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희 (2004-11-03 12:24:57, Hit : 2350, Vote : 55)
(1일 재답변) 고구려 안시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메일 질의에 대한 답변내용입니다
우리 민족사서가 있는데 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일본/미국학자들이 연구한 논문을 인용하여 우리역사를 해석하려한다
우리역사를 남이 연구해 놓은 것을 번역하여 논문을 쓴다
이것은 미친짓이다
(문)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답) 안시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1) 강단의 추정 → 추정일 뿐이다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
(2) 중국 정사의 기록 → 하북성 북경일대라 기록하고 있다
- 한서 : 요동군, 하북성 북경
- 위서 : 안락군, 정주, 하북 북경, 밀운
- 독사방여기요 : 안시폐현, 북경현 동북 50리, 한요동속현
(3) 민족사서의 기록 (한단고기) → 정확히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은 하북성 개평의 동북쪽 70리에 있다”
(4) coo2의 의견 → 북경인근이나 개평인근에서 찾아야 한다.
안시성은 하북성에 있어야 한다
중국사서의 기록은 하북성 북경인근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단고기는 하북성 개평 인근으로 정확히 적시하고 있어
안시성이 하북성에 있었음을 공통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안시성 전투는 645년(보장왕 4)에 있었던 전쟁이다.
연개소문이
643년 산동성 즉묵시에서 당태종과 마산전투를 벌였고
644년 산동성 봉래에서 당태종의 형을 전사시킨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것을 감안할 경우 안시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북성 지형도를 보면
북경 동북쪽이나 개평인근은 산맥이 시작되는 접경지역으로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맞다.
따라서 고구려 안시성의 위치로 적합하다 할것이다.
많은 분들의 추가적인 연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시성 복원도)
-> 엠파스 사진자료 일부 편집
(추가보완 설명자료)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제6 -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다"
"조대기"에 말한다
"태조 융무3년 요서에 10성을 쌓고 이로써 한의 10성에 대비케 하였다"
첫째,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셋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넷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옛 요동국이라 함)에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고구려 안시성은 하북성 "개평" 동북 70리
(1)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2)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3)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하북성)도 량(섬서성)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해설)
(1)(2)(3) 고려진(영), 고려성, 안시성
(1)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중국지도에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2)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했는데
북쪽으로 바로 산악지역이 시작되는 곳이라 성을 쌓아 방어용으로 할수 있는 지형이다
지금의 "탕지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3)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지도에는 성표시가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하며,
삼국사기 본기에는 태조대왕이 요서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어쨌던 고구려 "태조무열제"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자세한 위치는 아래와 같다
(북경대 교재, 하북성 지도)
(중국 군사지도상 표시)
삼국사기에는 아래와 같이 간략히 소개가 되어있다
요서에 쌓은 10성은 다음시간에 자세히 알아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기타>
(당나라 이세적이 당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
압록수(鴨水) 이북의 항복하지 않았던 (고구려) 11성(城)
(1)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였다.
(2) 절성(節城)은 본래 무자홀(蕪子忽)이었다.
(3) 풍부성(豊夫城)은 본래 초파홀(肖巴忽)이었다.
(4) 신성주(新城州)는 본래 구차홀(仇次忽)<혹은 돈성(敦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다.
-> (운영자 주) 하북성 신성 (?)
(5) 도성(桃城)은 본래 파시홀(波尸忽)이었다.
(6) 대두산성(大豆山城)은 본래 비달홀(非達忽)이었다.
(7) 요동성주(遼東城州)는 본래 오열홀(烏列忽)이었다.
(8) 옥성주(屋城州),
(9) 백석성(白石城),
-> (운영자주) 하북성 백석산 (?)
(10) 다벌악주(多伐嶽州),
(11) 안시성(安市城)은
예전의 안촌홀(安寸忽)<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다
(종합지도) 산동성/강소성에 있는 고구려 연개소문의 흔적
(요약설명)
-> 검색 연개소문 하시면 개별적인 내용들을 자세히 보실수 있습니다
(1) 산동성 봉래시(644년) : 연개소문과 당태종 격전지
- 봉래인근에서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격전을 치루었는데 당태종 형이 전사를 한다
(2) 산동성 즉묵시 마산대전 (643년) : 연개소문과 당태종 격전지
- 당태종이 산동성 즉묵시 마산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에 포위되어 사로잡힐 처지에 놓이자
용양장군 김걸이 당태종을 극적으로 구출하자 태종은 줄행랑을 치고(?)
김걸은 연개소문에 대항하다 전사하다
(김걸은 신라장군이라 한다 - 확인중)
(3) 강소성 비주 "애산" 전투 (627년 전후) :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 군과의 격전지
(4) 강소성 "숙천" 전투 :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 설인귀 군과의 격전지
- 자치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 내용중 장산삼림공원 소개부분을 보면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전쟁을 하여 연전연승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내려온다
(5) 강소성 염성 "건호" :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격전지
염성(鹽城)의 건호(建湖)현에는 몽롱탑(朦朧塔)의 전설이 있는데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우물에 숨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자 후에 이세민이 왕이 되어
거미줄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을 잊지 못해 감격하여
우물이 있던 곳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한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줘
목슴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탑이 "몽롱보탑(朦朧寶塔)" 이라 불려졌다.
더불어 탑을 세운 후 비교적 큰 정혜사(淨慧寺)라는 절을 세웠다.
1998년 이탑이 복원되었다
(6) 강소성 "금호" : 고려성이 있는 지역이다
(7) 양주 : 고구려 절세미인 아희와 수나라 양광(양제)와의 전설이 있는 곳 (단양주의 전설)
(8) 단양 : 단양주의 전설이 있는 곳(7번과 동일)
야후백과사전 양만춘(楊萬春)
- 생몰년 미상, 고구려의 명장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의 성주)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당나라 태종과의 공방과 일화)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독전(督戰)으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遼陽 동남)도 당나라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15만 병력이 출동하였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군대는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되어 60여일 걸려서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였고, 군량 또한 다하였으므로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하니,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