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요리와 파스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말린 오레가노와 바질, 로즈마리 정도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구하기도 쉬워졌다. 그에 비해 세이지는 우리에게 아직 잘 알려진 허브는 아니지만, 허브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류와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근한 식물이다.
민트과인 세이지의 학명은 살비아Salvia,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도 세이지를 살비아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허브가 지중해 연안에서 로마로 전해졌지만 세이지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로 전해줬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하는 허브였고, 쓰임새가 다양했기 때문에 학명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천 년이 넘게 재배되어 온 세이지의 고향은 지중해 북부, 유고슬라비아 인근이다.
샤를마뉴 대제를 비롯한 중세의 왕들은 모두 궁정에 따로 거대한 밭을 만들어 세이지를 대량으로 재배 했다고 한다. 약이 변변치 않아 허브의 약효와 주술에 의지하던 당시에 세이지는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진 응급 약으로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
로마인들도 세이지를 대규모로 재배했다. 스무 명의 젊은이들이 흑사병을 피하기 위해 죽음과 질병이 가득한 도시를 떠나 시골별장에 모여 열흘 동안 서로 주제를 정해 나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모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도 세이지가 무성하게 자란 공원이 등장한다.
세이지가 워낙 튼튼하고 무성하게 자라는 허브이기도 했지만 공원에 재배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늘 필요로
했던 허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세이지는 달콤하면서도 시고, 은은하게 매운 후추 맛과 함께 시원하면서도 강한 향을 가졌다.
그 강한 향 때문에 기절했을 때 정신을 차리게 하는 각성제로, 상처부위를 소독하는 약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데카메론]에는 또 점심식사를 한 연인들이 세이지를 뜯어 잇몸을 문질렀다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이는 민트과 식물이 가지고 있는 화한 특성으로 인해 세이지가 잇속 프라그를 제거하는 데 널리 이용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이야기이다.
세이지 잎을 찬찬히 잘 뜯어보면 보라색과 은색, 녹색이 섞여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홀로그램처럼 색이 은은하게 잘 섞여있다.
보라색은 왕족과 같은 귀한 존재를 위한 색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보라색을 띤 세이지는 그 어떤 허브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허브로 간주되었다. 허브와 사람과의 관계를 타로카드로 풀어 그린 허브타로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세이지 카드는 메이저 아르키나 중 5번, 고위 사제, 교황의 허브로 묘사되어 있다. 세이지 잎 사이로, 보라색의 제의를 입은 교황이 엄숙하고 자애롭게 서 있는 그림이다. 옛날부터 세이지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떠받들어 졌는지 짐작이 가는 장면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 이외의 것에서도 즐거움과 가치를 찾고 지식을 얻지만, 세이지가 무성하던 중세시대엔 교황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 믿음의 상징이었다. 교황의 허브인 세이지는 그만큼 대접받았던, 허브중의 허브였다.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의 성당의 향 그릇에서도, 공기를 정화함으로써 좋은 기를 받고,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고 믿는 친구의 향불접시에서도 말린 세이지를 본 적이 있다.
허브의 향으로 흐트러진 정신과 주변의 공기를 맑게 하는 일. 아마도 아로마 테라피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
인류가 가장 많이 의지하고 위안을 받은 향은 세이지가 아니었을까?
세이지를 요리에 사용할 때는 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소량을 사용하거나, 요리의 초반부터 넣고 끓여 향이
은은하게 배게 해 주어야 한다. 바질이나 파슬리처럼 요리의 마지막에 장식처럼 세이지를 곁들이면, 향이 너무
해 음식 맛을 압도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보통 500g 정도의 고기에 신선한 세이지를 잘게 썰어 사용할 경우 1 테이블 스푼(15ml)정도가 적당하고,
마른 세이지를 사용할 때는 양을 1/3로 줄여, 1 티스푼(5ml)정도 사용하는 것이 적당하다.
향이 워낙 강해, 녹말이 많은 음식,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 잘 어우러진다. 이탈리아 산 생 햄인 프로슈토를
송아지나 닭고기에 감은 다음, 세이지를 붙여 구운 살팀보카Saltimboca는 로마지역을 대표하는 요리이다.
돼지고기와 오리, 거위, 치즈와 같은 유제품과 특히 잘 어울린다.
특히 마늘과 양파, 빵이나 옥수수하고도 잘 어울려 세이지와 빵으로 만든 스터핑stuffing을 칠면조 안에 채워
굽는 요리는 추수감사절에 꼭 먹는 전통적인 요리이다. 세이지 한주먹을 버터에 넣고 가열해 버터가 약간 갈색
이 돌때까지 끓이면 세이지향이 가득한 브라운 버터가 되는데, 치즈나 채소를 넣은 라비올리Ravioli나 감자로
만든 뇨끼에 버무리듯 버터를 끼얹어 내는 요리는 이탈리아 가정에서 흔하게 만들어 먹는 요리중 하나다.
고온에서도 향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호두와 함께 스콘이나 빵을 만들기도 한다. 삼겹살을 구울 때 허브
소금을 만들어 뿌려도 좋지만, 비계가 있는 부분에 세이지 잎을 통째로 붙여 재워두었다 구워보자. 세이지
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고기도 맛있지만, 불에 바삭하게 익은 세이지도 별미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
호박감자전을 구울 때도 화전처럼 세이지를 한 잎 얹어 구워내면 맛도 있고 모양도 예쁘다.
샐비어Salvia의 어원은 라틴어 Salvere에서 왔는데 ‘치료한다heal’ 또는 ‘살린다save’라는 뜻이다. 어원만 보아
도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세이지의 효능을 믿고 애용했는지 알 수 있다.
고민 많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 날, 늘어진 몸과 마음에 기운을 불어넣고 싶을 때, 세이지 향기를
맡아보자,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믿어 온, 치유의 능력을 가진 세이지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