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 종헌(曼庵宗憲) 대종사(1876~1957)
만암 스님
만암 종헌(曼庵宗憲) 스님은 격변의 시기였던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비구⋅대처승 갈등기, 정화불사 시기를
다 겪으며,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선각자이자 교육자였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속가의 성씨는 송(宋), 법호는 만암(曼庵),
법명은 종헌(宗憲)이었다.
4세에 아버지가 죽고 8세에 서당에 들어가서 글을 배우다가
11세에 어머니마저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해 취운 도진(翠雲道珍) 화상의 제자가 됐다.
16세에 구암사(龜巖寺) 전문강원에 입학해 박한영(朴漢永, 1870~1948) 강백에게 수학하고
다시 운문암(雲門庵)의 환응 탄영(幻應坦泳, 1847~1929) 강백에게 수학해
사미과와 사교과를 이수, 불교경전을 익혔다.
불교에선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으려면 1만 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로 세로 15km의 거대한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내 다 없어지는 시간이 1겁이다. 영겁과 같은 그 세월을
만 번이나 반복해야 스승과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스승은 길이고 자비다. 끊임없이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스승의 가르침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감싸지는 않는다.
칠통(漆桶) 같은 제자의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몽둥이를 치켜세운다.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천 길 낭떠러지로
밀어뜨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뛰어난 조련사가 야생마를 길들이듯 눈 밝은 스승은 어떻게든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끈다.
훗날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된 혜가 스님이
면벽하는 달마대사를 찾아가 한쪽 팔을 끊어 바친 것도
그가 스승임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만암 스님 일생에는 여러 스승이 있었다. 직접 삭발해 주고 먹물 옷을 입혀준
취운 도진(翠雲道珍, 1858~1922) 스님, 경전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경안(經眼)을 밝혀준 환응 탄영(幻應坦泳, 1847~1929) 스님이 그렇다.
그리하여 법의 눈을 뜬 만암은 1902년 백양사 선원에 들어가 5안거를 보내며 선(禪)을 익혔다.
23세에 환응 강백에게서 전강(傳講)을 받아 개강(開講)했으며,
1905년 이후에는 청류암(靑流庵)⋅백련암(白蓮庵)⋅천진암(天眞庵)⋅
해인사 강원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항상 100여 명의 승려들이
그의 밑에서 공부해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됐다.
1910년에 나라를 잃게 되자 백양사에서 시대와 인심에 부합하는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부근의 사찰과 협의, 백양사 안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고, 이전의 강원제도를 혁신했다.
스님은 광성의숙의 방장으로 환응 탄영 스님을 모셨으며, 자신은 학감을 맡았다.
의식주는 항상 평등하게 함께 나누었고 절약을 모범으로 보였다.
당시에 그는 100여 명의 학승들에게 불경뿐만 아니라
외전(外典:불교 이외의 경전)도 함께 배우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됐던 교재인 국사(國史)와 지리,
기타 민족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모든 교과목을 지도했다.
이로 인해 백양사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출입하게 됐으며,
단순한 사찰의 기능을 넘어선 민족정신 함양 도량의 구실을 담당했다.
백양사
1911년에 백양사에서 대오견성(大悟見性) 해 수백 명의 수좌(首座)들에게 선(禪)을 지도했다.
한편 스님은 1911년 한용운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세우고 일제에 매종행위를 저지했다.
1914년에 처음 백양사의 주지로 취임했을 때는 변변한 건물이라고는
요사채 뿐인 황폐한 사찰이었다. 그는 학승과 수좌들을 지도하면서
철두철미한 자급자족 정신을 제창했다. 젊은 승려들에게 양봉기술을
익히게 하고 각종 필수품을 제조, 판매해 생활을 돕게 했으며,
사찰 토지를 승려들이 직접 경작하게 했다.
특히, 반선반농제도(半禪半農制度:하루의 반은 참선, 반은 농사)를 확립해
선가(禪家)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가풍을 그대로 실천했다.
또한, 이와 같이 해서 얻은 수입은 절대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고
사중(寺中) 재산으로 취합하게 한 결과 처음 40석을 추수하는 데
불과했던 백양사 재산을 약 800석까지 올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스님은 스님들의 일정시간의 울력(공동노동)을 통해 수입을 모아
‘선불장(選佛場)’이란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스님들은 주로 농사와 양봉,
숯 굽기, 죽세공품 만들기를 통해 선불장 기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합 27년 동안 본⋅말사 종무를 관장하면서 백양사를 크게 중창해
오늘날의 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백양사에 오래 머물러 목양산인(牧羊山人) 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만암 스님의 제자인 서옹(西翁) 스님은 “스님은 매우 자상하셨지만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셨다”고 회고했다. 특히 만암 스님의
사랑을 받았던 서옹 스님은 “몸이 약했던 나를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보약을 지어 먹이셨다”면서 자상했던 스승의 기억을 떠올렸다.
또한, 1928년부터 3년 동안 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또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에 한국 불교를 예속하려는 시도에 맞서
한용운, 박한영 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해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광주에 정광중학교(淨光中學校)를 설립해
7년 동안 교장직을 역임하는 한편, 쌍계루 옆에 일반인을 위한
보통교육기관인 심상학교(약수초등학교 전신)를 세워 인근의 학동들에게
한글과 국사, 수리, 농학 들을 가르쳤다. 이는 일제가 애국계몽을 탄압하고
민족혼의 말살을 꾀하고 있던 시기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진보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또 생산 불교를 지향해 광주에 전남여객버스회사와 전남 베어링 공장,
목포에 동광 유지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절 살림에도 불구하고 인근의 어려운 주민들을
취로사업을 통해 도왔으며, 청량원이라는 양로원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1947년에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상응하여
식민지불교 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 진작 등 3대 목표 아래
전라도 20여 사암 및 포교당을 동참시켜 호남 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을 결성하고,
불교정화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대한불교조계종 정화불사(淨化佛事)의 효시를 이루게 됐다.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불교계에서 종명을 조계종으로 환원하고
종헌을 개정하는 등 한국 불교 정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1954년에 조선불교 제3대 교정, 같은 해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초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만암 종헌 스님의 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는
한국 불교 정화 운동의 중요한 결실이자, 격동기 한국 불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만암 스님의 종정 추대는 왜색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전통적인 가풍과 수행 정신을 되살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지도력은 비구-대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종단을 안정시키고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만암 스님은 초대 종정으로서 조계종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정 임기 5년 동안 재직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대다수의 승려들이
대처승이 돼 승적(僧籍)을 교적(敎籍)으로 고쳤던 것을
다시 승적부(僧籍簿)로 고쳐 출가승 본위의 종단 출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삼보사찰(三寶寺刹)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 사찰을 비구승에게
돌려 줄 것을 강조했고, 대처승에게는 본사의 주지는 물론 삼직(三職) 등도 맡기지 말도록 했다.
또한,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한국불교의 종조(宗祖)라고 역설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을 종조로 내세우는 주장에 반대했다.
항상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시대에 부합하는 사원교육을 실시했으며,
평생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다.
1956년 12월, 세수 81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만암 스님은 열반 사흘 전에 대중을 모아놓고 하시는 말씀이
“고목이 쓰러져 군불을 때면 방이나 따뜻하고, 괴석은 화단에 놓으면
경치나 좋지, 하지만 늙은 몸뚱이는 죽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 몸뚱이를 물에 집어넣으면 고기들의 밥이 되고 들에 놓으면
까마귀밥이나 되련만 그렇게 하라고 해도 너희들이 하지 않을 것이니 나죽거든 부고 내지 말고
사흘 안에 간소하게 화장해 버려라.”고 하셨다.
만암 스님은 입적하시는 그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정하셨는데,
사흘 동안 모든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과 함께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흘 뒤 목욕재계 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시더니 저녁공양을 드신 후,
저녁 10시에 백양사 방장이신 서옹 스님을 불러서
“앞으로의 종단 진로가 걱정이다.… 나 죽더라도 종단 일에 관여하지 말고
초연하게 수행하라.” 이르시고 서옹 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리며 후사를 부탁했다.
백암산 위 한 사나운 범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물어 죽인다.
서늘하고 맑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울부짖으니
가을하늘에 밝은 달빛은 서릿발처럼 차갑다.
그리고 차 한 잔 드시고, “지금 몇 시냐?” 물어보셨다.
“11시 30분입니다.” 하니, 고개를 좌우 돌리시더니 주무시려나 해서
스님들이 부축하려니 이미 열반하신 뒤였다.
스님은 장례비용에 보태라며 만환짜리 한 장과 도장만을 남기셨다.
수행을 많이 하신 스님들의 열반모습은 이렇다.
생사불이(生死不二)를 몸소 보여주신다.
마치 헌옷을 벗듯 육신의 탈을 자유로이 벗어버리는 대자유인의
모습으로 후학들을 가르치셨다.
화장 후 사리 8과를 수합했는데 오색광채가 영롱했으며,
탑을 백양사에 건립했다.
정혜(定慧:수행과 지혜)를 함께 갖춘 일대 종사로서
태고선(太古禪)의 중흥에도 크게 공헌했던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고선(太古禪)----태고선은 태고보우(太古普愚) 화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으로,
태고선을 구성하는 두 가지 범주는 조사선(祖師禪)과 간화선(看話禪)이다.
이들 두 가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정하고
상호 제한하는 관계에 따라 불가분한 한 쌍으로 공존하고 있다.
고려 말에 돈오점수를 지향하는 보조선(普照선)과
돈오돈수를 지향하는 태고선이 대립했었는데, 당시 큰 스님들은 대개 태고선을 따랐다.
만암 스님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과
쇠퇴한 사찰을 일으켜 세운 중창 불사,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 등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가르침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가르침과 종정으로서의 활동은 이후 한국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1967년 12월 백양사에서는 <만암문집(曼庵文集)>을 발간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