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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
이제 숫자 이(2 – two)의 영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일(1)이 모든 차이를 배제하고 정의한 그것이 통치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2)는 차이가 있음을 단언한다. - 다른 하나(another)가 존재하며 반면 하나(1)라고 할 때에는 다른 하나가 없다.
이 차이는 선한 것일 수도 혹은 악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악과 구별되어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선한 것과 구별되어 악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2)는 문맥에 따라서 이중의 색깔을 갖는다.
다른 것으로 나눌 수 있는(divide) 최초의 수이다. 따라서 그를 사용하는 모든 것에서 분할(division) 혹은 차이(difference)의 기본적 사상을 알아낼 수 있다.
이(2)는 특성에는 다를 지라도 증거와 친밀감에 관해서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것이 도움과 구조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관심을 쏟을 곳에 이 수는 인간의 타락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 (opposition), 적의(enmity) 그리고 압제(oppression)를 암시하는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더욱 흔하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으로 뒤덮여 있을 때(창 1:2) 그 상황은 우주적인 폐허와 암흑이었다. 창조와 관계되어 기록된 두 번째 것은 두 번째 것 - 빛의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 곳에는 즉시 차이와 분할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둘째(second) 날에는 중요한 특성인 분할(division)이라는 것이었다.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창 1:6). 여기에 둘째날과 연관된 분할(Division)이 있다.
이 위대한 영적 의미는 하나님 말씀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다. 물론 우리는 책, 장, 절 등의 어떤 인간적 배열이나 분할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분할, 순서 그리고 배열을 하나님이 하신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어떤 것들 중에서 두 번째라는 것이 차이(difference), 일반적으로 대적(enmity) 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두 번째 문장을 잡아보자. 첫 번째 문장은,
창 1:1인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두 번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여기에서 첫 번째 문장은 완전함과 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번째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시기에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사라졌던 폐허와 황량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경의 분할
(THE DIVISIONS OF THE BIBLE)
앞에서 창세기가 열 두 부분(하나의 서론과 열한 개의 세대(톨도도–tol’doth) 로 이루어진)로 하나님께서 나누셨음을 알아보았다. 이 분할 중에 첫 번째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전함을 기록하였다. 두 번째(창 2:4-4:26)는 타락 – 다툼, 죄, 죽음을 나타내는 옛 뱀 사탄인 원수인 두 번째 것의 등장 – 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원수”는 두 번째 분할에서 처음으로 보여진다.
“내가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우리는 하나님께서 뱀을 두 번째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만당하여 “죄를 지은” 여자는 두 번째 피조물로, 최초의 약속이며 예언의 주제인 여자의 후손은 두 번째(second) 사람, 따라서 숫자 이(2)는 그리스도의 화육(化肉) - 영원히 찬양받으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두 번째 분, “두 번째 사람”, “마지막 아담” - 과 상호연관이 있다.
두 번째 “Tol’doth”(창 5:1-6:8)는 ‘아담 자손의 계보“로 시작한다. 반면에 ”두 번째 사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기록하였다(마 1:1).
모세오경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면 첫 번째 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알 수 있지만 두 번째 책(출애굽기)은 “원수들의 압제”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다시 “내가 내려와서 ... 그들을 건져내고”(출 3:8)라 말한 구원자(the Deliverer)와 구속자(the Redeemer)인 또 다른 것(another)이 있다.
찬양은 그에게 모세의 노래로 드려졌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따라서 구속은 성경에 소개되었으며 두 번째 책에서 원수(출 3:15에 구속자의 첫 약속으로써)와 관련되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네비임 혹은 선지자들(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라 불리우는 구약의 3개의 대분할 중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의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논쟁의 기록을 포함한다. 첫 번째 책(여호수아)에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알 수 있고 두 번째(사사기) 책에서는 그 땅에서의 배신과 적의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원수들에게 압제 되는 것을 본다. 다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운 “구원자들”을 원수들과 병행하여 보게 된다.
“시가서(the Psalms)”라 불리우는 구약의 세 번째 대분할에서는 시편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두 번째 책 욥기를 히브리 정경으로 갖고 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하고 억압하는 원수의 힘과 악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백성의 피난처, 고통 중에 매우 신속한 도움이신 살아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시편은 창세기 이외에 어떤 유사한 하나님의 분할을 나타내는 유일한 책이다.
그것을 다섯권으로 이루어진다.
제1권........시 1 ∼ 41
제2권........시 42 ∼ 72
제3권........시 73 ∼ 89
제4권........시 90 ∼ 106
제5권........시 107 ∼ 150
시편의 제2권은(출애굽기처럼) “원수들의 압제”로 시작한다(시 42:9) 이것이 시편 전체의 주제이며 또한 제2권의 주제이다 !
이러한 것은 제2권 뿐만 아니라 다른 권들의 제2편도 각각 그러하다.
제1권의 제2편(시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어찌하여〕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
〔어찌하여〕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며,
〔어찌하여〕관원들이 서로 꾀하며,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고 ?
그러나 6절에 다시 구원자가 등장한다.
‘내가 나의 왕을 .... 세웠다.“
제2권의 제2편(시43)은 약속된 구원자를 위한 찬양의 예언과 함께 2절에서 반복된 “원수들의 압제”로 시작한다
.
제3권의 제2편(시74).
“영원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 훤화하며...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훼방하며...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제4권의 제2편(시91)은 전부가 인용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원수가 앞으로 오실 구원자에게 결국 어떻게 압도당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제5권의 제2편(시105).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수 이(2)의 동일한 의미는 신약에서도 나타난다. 2개의 서신서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두 번째가 원수들에 관하여 어떤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원수들과 힘과 사탄의 역사를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2:11;11:14; 12:7, pp.을 보라)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는 ‘범죄한 자와 무법한 자’를 밝히면서 사탄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디모데 후서에서는 딤전에서 통치 속에 잇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 같이 타락한 교회를 볼 수 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앞으로 올 배교가 예언되고 기록되 있다.
동시에 요2에서는 “적 그리스도”란 이름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교훈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집에 들이지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작(pairs)으로 알려진 수 많은 이름을 대는 것조차 불가능하므로 하나 다른 하나에 관해 비교 혹 차이를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도 있다.
마태복음 7:24-27의 두 기초, 즉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하나와,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한“ 다른 하나. 두 염소(레 16:7),
즉 두 새(레 14:4-7), 두 의견(왕상 18:21), 두 주인(마 6:24), 두 계명(마 22:40), 두 빛진 자(눅 7:41), 두 언약(갈 4:24), 두 사람(눅 18:10), 두 아들(마 21:28; 눅 15:11; 갈 4:22)등등.
창세기의 생명 형태
(THE LIFE TYPES GENESIS)
창세기의 일곱 개의 생명형태(life-type) 중 두 번째는 동일한 특성을 갖고 있다.
첫 아담은 무죄, 타락과 추방, 곧 하나님의 목전에서 추방된 첫 부모로 묘사되고 있다(창 3:24).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다시 동행할 수 있었을까? 이 중요한 문제는 중대한 질문, ‘두 사람이 합의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암 3:3)의 해답으로 주어지는 게시의 첫 머리에 기록된 바로 다음의 말씀으로 해결된다.
해답은 창4에 두 번째 생명 – 형태(life type)로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두 방법. - “하나님의 방법”(행 18:26)과 “가인의 방법”(유 11)이 세사에서 불 수 있는 두 종교뿐임이 제시되었으며 기록되었다. 하나는 참된 것인 반면, 다른 하나는 거짓된 것이다.
진실한 종교는 하나이며 병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은,
“나의 손으로 아무 것도 가져올 수 없다.
오직 당신의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다.“
거짓된 종교도 하나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에는 많은 변종이 있으나 그 말은 하나이다.
“나의 손으로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들은 존재하게 될 그 어떤 것에 관하여 격렬히 싸운다. 그들은 그것에 대한 논쟁의 과열로 서로를 박해하고 불사르며 파괴한다. 하지만 이 “어떤 것”이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면에서는 하나(one)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이 아니라 “가인의 방법” 즉 인간의 방법이다.
하나는 “신앙”(faith)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works)이다. 하나는 “은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적 “공로”이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두 번째 죽음”으로 끝난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 비교 혹은 영원한 차이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와 엄숙한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도 이런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롯
(ABRAHAM AND LOT)
이들 역시 위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잇다. 이 두 사람은 셈으로부터 데라를 통하여 이어지는 삼촌과 조카의 친척관계였다. 둘은 갈대아 우르에서 메소타미아의 하란까지 함께 출발했다(창 11). 그들 둘은 하란부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함께 출발했다(창 12:4). 그 후에 그 둘은 애굽에서 함께 나왔다(창 13:1). 그러나 곧 둘 사이에는 차이가 명백해졌으며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있었다”. 그 차이는 명백해졌다.
이 둘 중의 두 번째인 롯은 그의 눈을 들어 자기 몫을 선택했다(13:11).
반면에 아브라함의 몫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13:14).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13:11 ⋅ 14).
우선 롯은 소돔과 고모라는 성읍이 잇는 요단평야를 바라보았고 그것은 “여호와의 동산같이” 보였다(창 13:10). 그리고 그는 자기 몫으로 이것을 택했다(13:11). 그리고 그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13:12).
그 후 그는 “소돔에 거하였고” 소돔의 문제와 전쟁에 끼어 들었으며 그 곳에서 쌓아 올린 모든 재물을 잃었다(14:12). 그 후에 그는 “소돔 성문앞에 앉아” 있었고(19:1)그들의 불경건한 언행으로 매일같이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재판관으로써 역할을 하였으며(벧후 2:6-9), 마침내 그 멸망에서부터 생명만 건졌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으로 그이 몫을 삼았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였다.
그는 단을 쌓을만한 장막만을 쳤다(12:8, 13:3-4). 그는 그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인 하나님과 교제를 가졌다(15:1). 그는 세상에서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친구“였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비밀을 받았다(시 25:14, 암 3:7, 요 15:15).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두 부인에게 있어서 더욱 컸다. 사라는 천국의 예루살렘의 모형인 반면(갈 4:21-31) ,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영원히 기억될 경고지침으로 남게 된다 ; 눅 17:32).
이삭과 이스마엘
(ISAAC ABD ISHMAEL)
이들은 함께 설명된다. 그들은 이복형제였기 때문에 더 가까웠던 인척관계였다, 둘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이삭의 어머니는 사라,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하갈이었다. 육체에 따른 인척관계는 아브람과 롯의 관계보다 더 가까왔지만 그 차이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컸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롬 9:7). 오 !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가 ! 이삭은 ‘영을 따라 낳았으며“;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았으므로“(갈 4:29, 30), 박해자가 되었다. 우리는 롯에서와 같이 ”옳은“ 이스마엘, 의로운 이스마엘에 관하여 전혀 읽을 수 없다. 롯의 후손은 모압족속과 압몬족속이었고 모압여인 인 룻은 예수의 여조상(ANCESTRESS)이 되엇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후손은 ”흩어졌으며“ 오늘날까지 거칠고 정복되지 않은채 계속되고 있다.
야곱과 에서
(JACOB AND ESAU)
이들도 함께 나타난다. 이들의 인척 관계는 더욱 가깝다. 동일한 아버지(이삭)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리브가)도 같았다. 하지만 영적인 차이는 더욱 컸다. 적대관계는 이미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서로 타툴” 정도로 명백했다(창 25:22). 그리고 성경에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사실이다(말 1:2, 3; 롬 9:13).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무시한 ‘가음자이며 망령된 자“였다(히 12:16, 17).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너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서 그것을 얻는데 슬프게도 죄를 범하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롯의 후손,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에서 볼 수 있는 차이와 같이 여기에서 그 차이는 더욱 현저해진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영광, “영원한 나라”인 반면(사43:122, 13; 44:7), 에돔 족속은 저주를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아말렉족속에게 맹세하시기를 ‘아말렉으로 더불어 때로 싸우리라“하셨다(출 178:16).
두 번 나오는 단어들
(WORDS WHICH OCCUR TWICE)
이제 두 번 나오는 단어들 속에 나타난 동일한 의미를 살펴보자. 그 목록은 매우 길게 만들어질 것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그런 모든 단어들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αποπλωέ(아포플레오)
에서는 원수들의 사역, 선민을 유혹하는 일(마 13:22)이 있을 수 있고 또 믿음으로부터 잘못되게(err)하는 것(딤전 6:10)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ἁποπνίϓ ω(아포프니고)에서는 원수들이 씨앗의 기운을 막고(마 13:7) 바다에서 스스로 숨막혀 죽는 것을 알 수 있다(눅 8:33).
άπόλαυσις(아폴라우시스)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시는(딤전 6:17) 것과 죄악의 낙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히 11:25).
ἀποχνέω(아포쿠에오)에서는 죽음을 낳는 죄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약 1:15, 18)
ἀτμίς(아트미스)에서는 비교된 안개 같은 세상의 생명과 비교된 여원한 생명의 차이를 알 수 있다(약 4:14; 해 2:19).
πανοπλία(파노플리아) (무장)에서는 실제적으로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두 번만(단지 한단어로)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 두 의미와 두 곳 즉 사탄의 무장(눅 11:22)과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1)로 사용되었다.
‘강한 사람“의 무장은 ”더 강한 사람“이 빼앗으며 그 영혼은 더 이상 사탄의 영역에 놓이지 않고 구원된다. 그리고 사탄이 믿고 있던 모든 무장은 그에게서 빼앗아(눅 11:21, 22) 그의 능력 앞에 있던 불쌍한 죄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된다.
이와 유사한 연구는 다른 단어에서도 가능하다. 심지어 한 단어가 여러번 나오는 곳에서도 구를 이루는 다른 단어와 연관하여 두 번만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 ὁ υίὸς τῆς ἀπωλειάς,멸망의 자식이다. 이 두 단어는 “자식”과 “멸망”은 여러번 나오지만 함께 나오는 것은 두 번뿐이다(요 17:12과 살후 2:3인데 시 109편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것으로 가룟 유다가 다시 죄인으로써 밝혀질 수 잇을 것인지에 대해 이심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두 번만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דבא(오베드), 멸망하다(perish), 민 24:20, 24.
קבא(아바크), 씨름하다(to wrestle), 창32:24, 25.
ףורגא (에그로프), 주먹으로(with the first), 출 21:18; 사 63:4.
לוא(올), 힘 또는 권세(strength), 왕하 24:15; 시 73:4.
בובא(아흐자모), 속이다(liar), 렘 15:18; 미 1:14.
םימםא(아사밈), 창고(storehouses), 신 28:8; 잠 3:10.
ברא(에레보), 누워 기다리다(lie in wait), 욥 37:8; 38:40.
הדעצא(에츠아다), 고리(chains), 민 31:50; 삼하 1:10.
הדא(아라흐), 따다(to pluck), 시 80:12; 아 5:1.
אדב(바다), 지어내다(feign), 왕상 12:33; 느 6:8.
דוב(바자르), 흐트러뜨리다(scatter), 단 11:24; 느 6:8.
קלב(발락), 황무(waste), 사 24:1; 나 2:10.
טעב(바가트), 차다(to kick), 신 32:15; 삼상 2:29.
דתב(바타르), 쪼개다(to divide), 창 15:10.
תוהבג(가브흐트), 높은, 고상한(lofty), 사2:11, 17.
יחר(드키), 실족으로부터(from falling), 시 56:13; 116:8.
קחד(다챠크), 부딪히다 또는 괴롭히다(thrust or vex), 삿 2:18; 욜 2:8.
עמד(다마그), 눈물흘리다(weep), 렘 13:17.
קנח(차나크), 목매다(hanged), 삼하 17:23; 나 2:12.
ממח(차삼), 입에 망을 씌우다(muzzle), 신 25:4;겔 39:11.
רמח(차세르), 궁핍, 가난(want, poverty), 욥 30:3; 잠 28:2.
תונבשח(키쉬바노트), 기계(engines), 대하 26:15; 지으심(inventions)
전 7:29.
ששח(카솨슈), 꽃의 티끌(chaff), 사 5:24; 33:11.
ןיט(틴), 진흙(miry), 단 2:41, 43.
ןוי(야웬), 수렁의(miry), 시 40:2: 수렁(mire) 시 69:2.
מרי(야라트), 패역한(perverse), 민 22:32; 욥 16:11.
לבב(카발), 착고 고랑(fetters), 시 105:18; 149:8.
אולב(클로), 옥(prison), 렘 37:4; 52:31.
חמב(카사흐), 작별하다 자르다(cut down), 시 80:16; 사 33:12.
נעל(라에그), 조롱하는 자(mockers), 시 35:16; 사 28:11.
תרתחמ(마테레트), 꿇고 들어오다(breaking up), 출 22:2.
קלמ(말라크), 비틀다(wring off), 레 1:15; 5:8.
הממשמ(마스테마), 원한(hatred), 호 9:7, 8.
הרשמ(미스라), 정사(government), 사 9:6, 7.
חננ(낙가흐), ∼을 받다(push), 출 21:29, 36.
הדנ(나다), 내쫓다(cast out), 사 56:5 멀다(put away) ; 암 6:3
שחנ(나차슈), 사술(enchantment), 민 22:23; 24:1.
רינ(니르), 갈다 기중하다(to break up), 렘 4:3; 호 10:12
תבנ(니코트), 보물(precious things), 왕하 20:13; 사 39:2.
עקנ (나카그), 싫어하다(alienated), 겔 23:18; 22:28.
ףשנ(나솨흐), 일으키다 불다(to blow), 출 15:10; 사 40:24
ףחמ(사차흐), 쓰러지다(to sweep away), 잠 28:3; 렘 46:15.
השרפ(파라솨), 수효(sum), 에 4:17; (declaration) ; 에 10:2
םינינצ (츠니님), 가시(thorns), 민 33:55; 수 23:13.
שומק(킴모슈), 엉컹퀴, 찔레(nettles), 사 34:13; 호 9:6.
למק (카말), 시들다(wither), 사 19:6; 3:9(marg).
שאר (레슈), 빈궁(poverty), 잠 6:11; 30:8.
םפר(르파슈), 밟다(stamp), 단 7:7, 19.
בבוש(쇼베브), 패역한(backsliding), 렘 31:32; 49:4.
ἀϒϒϵῐον(앙게이온), 그릇(vessels), 마 13:48; 25:4.
ἀϒϵ(아게), 오늘(to-day), 약 4:13; 5:1.
ἀϒναϕο ϛ(아그나포스), 새로운(new), 마 9:16; 막 2:21.
ἀϒν ωσ ί α (아그노시아), 알지 못하는(not the knowledge),
고전 15:34 무식한(ignorance): 벧전 2:15
ἀϒοραῐος(아고라이오스), (the public place), 행 17:5 저자(baser sort); 19:38 재판날(law, αϒοραιοι, public or court days).
ἄδῃλος(아델로스), 보이지 않게(appear not), 눅 11:44
분명치 못한(uncertain) : 고전 14:8
ἄΦεσμος(아데스모스), 무법한(wicked), 벧후 2:7; 3:17
ἀΦλέω(아들레오), 경기하다(strive), 딤후 2:5.
αίϕνίδιος(아이프니디오스), 뜻밖에(unawares),
눅 21:34 홀연히(sudden): 살전 5:3.
ἀχάνϕινος(아칸디노스), 가시(thorns), 막 15:17; 요 19:5.
αχρασία(아크라시아), 방탕(excess), 마 23:25;
고전 7:5 절제못함(incontinency)
ἀλαξών(알라존), 자랑을 잘 하는 사람(boasters), 롬 1:20; 딤후 3:2.
ἀλαλάξω(알랄라조), 통곡하다(wailed), 막 5:38;
울리는(tinkling), 고전 13:1.
ἀναχαινόω(아나카이노오), 새롭게 하다(renew), 고후 4:16; 딤 3:10.
ἀναχα ίνωσις(아나카이노시스), 중생(renewing), 롬 12:2; 딛 3:5.
ἀνάπηρος(아나페로스), 병신(maimed), 눅 14:13, 21.
ἀναπολόϒητος(아나폴로게토스), 핑계치못하다(with excuse),
롬 1:230; 2:1.
ἀνατρέπω(아나트레포), 무너뜨리다(overthrow), 딤후 2:18;
엎드려 치는도다(subvert), 딛 1:11.
ἀνϵξιψνίαότος(아넥시흐니아토스), 찾지 못하다(past finding out), 롬 11:33; 측량할 수 없는(unsearchable), 엡 3:8(그 단어는 찾아낼 수 없는 또는 추적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ἀνφραχιά(아나드라키아), 숯불(the enemy’s fire),
요 18:18; 숯불(the friend’s fire), 요 21:9.
ἄνοια(아노이아), 분기, 어리석음(madness), 눅 6:11;
어리석음(folly) 딤후 3:9.
ἀνόμως(아노모스), 율법없이(without law), 롬 2:12(두번)
ἀνόσως(아노소스), 거룩하지 않으며(unholy),
ἀντάλλα ϒμα(안탈라그마), 바꾸다(exchange), 마 16:26; 막 8:37.
άντιμιαθία(안티미스디아), 보응(recompence), 롬 1:27; 고후 6:13.
ἀνωφελ ή ς(아노휄레스), 무익한(unprofitable), 딛 3:9; 히 7:18.
άξίνη(악시네), 도끼(axe), 마3:10; 눅 3:9.
ἀπειλ έω(아파일레오), 위협하다(threaten), 행 4:17; 벧전 2:23.
ἀπεχονομαι(아페크뒤오마이), 벗다(put of),
골 3:9; 벗어버리다(spoil), 골 2:15.
ἀποβολή(아포보레), 손상(loss), 해 27:22; 버리는 것(casting),
롬 11:15.
ἀποχαραοοχια(아포카라도키아), 고대하는 바(earnest expectation), 롬 8:19; 빌 1:20.
ἄποχυέω(아포퀴에오), 낳다(bring), 약 1:15(자식을); 보다(beget),
약 1:18.
άπόλαυσιϛ(아폴라우시스), 누리다(enjoy), 딤전 6:17; 히 11:25.
ἀποφρίξομαι(아포훠리조마이), 갈라서다(depart), 행 15:39;
계 6:14.
ἀρσενοχοίτηϛ(아르세노키테스), 남색하는 자(sodomites),
고전 6:9; 딤전 1:10.
ἀσβέω(아세베스), 경건치 아니한(live ungodly), 벧후 2:6; 유 15.
ἄσπονδο ϛ(아스폰도스), 앙심깊은(implacable), 롬 1:31;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truce-breakers), 딤후 3:3.
ἀστειο ϛ(아스테이오스), 매우 아름다운(exceeding fair), 행 7:20; 아름다운(proper), 히 11:23.
ἀστήριχτο ϛ(아스테리크토스), 굳세지 못한(unstable), 벧후 2:14; 3:16.
ἀστορϒο ϛ(아스토르고스), 무정한(without natural affection),
롬 1:31; 딤후 3:3.
ἀσχημονέω(아스케모노에오), 무례히 행동하다(behave unseemly),
고전 7:36; 8:5.
ἀσχηο σ ύνη(아스케모쉬네), 부끄러운(unseemly), 롬 1:27; 계 16:15.
ἀτάχτωϛ(아타크토스), 규모없이(disorderly), 살후 3:16, 11.
ἀτμιϛ (아트미스), 연기(vapour), 행 2:19; 약 4:14.
ἀχρειοϛ(아흐러오스), 무익한(unprofitable), 마 25:30; 눅17:10
ἄχυρ ον(아휘론), 쭉쟁이(chaff), 마 3:12; 눅 3:17.
우리는 수(2)를 가진 의미를 조사하지는 않을뿐더러 수 2(two)가 갖는 의미를 세지도 않지만 그 두 개가 이름지워진 곳의 의미를 조사해 보자.
렘 18:1 – 4의 토기장이의 두 그릇이다
(THE POTTER’S TWO VESSELLS OF JER, 18:1-4)
그가 만든 첫 번째 그릇은 상하였고 두 번째 그릇은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만들 “다른”(another) 그릇이었다.
문맥으로 보이 이것은 이스라엘이 몰락했지만 회복되며 나뭇가지처럼 잘리었지만 곧 접목될 것이며 스스로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찾게 된다는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커다란 차이가 신구약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 것은 상처입고, 흠이 없지 않으며, 오래되고 없어져가는 것이지만(히 8:7, 8, 13,; 10:9)
두 번째 것은 “더 나은 언약,” “새롭고,” “세워진” 것이었다(히 8:6, 8; 10:9, 10, 16, 17).
옛 율법은 “약하고” “무익한 것”이지만(히 7:18; 10:6, 9) 은혜의 율법은 “다가 올 좋은 것”이다.
“첫 사람”은 훼손되었고(창 2:7; 3:19)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하지만 “두 번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시다(고전 15:47). 첫 아담은 죽음으로 운명지어지지만 마지막 아담은 영원히 계속해서 산다.
몸(Body)은 타락으로 훼손되었고 죽음과 락에 종속되어졌으나 부활할 때에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만들어질 것이다(요일 3:1-3; 빌 3:21; 롬 8;23; 고전 15:42-49).
저주 아래 있는 옛 피조물은 훼손되었고 몰락했다(창 3).“새 하늘과 새 땅”은 공의롭게 세워졌고(계 21:22), - 사실상 커다란 차이가 있다. “거기는 밤도 없고,” “태양도 필요치 않으며,” “더 이상 슬픔도 없고.” “더 이상 저주도 없고,”더 이상 죄 혹은 고통 혹은 죽음도 없다. 오 얼마나 경이로운 차이인가 ! 그리고 이것은 영원무궁하다. “그는 첫 번째 것을 없애시고 두 번째 것을 세우실 것이다.”“주를 찬양하라!” 반역적인 이스라엘의 마음은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주어진다. “사용하므로 멸망하게 되는” 율법은 하나님 주신 그리스도에 의해 대치되었다. 인간은 몰락하고 잃어 버렸지만 영원한 구속으로 구원됐다. 비천한 몸은 부패케 되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영광 속에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두 개가 있는 곳에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차이가 좋은 의미오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압제나 방해로 될 수도 있고 혹은 상호교제와 상호협동이 될 수도 있다. 레아와 라헬이 기록된 룻기 4:11을 보라 “이스라엘 집을 세운 두 사람” 그것은 사도의 직분과 봉사를 속담과 같은 “두 사람씩”(two and two)이 될 수도 잇다. 또 세례와 주의 만찬의 커다란 표적과 상징이 되는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연합이 될 수도 잇다.
시 89:19에 기록된 구세주이며 전능한 구원자는 특별히 “다름(other)” 것을 나타낸다.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여라” 했다.
두(2) 인격-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을 가진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이다. 참으로 완전한 인간이다. 하지만 오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 “노동에 대한 좋은 보수를 받기 때문에 둘은 하나보다 낫다. 그들이 넘어진다면 하나가 그 동료를 일으켜 세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가 넘어졌을 때 홀로 혼자인 사람에게는 화가 된다.”
거기에는 여전히 “다른“ 것이 있지만 그 곳에는 미움 대신에 ”도움“이 있다. 둘은 더 이상 다른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둘이다, 왜냐하면 ” 두 사람이 합의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
두 증거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지해 주고 강하게 하고 확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7, 18). 또한 율법에도 기록되었다. “두 증인 혹은 세 증인의입으로” 사실이 세워질 것이다(민 35:3; 신 17:6; 19:15; 마 18:16; 고후 8:1; 딤전 5:19; 히 10:28). 율법 전체는 “두 계명”에 의존해 있다(마 22:40).
하나님 자신의 계시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구약과 신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충분한 증거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함 !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인격이 특별히 충성된 증인으로 불리운 것을 알 수 있다(계 1:5). 충성된 증거와 연관된 숫자 이(2)의 다른 예도 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 진리의 말씀에 두 충성된 증인이었다. 충성되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그러나 충성된 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한다(민 13:30, 31). 그리고 6+0만 중에 이 두 사람만이 그 땅을 유업으로 소유하였다. 오늘날도 역시 충실한 증거는 다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수의 증거는 과거의 정탐꾼들의 것만큼 오늘날도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홀로 진실된 것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그 두 사람의 증거이다. 사람의 말에 귀을 기울이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주목하는 귀를 가지고 오늘날의 배교시대에 굳게 설 수 있도록 이것이 용기를 북돋아 준다. 전체 회중이 우리를 대항해 반대한다 할지라도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공중에서 주님과 만나게 되기를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비밀로 여호와의 충실하심을 가지고 항상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라.
다음은 꼭 두 번 나타나는 증거에 관한 특별한 언급을 갖는 주목할만한 단어들이다. 예를 들면
άληϴϵύω(알레데우오), 참된 말(to tell the truth), 갈 4:16; 참된
것을 하여(to speak the truth), 엡 4:15.
άμετάθϵτος(아메타데토스), 변치 못할(immutable), 히 6:18; 변치 못할 (immutability), 히 6:17.
άναχϵφαίοομαι(아나케활라이오마이), 다 들었다(comprehend),
롬 13:9, 통일되게 하려하다(gather together in one), 엡 1:10.
βϵβαίωσις(베바이오시스), 확정(confirmation), 빌 1:7; 히 6:16.
χϵράια(케라이아), 일점 일획(tittle), 마 5:18; 눅 16:17.
νομοϴϵτέω(노모데테오), 율법을 받았으니(received the law),
히 7:11; 세우신(was established), 히 8:6.
άμϵταμέλητοϛ(아메타멜레토스), 후회없이(without repentance),
롬 11:29; 후회할 것이 없는(not to be repented), 고후 7:10.
έϒϒράφω(엥그라포), 쓴것(written in), 고후 3:2, 3.
διχαίωσιϛ(디카이오시스),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
롬 4:25; 5:18.
다음에 이어서 계속.....(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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