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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Chapter 3 마리우스
또다시(3)
테나르디에는 다시 하얀 신사 곁으로 가서 앉았다.
“이야기를 계속하지. 우리는 서로 이야기가 통할 거야. 그러니 쉽게 일을 처리하기로 하지. 내가 아까 화낸 것은 미안하게 됐어. 왜 그랬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군. 가령 선생이 백만장자라 하여 큰 돈을, 많은 돈을 달락 했던 건 잘못이었어. 그것은 무분별한 일이지. 아무리 부자지만 그만큼 쓸 데가 있을 테니까. 나는 당신을 파산 시키고 싶지 않아. 나 역시 인간이니까. 이쪽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 해서 우스운 짓을 하는 그런 인간들과는 달라. 어때? 20만 프랑으로 얘기를 끝냈으면 좋겠군. 당신이 그 돈만 건네준다면 이것으로 일을 끝내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겠어. 20만 프랑이나 되는 돈을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겠지만, 나도 그렇게 무분별하지는 않아. 당장 내라는 것은 아니야. 부탁은 꼭 한가지, 내가 하는 말을 글로 써 달라는 것 뿐이야.”
여기서 테나르디에는 히죽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을 테지?”
종교재판소의 대법관이라도 이때의 그 미소에 대해서는 부드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테나르디에는 하얀 신사 앞으로 탁자를 바짝 밀어 놓고는 잉크병과 펜, 종이 한 장을 서랍에서 꺼냈다. 반쯤 열린 서랍 속에서는 큰 식칼이 빛나고 있었다. 그자는 종이쪽지를 하얀 신사 앞으로 밀어 놓고 말했다.
“어서 써!”
마침내 하얀 신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 묶여 있는데,”
“아! 그렇군. 옳은 말씀이지.”
그자는 비그르나유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양반 오른팔을 풀어 줘!”
프랭타니에 혹은 비그르나유란 별명을 가진 팡쇼는 테나르디에의 명령에 따랐다. 노인의 오른손이 자유롭게 되자 페나르디에는 펜에 잉크를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봐요, 선생.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게야. 인간의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 우리가 난폭한 짓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야. 나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몰라. 미리 말해 두지만, 이제부터 쓸 편지를 전할 심부름꾼이 돌아올 때까지는 이대로 묶어 두겠어. 자, 이젠 쓰시지. “
하얀 신사가 말했다.
“뭐라고 쓰라는 거요?”
“내가 불러 줄 거요.”
하얀 신사가 펜을 들자 테나르디에가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딸에게.”
하얀 신사는 몸을 떨며 테나르디에를 쳐다보았다. 테나르디에가 말했다.
“사랑하는 딸이여, 라고 써!”
하얀 신사는 하라는 대로 했다. 테나르디에가 계속했다.
“곧 오너라.”
그자는 말을 끊고 물었다.
“당신은 그녀에게 너라고 부를 테지?”
하얀 신사가 물었다.
“누구를?”
“그 계집애, 종달새 말이지.”
하얀 신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어쨌든 좋아.”
테나르디에가 말하며 이어 편지 내용을 불렀다.
“곧 오너라. 네게 용무가 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나 있는 곳으로 너를 안내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 안심하고 오너라.”
하얀 신사는 그대로 썼다. 테나르디에가 말했다.
“아, 그렇지! 안심하고 오너라 하는 대목은 지워! 그런 것을 쓰면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기고 조심할지 모르니까.”
하얀 신사는 그 줄을 지웠다. 테나르디에가 말했다.
“이제 서명해. 이름이 뭐지?”
하얀 신사는 펜을 놓고 물었다.
“이 편지는 누구에게 보낼 건가?”
테나르디에가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계집애지 누구겠어? 빠릴 서명이나 해! 이름이 뭐야?”
하얀 신사가 대답했다.
“위르뱅 파브르.”
테나르디에는 고양이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 머리글자를 찾아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U. F. 그렇군! 위르뱅 파브르가 맞아. U. F. 라고 서명해!”
하얀 신사가 서명을 마쳤다.
“편지를 접으려면 두 손이 필요할 테니, 이리 내! 내가 접을 테니까.”
편지를 접고 난 테나르디에가 또따시 말했다.
“겉봉을 써. 네 집 주소와 파브르 양 앞이라고. 네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 테지. 이름을 사실대로 적은 것처럼 주소도 정확히 쓰란 말이다. 손수. “
하얀 신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펜을 들고 ‘생도미니크 당페르가 17번지 위르뱅 파브르 씨 댁 파브르 양’이라고 썼다. 테나르디에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며 그 편지를 받아 쥐었다.
“여보!”
테나르디에가 소리치니 그 아내가 달려왔다.
“여기 편지가 있어. 당신이 할 일은 알고 있을 테지? 밑에 마차가 있어. 빨리 달려갔다 얼른 돌아와. “
그자는 곤봉을 가진 사내에게도 말했다.
“자네는 마스크를 벗고 아내와 같이 가게. 마차 뒤에 타. 마차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응.”
대답을 한 사내는 곤봉을 내려놓고 테나르디에 부인을 따라 나갔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채찍 소리가 나더니 차차 마차 소리는 멀어져 갔다.
테나르디에는 말했다.
“좋아! 만사가 잘되어 가는군. 저렇게 달려가면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겠지.”
테나르디에는 의자를 난롯가에 끌어당겨 앉아 팔짱을 끼고는 흙투성이가 된 발을 내밀었다. 그자가 말했다.
“발이 시리군.”
조금 전까지도 이 방에 가득 찼던 흉포한 소리는 멎고, 음울한 고요가 감돌았다. 잠이 든 술주정뱅이 영감의 숨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커져 가는 불안 속에서 기다렸다. 수수께끼는 더욱 불가사의해졌다. 테나르디에가 ‘종달새’라 부른 처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의 ‘위르쉴라’를 말하는 걸까?
붙잡힌 하얀 신사는 종달새란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자약하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한편 U. F. 라는 두 글자는 해명이 되었다. 그것은 위르뱅 파브르이지 위르쉴라는 아니었다. 마리우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어쨌든 종달새가 그녀인지 아닌지는 이제 판명이 되겠지. 테나르디에 부인이 데려올 테니까. 그렇게 되면 위험이 닥칠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는 내 목숨과 피를 바쳐서라도 그녀를 구해 내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구하겠다.’
테나르디에는 무슨 음모를 꾸미느라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붙잡힌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조금 전부터 그 인질에게서 희미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테나르디에가 말했다.
“파브르 영감, 지금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야기하는데……”
마리우스는 이 한마디로 사정이 분명히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귀를 곤두세웠다. 테나르디에는 말을 계속했다.
‘여편네가 곧 올 테니 좀 참으시지. 나는 종달새가 정말 당신 딸이라고 믿고 있으니 곁에 있도록 할 수밖에 없어. 그녀는 내 친구가 뒤에 탄 마차를 타게 될 거야. 성문 밖 어느 곳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고급 마차에 당신 딸과 내 친구만 바꿔 타도록 되어 있지. 물론, 내 여편네는 이리로 곧장 와서 보고할 거고. 당신이 내게 20만 프랑만 넘겨준다면 딸을 돌려보내겠어. 만일 당신이 돈을 안 내면 당신 딸은 목이 비틀릴 줄 알아.”
하얀 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테나르디에가 말을 이었다.
“여편네가 돌아와서 종달새가 떠났다고 하면 당신을 놓아줄 거야. 당신은 자유롭게 집에 돌아가 잠잘 수 있게 돼. 이만하면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지.”
무서운 환상이 마리우스의 머리를 스쳐 갔다. 뭐라고! 유괴한 처녀를 데려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악한 중의 하나가 그 처녀를 숨긴다는 말인가? 어디일까? 만일 그녀가 그 처녀라면! 그 처녀임에 틀림없다! 마리우스는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권총을 쏠 것인가? 이 악한들을 모조리 당국에 넘길 것인가? 그러나 이런 일을 하더라도 곤봉을 가진 사내가 그녀와 함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만이 아닌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도 좀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별다른 길이 없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인질도 인질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한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문이 열리고 테나르디에 부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엉터리 주소야!”
테라르디에 부인과 함께 갔던 사내가 뒤따라 들어오며 곤봉을 찾았다. 테나르디에는 반문했다.
“뭐라고?”
“아무것도 없어요! 생도미니크 당페르가 17번지. 위르뱅 파브르란 사람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어요! 아무도 그런 사람은 모른데요!”
부인은 숨이 차서 말을 끊었다가 이어 갔다.
“여보! 이 늙은이가 당신을 속인 거예요.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에요. 나 같으면 먼저 저 녀석의 입을 찢어 놓고 시작했을 텐데! 또 못되게 굴었다면 산 채로 삶아 버렸을 텐데! 그랬으면 그년의 거처랑 돈이 있는 곳을 실토했을 거 아녜요! 나 같으면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보다 어리석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아무도 없었어요! 17번지에는 차가 지날 만한 큰 문밖에 없었어요. 생도미니크 당페르가 파브르 씨라니 천만의 말씀이에요. 마부에게 팁까지 주며 달려갔는데 허사였어요. 문지기와 똑똑해 보이는 아줌마한테도 물었는데 둘 다 그런 사람은 모른다는 거예요.”
마리우스는 한시름 놓았다. 그 처녀, 위르쉴라인지 종달새인지 어쨌든 그가 이름을 모르는 그녀는 위기를 면한 것이었다.
화가 치민 여편네가 떠들어 대는 동안 테나르디에는 탁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풍로를 바라보며 발을 건들거렸다. 무슨 흉악한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는 듯했다. 드디어 그자는 표독하고 느릿느릿한 말투로 노인에게 천천히 말했다.
“가짜 주소라니!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어?”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이와 동시에 하얀 신사가 일어섰다. 밧줄은 어느 새 끊어져 발아래로 떨어졌다. 사내들이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기도 전에 그는 난로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끌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거기서 처참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테나르디에 부부와 악한들은 뒷걸음질 치며 멍청히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들은 놀람에서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듯했다. 비그르나유가 테나르디에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아직 한쪽 발이 묶였으니 도망치진 못할 거야. 내가 보증하지. 그 발을 묶은 것은 바로 나야. “
하얀 신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네만 내 목숨은 그다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자네들이 억지로 말을 하게 하고,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게 한다면 이렇게 해 주겠네.”
그는 왼팔을 걷어올리며 팔을 내밀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시뻘건 끌이 왼팔의 살에 닿았다. 순간 살이 타는 소리가 들리고 고문실에서나 맡을 수 있는 독특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마리우스는 무서운 나머지 몸을 비틀거렸다. 사내들조차 몸을 떨었다. 이 괴이한 노인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을 뿐이었다. 벌겋게 단 쇠가 살을 태우고 있는 동안 그는 태연하게, 장엄하도록 아름다운 시선을 테나르디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의 그림자가 없었다. 고통이 깨끗한 존엄성 안에 녹아들고 있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격이 육체적 고통을 견딜 때는, 그 영혼이 외부에 나타나고 고귀한 성품이 역력히 표출되는 법이다. 그것은 오합지졸의 반란이 지도자로 하여금 자기의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말했다.
“가엾은 자들. 나를 무서워하지 말게. 내가 그대들을 무서워하지 않듯이. “
그는 상처에서 끌을 떼어 열려 있는 창밖으로 내던졌다. 살을 태우고 있던 가공할 연장은 회전하면서 암흑 속으로 사라져 눈 속에서 식게 되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나를 마음대로들 하게나.”
그는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테나르디에가 소리 질렀다.
“붙잡아.”
사내 중의 두 사람이 하얀 신사의 어깨를 붙들었다. 마스클르 쓴 목쉰 사내가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자물쇠로 머리르 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이때 마리우스는 자기 발밑, 즉 벽 가까이에서 낮은 음성으로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벽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한 가지 수단밖에는 없겠어.”
“해치우는 일 말이에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