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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6 - 전쟁으로 날을 지샌 동주(東周) 전국(戰國)시대
전국(戰國)시대는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周) 왕실이 공인한 403년 이후 시기이니, 주 왕실이 직접 제후국으로 봉한 진(晉)
나라가 내부의 하극상으로 분열함으로써 봉건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한 것인데,
강한 국가만이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춘추(春秋)시대는 공자의 책명 “춘추(春秋)”에서 따온 이름이고 전국(戰國) 시대는
전한시대의 저술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따온 이름인데,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BC 770년으로 부터 BC 403년에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 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전국(戰國)시대는 BC 403년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
까지 인데 춘추(春秋)는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
에서 유래되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
에서 유래되었으니...... 모두 그 시대에 저술된 책의 이름을 딴게 공통점입니다.
춘추(春秋)시대에 대국 진(晉)나라에는 조씨, 위씨, 한씨, 지씨, 범씨와 중행씨의 6경(卿)이
있었는데 기원전 458년에 지씨, 조씨, 한씨, 위씨가 연합해 범씨와 중행씨의 땅을
나누어 가졌고, 기원전 453년에 조씨, 한씨 및 위씨가 다시 지씨를 멸하고 땅을 나누어
가지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러시아가 폴란드 땅을 나누어 가진 것을 연상 시킵니다?
세 가문에 의해 진(晉)나라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위사, 조적 및 한건은 위(魏)나라, 조(趙)나라
및 한(韓)나라를 세우니 이를 삼진(三晋)이라고 하는데, 제나라 전도자가 죽은후 전(田)씨가
내란을 일으키니 삼진은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기원전 404년에 제나라 장성까지 쳐들어가자
주(周)나라 위열왕은 기원전 403년에 삼진을 정식 제후로 책봉하니 전국(戰國)시대의 시작입니다.
전국책의 동주책 1권의 첫이야기는 주나라 천자의 상징물인 구정(九鼎)을 제후국인 진나라와 제나라
가 요구하고 주나라 대부 안율이 이를 지켜내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사마천은 사기의 전국시대
역사표인 육국연표 서문에서 제나라의 전상이 제 간공을 살해하고 진(晉)나라에서는 대부
조(趙), 위(魏), 한(韓)씨가 실권자 지백을 공격해 제거했는데 천자국 주나라가 이를 묵인했으며.....
제나라와 진나라의 제후를 끌어내리고 제후가 되었는데 주나라가 공인해준 사건을 주목해 육국연표
의 시작을 진나라 내전이 있었던 진나라 여공공의 즉위년인 기원전 476년을 기준으로 하며, 자치
통감에서도 기원전 422년 진(晉)나라의 멸망을 전국시대의 기준점으로 삼았으니 기원전 400년
대에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되고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마저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한·위·조가 후(侯)라고 칭해졌다는 것은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주왕이 스스로 종법제
(宗法制)를 번복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강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王)을 칭하게 됨으로
명실공히 주 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중원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균형을
유지시켜오던 봉건제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해 결국 붕괴되어 버리는 시발점이 됩니다.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니
이 시기부터 제후들이 주나라로 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으며, 거기에 춘추시대 초창기 부터 주나라의 권위에 불복하던 초나라도
그 동안에 140여개국이었던 제후국이 모두 멸망하니 7개 강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니 문후(文侯)· 혜왕(惠王) 은 인재를 구하여 관개 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
함으로 인해 비로소 중원은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습니다.
그 중 진(秦)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強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되니 소위 합종연횡
(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또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는데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당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됩니다.
전국 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
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하니 전국 시대가 되자, 사(士)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이니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
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군제(軍制)에 있어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 마다 군주에 의해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으니,
서주(西周)로 부터 춘추 시대에 걸쳐 정치· 군사 양면에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비해 전국 시대는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니....... 군주권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이 형성됩니다.
이시기에는 다른 나라 출신자들이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됐으니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모두
다 그러했는데, 춘추 말기에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자기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고 하나의 나라를 초월해 중원 전체의 공감대 와
유대감을 조성하는 공통된 문화·사상이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오로지 자기의 영지(領地)와 그 이익관계 속에서만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한
되고 단절된 당시 대부 계층의 보수적 시대관 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춘추 전국 시대의 중국사회의 일대 변혁 및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의 현저한 발달이었으니 이러한 생산력의 발달 요인은 춘추
시대에 시작된 우경(牛耕)의 보급과 전국시대에 보급된 철제 농구의 사용이었습니다.
철제농구 이전의 농구는 거의 석제나 목제였으며, 그것은 토질이 부드러운 황토지대에서의
경작에는 그런대로 쓸 수가 있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새로 경지(耕地)를 일굴 때는 극히
비능률적인 농구였으니, 이 곤란을 타개하며 개간을 용이하게 하고 심경(深耕)에 의한 토지
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준 것이 철제농구이며 그 계기로 농업은 놀랍게 진보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 시대의 전반인 기원전 6, 7세기경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니, 이때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명’ 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사업은 꽤 대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괭이, 삽, 가래 같은 농구의 주조는 전국 시대에 들어와서 발달된 것 같습니다.
우경과 철기가 보급되어 생산이 부국 강병의 근본으로 장려되자...... 이제까지 돌보지 않던
황무지까지 개척되며, 관개용 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공사가 일어났는데 철기(鐵器)
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습니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여러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팔아
큰돈을 벌었으니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는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통관세를 필요로 하는 국경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없는 것이었으며 국경이 없는 중원의 통일을 이면에서 추구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습니다.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에서 보는바와 같이, 분립한 강국들이 서로 대립·
항쟁하는 와중에서도 문화, 경제의 면에 있어서는 이미 중원이 하나의 세계로 성립되어 있었으니
춘추시대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이 강한 문자에는 지방색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진 문자에는 상당한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춘추시대에는 한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그 조상으로 부터 저주받는다고 생각해고 점령해도 완전히 멸해
버리는 일은 많지 않고, 멸망해도 부흥하기도했지만 전국 시대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으니,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
되어 갔는데 사기의 육국연표 8개 나라중 주나라를 뺀 7개의 나라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 부릅니다.
진(秦) 왕실의 성은 영(嬴)이고 수도는 함양인데 기원전 900년 주의 효왕(孝王)을 시중
들던 비자(非子)가 영(嬴) 이라는 성을 받고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으니, 풍속적
으로는 중원 제국(諸國)과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인데 진후(秦侯)는 서융(西戎)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습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등 타국 출신자를 등용하여 서융을 토벌해
패자가 되었고,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등용해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났으니..... 상앙의 변법 운동으로 진은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습니다.
소양왕(昭襄王) 때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白起)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번이나 승리를 거두
었고 범저(范雎)를 등용하니 원교근공(遠交近攻) 책략으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운 한·위·조를 공격하면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소양왕은 진언
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해
장평전투에서 조군을 격파해 포로 40만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립니다.
조(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나라(晉)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며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 전술을 도입한
나라이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수 있었으나 기원전 228년 진시황제에 침공을
받았고 이때 멀리 대나라로 쫓겨가 대(代)나라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시황제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주 목왕(周穆王)의 신하인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으로 봉해진 후에 조씨(趙氏) 를
칭하였고 진나라(晉)의 신하가 되었는데, 진 문공(晉文公)의 측근인 조최가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아들 조돈이 집정일때 진 영공을 죽인 종제 조천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조삭 사후에 조씨 가문은 극씨와 난씨의 참소로 제거되었습니다.
이후 조무가 진 경공 17년 기원전 583년에 복권되어 춘추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로 다스리는
육경(六卿)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기원전 456년 지씨 일족의 수장인 지요가 한씨, 위씨 일족을
거느리고 조씨 가문을 멸족하려 하자 조무휼은 한호, 위구에게 말하기를 "지씨는 탐욕스러워,
조씨가 멸족 된 뒤에는 당신들 차례다" 라고 말하니 세 가문에 역공당하여 지씨 가문은 멸망합니다.
조(趙)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 보다도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고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했는데,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로 중국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형태였고 말을 타고 싸우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조(趙)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싶었
으니 이에 실행하고자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혔고 말에 직접 걸친
훈련하였는데, 조나라의 경대부들은 오랑캐 옷이라며 반발하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됩니다.
기원전 298년 조(趙) 무령왕은 왕위를 혜문왕에게 물려주자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의 후계 다툼이 일어났으니 그 일로 무령왕이 유폐되었고 굶어죽었는데, 조나라
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秦)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이 되었지만 인상여와
염파, 마복군 조사와 같은 명장들이 등장해 당분간 버티지만 결국 인상여가 사망합니다.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에게 대패해 조나라 병력의 대부분
을 잃었고 급격하게 약해졌으니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군이 수도 한단에
진군하자 백성이 굶주리고,아이들도 죽어가는등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조나라의
백성이 일치단결하자 전국(戰國) 4공자 중에 한 사람인 재상 평원군이 위나라의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에게 원군을 요청해 지원군이 오자 진(秦)나라군을 격퇴합니다.
장평 전투 이후에는 군사상 쇠퇴한 조나라이만,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으니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名家)를 대표하는 인재인 공손룡과 음양가를 대표하는 인재인
추연이 있었으며, 조나라 출신의 학자로는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 종횡가, 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龐煖)이 있었습니다.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렀는데, 장평 전투에서 패배한 효성왕도 유학자 순자와 초나라의 출신 병법가
임무군(臨武君)을 불러 군사에 대하여 물어보는등 인재 등용에 적극으로 진력
했으며 유류왕 때에는 흉노에서 국경선을 지킨 명장 이목이 있어 진(秦)나라군을 격퇴합니다.
진(秦)나라의 공격을 막은 장수로는 초나라의 항연과 이목 두명 뿐이었지만 이목도 유류왕이 총신
곽개의 참언을 받아들여 죽이자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해 수도
한단이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했는데, 그후 왕족 조가(趙嘉)가 대(代)라는 지역에 피하여 대왕
(代王)을 칭하여 조나라를 재건했지만 대왕의 조나라도 연나라와 함께 기원전 222년에 멸망합니다.
진시황이 칠국을 통일하기 전의 중화 인구는 4,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인구 밀도는 문명 개척이 진전돼 있던 중원지역에 집중되었고, 이 당시에
강남 땅은 아직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아서 인구밀도가 비교적 낮았으며
당시 중화 인구의 상당수는 조, 위, 제 3국이 위치한 중원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의 칠웅 가운데 하나로 진(晉)
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으며 토지가 사방 일천리에 달했으니, 춘추전국시대
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로 갑병 30만과, 말 오천필, 전차
육백승을 낼수 있었으니 전국 7웅중 국토가 월경지가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위나라의 시조는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인 필공 고(畢公高)이니 아버지 주 문왕을
비롯한 주나라의 역대 군주들이 묻혀있는 왕릉이 있는 곳이 필나라였고, 그 곳
을 무왕의 아우 고(高)가 필나라의 제후로 봉해져 필공이라고 불렸는데 그후
춘추 시대에는 필공 고의 후손인 필만(畢萬)이 필나라를 진나라(晉)에 바쳤습니다.
나라를 바친 후에는 진(晉)나라로 가서 일족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진나라의 공족
(公族) 환숙이 다스렸던 곡옥(曲沃)이었고, 환숙의 손자인 무공(武公)이 필만
을 등용하니 신하가 되었는데 그 뒤에 헌공(獻公) 밑에서 군공을 세워
위나라(魏)를 하사받으니 이후 필만은 위만(魏萬)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위씨 가문은 필만의 손자 위주(魏犨) 때부터 진(晉)나라 내부에 세력을 갖게 되었고, 춘추시대
말기 위서(魏舒) 때는 진나라의 육경(六卿)이 되었는데, 기원전 453년 위구(魏駒)가
진나라 육경 중에 하나인 지씨(智氏)를 멸망시켰고 손자 문후(文侯)때에 주나라 왕에게
제후로 임명되었으며 한나라(韓), 조나라(趙)와 함께 진나라를 영토를 삼등분으로 갈랐습니다.
기원전 445년 위 문후가 위씨종주가 되면서 내정에는 이극(李克), 서문표(西門豹)
와 군사에는 오기(吳起), 악양(樂羊) 등 신하들을 등용하여 주변국 보다 위나라
의 국력이 강성하게 되어 칠웅 중 최강 국가가 됐으며, 기원전 403년 위나라는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주나라 왕이 제후로 임명되었으니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기원전 396년 문후가 사망하고 아들 무후가 위나라 군주로 즉위한후 하서태수(河西太守) 오기
가 초나라(楚)로 망명했지만 무후는 뛰어난 군주라 오기가 없어도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
지만 나라 주변에는 무혈입성으로 위나라를 확장할수 있는 약한 세력이 없었고, 위나라는
강력한 나라만 상대하느라 전쟁이 끊임 없이 계속되었고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370년 무후가 사망하고 아들 위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다스릴때는 제나라의 장수
손빈(孫臏)이 공격해오자 태자 신(太子申)과 장수 방연(龐涓)을 보내었고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군은 제나라군에게 대패하였는데, 공숙좌(公叔座)의 건의로 내친 상앙이 진나라(秦)
로 갔고 진(秦)나라는 그를 등용하여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니 진나라는 국력을 강력해집니다.
기원전 340년 상앙이 이끄는 진(秦)나라군에게 대패하여 황하 이서 지역을 잃었고
진나라를 두려워하며,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동쪽 지역인 대량(大梁
카이펑 開封)으로 천도하였으며 천도를 한 이후는 별칭인 양나라(梁)로
대신 불렸으니, 문후가 패자가 된 이후에 유지하였던 패자의 자리에서 내려갑니다.
그 후에는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濟)가 과거에 모욕하였던 식객인 범저(范雎)
가 진(秦)나라로 망명하여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를 시행할 것을 요구
하였고, 범저가 진나라 신하로 등용되자 진나라가 위나라에 압박하며
위나라는 상앙 처럼 범저를 중용하지 않아서 진나라에 시달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위공자(魏公子) 위무기(魏無忌)가 기원전 247년에 육국(六國)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秦)나라 군을 물리쳤으며 후에 신릉군(信陵君)으로 봉작을 받고,
전국시대의 사공자에 꼽힐 만큼 거물이 된 신릉군은 명성을 얻었는데 그 후에
멋대로 위나라 군대를 함부로 움직였다고 규탄을 받고서 조나라로 도망을 칩니다.
후에 위나라에 소환되어도 위나라의 높은 관리가 되는 것을 멀리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술 때문에 사망하였다는데, 이후로는 위나라는 진(秦)나라에게 저항을 못하고
차례로 영토가 축소되었으니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한데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
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으니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
지만 그러나 전국(戰國)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德)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습니다.
즉,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인데,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으니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한나라(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는 전국시대의 칠웅(七雄) 의 하나로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이었으며 다른 명칭으로는 소한(小韓)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춘추
오패의 하나 진(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허난성(河南省), 서쪽으로는 후베이성(湖北省)에 이르렀고, 영토의 길이
가 구백리에 달했다는데 또한 갑병 30만을 낼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으나 기원전
239년 진나라(秦)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곧이어 기원전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韓王安)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합니다.
한나라 조상은 춘추 시대 진나라(晉)의 공족이며 진 목후(晉穆侯)의 아들인 환숙(桓叔)의 아들 한만이
한원(韓原)에 봉해졌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희성(姫姓)을 가졌던 일가들이 한씨(韓氏)를 칭하였고,
성씨와 땅이름에서 지칭되었는데 한원에는 주나라 선왕때 분봉된 희성 제후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한나라는 50여년 동안 존속했다가 진(晉)에게 멸망했고 바로 그 지역을 영지로 받은 것이 한만입니다.
기원전 620년 한만의 고손자 한궐(韓厥)이 사마로 등용되었고 군락이 뛰어났으니 과거에
신세졌던 조씨(趙氏) 일족의 재부흥에 힘을 보태었고, 그 여망으로 기원전 573년
한궐이 정경(正卿)과 중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어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 기원전
541년 아들 한기(韓起)도 정경이 되면서 정치를 관장하는 대신인 육경(六卿)이 되었습니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한호(韓虎) 가 조씨, 위씨(魏氏) 일족 등과 함께... 육경 중에
강력한 가문인 지씨(知氏) 일족을 기원전 453년에 멸망을 시켰으며 후에
위씨, 조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으니 그후 기원전 403
년에 주나라로 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아서 비로서 전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기원전 375년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을 시켰지만 전국 칠웅 중에 최약체라 서쪽 진나라
(秦)의 침공에 떨고 있었지만 신불해(申不害)을 재상으로 발탁한 한 희후(韓喜侯)의
치세에는 국내도 안정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이어서 즉위한 한 선혜왕은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고 재상 신불해가 죽은 후에는 다시 진나라의 침공에 시달립니다.
한나라의 패망을 우려했던 공자 한비(韓非)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을 저술하였으니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韓非子) 인데, 그러나 한비의
주장은 모국인 한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왕 영정(嬴政)이 한비자에
관심이 있었으니 한나라는 역으로 이용해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냅니다.
진나라가 관개 사업을 하도록 해서 국력을 쇠퇴시키려고 하였지만 수로는 후에 정국거(鄭國渠)로
중국 고대 3대 수로 중에 하나가 되어 진나라를 풍요롭게 하였는데,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함락되어 6국 중에 가장 빨리 멸망하였고, 한나라의 영토 전체가 영천군이라는 새로운 진나라
행정구역이 되었으니 기원전 226년 한나라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당합니다.
제(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의 춘추 오패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산둥 지방이며 수도는 임치인데, 주(周)나라 문왕이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
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나 당시 동이(東夷)라고 불리는 이민족이 이 지역에 있었으니 영지를
하사한 것과 다르게 태공망 강상에게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할 것을 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강태공은 제나라 제후가 되어 현지 풍속에 맞춰 정치를 집행하여 안정시켰는데 관숙(管叔)과 채숙의
반란후, 성왕은 "동쪽은 바다에 이르러, 서쪽은 하수, 남쪽은 목릉에 이르러서 5후 9백이 죄를 범했
을 경우 토벌해도 괜찮다." 라고 명했으니 영토를 확대해 춘추 시대 초기에는 동쪽의 강국이 되었
는데, 제나라는 바다를 접하여 있어 소금의 생산을 하였고 철이 나오기 때문에 자원이 풍족했습니다.
이후 제15대 군주 환공 시대에 관중을 등용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통제하였고, 남쪽의
초나라의 위협에 대항했으며 기원전 667년 환공은 주나라 혜왕에게 패자로 인정되었으니
춘추 오패의 한명인데, 사후에 아들들 간의 후계 싸움이 일어나 나라는 혼돈에 빠졌으니
환공이 태자로 지목한 효공 대신에 환공의 총신 역아와 초가 지지한 무궤가 뒤를 이었습니다.
무궤는 효공을 앞세운 송 양공 주도의 제후연합군과 국내의 호응에 쫓겨나 죽었으나 소공· 혜공· 의공
세 형제가 효공의 즉위를 저지해 송 양공이 재차 침입하고서야 효공은 즉위할수 있었지만 패자의
권위는 잃었으니, 효공 사후에 효공의 아들을 또 다른 환공의 총신이며 소공의 당인 공자 개방이
죽이고 소공이 즉위했으나 죽은후 아들 사가 즉위했지만 의공이 죽이고 즉위하는등 혼돈은 이어집니다.
진나라 문공이 패자가 되고 제나라도 국력을 유지하였지만... 중원의 주도권이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초(楚)나라의 패자 쟁탈전으로 옮겨지니 서서히 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군주의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으며 특히 제나라 공실의 지파인 국씨, 고씨
, 최씨, 경씨와 제나라 밖에서 온 포씨와 진씨(陳氏) 등 6개의 가문의 힘이 강했습니다.
25대 장공 때, 재상 최저(崔杼)는 자신의 아내가 장공과 사통하였음을 알고는 장공을
시해하고 장공의 아우 경공을 세웠지만 후에 경씨에게 죽었으며, 기원전 532년
경공은 안영을 등용하고 군사 분야에는 사마양저를 등용했는데 기원전
672년 진나라(陳) 에서 공자 전완이 진나라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로 망명합니다.
전완의 후손들이 전, 손, 문, 설, 왕 등의 가문으로 창성하였으니 제 경공은 안영과 전양저
등의 명신에 힘입어 작은 패업을 이루었으나, 이 당시에 오히려 전씨는 제 경공의
실정을 틈타 민심을 사고 세력을 점차 강화했으니 이를 본 제나라 재상 안영은 진나라
의 양설힐과 대화를 나누면서, 규성 전씨 왕조가 제나라에 들어 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기원전 489년 경공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뒤엎고 제 도공을 임금으로 세웠으며, 전걸의
아들 전항은 도공을 죽이고 제 간공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제 간공은 총신 감지를 끼고 전항
과 대립했으나 전항은 감지와 간공을 죽이고 제 평공을 임금으로 세웠으며 이후 평공, 선공,
강공 3대를 걸치며 전항 - 전반 - 전백 - 전도자 - 전화가 이어가며 사실상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기원전 386년에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었는데 위왕이 행정 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며 왕을 일컬었고, 기원전 4세기에는 제 민왕이 진(秦)나라와
중국을 양분 동제, 서제를 일컬을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으며 또 송나라를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로 말미암아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를 앞세운 연합군 앞에 제 민왕도 살해당하고, 거(莒)와 즉묵을 제외한 전 성읍이
함락되며 멸망의 위기에 놓였는데, 민왕의 아들 제 양왕이 즉위해 항전을 이어 갔으며 전단
이 악의와 연나라 간을 이간시키고 새로 온 대장 기겁을 무찌르며 나라를 회복하는데 성공합니다.
양왕의 아들이 마지막 왕인 제왕 건이니 건과 섭정 후승은 진(秦)나라와 친교를 맺고, 다른 나라들이
차례차례 진나라에 망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는데, 마침내 일개 성읍국가에 불과한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망하고서야 위협을 느껴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침공
하자 제나라에는 이미 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으니..... 결국 제왕 건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합니다.
연나라(燕)는 중국 춘추 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로,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생 소강공(召康公) 석(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으니 북연(北燕)이라고 했는데, 당시는 언(匽, 郾)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으며 소공석
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북경 부근으로 옮깁니다.
이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으니 주민
은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는데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했으며,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후
멸망했으며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연나라 장공(莊公)은 이웃
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여 산융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으니, 산융
과 전쟁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
를 움직이게 하였으니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타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 뿐이었다는데,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서 일부 영토를 할양 받아서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하니 이 일로 인하여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기원전 334년경에 사기 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 라고 하였으니,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를 낼 수 있었으니 기원전 323년에 왕을 자칭합니다.
기원전 315년, 연왕 쾌(燕王 噲)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했던 일을 예로
삼아 재상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로 인해 태자 평(太子平)과 장군 시피(市被)가 거병하여 연나라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태자 평과 시피가 전사하고 이 틈을 타고 다음 해에 제나라가 태자의 원군을 자칭
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고 기원전 313년에는 연왕을 자칭한 자지가 살해되고 연왕 쾌가 자살합니다.
기원전 312년, 한나라에 달아나 있던 공자 직(연왕 쾌의 서자)이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
으로 연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연 소왕(昭王)이니, 소왕 때에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
(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 지역까지 1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확장하였고,
기원전 285년에는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와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킵니다.
기원전 226년, 연왕 희(燕王喜)의 아들 태자 단(太子丹)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의 손자 진무양
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진 시황제(秦始皇帝)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연왕 희는 요서와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자 연왕 희는 아들 태자 단을 죽이고 그 목을 진 시황제
에게 바치면서 선처를 구하지만 진 시황제는 연왕 희와 잔존 세력을 공격하여 연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한 고조 유방은 한날 한시에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향우이자 전우 노관(盧綰)을 장안후(長安侯),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는데 노관(盧綰)은 국경지대의 혼란이 자신의 장기집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흉노와 연계된 반란을 진압하란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진압되어버리는 바람에 흉노족에 투항해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던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봉해지나 그 해에 동호에서 죽었으며, 이 무렵 노관의 부장인 위만도 1,000
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 이후 도성을 공격해 위만조선을 세우는데, 위만 조선이
멸망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항이 한 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었습니다.
초(楚,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223년)는 후베이성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중의 하나로 군사력은 갑병 수십 만,
전차 천승(乘)과 기병 1만기를 낼 수 있었는데 국성이 미성 웅씨인 주나라의
제후국이며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비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됩니다.
초나라는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리는데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
이니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의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있었던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 등지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군주의 처음 작위는 자작이었으나 기원전 704년에 무왕이
왕을 자칭했고 전국 시대 말기 기원전 223년에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그 뒤 기원전 208년에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
기원전 202년에 초한전쟁에서 전한에게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에 초나라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전욱은 창의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은 축융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의 아들로
주 문왕때 계련의 후손 중에 육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초나라 웅씨들의 시조입니다.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은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해졌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으니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으로 정합니다.
서주 이왕 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 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으며, 그 이후
웅거는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서주 여왕이 즉위하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 칭왕을 그만둡니다.
기원전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는데 초나라는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으니,
기원전 822년에 웅순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은 가라앉았고, 내부 분쟁
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약오, 소오와 분모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강한 나라인 수나라와 어깨를
겨뤘으며, 기원전 741년 웅통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초 무왕으로 기원전 704년
웅통은 왕이라 칭하고 복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으며 기원전 690년 초 문왕은 도성
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에 소집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고,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가 조상인 축융과 육웅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으며,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고 기원전 626년 태자
(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초 목왕입니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으로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기원전 223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 과 왕 부추가 사로잡힙니다.
결국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는데 초한 쟁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워 초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의제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했고 항우도
한나라 유방에게 패망했으며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으니 이로서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