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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젊고 자유로운 영혼―이시영 시인
이은봉
1984년 2월의 어느 날인 듯싶다. 그러니까 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나를 비롯한 대전의 『삶의 문학』 친구들은 대전역의 대합실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다. 이은식, 김영호, 김흥수, 전인순, 나 등이 대전역의 대합실에 모였을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서울나들이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행선지는 마포의 창작과비평사였다. 창작과비평사(이하, 창비사)에서 우리를 초대해준 것이다.
당시 창비사에서는 시전문 무크지 『마침내 시인이여』(1984. 1. 20)를 발간해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이 시전문 무크지에 「좋은 세상」 등 신작시 7편을 발표해 두루 관심을 끌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계간 『창작과비평』이 강제로 폐간되자 창비사에서는 각 장르별로 무크지를 발간하고 있는 참이었다.
내가 시전문 무크지 『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싣게 된 데는 창비사의 편집장인 이시영 시인의 도움이 컸다. 『삶의 문학』(인간사랑, 1983) 제5집에 실려 있는 시를 보고 그가 내게 원고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공주사대 조재훈 교수님이 중간에 연락을 해주시기는 했다. 이시영 시인은 이렇게 해 나를 중앙문단에 소개해준 은사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삶의문학』 친구들은 더없이 순수했다. 서울의 창비사로 나들이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뜰 정도였다. 물론 우리에게 창비사로 놀러오라고 연락을 한 것도 이시영 시인이었다. 창비사에 초대를 하는 내용을 담아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 그였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창비사에 가보고 싶던 참이기도 했다. 그러던 참에 창비사에서 놀러 오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들뜬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창비사의 사무실은 마포경찰서 뒤쪽의 별로 크지 않은 건물 2층에 자리해 있었다.
창비사의 사무실에서도 우리를 반겨준 사람은 이시영 시인이었다. 우리는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며 창비사의 식구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백낙청 선생님도 그때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다. 악수를 청하기는 했지만 백 선생님이 우리에게 따로 무슨 말을 하시지는 않았다.
창비사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편집부의 식구들도 대여섯 명 정도나 되는 듯했다. 그토록 내 영혼을 사로잡아온 창비사의 사무실이 이렇게 좁고 직원들도 얼마 안 된다니!
사무실 구경을 마치자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이시영 시인은 우리를 근처의 생맥주집으로 안내했다. 이시영 시인을 비롯한 창비사 사람들도 『삶의문학』의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한 듯했다. 현장의 목소리로 들끓는 『삶의 문학』 제5집(인간사랑, 1983년)이 간행되어 한참 주목을 받던 무렵이었다.
생맥주집 구석에 앉아 있자니 조금은 쑥스러웠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묻는 말에나 겨우 더듬거리는 소리를 주억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따라주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그만 대취해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언뜻 잠이 깬 나는 술자리가 파하는 것 같아 비척거리며 계산대로 향했다. 하지만 전혀 술이 취하지 않은 이시영 시인이 이미 계산을 다 마친 뒤였다. 지갑을 손에 든 채 버걱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 어색했던지 이시영 시인이 한 마디 했다.
“일차는 당연히 창비사에서 내야지. 이 시인이 술값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
생맥주집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의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갈비탕인지 육개장인지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저녁식사 값은 기어코 내가 치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배와 만나면 당연히 후배가 술값을 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뒤 어떻게 대전으로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서울역 앞 만화방에서 밤을 보냈을 수도 있다. 무슨 일로 『삶의문학』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에 갔다가 잠 잘 곳을 찾지 못해 그렇게 밤을 보낸 적이 두어 차례 있기는 했다.
그때 나는 이시영 시인이 정현종 시인이나 오규원 시인과 같은 또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그는 새롭고 젊고 자유로운 청년 시인이었다. 실제로는 나보다 너댓 살 정도밖에 더 먹지 않은 것이 이시영 시인이었다. 그때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1976년에 간행된 그의 첫 시집 『만월』 때문인 듯싶다. 이 시집의 시세계가 나로 하여금 그를 나이 지긋한 중견시인으로 받아들게 했던 것이다.
그의 첫 시집 『만월』에는 좋은 시가 많이 실려 있었다. “청춘의 순결성으로 무장하고 시대의 어둠과 역사의 아리로니를 투시하는 70년대 시인의 새로운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이 시집 『만월』이었다. 일단은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부터 읽어 보자.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길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순 낫이 될지라도
오늘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장승이 되기 위해
―「이름」 전문
내가 이시영 시인을 처음 만난 1984년 2월은 캄캄한 어둠의 시대였다. 그때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제로 권력을 잡은 것이 그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시영 시인의 이 시는 읽을 때마다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에 취할 때마다 나 자신을 향해 이 시의 몇 대목을 골라 중얼거리고는 했다. “밤이 깊어갈수록/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잠시라도 잊었을 때/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조용히 들끓는 것이 이 시의 이들 구절이다.
1984년 4월 29일(일) 나는 대전의 대사동 성당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 뒤에는 곧바로 아내를 따라 서울의 정릉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내 서울생활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시영 시인과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남들처럼 나도 이시영 시인을 그냥 형이라고 불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4년 12월에야 정식으로 재출발했다. 나는 연구조사분과의 간사를 맡았다.
1986년 늦은 봄날의 어느 날인 듯싶다. 신접살림을 차린 이승철 시인이 집들이를 빙자해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강형철 이재현 현준만 박선욱 고규태 김형수 등이 이승철 시인의 집들이에 참석을 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행해진 집들이였는데, 밥도 먹고, 술도 마신 뒤 자연스럽게 화투판이 벌어졌다.
고스톱을 칠 때까지는 나도 그런 대로 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지꼬땡으로 판이 바뀌자 나는 순식간에 갖고 있던 돈을 다 털리고 말았다. 판돈을 끌어 모은 평론가 이재현은 절대로 개평을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짓궂게 웃으며 버스비가 없으면 집에까지 걸어가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오후 5시쯤 이승철 시인의 집들이가 파했다. 내게는 정말 십 원짜리 동전 하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은행카드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재현은 끝내 벌린 내 손을 외면했다. 평론가 현준만이 겨우 버스비를 내주었다.
강형철 고규태 김형수 박선욱 등 일행을 따라 나도 마포의 창비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비사가 있는 용현빌딩 일층의 생맥주집 ‘아몬드 치킨’이 목적지였다. ‘아몬드 치킨’에는 이미 채광석, 김정환, 김사인 시인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젊은 회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창비사의 이시영 형도 사무실에서 내려왔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몬드 치킨〉은 여전히 자유실천문인협의의 젊은 회원들로 벅적거렸다. 이제는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차비가 없으니 어쩌지……. 염치 불구하고 나는 이시영 형에게 5천 원만 빌려달라고 말했다. 지갑을 열어 그는 빳빳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꺼내 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말했다.
“안 갚아도 돼!”
정말 나는 이시영 형한테 빌린 돈 5천을 갚지 않았다. 안 갚아도 된다는 말을 실천한 셈인데, 그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비교적 넉넉한 집에서 자란 나는 누구한테 돈을 빌린 적이 거의 없었다. 몇 푼 빌리더라도 곧바로 갚았다. 하지만 이시영 형한테 빌린 돈만큼은 왠지 떼어먹고 싶었다. 어떤 근원적인 빚을 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좀 넘고 있었다. 슬쩍 〈아몬드 치킨〉을 빠져나온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1980년대는 오직 시만을 위해, 아니 시와 민주화만을 생각하며 산 시절이었다.
이시영 형은 1990년대에도 창비사에 모이는 문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는 문인들을 위한 창비사의 술상무이기도 했다. 많은 문인들이 술 생각이 나면 우물쭈물 창비사 1층의 생맥주 집 〈아몬드 치킨〉으로 몰려들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시영 형은 문인들의 술심부름을 했다.
이시영 형은 염무웅, 이문구, 조태일 선생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시영 형을 따라 나도 덩달아 염무웅, 이문구, 조태일 선생 등과 가깝게 지냈다. 조태일 선생과는 나중에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이시영 형과 가까운 사람은 이렇게 나와도 가까웠다.
1987년은 민주화운동세력이 군부독재세력과 가장 치열하게 맞붙은 해였다. 연초에 있었던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그 개막전이었다. 특히 6·10 국민대회 하루를 앞둔 1987년 6월 9일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죽은 연세대 이한렬 군의 사건은 국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7월 9일에 개최된 이한렬 군의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은 그 규모만 해도 엄청났다. ‘민주국민장’의 출발지는 연세대학교 본관 앞이었는데, 이곳에서 출발한 ‘민주국민장’의 행렬에는 무려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재야와 정당의 원로인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 등이 앞장을 섰다. 나도 연세대학교 본관 앞을 출발해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울시청 광장까지 걸었다. 이때의 긴 거리를 나와 함께 걸은 사람도 이시영 형이었다. 이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나와 이시영 형은 늘 발걸음을 맞추었다. 하지만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나도 이시영 형도 그저 묵묵히 걷는 것으로 온갖 말을 대신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장례행렬은 광주의 5·18묘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1년 4월 26일의 일이었다. 시위를 하던 명지대 신입생인 강경대 군(경제학과 1년)이 경찰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의 집단구타에 의해 숨지고 말았다. 재야의 운동권에서는 이한렬 군 사건 때와 똑같은 형식으로 대규모의 장례를 치렀다. 그때도 나는 이시영 형과 함께 연세대학교 본관 앞을 출발해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울시청 광장까지 걸었다. 강경대 군 장례행렬 때도 이시영 형과 나 사이에는 별 말이 없었다.
그 즈음처럼 지독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 때도 드물었다. 강경대 군 폭행치사사건과 관련해 시위를 벌이던 성균관대 1학년 김귀정 양이 곧이어 백골단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더불어 전남대의 박승희, 안동대의 김영균, 경원대의 천세용 등이 분신을 하거나 투신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민련의 김기설(金基卨) 사회부장, 한진중공업 박창수(朴昌洙) 노조위원장 등이 분신을 하거나 투신을 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1987년 12월의 대선패배는 많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절망을 주었다. 하지만 1988년 4월의 총선승리는 여소야대라는 조그만 희망을 낳았다. 이들 희망을 바탕으로 1989년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은 ‘북한 바로알기 운동’에 진력했다. 당연히 통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출판운동권에서는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북한서적을 복간해 눈길을 끌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의 시인들도 각각 ‘북한 바로알기 운동’에 참여했다. 푸른숲의 강태형 시인, 도서출판 인동의 고규태 시인, 도서출판 황토의 이승철 시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또한 각종 북한 책을 발간해 구속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재야에서는 문익환 목사에 이어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을 해 주목이 되었다. 1989년 3월의 일이었다. 소설가 황석영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회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그의 방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에 가 있는 동안 그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대한민국 국민들을 좀 더 놀라게 했다.
황석영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곧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세계의 도처를 떠돌아야 했던 것이 그였다. 1991년 11월까지는 독일 예술원의 초청작가로 베를린에서 체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쓴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게재된 그의 북한방문기도 다를 바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곧바로 황석영의 원고를 게재한 『창작과비평』의 주간 이시영 시인을 잡아들였다. 이시영 시인이 갇혀 있던 곳은 경기도의 의왕교도소였다. 일단은 면회부터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이시영 형의 부인인 이경희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이경희 여사는 의왕교도소에 씩씩하게 잘 있다며 곧 면회를 갈 것이라고 했다. 나도 함께 따라가기로 했다.
1990년 초의 어느 날이었다. 약속장소인 사당역으로 나갔다. 도종환 시인도 합류를 했다. 이경희 여사는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분이었다. 남편인 이시영 시인이 교도소에 갇혀 있는 데도 크게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곧이어 나는 도종환 시인과 함께 이경희 여사의 흰색 승용차를 타고 의왕교도소로 향했다.
면회 절차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이내 우리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이시영 형과 마주 앉았다. 이경희 여사가 먼저 이시영 형과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도, 도종환 시인도 따로 할 말이 있지는 않았다. 간단한 안부나 주고받았을 따름이었다. 그때 철장 저쪽에서 이시영 형이 큰소리로 말했다.
“곧 나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나는 자꾸 걱정이 되었다. 그때는 지금 당장 전개되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내게 부족했다. 나날의 현실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시영 형은 자신의 말대로 곧바로 출옥했다. 1990년 2월초에 그는 3개월여의 영어생활(囹圄生活)을 별 탈 없이 잘 마쳤다.
여소야대 정국은 그래도 국민들에게 얼마간 희망을 주었다. 야당인 평화민주당이나 통일민주당의 파워도 정국의 도처에서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노태우 정부도 빠른 속도로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1988년 11월 23일에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유배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중간평가를 하겠다는 공약 탓이었겠지만 노태우 정부의 개혁은 자못 놀라웠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불안한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권여당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 1월 22일의 일이다.
당시 나는 통일민주당의 최형우 의원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도 3당합당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어둠의 덩어리가 밀려왔을 따름이다.
어둠의 덩어리는 진보적 문단에도 밀려왔다. 6월 항쟁 이후 진보적 문단은 민중적 민족문학, 노동해방문학, 자주적 민족문학 등으로 갈라져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했다. 이들 진보적 문학운동에 참여하는 친구들은 혁명이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 듯했다. 이들은 내가 보기에 리얼리스트이기보다는 로맨티스트였다.
나는 진보문단이 이렇게 갈라져 쟁투하는 것이 싫었다. 이시영 시인은 이들 정파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진보문단이 ‘시의 리얼리즘’ 문제로 또 한 번 뜨겁게 달구어졌다. 박사논문을 쓰는 중에도 나는 ‘시의 리얼리즘’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소론을 발표했다. 이렇게 그때그때의 문단상황에 대처에 나가던 중이었다. 1992년 나는 「리얼리즘 시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 대하여」(『실천문학』 여름호)라는 소론을 발표해 ‘리얼리즘 시 논쟁’을 종결짓기도 했다.
1995년 3월에는 나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전임강사직을 얻었다. 백낙청, 신경림, 조태일 선생 등의 도움이 컸다. 이시영 시인도 말부조를 좀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적응을 하는 동안은 이시영 시인과 거의 연락을 하지 못했다.
1999년 9월 7일 조태일 선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태일 선생이 저승으로 가는 동안 나는 엄청난 격랑에 휘말려야 했다. 그때의 격랑이 대충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나는 이시영 시인을 찾아가 얼마간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인사동의 솥밥집 ‘조금’에서였다.
예의 격랑으로부터 내가 일정한 거리를 가진 것은 2003년쯤 되어서였다. 3~4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겨우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참고 견디는 것이 세월이라고 생각했다.
2004년쯤 되어서였다. 이도윤 시인이 마포역 근처의 한화오피스텔에 ‘시인사’의 사무실을 열었다. 한국작가회의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태일 선생의 ‘시인사’를 이어받은 것이 이도윤 시인의 ‘시인사’였다. 이도윤 시인의 ‘시인사’ 사무실을 오가며 나는 다시 이시영 시인을 다시 만났다.
이즈음의 ‘시인사’ 사무실은 차와 술의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주로 보이차를 마셨다. 겨울방학 때나 여름방학 때는 따로 시간을 만들어 술과 차를 마시며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이곳 ‘시인사’에는 여성시인 두 명도 출입을 하고는 했다. 김여옥과 문경화 시인이 그들이었다.
김여옥 시인은 이도윤 시인과 가까웠고, 문경화 시인은 이시영 시인과 가까웠다.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나와 국민대학교 대학원 문창과에 다니는 문경화 시인은 『창작과비평』으로 등단을 한 재원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김여옥 시인은 물론 문경화 시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나는 이들 여성시인이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잘 몰랐다. 2005년 늦봄이었다. 이도윤 시인이 따로 내게 말했다.
“형, ‘시인사’에서 문경화 시인의 첫 시집을 출간하기로 했어.”
“그래? 잘 했네.”
이도윤 시인의 이런 결정은 아마도 이시영 시인의 부탁 때문인 듯했다. 얼마 뒤 이시영 시인이 내게 말했다.
“문경화 시인의 첫 시집에 해설을 좀 써.” 무슨 말을 따로 할 수 있겠는가.
“예, 그렇게 해야지요.”
흔쾌히 나는 문경화 시인의 첫 시집에 해설을 쓰기로 했다. 내게는 그것이 우정의 표시였다.
문경화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은 『아니마, 아니무스』였다. 원고상태로 시집을 읽었는데, 나로서는 해설을 쓰기가 좀 벅찼다. 힘들고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제된 이미지 혹은 은폐된 사랑―문경화의 시세계」라는 제목의 해설을 써내기는 했다.
문경화 시인은 곧바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미국에서 몇 차례 이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그때마다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다 하지만 곧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3~4년이 흘러갔다. 갑자기 문경화 시인의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왔다.
“귀국을 한 뒤 부산에서 살고 있어요. 건강이 별로 안 좋아요. 암이라고 하네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또 소식이 끊어졌다. 그녀가 끝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2006~7년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광주의 몇몇 지인들 때문에 나는 또다시 엄청난 격랑에 휘말려야 했다. 하루하루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너무도 한심한 일들이 반복되어 가슴속에서 늘 분노가 들끓어 오르고는 했다.
내 나이도 벌써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중년이 지난 내 몸은 이렇게 밀려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여기저기서 이상 징후를 나타냈다. 우선은 심장을 비롯한 혈관계에 병이 왔다. 마침내 고려대 안암병원 심혈관센터에서 특진을 받았다. 예쁜 여의사가 주치의였다. 그녀가 말했다.
“고협압, 고지혈, 혈관협착, 당뇨 등이 이미 몸속 깊이 침투해 있어요. 오래 살고 싶으면 담배부터 끊아야 해요.”
문득 이문구, 조태일, 이청준, 박명룡, 김용성 등 문단 선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담배와 술로 인해 이승을 떠난 분들이었다.
이내 금연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금연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전전긍긍하다가 아내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나는 아주 어렵게 금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연을 확인하기 위해 한두 번 담배를 피웠다가 이내 도로묵이 되고 말아 가슴을 치고는 했다.
그렇게 두어 차례 금연에 실패한 2010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화여대 목동병원으로 위암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소설가 김남일한테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이화여대 목동병원 1층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빡빡 담배를 피워댔다. 한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도 견딜 수 있도록 몸속에 니코틴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였다.
병실에는 김남일이 혼자 있었다. 내가 병실로 들어서자 담배냄새가 싫은지 김남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형, 담배 피우고 왔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아차 했다. 김남일이 이어 내게 말했다.
“금방 이경자 누나와 이시영 형이 왔다가 갔어.” “형이 온다고 하자 일층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빨리 가 봐.”
김남일이 이렇게 말하더라도 금방 입원실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주춤거리며 김남일에게 말했다.
“예후가 어떻다고 해?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해?”
김남일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시영 형한테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수술환자 앞에서 담배냄새 뿜지 말고 빨리 일층으로 내려와!”
“예, 알았어요.”
병실로 김남일을 만나러 올라가기 전 급하게 빡빡 담배를 피워대고 있는 내 모습을 본 듯했다. 서둘러 김남일과 헤어져 병원 일층으로 내려왔다. 이경자 소설가와 함께 이시영 시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우리는 택시를 타고 마포의 환화오피스텔 일층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택시 안에서였다. 이시영 시인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한의사이며 수필가인 이유명호 씨를 불러냈다. 택시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잠시 나는 금연과 관련해 이시영 형의 퉁망을 들어야 했다
“담배 끊기가 너무 힘드네요.”
나로서는 거듭 담배 끊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포 환화오피스텔 일층 커피숍 앞의 파라솔 밑에서였다. 모두들 손에 거피 한 잔씩을 들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더는 참지 못하고 마침내 답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었다. 담배연기가 주위를 허옇게 물들이자 우선은 두 여자 분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시영 시인도 담배를 피워 입에 무는 내 모습이 언짢은 듯했다. 잠시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다.
“담배 끊기가 이렇게 힘들어 어떻게 하나. 안절부절 못하는 저 모습이라니…….”
돌이켜보면 별 얘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다. 당장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담배를 끊기로 작정했다.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다짐했다.
아무튼 이시영 시인한테 이렇게 욕을 좀 먹은 뒤 나는 금연에 성공했다. 어찌 보면 이시영 시인 덕분에 담배를 끊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시영 시인은 2014년 초 신경림 선생 팔순 모임 이후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후 아직도 담배를 못 끊고 있다.
이시영 시인은 2012년 2월부터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직을 맡아 봉사를 하고 있다. 첫 번째 임기가 끝났지만 연임이 되어 지금까지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연말이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인 나는 총회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도 활동을 하기 했다. 위원장은 도종환 시인이었는데, 차기 이사장은 진작부터 이시영 시인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시영 시인은 쉽게 차기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하지만 사무총장을 맡을 만한 마땅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암중모색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광규 시인이 차기 사무총장을 맡기로 했다.
2012년 2월초의 어느 날이었다. 차기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직을 맡기로 한 이시영 시인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일의 연속성도 있고 하니 부이사장직을 연임해야겠어.”
“……………”
“그동안 사무총장 겸 부이사장으로 봉사를 해왔으니 연임을 해 일을 마무리하라는 거야.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새로 사무총장을 맡기로 한 공광규 시인을 도와야 할 필요도 있기는 했다. 이시영 시인은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였다.
군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나는 이시영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 그렇게 하지요.”
이렇게 해 나는 이시영 시인을 신임 이사장으로 모시고 또 한 차례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봉사했다. 따라서 한국작가회의의 온갖 행사 때마다 이시영 이사장과 행보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 작가대회 때도, 각종 촛불시위 때도 나는 늘 이시영 이사장의 곁에 있었다.
새롭고 젊고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시영 이사장이었다. 높은 정신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 그는 한 번도 내게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자주, 그렇게 많이 술을 마셨지만 나는 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잔정에 매여 일을 그르치는 적이 없는 그는 늘 저 자신이 세운 규율을 완벽하게 실천해 나갔다.
2014년 신학기가 되자 대학의 일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는 문단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이시영 이사장과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었다.
11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이시영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뭐하냐?
“정신없이 바쁘네요.”
“바빠도 전부터 얘기한 강재순 시인 좀 챙겨.”
“아, 예. 그래야지요. 그런데 뭘 어떻게 챙겨야지요?”
“강재순 시인, 잘 알잖아?”
“예.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잖아요.”
“그렇지. ……김남주 시인이 죽기 전에 내게 강재순 시인을 부탁했어.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학영 시인과 함께 말이야.”
“그 얘기는 전에도 하셨잖아요?”
“전에도 얘기했지. 그런데 강재순 시인이 시집을 내기로 했어.”
“아, 그래요. 어느 출판사에서요?”
“김영재 시인의 도서출판 ‘책 만드는 집’에서…….”
“강재순 시인은 지금 중국 산동성 제남의 청년정치학교 한국어 교수로 있잖아요.”
“맞아. 내년, 2015년 2월에 잠시 귀국을 한다고 해.”
“아, 그래요? 그때까지는 시집을 내야겠네요?”
“이은봉 교수가 서둘러 강재순 시집의 해설을 써 줘.”
“예. 알았어요. 그러나 겨울방학이나 되어야 쓸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해. 내년 2월초에 시집이 출간되기만 하면 돼.”
이시영 시인이 부탁을 하니 나는 그냥 예, 하고 대답을 했다. 형편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이것저것 따져 무엇을 하겠는가. 대답은 쉽게 했지만 원고를 쓸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의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겨울방학 내내 나는 학교에 출근했다. 그러고는 공문서를 처리하는 틈틈이 강재순 시인의 첫 시집 『오래된 호수』의 말미에 붙일 해설을 썼다. 「떠돌이 자아의 아프고도 슬픈 추상―강재순의 시세계」가 그것이었다.
2015년 2월 12일, 드디어 강재순 시인의 시집이 도서출판 ‘책 만드는 집’에서 간행되었다. 그녀도 귀국을 해 서울에 와 있었다.
그녀는 마포의 중국식당 ‘부영각’으로 이시영 시인과 김영재 시인, 그리고 나를 초대했다. 약속시간은 저녁 6시였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나는 30분이나 늦게 ‘부영각’에 도착했다.
강재순 시인과 이시영 시인이 2층의 룸에서 ‘연태고량주’ 한 잔씩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간 ‘계림삼화주’도 꺼내놓고 한 잔씩 했을 때였다. 김영재 시인이 막 출간된 강재순 시인의 따끈따끈한 시집을 배낭에 지고 왔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술자리가 계속 이어졌다.
술자리가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이시영 시인이 이미 계산을 다해 잠시 강재순 시인이 당황했다. 이시영 시인의 셈법이 본래 그러니 나는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2차의 술자리는 한국작가회의 사무실 주변의 ‘째즈’에서 있었다. 빌딩의 6층에 자리를 한 ‘째즈’는 마포대교의 야경이 아름다운 술집이었다. ‘째즈’에서 이시영 시인은 오래 미루어 두었던 과제를 마친 학생처럼 즐거워했다. 술이 취하자 더러는 큰 목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남주야. 네가 내게 한 부탁, 다 마쳤다. 만세다.”
이미 다 큰 아이를 떼어놓는 엄마의 심정이 이랬을까. 이시영 시인은 강재순 시인이 첫 시집 『오래된 호수』를 상재한 것을 너무도 좋아했다. 취중에도 그는 김남주 시인과의 약속을 지킨 저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운 듯했다.
칵테일 몇 잔을 더 마신 뒤 그날의 술자리는 파했다. 택시를 타고 길음동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득 10년도 더 전에 발표한 이시영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내가 간단하게 해설을 쓴 적이 있는 시였다. (2015년 《푸른사상》 봄·여름호)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 「성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