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70~180년경에 기록된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도 한몫하였다. 물론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한 만큼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 요아킴은 늘 시무룩해 있었다. 게다가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준비해 온 제물을 봉헌하려 했지만, 대사제로부터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제단 앞에 나설 자격이 없다는 핀잔을 받고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녀 문제로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할 결심으로 광야에 갔다. 그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역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의 기도를 바쳤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을 아이는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성녀 안나는 남편이 돌아온다는 전갈을 받고 성문 앞으로 마중 나가서 기쁨의 포옹을 했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성녀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 받도록 맡겼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성녀 안나와 아버지 성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다. 그리고 많은 교부가 “야고보 원복음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조되었다. 원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9월 9일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전례가 6세기 동방 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 교회에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6세기에 이미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중세에는 유럽 곳곳에 성녀 안나에게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공경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Josephus)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함되지 않는 가정의 모습이 낯설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리아의 부모까지 포함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안나는 주로 영원하고 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초록색 망토와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책을 들고 있거나 어린 마리아를 교육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반면, 성 요아킴의 상징은 성전에서 행하던 그의 경건한 제사와 관련해서 어린 양, 백합, 새장 속의 비둘기 등이 있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