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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王建
936년 9월, 황산군(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의 마성(馬城), 이곳에서 후백제(後百濟)의 신검(神劍)이 고려의 왕건(王建 .. 877~943 재위 918~943)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삼한(三韓)은 다시 통일되었다. 900년에 견훤(甄喧)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워 '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를 연 지 36년만에, 그리고 676년에 신라(新羅)가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한 지 260년 만이었다. 그것은 신라(新羅)가 백제와 고구려 땅 일부를 정복한 형태의 '통일'보다 훨씬 완전한 통일이었고, 외세(外勢)의 힘도 빌리지 않은 자력(自力)에 의한 통일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다시 하나로 뭉친 한반도(韓半島)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다시는 갈라지지 않았다.
몇년 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 북녘의 문화유산전 '에 출품되어 화제를 모았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나신상(裸身像)이 정식적인 발굴이 아니라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비화(秘話)가 공개되었었다. 즉, 1992년 10월 북한당국에 의한 왕건릉(王建陵) 확장공사를 위해 포클레인 기사가 땅을 파 내려가던 중 지하 2m에서 석판이 나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하다가 포클레인 삽에 이 동상(銅像)이 걸려나왔다고한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전공인 서울대 노명호 교수의 저서 '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노명호 교수에 따르면, 왕건상(王建像)은 포클레인에 의해 끌려나오면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떨어지고, 여러 곳이 찌그러지는 손상을 입었다. 왕건상(王建像)은 출토 당시 표면에 비단 조각과 금도금(金鍍金)을 한 청동조각이 붙어있었는데, 출토 13일만에 평양(平讓)에서 조사단이 가보니 동상(銅像)을 깨끗하게 닦아 놓아 왕건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종(世宗) 11년 유교숭상(儒敎崇尙) 정책으로 땅 속에 묻힌 왕건상(王建像)은 북한 고려박물관에서는 금동불상(金銅佛像)으로 여겨졌으나, 위의 노명호 교수의 연구 결과 청년기(靑年期)의 왕건상(王建像)으로 밝혀졌다. 왕건상은 1429년에 제작되어 1992년 우연히 발굴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56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왕건상은 고려 왕실(王室)의 제례용(祭禮用) 상징물이었다. 현재 얼굴과 귀 등에 살구색 안료(顔料)가 남아 있는데, 채색(彩色)까지 마친 온전한 동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왕건상(王建像)은 발견 당시 단순한 청돌불상(靑銅佛像)으로 알려졌으나. 그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동상(銅像)으로 확인되었다. 즉, 문헌(文獻)의 추적 결과, 이 태조상(太祖像)은 951년 제작되어 개성 봉은사(奉恩寺)에 봉안되었고 이후 고려 전(全) 시기에 걸쳐 국가의례 때마다 주된 숭배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성리학(性理學) 제례법(祭禮法)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429년(세종 11) 개성 왕건능(王建陵) 옆에 매장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
예조(禮曺)에서 계(啓)하기를, '충청도 천안군에 소장한 고려 태조의 진영(眞影), 문의현(文義顯)에 소장한 태조의 진영 및 쇠붙이를 부어 만든 상(주상. 鑄像), 공신(功臣)들의 영정(影幀), 전라도 나주(羅州)에 소장한 혜종(惠宗)의 진영 및 소상(塑像), 광주에 소장한 태조의 진영을 모두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옮겨서 각 능(陵) 곁에 묻게 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10년 8월 1일
즉, 이 태조상(太祖像)은 951년경 조성되어 개성 봉은사(奉恩寺) 태조진전(太祖眞殿)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인데, 고려(高麗)가 망(亡)함에 따라 지금의 숭의전(崇義殿)이 있는 경기도 연천군 마전현(麻田縣)의 작은 사찰로 옮겨졌고, 주자학적(朱子學的) 제례법(祭禮法)에 따르려는 세종(世宗)의 의도에 따라 초상조각(肖像彫刻)이 목주(木主 .. 나무로 깎은 위패)로 대체되면서 세종 11년에 개성 왕건능인 현릉(顯陵)에 묻혔다.이 왕건상(王建像)은 나체(裸體) 조각만 남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옷을 입혔다고 한다. 발굴 당시 왕건상의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얇은 비단 천과 금도금(金鍍金)을 한 청동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왕건상은 나체(裸體) 조각으로 남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옷을 입혔다고 한다. 발굴 당시 왕건상의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얇은 비단천과 금도금(金鍍金)을 한 청동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위의 노명호교수는 조상제례에 옷을 입히는 조각상(彫刻像)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 고대 이래의 문화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왕건상은 ' 동명왕 어머니 '유화'의 소상(塑像)이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는 삼국사기(三國史期)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시조신상(始祖神像)의 특징과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왕건상을 전시할 당시 북한측에서는 ' 아무리 그래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인데, 나체(裸體)로 전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우리 박물관 측은 ' 문화재인 만큼 그대로 전시해야 한다'고 북한측을 설득하였으나, 결국 위 사진과 같이 예민한 부위에 하얀 천을 걸쳐놓고 전시(展示)하였다.
통천관 通天冠
이 왕건상(王建像)이 쓰고 있는 관(冠)은 중국의 황제(皇帝)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며, 이는 중국에서는 태자(太子)나 제후(諸侯), 나아가서 조선(朝鮮)시대 왕(王)들이 착용하던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르다. 이에따라 고려왕조가 건국(建國) 전기와 중기에는 황제국을 표방하였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즉, 통천관(通天冠)은 중국 진(晉)나라에서 시작되어 조금씩 형태가 변화하다가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인 621년 공포된 거복령(車服令)에서는 ' 24량(二十四梁) 통천관 '으로 제도화하게 되었다. 왕건상이 쓰고 있는 통천관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관(冠)에 붙은 8개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원형 형상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과는 구별되고 있다.
이 왕건상은 화려한 옥대(玉帶... 옥으로 만든 허리띠) 그리고 각종 비단천 조각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 비단천 조각에 대해서는 아직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옥대(玉帶)는 중국 송(宋)나라에서도 천자(天子)나 태자(太子)가 주로 착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건상(王建像)이 착용하고 있던 복식(服飾)도 황제의 복식(服飾)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외부 국가들을 포괄하는 영토개념인 ' 천하(天下)'를 사용하였다. 고려(高麗)에서 세계와의 관계를 규정짓는 천하관(天下觀)은 그 시대의 주요 외교, 국방문제 처리 방식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군주(君主)의 호칭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가 ' 천하의 중심국가 군주 '라는 의미의 천자(天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주변국과의 국제관계에서 고려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그려가 군주(君主)의 호칭으로 황제(皇帝)와 천자(天子)를 사용한 것은 건국(建國) 때부터 이다.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귀부(歸附 .. 스스로 와서 복종함)를 요청하면서 올린 글에 고려 태조를 천자(天子)라고 하였다. 본국에 화란이 장차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는데 다행히 천자(天子)의 광채를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데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여기서 천자(天子)는 경순왕의 임의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 고려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이외에 태조 왕건 시절에는 군주(君主)의 정령(政令)을 황제의 용어인 조(詔), 제(制) 등으로 하였고, 군주(君主)의 공식 복장을 천자(天子)의 색(色)인 자황색(紫黃色)으로 하였다.
고려시대에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한 사실은 조선(朝鮮)이 건국되어 고려사(高麗史)가 사대(事大)의 예에 어긋난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고, 모두 고쳐지기도 하였다. 논란 끝에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사실대로 기록하기로 결론이 났으나 본래 용어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도 있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칭제(稱帝) 관련자료는 이런 과정을 거쳐 남은 것이다. 황제국(皇帝國)과 제후국(諸侯國)의 용어 차이는 아래와 같다. 폐하(陛下) - 전하(殿下), 짐(朕) - 고(孤), 태후(太后) - 대비(大妃), 태자(太子) -세자(世子), 황후(皇后) - 왕비(王妃), 태황태후(太皇太后) - 대왕대비(大王大妃) 등이다.
관청의 이름과 장관 명칭도 다른데, 제후국(諸侯國)을 자처한 조선(朝鮮)은 이조판서, 호조판서, 이조참판 등으로 불렀는데 반하여 고려(高麗)는 중국과 같이 이부상서(吏部尙書), 호부상서, 이부시랑 등이었다. 태조 왕건 때부터 시작된 칭제(稱帝)는 성종부터 현종 초까지 중단된 적이 있으나, 고려 중기까지 이어졌다. 성종 초에 개혁적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인 최승로(崔承老)가 고려 왕실의 가계(家系)를 가리켜 황가(皇家)라 한것도 당시의 국가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고려의 군주(君主)를 황제로 인식한 것은 고려인뿐이 아니었다. 여진족(女眞族)에게는 고려의 군주를 천자(天子)나 황제(皇帝)로 지칭하는 관례는 뿌리 깊은 것이어서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나라가 처음 고려에 보낸 국서(國書)에서는 ' 대금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 大金皇帝寄書于高麗國皇帝 '라고 하여 고려의 군주를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고려는 국내와 자국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천자,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외부의 송(宋)과 거란(契丹)에 대해서는 왕(王)을 칭했다. 이러한 면에서 외왕내제(外王內帝)라 할 수 있으나, 주변의 강대국인 거란과 송(宋)이 고려의 내부적인 칭제(稱帝)를 알고도 문제삼지 못하고 사실상 인정한 셈이었다. 고려의 군주를 천자(天子)로 설정한 팔관회(八關會)에 많은 수의 송나라 사신이나 여진족이 참여하여 고려의 칭제(稱帝)가 널리 알려졌다.
고려 스스로 자신의 위상(位相)을 설정한 것이 주변여러 나라와 교류하거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고구려(高句麗)보다는 작았을지 모르나 그에 못지않은 국력으로 황제국을 칭하며, 스스로 천자(天子)가 되었던 우리의 강소국(强小國) 고려(高麗)이었다.
32 길상 32 吉祥
전술한 노명호 교수에 의하면, 이 왕건상은 발바닥을 비롯한 신체의 특징 10여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2길상(吉祥)에 해당하는 특징들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32길상(吉祥) 가운데 하나가 성기(性器)를 몸속에 감춤으로써 드러난 남근(南根)은 매우 작은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므로, 태조 왕건상은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상(佛像)이 갖추어야 할 32가지 모습이다. 인간은 갖출 수 없는 특징으로, 부처의 존엄성에 대한 구체적인 표지이다. 경전에 따르면 불신(佛身)은 반드시 32길상(吉祥)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부처의 존엄성이 감소되는 것들도 있다. 때문에 모든 불상(佛像)이 32길상(吉祥)을 다 갖추고 있지는 않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32길상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정유육발 (頂有肉髮) ..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2. 나발우선 기색감청 (螺髮右旋 其色紺靑) ..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3. 액광평정 (額廣平正) ..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 4. 미간호상 백여가설 (眉間毫相 白如珂雪) .. 눈 사이의 터럭상은 희기가 흰 마노 눈과 같다. 5. 첩여우왕 (睫如牛王) .. 속눈썹이 소의 그것과 같이 길다. 6. 목감청색 (目紺靑色) .. 눈은 검푸른 색이다. 7. 유사십치 (有四十齒) .. 마흔개의 이(齒)가 있다. 8. 치밀이불소 (齒密而不疎) .. 이가 빽빽하고 성글지 않다. 9. 치백여군도화 (齒白如軍圖花) .. 이가 군도화처럼 희다. 10. 범음성 (梵音聲) .. 대범천왕의 음성이다. 11. 미중득상미 (味中得上味) .. 맛 중에서 가장 좋은 맛을 얻는다. 12. 설연박 (舌軟薄) .. 혀가 부드럽고 얇다. 13. 협여사자 (頰如獅子) .. 뺨이 사자와 같다. 14. 양견원만 (兩肩圓滿) .. 두 어깨가 둥글고 원만하다. 15. 신량육촌 (身量六寸) .. 몸의 길이가 14뼘이다. 16. 전분여사자왕억 (前分如獅子王臆) .. 앞 가슴이 사자왕의 가슴과 같다. 17. 사아교백 (四牙皎白) .. 네 어금니가 희디희다. 18. 부체유연세활자마금색 (膚體柔軟細滑紫磨金色) .. 피부가 부드러우며 곱고 매끄러운데 자마금빛이다. 19. 신체정직 (身體正直) .. 몸이 바르고 곧다. 20.수수과슬 (垂手過膝) .. 손을 늘이면 무릎을 지난다. 21. 신분원만 여니구타수 (身分圓滿 如尼拘陀樹) .. 몸의 각 부분이 원만해서 니구타나무와 같다. 22. 일일모공 개생일모 ( 一一毛孔 皆生一毛) .. 하나하나의 털구멍에 모두 털이 나지만 모두가 한 터럭과 같다. 23. 신모우선상비 (身毛右旋上飛) .. 몸의 털이 오른쪽으로 말려 오른다. 24. 음장은밀 (陰藏隱密) .. 음경이 음밀하게 숨어 있다. 25. 비퇴장 (臂腿長) .. 넓적다리가 가지런하고 길다. 26. 창여이니녹왕 (脹如伊尼鹿王) .. 창자가 이니사슴왕 같다. 27. 족흔원정 족지섬장 (足昕圓正 足指纖長) .. 복사뼈가 둥글고 바르며 발가락이 가늘고 길다. 28. 족부융기 (足趺隆起) .. 발등이 솟아 올라 있다. 29. 수족유연세활 (手足柔軟細滑) .. 손발이 부드러우며 곱고 매끄럽다. 30. 수족지개망만 (手足指皆網輓) .. 손가락, 발가락에 모두 갈퀴가 있다. 31. 수족장중각유윤상 곡망원비 천폭구족광명조요 (手足掌中各有輪相 穀輞圓備 千輻具足光明照耀) .. 손발바닥 가운데 각각 바퀴 모양이 있는데, 바퀴테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천 개의 바퀴살이 있고 빛이 반짝거린다. 32. 족하평정 주편안지 (足下平正 周遍案地) .. 발바닥이 평평하고 반듯하여 두루 땅을 편안하게 한다.
마음장상 馬陰藏相
왕건상의 앉은 키는 84.7cm의 크기로 성인 남자의 그것과 거의 같은 크기인데 반하여 남근(男根)은 그 길이가 2cm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 적은 32길상(吉祥) 중 하나가 성기(性器)를 몸 속에 감춤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남근(男根)은 매우 작은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므로, 태조왕건상은 이에 해당한다. 음장은밀(陰藏隱密) 대신 마음장상(馬陰藏祥)이다. 같은 말이다.
마음장상(馬陰藏相)이란 수말의 생식기(生殖器)가 번데기처럼 줄어들어서 감춰져 있는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도서(道書)에 보면 제대로 수도(修道)를 한 남자의 생식기는 마음장상(馬陰藏上)의 형태로 변한다고 적혀 있다. 붓다의 신체적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음장상'이기도 하다. 도교(道敎)의 신선(神仙)들도 역시 경지에 이르면 '마음장상'이 된다고 한다.
그 원리는 환정보뇌(還精補腦)이다. ' 정액(精液)을 되돌려서 뇌(腦)를 보강한다 '는 이치이다. 정액(精液)을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고 머리로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정액을 밖으로 배출시키면 생명을 탄생시키지만, 안으로 끌어올리면 성인(聖人)이 된다.
도(道)를 통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이 생긴다고 한다.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이 그것이다. 타심통(他心通)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고, 숙명통(宿命通)은 사람의 전생(前生)을 아는 능력이며, 천안통(天眼通)은 멀리 보고, 천이통(天耳通)은 멀리 하늘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며, 신족통(神足通)은 축지법이라고 한다.
누진통(漏盡通)은 ' 새는 것이 다 끝난 경지 '이다. 좁은 의미로는 ' 성욕(性慾)을 극복한 경지 '를 말한다. 몸에서 정액(정액)이 새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콧물이나 땀도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누진통(漏盡通)이 되면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마음장상(馬陰藏像)이다. 남성의 생식기(生殖器)가 번데기처럼 줄어드는 현상이다. 생식기 쪽에 몰려 있던 양기(陽氣)가 머리 쪽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된다. 고려 태조상(太祖像)의 조그마한 생식기 모습은 '마음장상'을 표현한 것이다.
왕건의 출생과 통일 이전
왕건(王建)은 송악군(松嶽郡)에서 사찬(沙粲)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 용왕(龍王)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 낳았기 때문에, 대대로 왕씨(王氏) 일족의 겨드랑이에는 용(龍)의 비늘이 돋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당나라 황제 선종(宣宗)이 왕자 시절 한반도를 유람하다가 얻은 사생아(私生兒)가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왕가(王家)의 핏줄을 미화(美化)하기 위해 생겨난 전설로 여겨진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실려 있는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용(龍)이 송악(松嶽)의 남쪽에 집을 짓자 당대 도참(圖讖)의 제일인자이었던 도선(道詵)이 지나가다가 ' 이곳에서 성인(聖人)이 나시리라 '라고 외치고는, 아버지 융(隆)에게 '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귀띔했다. 도선(道詵)은 왕건이 17세 때 다시 찾아와 ' 너는 장차 왕이 될 운명이다 '라고 알리고, 병법(兵法)과 각종 술법(術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시대적 배경
왕건이 태어났을 때의 신라(新羅)는 이른바 ' 하대(下代) '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라 통일기, 융성하였던 활력과 지도력이 스러지고 중앙은 진골(眞骨) 귀족들끼리 ' 족당(族堂) '을 맺어 왕위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였으며, 지방은 호족(豪族)들이 중앙에 바칠 세금을 빼돌리고 자체 무장(武將)을 하면서 중앙으로부터 독립해 나가는 추세가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러한 추세를 더욱 급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841년, 장보고(張保皐)의 반란(叛亂)과 죽음이었다. 해로(海路)를 장악해서 세력을 쌓은 여러 호족(豪族)을 하나로 통합하여 해상제국(海上帝國)을 세웠던 장보고(張保皐)가 죽음에 따라, 그의 아래에 있던 호족(豪族)들이 저마다 독자행동에 나서면서 지방의 이탈(離脫)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왕건(王建)의 가문(家門)이었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형성한 왕건의 가문은 송악(松嶽) 일대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성강(禮成江) 일대에서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해군력(海軍力)과 재력을 갖춘 왕건 가문과 임진강(臨津江)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弓裔)가 896년에 손을 잡음으로써, 후고구려(後高句麗 .. 고려)는 후삼국(後三國)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출발할 수 있었다. 궁예(弓裔)는 왕건의 아버지 융(隆)을 금성 태수(太守)로 삼고 송악(松嶽)에 도읍한 다음, 갓 스무 살이던 왕건(王建)에게는 발어참성(勃禦塹性 .. 개성시 송악동에 있는 태봉,고려시대의 성곽) 성주(城主)의 직위를 주었다.
왕건과 궁예 王建과 弓裔
왕건(王建)은 궁예(弓裔)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특히 가문(家門)이 키워온 수군(水軍)을 이끌고 한강(漢江) 유역과 서해안 그리고 멀리는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공략하여 기세를 떨쳤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왕건의 용모를 '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 나왔으며, 턱이 살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라고 표현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임금에게 어울리는 관상을 모두 열거하다시피 한 것이므로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아무튼 단지 '부잣집 도련님'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지도력이 있었던 듯하다.
궁예의 휘하에서 왕건은 913년 덕진포(德津浦)에서 견훤(甄萱)의 수군(水軍)과 일대 대결을 펼쳤는데, 왕건은 화공(火攻)을 전개하여 후백제 수군(水軍)을 격파하고, 견훤이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치게 하였다. 계속해서 반남현(潘南縣)을 공격하여 수전(水戰)에 능숙하다고 '수달(水達)'이라는 별명이 붙은 견훤의 애장(愛將), 능창(能昌)을 사로잡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렇게 궁예는 왕건의 활약에 힘입어 견훤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그러나 중앙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바뀌고 있었다. 궁예(弓裔)는 본래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은 '후고구려'라는 국명(國名)을 904년에 마진(摩震)으로,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고쳤으며, 수도(首都)도 개경(開京 ..송악)에서 철원(鐵原)으로 옮겼다. 이는 나라가 넓어지고 왕건(王建)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궁예가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추진한 변화이었다. 수도를 옮겨 왕건의 본거지에서 빠져나왔을 뿐 아니라, 자신을 말세(末世)에 나타나 개벽(開闢)을 이룬다는 미륵(彌勒)의 화신(化身)이라고 일컫고, 국호(國號)도 불교적 의미가 짙은 이름으로 바꿨다.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거두어들이고, 스스로 신라(新羅) 왕실의 후예라고 하면서, 금성(金城 ..경주)를 ' 멸도 (滅都) '라고 부르면서 자신이야말로 타락한 신라(新羅)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시할 구세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세력이 커진 호족(豪族)과 장수(將帥)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왕건(王建)도 여기 말려들어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으나, ' 내 관심법(觀心法)으로 보니 네가 반역을 꾀하였다 '라는 궁예(궁예)의 힐문에 왕건은 오히려 '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역모(逆謀)를 꾸몄습니다. 죽여주십시요 '하자, 궁예가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벌(罰)은 커녕 상(賞)을 내렸다고 한다.
왕건, 궁예를 벗어나다
왕건은 죽음을 가까스로 모면하였지만 언제 궁예의 손에 숙청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고려(高麗)를 세운 절반의 지분(持分)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궁예(弓裔)가 독재(獨裁)의 길을 치닫고 있으니, 왕건으로서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왕건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박술희(朴述熙)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弓裔)를 내쫒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기록에는 당시 왕건은 반역에 반대하며 궁예(弓裔)에게 충성하려 했으나, 홍유(洪儒) 등이 간곡하게 부추기고, 부인 유씨(劉氏)가 '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없애는 일은 예부터의 일이다 '라며 손수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혀, 왕건은 마지못해 거사(擧事)를 하였다 '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는 왕건을 미화(美化)하려고 나중에 만들어진 말일 것이고, 실제로 왕건은 거사(擧事)에 앞서 수도(首都)에 ' 왕건이 왕이 된다 '라는 참언까지 퍼뜨리며 적극적으로 반역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예(弓裔)가 쫒겨나 죽은 다음 이흔암, 환선길, 진선 등의 반란이 꼬리를 물었고, 옛 백제 지역으로 고려에 복속(服屬)해 오던 공주(公州) 이북의 30여 성(城)이 한꺼번에 후백제(後百濟)에 투항한 점등을 보면 ' 궁예가 포악해서 널리 민심을 잃었고, 왕건이 대신 왕이 되자 온나라가 한마음으로 환호하였다 '는 기록은 현실과 거리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동안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을 바로잡고, 북방(北方)의 위협 (당시 발해가 쇠퇴하며 거란이 새로운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에 대비하느라 통일전쟁에서는 한발 물러 서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기세를 올렸다.
왕건과 궁예의 차이
우리의 역사에서 정치인 가운데 고려태조 왕건(王建)만큼 포용성 있고, 인내하면서 기다림의 미학을 알았던 인물은 드문 것 같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勝者)에 의하여 기록된 산물이라고 해도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넓은 가슴과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릴 줄 알았던 그의 투철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고려(高麗)라는 국호(國號)를 먼저 사용한 궁예(弓裔)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즉, 왕권중심(王權中心)의 정권을 지향하다가 결국 그의 수하에 있던 왕건(王建)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고 포악(暴惡)한 군주상(君主像)으로 그려져 왔다. 속담에 ' 이기면 관군(官軍)이고 지면 반군(叛軍) '이라는 말이 있듯이 객관적인 역사평가에 앞서서 역사는 자주 주관적인 승자(勝者)의 역사를 관대하게 서술하는 편이다.
출생부터 불운(不運)하였던 궁예(弓裔)는 삼국사기에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이 아버지라고 되어 있는 것도 관리출신도 아닌 왕위계승권을 가진 인물의 기록치고 부당한 서술이라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나아가 왕자 신분에 태어난 시기(음력 5월5일 단오)에 대해 좋지 않다고 일관(日官)이 죽이라고 한 것도 무언가 궁예를 처음부터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궁예는 강원도 영월의 세달사(世達寺) 등에서 승려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처음에는 기훤(箕萱)에게 의지하였으나 중용(重用)되지 않자 양길(梁吉)의 수하로 들어가 진성여왕 8년(894)에는 현재의 강릉일대를 점령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신라말기 장군(將軍)으로 처음 칭호를 사용한 이가 궁예(弓裔)이고, 그가 신라말기 혼란한 시기에 반란세력에 가담하여 3년만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것을 보면 그의 내외적(內外的)인 역량이 탁월하였으믈 말해주고 있다.
궁예와 왕건의 인연은 왕건의 나이 20세 때인 진성여왕 10년(896), 아버지 왕륭(왕륭)이 조건부로 궁예의 휘하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는 궁예 입장에서 보면 패서지역(浿西... 예성강 서쪽 지역)이 그의 관할권에 들어옴으로써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고, 왕건의 입장에서는 기득권(旣得權) 유지와 아울러 훗날을 준비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왕건의 주요 세력이 지방의 호족(豪族)세력이라면, 궁예는 중앙귀족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도 한 세기(世紀) 가까이 지난 성종 때 비로소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펼 수 있었듯이 왕건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지방의 군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호족세력을 배제하고는 국가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려 3대 국시(國是) 중에서 북진정책(北進政策), 숭불정책(崇佛政策)과 더불어 호족융합정책(豪族融合政策)을추진하여 각 지역의 호족세력과 혼인(婚姻)을 맺어 그의 세력으로 활용해서 고려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궁예(弓裔)는 호족세력의 독자성(獨自性)을 부인하고, 자신을 절대시하는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면서 지방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絶對王權)을 추구하다가 기득권(旣得權)의 상실(喪失)을 두려워했던 왕건 등의 반발에 의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왕건의 선택
하지만 왕건은 한반도 통일의 대업(大業)에 한시도 관심을 잃지 않았다. 새로 왕이 된 그는 후백제(後百濟), 신라(新羅)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선택하여야 했다. 궁예(弓裔)는 말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친하고 신라(新羅)를 압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견훤도 왕건이 궁예의 정책을 계승하기를 바랐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사신(使臣)을 보내 축하하고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반면, 신라(新羅)는 3년 뒤에야 겨우 사신을 보낼만큼 고려와 왕건을 불신(不信)하였다.
그러나 왕건의 선택은 신라(新羅)이었다.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서 군사적으로는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였던 신라를 껴안고, 강국(强國) 후백제에 등을 돌리는 선택은 짧게 보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927년의 팔공산 전투에서는 왕건이 직접 신라를 도우려 나섰다가 견훤에게 대패(大敗)하고 간신히 목숨만 구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은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했다. 신라가 부패(腐敗)와 분열(分裂)로 힘을 못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인구와 강력한 호족(豪族)들 그리고 천년 왕실의 전통과 문화가 있다. 장차 통일 한반도를 다스리려면 신라 호족들의 지지와 신라 왕실의 후광(後光)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왕건은 신라를 위해 후백제와 싸웠을 뿐 아니라 동해안을 통해 침략하는 북방민족까지 쫒아내주는 등 백방으로 신라를 도왔다. 그리고 기록에는 다소 모호하게 적혀 있지만, 928년 견훤(甄萱)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건은 ' 우리가 신라를 돕는 명분은 중국 춘추시대에 제환공(諸桓公)이나 진문공(晉文公)이 주(周)나라 왕실을 도운 대의(大義)와 같다 '고 밝힌 점을 보면 적어도 한동안은 신라의 왕을 주군(主君)으로 받들기까지 했던 것 같다.
왕건과 견훤의 차이
왕건은 위와 같이 물심양면으로 신라를 도와 주었다. 이러한 왕건의 태도는 백제의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신라를 공격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王妃)를 겁탈하였으며, 역대 왕들의 능묘(陵廟)를 약탈했던 견훤(甄萱)에 비해 왕건(王建)이 어떻게 신라인들에게 비쳤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군사적 재능에 비하여 정치적 식견이 모자랐던 견훤(甄萱)은 ' 적(敵) 중에서 약한 쪽을 먼저 쓰러트린다 '는 병법(兵法)에 따라 신라를 공격하고, 자신이 뽑은 사람으로 신라 왕을 삼고는 일부러 포악한 행위를 벌였다. 이렇게 하면 공포에 사로잡혀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는 나름의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수법은 공포에 싸인 쪽에서 대안(代案)이 없을 경우에나 유효하다. 천년 왕국 신라(新羅)의 자존심(自尊心)은 견훤의 폭풍이 아니라 왕건의 햇빛 앞에서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930년에 고려군(高麗軍)이 고창(高敞)에서 후백제군(後百濟軍)을 크게 이기고 마침내 힘에서도 우위를 보이자,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왕건에게 항복을 결심한다. 후백제는 고창(高敞) 전투 이후 점점 위세가 기울더니, 935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神儉)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익산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사변이 생긴다.
금산사(金山寺)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견훤(甄萱)은 고려에 망명(亡命)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 타도에 앞장섰고, 같은 해에 마침내 신라가 정식으로 고려에 흡수되었다. 왕건은 오랜 라이벌 견훤(甄萱)을 상보(尙父 .. 왕이 아버지와 같을 정도로 극히 존경하는 신하)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대접하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도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계속 경주를 다스리게 하고는, 그의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장인대접을 하는 등 화해아 통합에 주력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926년에 발해(渤海)가 멸망하자, 그 유민(流民)들을 받아들여 최고의 대우를 하였다. 실로 삼국시대 이래의 한민족의 여러 갈래가 고려(高麗)라는 큰 틀 안으로 융합하게 된 것이다. 그 대업(大業)의 종지부는 936년에 왕건과 견훤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신검(神儉)을 공격, 마침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찍혔다.
왕건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전란(戰亂)에 지친 백성들을 다독이고 쉬게 하는 정치를 펼쳤다.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을 본떠 흑창(黑倉)을 설치하여 빈민(貧民)을 구제하였으며, 조세(租稅)를 크게 낮추었다. 그리고 궁궐이나 의복 등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흑창(黑倉)이란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들었을 때, 저장한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던 구호기관이다.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194년부터 매년 3~7월 사이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후에 의창(義倉)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정략결혼 政略結婚
그러나 왕건은 위와 같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 이외에 특별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숱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는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것은 왕건은 세력기반이 비교적 미약했고, 고려(高麗)라는 나라 자체가 ' 호족 대연합 (豪族大聯合) '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었다.
신라의 구왕실(舊王室)을 포함하여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豪族)들과 혼인(婚姻)으로 동맹을 맺고, ' 지금은 당신이 일개 지방의 지배자일 뿐이지만, 만약 당신의 딸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천하의 2인자로 올라선다 '라는 미끼를 주어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정략결혼은 성공하여 궁예나 견훤처럼 허무하게 나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으나, 나중에 필연적으로 왕위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과연 왕건이 죽은 후에는 왕위를 노린 갈등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고, 유력한 호족들이 왕권을 넘보는 일도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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