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는 정열의 나라. 푸르다 못해 시린 바다물결이 넘실대는 쿠바의 해변은 지금도 유럽인들이 꼽는 관광 1순위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구상, 집필했던 아바나의 밤거리도 여전히 낭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도 아바나를 비롯한 전역에는 반미(反美)구호와 카스트로를 찬양하는 플래카드가 뒤엉켜 있다.
낭만과 투쟁의 정서가 묘하게 어우러져 이국적(異國的) 풍취를 더해주는 그 곳, 우리 동포들은 1920년대 초 이곳에 새 삶의 터전을 닦았다.
1921년3월 멕시코 유카탄을 찾았던 한인들의 한 무리가 쿠바의 동쪽에 도착했다. 3백명의 한인들은 지긋지긋한 멕시코 ‘애니깽’농장의
애환을 풀기 위해 동쪽의 ‘진주’를 찾았던 것이다.
이들은 쿠바의 세계적 명산물인 사탕수수 농장에 제2의 인생을 걸었다. 당시 쿠바 정부로서도 한인들의 노동력이 절실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쿠바의 사탕수수 재배는 번창일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멕시코의 힘들었던 4년간 계약노동을 마친뒤 새로운 인생설계를 꿈꾸던 이들에게 하늘은 또다른 시련을 던져주었다.
이들이 쿠바를 찾을 무렵, 그동안 상한가였던 사탕수수의 시세가 폭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한인이 이민하기 전에는 설탕 한 근에 20전(센트)일 정도로 가격이 폭등, 황금세계라고도 했는데 동포가 이민한 그해부터는 설탕값이 근당 2전(센트)까지 가격이 떨어졌다.”(임천택·쿠바이민사)
주력상품이 제 값을 받지 못하자 쿠바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일반인들의 생활상도 비참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설탕농장 경험마저 없었던
우리 동포들에게는 더더욱 날벼락이었던 셈이다.
이들의 인생항로는 쿠바 도착 2개월만에 방향타를 돌려야 했다. 이들은 첫 기착지였던 동쪽편 ‘마니티’농장을 떠나 서쪽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니티’ 농장을 떠나 찾은 곳이 수도 아바나에 인접한 마탄사스부근의 ‘애니깽(선인장의 일종으로 선박용 로프의 주원료)’ 농장. ‘애니깽’이 싫어 멕시코를 떠나왔건만 배운 기술이라고는 ‘애니깽’ 농장일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칼을 잡고 ‘애니깽’을 잘랐다. 나머지 한인들도 부근의 농장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오후 5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나날이
계속됐지. 농장일을 마치면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했어.”
아바나에 살고 있는 장천뇌할머니(78)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당시를
회고했다. 같이 고생했던 남편은 작년3월 81세로 돌아가셨다고 장할머니는 전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국에서)우리 집안의 고향은 서울이라고 들었지만 더이상 기억나는 것은 없어. 여기와서 처음에 좋은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손에 익은 애니깽농장일밖에 할 것이 없었지….”
장할머니는 “이제 당시 한인 1세대들은 거의 죽고 없지만 이분들이
살아계셨을 때는 3·1절 기념식도 치르고 애국가도 불렀어”라면서
“노인들에게 환갑잔치도 해드리고 갓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돌상도
차려주었지”라고 말했다.
아바나시내에서 큰 중국집 ‘상아탑’을 경영하고 있는 이상복씨(67). 이씨의 아버지 고향은 평양, 어머니 고향은 서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불귀(不歸)의 객’이 된 지 오래다.
“처음 쿠바에 왔을 때 사탕수수농장에 있다가 나중에 마탄사스에서
‘애니깽’농장일을 했는데 하루 평균 12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겨우 1,2페소를 받는데 그쳤다. 11명의 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고 이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세상을 뜰 때까지 쿠바의 공용어인 스페인어가 서툴러 고생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일이 생기면 종종 아들들을 불러 의사소통을 했다. 그러나 이씨에게 아버지는 기억저편에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였다.
“집에 계실 때는 ‘여기와라’ ‘식사해라’는 한국말을 사용했었지요. 자식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으며 우리는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농장시절 쿠바 한인들의 주음식은 ‘쌀밥’이었다. 쿠바에서 나오는
쌀로 밥을 지어 먹었으며 김치와 고추장까지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쿠바 한인 2,3세들도 ‘고추장’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이씨는 17세 때 아바나로 진출, 밑바닥생활을 거쳐 이젠 어엿한 식당경영주로 ‘출세’했다. 비록 사회주의 체제하이기 때문에 국가가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거느린 종업원수만도 27명이나 됐다.
한인2세인 이씨에게 과거 한국은 낯설은 곳이었다.
“젊었을 때 쿠바에 ‘코레아’라는 말은 없었다. 쿠바인들도 처음에
한국인들이 중국인인줄로 알았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쿠바사람들도 코레아를 알았다.”
아바나에 있는 가죽공장에서 일하다 공장 감독관을 지낸 뒤 은퇴한
김봉희할머니(65)는 “당시 한인들은 아주 부지런하고 일을 많이 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라고 회상했다.
김할머니는 “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기전에 고향땅을 밟아봤으면하고 바랐는데, 꿈을 이루지 못했어”라고 아쉬워했다.
쿠바 한인들에게도 피끓는 민족의식이 없을 수 없었다. 이민 초창기
쿠바 한인들의 비극적인 생활상이 외부에 전해지자 미주 한인회에서
모금활동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이들은 일제강점기인 1937∼1938년 중국의 한국 임시정부에 한푼두푼 모은 돈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쿠바 한인1세대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쿠바 현지인들과
인연을 맺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5백50명정도의 한인 2,3세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의 물살은 거스를 수 없는 법.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생각은 점차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바 의대를 89년에 졸업한 노라 림(32·여)은 현재 아메헤아리스 병원의 응급실 담당의. 한인3세의 신세대다.
노라의 봉급은 쿠바 일반인들의 봉급(1백60∼2백80페소)보다 훨씬
높은 4백페소 수준이다.
한인 이민초창기에 대해 노라는 “할머니로부터 과거 고생한 시절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데 슬픈 얘기만 들었다”면서 “지금 우리는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현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높은 교육열 덕택에 한인 2,3세들은 노라처럼 의사를 하거나 학계 등으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에게 한국은 더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아바나 시내를 질주하는 대우와 현대의 자동차와 LG 삼성의 가전제품이 이들에게 비친 한국의 모습이다. 세월은 한세기의 이민사를
닫으며 새로운 세기의 새 장(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바나(쿠바)〓정연욱기자>
-쿠바 교민회장 임은조옹-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관문 ‘호세 마르티’공항을 뒤로 하면서 남쪽으로 죽 뻗은 고속도로를 1시간가량 달리면 마탄사스시(市)가 나타난다.
시내를 가로 질러 다시 왼쪽 능선을 10여분 올라가면 1920년대 쿠바
한인들의 초기 정착촌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당시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던 쿠바 한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없다. 대신 현지인들이 이 건물을 고쳐서 사용하고 있다. 쿠바 한인들의 땀이 배었던 과거의 ‘애니깽’농장도 대부분 풀밭으로 바뀌었다.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당시 ‘한인타운’의 중심은 예배당과 한인 학교. 이 건물의
옛 형태는 거의 남아 있었지만 벽은 빗물에 바래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였던 민가들도 몇 채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 헐려버렸다고 현지 주민들은 전했다.
고 임천택씨는 쿠바 한인1세대로서 30,40년대 이 곳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불살랐다. 임천택씨의 장남 임은조옹(71)은 “저 곳에서 내가 태어났는데…”라며 손으로 건물 곳곳을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혔다.
피델 카스트로와 아바나 법대 동창이었던 임옹은 50년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 참가, 혁명성공후 혁명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현재 쿠바 교민회장을 맡고 있는 임옹은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쿠바 한인들의 최대 숙원사업은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흐지부지해진 한인협회를 재건하는 일.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인2세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협회준비위원회에서 일하는 박흥선씨(59·식당운영)는 “현재 한인들의 소재지와 가계도를 작성중인데 상당부분 진척됐다”면서 “작년말부터 지역별로 회의를 열었고 지역신문에도 이같은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한인들이 만날 장소도 없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쿠바내 외국이주민중 한인들만 고유한 단체가 없는 실정이다”고 외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들은 한국의 홍보물과 항생제 혈액순환제 비타민제 등 의약품, 한국어강좌 개설 등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첫댓글 임은조, 개인택시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