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文正)은 장연현(長淵縣) 사람이다. 문종(文宗) 초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올라 병부시랑 좌간의대부(兵部侍郞 左諫議大夫)가 되었다. 형부상서(刑部尙書)·참지정사(叅知政事)를 역임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동번(東蕃)이 난을 일으키자 문정은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가 되어 병마사(兵馬使) 최석(崔奭)·염한(廉漢), 병마부사(兵馬副使) 이의(李顗)와 함께 보병·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에 나가서 진을 쳤다. 밤에 길을 나누어 바로 적의 소굴로 달려가 날이 밝아올 무렵에 도착하여 땅이 진동하도록 북소리와 고함소리를 내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맹렬히 공격하여 392명의 목을 베고 장수[渠帥]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말 100여 필을 노획하였다. 버려진 무기가 가득 쌓였고 공격하여 파괴한 부락이 무릇 10여 곳이나 되었다. 해질 녘이 지나 개선하여 승첩을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裴緯)를 보내어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근래 변방의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마음을 태우며 걱정하였다[軫慮]. 지금 주문(奏文)을 올린 것을 살펴보니 훌륭한 작전으로 오랑캐를 항복시키고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여, 짐으로 하여금 동쪽을 돌아볼 걱정이 없게 하였으니 오로지 그대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특별히 문정에게 은합(銀合) 한 벌을 하사하니 무게가 100냥이었고, 최석·염한·이의에게는 은합 한 벌씩〈을 하사하니〉 무게가 각 50냥이었는데, 〈그 속에〉 모두 정향(丁香)을 채웠다. 곧이어 문정에게는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특진 검교사도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예·형부사 겸태자태부 상주국 장연현개국백(特進 檢校司徒 門下侍郞平章事 判尙書禮·刑部事 兼太子太傅 上柱國 長淵縣開國伯) 식읍(食邑) 1,000호, 식실봉(食實封) 200호를 더하였다.
문정이 아뢰어 말하기를, “지금 때에 맞추어 비가 이미 흡족히 내려 농사일이 바야흐로 한창입니다. 바라건대 주상께서는 하늘이 백성을 기르는 것을 본받아 흥왕사(興王寺)의 토목 공사와 12곳의 감창사(監倉使)·순찰사(巡察使)를 파하여 민폐를 제거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진사(進士) 노준(魯隼)은 그 부친이 대공친(大功親)에게 장가들어 낳은 사람이다. 최석(崔奭)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어 법률에 따라 벼슬길을 막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인재를 선발하여 쓸 때는 마땅히 일반적인 방식[常扃]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그에게 여러 진사들과 같이 관직을 임명하여 조정의 명부[朝籍]에 오르는 것을 허통(許通)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문정 등이 말하기를, “집안이 바르게 된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인데, 노준의 아비는 혼례를 바르게 하지 못하여 인륜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을 숭상하고 선비를 등용하는 일이 급하니, 마땅히 벼슬의 등급을 낮춰서 임명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선종(宣宗) 10년(1093)에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 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고 죽으니, 시호를 정헌(貞獻)이라 하고 선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