
시카고 러셀 교회에서 나는, 교회의 선교란 바로 내 이웃의 절박함에 손 내미는 것임을 배웠다.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별다른 분규가 없었던 이유 하나를 대보라면 나는, 날마다 우리와 같은 거리를 오가는 지역공동체 사람들에게 다가 서고자 교회 회중 전체가 한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갈등이란 아무래도 나를 먼저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을 섬기려는 마음이 분주하면 나 자신은 그만큼 덜 생각하게 된다.
러셀 교회의 공동체 운동은 글을 모르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시작하여, 무료 법률상담소, 미혼모사역, 노인복지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 대부분 자책감이나 책임감으로 이와 같은 일들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은, 베풂이란 베푸는 자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실로 주고 베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이 얻고 받아야 할 필요만큼이나 절박하다. 사랑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지 않는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사랑, 그것이 믿음의 역설이다.
안을 보다
러셀 스트리트 교회의 빌 레슬리 목사는 끊임없이 은혜를 외쳤다. 매주 은혜를 주제로 설교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만치 구체적으로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고 보니 은혜란 내 유년시절의 교회에서는 도무지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옛 교회는 왜 그렇게 무섭기만 했을까? 우리의 교회가, 경쟁과 비난과 서열, 곧 은혜 아닌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 은혜를 알릴 수는 없을까? 이제 나는 교회를 찾으면, 안을 보며 하나님께 부탁한다. 내게서 싸늘한 비평과 경쟁의 독을 제거하시고, 대신 은혜를 채워달라고, 어느 모로 보나 은혜가 넘쳐나는 교회, 내가 찾는 교회는 그와 같다.
호숫가의 새로운 표상
우리는 세상에 세운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이다. 러셀 스트리트 교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한 광경은 늘 내 가슴에 이 새로운 공동체의 감동적인 전형으로 간직된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러셀 교회는 미시건 호수에서 침례식을 베풀었다. 시카고의 백사장에는 그들 나름의 사회적 서열이 있다. 남미 계통 사람들은 백사장 북쪽에, 전문직의 젊은 부자들은 구조대 망루 주변에, 동성연애자들은 바위지대에 각각 몰려든다. 끼리끼리 모이고, 가족끼리 붙어 앉는다. 그러나 그 날 침례를 받기 위해 모인 작은 공동체에는 주식 중개인과 쿠바인과 오페라 가수와 여든 다섯 먹은 흑인 노예의 손녀딸이 있었다.
교회의 정의라면 나는 칼 바르트의 것을 사랑한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과는 현격하게 다른 새로운 표상,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전혀 모순되는 표상을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 미시건 호수 백사장에서 거행한 우리의 예식은 정녕 세상의 방식, 적어도 시카고의 방식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보건대, 특별히 러셀 스트리트 교회는,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교회가 세상과 모순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제2장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교회
말 찾아 들어가기
하나님은 내 유년 시절의 교회처럼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곳에도 계시지만, 러셀 교회처럼 소동과 혼란을 떠 안으며 가까스로 유지되는 곳에도 계신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나는 러셀 교회와 같은 도심지 교회들을 생각한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 장사꾼, 떠돌이 집시, 그리스인, 매춘부, 이교도 우상숭배자 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고린도 서신만큼 강렬한 어조로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교회분열을 엄중히 경고했고, 근친상간을 거세게 비난했으며, 주님의 만찬이 무법천지의 식탁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싸웠다.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생각하신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고린도라는 어수선한 정황에서야 대답이 분명치 않았으리라. 그리고 거의 스무 세기나 지난 오늘날의 내게도 대답은 여전히 모호해 보인다. 바울의 고린도 서신은, 특히 말을 찾아가는 방식에서 망설임을 보여준다. 그는 망설이고 유예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적합한 말을 찾아 들어간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 아, 한편으로 생각하니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다. 확실히 그 말이 더 옳겠다. 그러나 더 좋은 비유가 있다. 너희는 성전이다. 사도 바울은 아직도 망설이고 유예한다. 내내 같은 어조를 유지하며 나아가다 12장에 이르러, 마침내 최상의 비유 하나를 건져 올린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책 전체의 어조는 순식간에 바뀐다. 이것저것 꾸짖고 당부하는 개인서신의 문체에서 하나의 유려한 산문 문체로의 비상. 저 유명한 13장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작가로서, 고린도전서에 드러난 바울의 방식에 공감한다. 바울의 비유들이 가리키는 진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확실히 낯설다. 비유의 대가 바울이 이 시대 사람이었다면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썼을까? 어떤 이미지의 말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애초부터 생각하신 교회의 모습을 전달하는 최상의 도구가 되었을까?
나의 그림을 소개하겠다. 다음의 내용들은 내가 다닌 모든 교회의 경험을 통해 그린 나의 최신작이다. 모든 교회는 이상적인 모형을 추구하지만, 어느 교회도 그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상적인 모형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 모형이 우리의 지향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열두 단계 모임
이런 유형의 교회는 어떤가? 언젠가 가 본 이 교회는 사무처도, 급료를 받는 직원도 없이 매주 엄청난 수의 헌신적인 회원들을 불러들인다. 이 교회는 ’익명의 금주회‘(Alcoholic Anonymous)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이 모임의 설립자들은 애초부터 관료화 경향을 철저히 배격했다. 요컨대 그것은 회원들 상호간의 근본적인 관계, 곧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에 바탕할 때에야 이 모임이 유지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아무개입니다. 나는 알콜중독자이고 마약중독자입니다.” 그들이 스스럼없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결단코 지역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대한의 연민을 가지고 경청하며, 따뜻하게 응답해 주고, 여러 차례 손을 잡거나 어깨를 두드려가며 서로를 격려했다. 내가 참석한 그 날 밤, 회원들은 한 음성으로 열두 단계를 거듭 외쳤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용서와 힘을 구하겠다는 수락이었다. 알콜중독자인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회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네. 하나님은커녕 자기들끼리도 의지하지 않고 있지. 또 그들의 삶은 당당하고 안정돼 보여서 알콜중독자들이 거기 가면 열등감밖에는 느낄 게 없다네.”
내 친구가 다니는 심야교회에서 나는 겸손과 정직의 마음을 보았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동병상련의 친구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배웠다. 아마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생각하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음들 아니었겠는가!
하나님의 운전면허시험관리단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는 좀처럼 나다니지 않는다. 그런 내가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들 틈에 섞여야 하는 때가 있다. 3년마다 한 차례씩 운전면허시험관리단에 출두해서 면허증을 갱신해야 하는 때가 그렇다. 매번 줄을 서서 한 시간씩 기다려야했다. 그럴진대 내 앞뒤로 늘어선 다양한 사람들은 인간 군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뚱뚱한 사람, 노인들, 허름한 청바지에 막장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 성장기에 치열교정을 못 받아 제멋대로 생긴 이를 내보이는 사람들. 여기 운전면허시험관리단 현관이야말로 내가 모르는 진짜 세상이다.
웬 사람이 그렇게 고립적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닮은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운전면허시험관리단에서 날아오는 고지서대로 할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며, 우리는 대부분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 그저 교회에서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존 하워드 요더는 말했다. “세상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이다.”
하나님의 응급실
교회를 응급실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밤늦도록 열려 있고, 찾아가기도 쉬우며, 예기치 않은 응급상황으로 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돌봐주는 곳. 솔직히 말하건대 복음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강요하지 않는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핍박받는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셨다.
대도시의 큰 병원들을 보라. 병원이라는 이름 앞에 어떤 한정사가 붙는가. 침례교 병원이고, 장로교 병원이고, 감리교 병원이다. 침례 병원이고, 세브란스 병원이고, 성모 병원이고, 성 유다 병원이고, 성 누가 병원이다. 이 병원들이 물론 지금까지도 공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이름들은 적어도 그 병원들이 애초에 무엇을 근거로 설립되었는지 증명한다. 상처 입은 세상에 손 내미는 교회의 선교가 아니었다면 그 병원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성찬식을 하며 손 내민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며 나는 “너희를 위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새삼 깊고도 깊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실로 교회란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들고 오는 곳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몸을 쪼개신 그분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고가철도
몇 년간 시카고 대학에서 문학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다. 그 대학은 도시 최남단에 있어서, 고가철도를 타고 5킬로미터쯤 간 다음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기차가 도심지로 들어설수록 전문직의 젊은 부유층이 많이 탔으며, 도시남단으로 진입할 무렵쯤이면, 스페인, 그리스, 폴란드 등의 소수민족과 여피들은 어느새 내리고 없었다. 중산층 지역, 서민층 지역, 극빈층의 우범지역을 통과해 최남단까지 가는 동안 기차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학교에 들어서면 나는 엘리엇, 오든, 쇠렌 키에르케고오르, 존 던,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코 등의 작가들을 공부하며 보냈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그 웅장한 대학 건물을 떠나, 빈민층의 우범지역부터 시작해서 다시 시카고의 다양한 이웃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로에 올랐다.
고가철도를 타고 대학을 왕복하면서 나는 교회의 두 모습을 보았고, 두 모습 모두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흑인지역의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 침례 교회는 내게 세상 남녀 모두에게 전파되는 복음의 간명한 아름다움을 가르친다. 나는 여기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시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본다. 또 한편으로 나는 키에르케고르나 엔도 슈사코 같은 작가들이 표현해 내는 이 신앙의 신비와도 만난다. 과연 우리는 이 신비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가족
한 기구 내의 지위란 수행능력에서 온다. 기업세계는 지위라는 보상에 인간이 얼마나 혹 하는지 알고 있다. 지위라는 보상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다. 반면, 한 가족 내에서 지위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지우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아이는 태어나는 것 그 자체로 가족의 권리를 얻는다. 성취력이 떨어지는 아이라 해서 집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다. 아이는 그와는 반대로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소설가 존 업다이크가 표현했듯, “가족이란, 단순히 싫고 좋고를 떠나, 무관심과 경쟁은 물론 증오조차 공존하는 한 세계에서 어떻게 사랑이 존재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곳이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우리가 듣는 말도 그렇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사람 사이의 모든 인위적인 구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태양 아래서 녹아 없어졌다. 하나님의 장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그 모든 권리를 우리가 함께 누릴 자격은 결단코 없었을 테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 삼으심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했다. 이럴진대, 가족보다는 무슨 사업체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지역교회를 보면 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선수대기실
일 년 중 대부분을 나는 텔레비전과 담 쌓고 산다. 그러나 적어도 초봄 한 차례 전국 대학농구 선수권대회의 유혹은 나는 도저히 거절 못한 채 채널을 맞추곤 한다. 해마다 경기는 마지막 1초를 남겨놓고 열아홉 살짜리 어린 선수의 자유투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이 하나를 성공시키면, 그는 영웅 중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실패하면, 그는 천하에 없는 죽일 놈이 된다. 이 두 장면에서 나는 어떤 상징을 읽어냈는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자유투를 앞에 두고 바짝 긴장한 모습. 이 정지 장면을 율법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료들의 어깨에 올라타 세상에서 가장 큰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 그렇다면 이 장면은 당연히 은혜의 한 상징이 될 것이다.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 관중들과 감독과 프로 스카우터들을,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면 우리는 반드시 공을 집어 넣어야 한다. 그 공 하나가 우리를 영원히 결정짓는다. 실패하면 우리는 영원히 곤고한 자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을 일러준다. 우리가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서 직접 나서는 방식. 우리는 우리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쟁취하신 예수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 번 다시 무엇을 쟁취하기 위해 바싹 긴장할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교회는 다만, 승리한 선수들이 서로 축하하는 선수대기실처럼,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교회는 모두가 용서받았다는 기쁜 소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의 승리는 확정적이라는 위대한 복음을 인해 서로 축하하고 감사하는 곳이다.
마지막 비유 하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 이 비유는 적확하다 못해 압도적이다. 사실 몸이라는 이 압도적인 이미지에서 가지 쳐 나오는 비유들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작은 책에서는 다만 몸이라는 주제에서 내가 얻는 가장 큰 배움 하나는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너와 나 곧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으뜸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사는가? 세상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시내산의 장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대신 우리같이 평범하다 못해 비루하기까지 한 사람들 안에 살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포함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별별 잡색의 인간들이 모인 교회, 곧 황송하게도 우리들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대단한 모험 아닌가!
제3장 벽을 넘어서
어떤 사역에 참여하면 누구나 그렇듯 출발이야 호기로웠지만 얼마 못 가 피곤과 실망의 벽에 좌충우돌하고, 종국에는 그쯤에서 주저앉기로 마음먹곤 했다. 사역에는 아무리 헌신적인 일꾼들이라도 주저앉힐 고통과 개인적인 희생이 따른다. 기독교 사역과 내 사역의 경험에서 관찰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고도의 민감성과 감정적 결절 사이에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피부가 약한 어떤 일꾼들은 거의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의 고통에 민감하다. 반면 정서적으로 두터운 못이 박은 어떤 사역자들은 어지간한 고통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교회 사역에서 이 극단의 두 부류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내 몸, 특히 나의 왼발에서 일어나는 양극단의 교호작용을 지켜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에도 똑같은 과정이 진행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나의 왼발
몸의 ‘피부’인 우리 사역자들(반드시 전문 사역자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은 끊임없는 고통과 압박에 노출된다.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외과의사처럼 정교회 기술이 요구된다. 몸을 고치는 사역자의 섬세함이야 달리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어지간한 고통에는 무감각해질 필요도 있다. 사역에는 빈번히 무거운 짐과 자원의 고갈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따라다닌다. 이 같은 희생과 고통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사역을 지속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못이 필요하다. 실로, 사역이란 폭풍우 속에서 밧줄을 잡고 필사적으로 견뎌내는 뱃사람들의 강인함을 닮았다. 고통에 단련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없이 섬세하고 최대한 강인해야 하리라.
눈물을 먹다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해,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다는 뜻이다.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헨리 나웬의 작지만 아름다운 책은 사랑해 주는 이 하나 없이 방치된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웬은 여기서, 수술을 앞둔 한 환자에게 사랑어린 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줄 게 없는 젊은 사역자를 말하면서 이렇게 쓴다. “기다려주는 사람 없이는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고단하고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은, 누군가 역이나 공항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은, 집에 남아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기쁨의 순간들을 이야기 해주고 싶어합니다.”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고통이 우리들에게는 의미 있다고 하는 확신, 이 확신만이 사역에 몸담은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전해 줄 유일한 의미일 때가 있다.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는 고통의 당사자들에게 우리 사역자들은 실로 이 확신 하나 들고 가는 것이다.
눈물로 깊어지는 마음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뜻을 알 수 없는 고통들은 어찌하는가? 치매 걸린 노인은 어떤가? 지능지수 3~40밖에 안 되는 중증의 장애아는 어떤가? 이 정신 놓친 노인이나 백치 아이에게서 우리는 과연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이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의 삶에도 의미가 있는가?” 중증의 정신지체아들을 위해 헌신한 소아과 의사 위르겐 트로기쉬 박사는 물었다. 트로기쉬 박사는 의미에 대한 이 질문의 대답을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의료 업무에 더더욱 정진했지만 답은 역시 찾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그는 자원봉사자 기초교육과정을 주관하게 되었다. 일 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그는 이 젊은 봉사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설문지의 질문내용 중 하나. “장애자들을 위해 헌신한 뒤로 당신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다음은 설문작성자들의 답을 간추린 것이다.
* 생애 처음으로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 이전 같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일을 하고 있다.
*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한 장애인의 사랑을 얻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까이 지내보면 안다.
* 나는 이제 인간의 고통에 대해 더 깊이 반응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남을 돕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 장애인을 보면서 나를 보았다.
* 더 관대해졌다. 내 사소한 문제들은 이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불완전한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마음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소한 기쁨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미음이나 힘보다 사랑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이 내용을 읽던 트로기쉬 박사는 서늘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이 바로 그 설문지 위에 있었다. 그 아이들의 고통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세련된 교육체계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교훈을 거기 와서야 배우는 자원봉사자들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먹는다는 것은 눈물을 직접 흘리는 사람에게는 물론이려니와 그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에게도 유익하다.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예상되면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은 역설적이다. 고통과 어려움이 예상된다 해서 사역을 회피하면 교회는 그 자체로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 교회는 병이 들어 성장을 멈춘 식물과 같다.
바울 자신은 육체의 가시를 세 차례 간구했다. 우리는 그의 기도내용을 추측해 보는 수밖에 없다. ‘주여, 이 가시를 없애 주시면 나의 능력이 배가 되겠나이다. 생각하소서. 이 가시는 당신의 사역에 해가 됩니다. 나는 이 가시로 자주 걸려 넘어집니다’ 바울의 이런 기도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부정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울의 고통을 그대로 두셨는가? 바울 자신이 딱 부러지는 이유를 댄다. “잔뜩 교만해질까봐”(고후 12:7, 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리고 바울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르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이 자주 되풀이하신 선언은 무엇인가? 우리는 죽고자 할 때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섬김으로써 가장 잘 죽을 수 있다.
고통의 완충장치
우리는 과연 스스로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몸 바칠 수 있는가? 음은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치유자들의 초기증세를 보여주는 위험신호들이다.
1. 나는 사람 자체를 염려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에 더 노심초사하지 않는가? 타인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소모성 자기번민의 초기증세를 나는 이렇게 본다. 초기증세라 해도 그것은 위험하다. 즉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강박. 이런 사람은 교회, 공동체, 나라, 아니 우주 전체의 운명이 헌신적인 사역자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박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사역이란 때때로 어떤 초연함이 요구된다. 자신의 몸을 이웃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들이 돌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불구자가 될 수 있으며,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만다.
타인을 위하겠다는 불건전한 자기희생 증후군,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을 더 짊어지겠다는 태도. 이를 일러 ‘구세주 강박증’이라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 자신은 정작 그와 같은 강박증에서 완전히 초탈해 있었다. 그분은 아예 배를 빌려 군중들을 피해 달아났다. 한적한 곳을 찾았고, 혼자 있고자 했다. 유다가 힐난했듯, 좋은 값으로 팔아 인간의 궁핍을 완화시키는 데 쓰면 좋았을 향유를 당신의 발에 부어 ‘낭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2.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귀하게 보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3. 나는 하나님과 삶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가? 욥과 같이 큰 고통을 당한 더글러스는 내게 말했다. “하나님과 삶을 혼동하지 않는 법, 나는 이것을 오래 전부터, 특별히 이번 비극을 통해서는 더더욱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나는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내게 닥친 이 비극 앞에서 나는 결코 초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창망하여 넋을 놓고 있습니다. 이 삶의 부조리, 이 불공평을 나는 있는 그대로 저주합니다. 나는 분노합니다. 비통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도 내게 닥친 이 비극을 보시며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나와 같이 분노와 비탄에 잠기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내게 닥친 일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육체적 실재를 넘어 영적인 실재를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공평하므로 삶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이 아닙니다. 삶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관계가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형성시켜 나간다면, 우리의 육체적 실재가 무너져도 능히 견딜 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삶의 불공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4.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사역을 누구에게 보고하는가? 누가 우리를 불렀는가? 참된 구세주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구세주 강박증’이라 부르는 태도에서 완전히 초탈해 있었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렇게 예수를 묘사한다.
온 세상의 질고가 자신의 두 어깨에 걸려 있음에도, 에베소, 고린도, 아덴이, 온 대륙의 도시들이 절박하게 손짓하며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도, 의사당과 길거리와 부자들의 집과 뒷골목에서 하나님의 아들만이 볼 수 있는 고통과 죄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세상의 고통과 비참한 인간 실상이 한 의사를 찾아 애타게 소리치고 있음에도, 그는 길을 가다 조용히 멈추어 서서 한 사람과 이야기한다. - 『기다리는 아버지』
밖으로의 여행을 지속하려면 안으로의 여행에 더 마음써야 한다. 나는 내게도 초연함을 달라고 기도한다. 아버지께서 맡아주시므로 나는 고요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도 내 일을,내 삶을 날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로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임을, 분명코 믿고 맡길 수 있는 주인임을 안다.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타인을 위한 사랑과 나를 위한 사랑 사이의 어려운 길을 능히 걸어가도록 도우실 수 있다. 여리고 예민한 마음과 강하고 둔감한 마음 사이로 난 그 길을 말이다.
그래도 애쓰는 자가 내는 소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들은 결코 당신이 나서서 하지 않는 듯하다. 그분은 당신이 눈 한 번 깜빡여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느리더라도, 실수하며 그르치더라도 우리더러 하라고 말씀하신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임무를 교회에 위임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정확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완벽을 기대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자는 이 모험의 본질도, 인간조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비록 작곡가가 애초에 구상한 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겠지만, 불완전한 그 음이나마 세상에 들려줄 사람들은 우리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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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에 한 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필립 얀시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용이 감성적이고 따뜻했던 인상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표지만 한 번 슬쩍보고 언젠가 한 번 읽어 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집사님이 이렇게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히 수행하여 나가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보면 위로가 됩니다. 그들을 보면 도전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서도 막상 제가 혹은 저의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열심이 앞서 나중에 지치고 혹여나 이도저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게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있지요. 참으로 하나님이 마음 주시지 않으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으면 제대로 되는 것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선행은 감사의 열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늘상 우리들의 주신 복음에 전심으로 차고도 넘치도록 감사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로써 온전한 복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일에도 차고도 넘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같이 누렸으면 좋겠네요^^
회중으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같이 누려요~~~~~^^
와우 !!! 세빈맘님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