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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시 세계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 박인환 탄생 100주년에 부쳐
장 만 호(시인, 경상대 교수)
1. 뱀이 지나간 자리
192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죽은 시인이 있다. 서른 해의 생애. 그 짧은 시간 안에 식민지의 말기, 해방의 환희, 분단의 예감, 전쟁의 참혹, 전후의 폐허,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도래가 모두 들어 있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렬한 국면을 관통했고, 그의 시는 그 관통의 기록이었다. 그는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을 맞고, 서울 종로 3가에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열고, ‘신시론’ 동인을 결성하여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 후 다시 ‘후반기後半期’ 동인을 결성하고 종군 기자로 이 참혹을 시와 산문으로 증언했다. 화물선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이 이력은 일종의 ‘포즈’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를 시도했으나 어느 하나도 완결하지 못한 산만한 삶의 궤적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김수영은 이 시인을 두고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김수영, 「박인환」,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161면)다고 평가했다. 박인환의 삶과 시적 이력을 송두리째 부정한 이 혹평은 이후 반세기 넘게 박인환 평가의 그림자가 되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2026년, 우리는 이 시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70~80년대에는 ‘경박한 모더니스트’로, 1990년대에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자유주의자’로, 200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를 구제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연구자가 지적했듯이 그 구제의 방식은 대체로 박인환의 정체성(누구인가)을 분석하되 주체성(무엇을 하고자 했는가)은 삭제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그의 이력을 비정치적 미의식으로 환원함으로써 박인환을 ‘구제’하는 동시에 ‘박제’로 만드는 역설이 거기에 있었다. 이 같은 박인환 평가의 함정을 의식하면서, 그의 시가 당대의 어떤 모순과 대결했고 그 대결의 방식은 무엇이었는가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시인이 자기 시대의 구체적 모순 앞에서 어떤 실천적 태도를 취했는지를 그의 텍스트 안에서 읽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주지하듯 ‘박인환의 시대’는 거대한 대립의 시대였다. 좌익과 우익, 전쟁과 평화, 죽음과 생존, 미국과 한국. 이 대립들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훑고 간 역사적 현실이었다. 박인환의 이력은 이 대립들 가운데 어느 한쪽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면서, 대립 사이의 틈을 통과하여 자유로운 감각과 살아 있음의 의지를 되찾으려 한 시도였다. 공교롭게도 이 같은 시도는 그가 「목마와 숙녀」에서 이미지화했던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는 해방기의 이념적 지형에서 ‘자본과 사상’이라는 두 바위의 어느 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자유정신을 모색했다. 한국전쟁이 강제한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욕구 ‘사이’에서 시 쓰기를 통한 실존적 분투를 이어갔으며, 미국 체험을 통해 절감한 문명적 격차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고자 했다. 이 세 국면에서 박인환은 각각 일방적 질서에 맞서 균형을 취하려는 태도, 센티멘털리즘을 시인의 무기로 전환하려 한 태도, 이방인의 자의식을 자기 정체성의 거점으로 삼으려 한 태도를 취한다. 바위틈에 허물을 벗어놓고 새로운 몸으로 나아가는 뱀처럼, 그는 이념의 바위, 전쟁의 바위, 문명 격차의 바위틈을 뚫고 지나가려 한 것이다. 그가 헤쳐간 바위틈을 하나씩 살펴보자.
2. 자본과 사상의 바위 틈
해방 후 박인환이 처음 한 일은 2년 정도 수학하던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와 서점을 차린 일이었다. 아버지로부터 3만 원과 이모부에게서 2만 원을 빌려 종로 3가 파고다 공원 옆 낙원동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한 것이다. 마리서사는 “동쪽의 널따란 유리 진열장에 그린 ‘아르르 강’이라는 도안 글씨이며, 가게 안에 놓인 커다란 유리장 속에 든 멜류알, 니시와키 준사부로의 시집들이며, 용수철 같은 수염이 뻗친 달리의 사진”(김수영, 「마리서사」,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174면)을 ‘근사하게’ 내걸고 외국의 희귀 서적을 파는 곳이었다. 박인환은 이 공간에서 시를 습작하는 한편 다양한 예술인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요즘의 소위 ‘난해시’라는 것을 그는 벌써 그 당시에 해방 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책방에는 그 방면의 베테랑들인 이시우, 조우식, 김기림, 김광균 등도 차차 얼굴을 보이었고, 그 밖에 이흡, 오장환, 배인철, 김병욱, 김광균 등의 리버럴리스트도 자주 나타나게 되어 전위예술의 소굴 같은 감을 주게 되었지만, 그때는 벌써 마리서사가 속화의 제일보를 내딛기 시작한 때이었다.
―김수영, 「마리서사」,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175면.
사실은 이 글의 의도는,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위의 글, 178면.
김수영의 이 같은 증언과 회고를 통해 이 시기 박인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박인환은 이 시기 ‘난해시’를 창작하고 있었으며, “벌써 그 당시에 해방 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김수영은 같은 글에서 미기시 세츠코, 안자이 후유에, 기타조노 가츠에, 곤도 아즈마 등 일본의 “이상한 시”를 박인환을 통해 접하게 되었고, “그보다도 더 이상한, 그가 보여주는 그의 자작시를 의무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시기 박인환은 난해시, 혹은 전위시의 학습자이면서 동시에 전파자였던 셈이고, 박인환의 시적 인식과 취향에 난해시가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이로써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마리서사라는 공간의 성격이다. 이 공간은 좌와 우의 이념적 대립, 전통과 전위와 같은 시적 지향을 떠나 다양한 문인들이 모여드는, “가장 자유로웠던” 공간이었다. 마리서사를 출입했던 김광균 역시 “좌우가 머리가 깨어져라 싸우는 문단 안에서 거기만 무풍지대처럼 따뜻한 술잔을 나누었다”(김광균, 「마리서사 주변」, 오영식·유성호 편, 『김광균 문학전집』, 소명출판, 2014. 474면)고 회고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마리서사는 격렬한 이념 대립의 양상을 보이던 해방공간 안에 예외적으로 자리한, 예술적 자유가 넘쳐나던 아지트이자 헤테로토피아였던 셈이다.
이 시기 박인환의 문학적 지향과 문단 교류 방식은 그가 쓴 작품과 발표 지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은행 유리창 밑으로/대륙의 시민이 푸로므나-드하든/지난해 겨울//전쟁을 피해온 여인은/총소리가 들리지않은 과거를/수태하며 뛰여다녔다.//폭풍의 Muse는 등화관제 속에/고요히 잠들고/이 밤 대륙은 한 개 과실같이/대리석 우에 떠러젔다.
-「斷層」 부분(『전집 1』, 249면)
사진 잡지에서 본 향항(香港)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 부두를 슬퍼했다//서울에서 삼십 킬로를 떨어진 곳에/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인천항이 있다//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여실히 표현한 인천 항구에는/상관(商館)도 없고/영사관도 없다// (··· 중략 ···) //밤이 가까울수록/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宿舍)와/주둔소(駐屯所)의 네온사인은 붉고/정크의 불빛은 푸르며/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 간다/조선의 해항(海港) 인천의 부두가/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 간다.
- 「인천항」 부분, 『전집 1』, 56~58면.
박인환이 처음으로 발표한 시 「단층」(후에 「불행한 샹송」으로 개작하여 시집 『선시집選詩集』에 수록)은 1946년 6월 20일 우익 계열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에 게재된다. ‘푸로므나-드’, ‘Arlequin’, ‘Express for Mukden’, ‘Marronnier’ 등 외래어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시어와 이미지들의 의미적 연결을 (일부러) 갖추고 있지 않은 ‘난해시’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의미의 윤곽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작품인데, “대륙의 시민이 푸로므나-드(산책, 행진)”한다거나, “전쟁을 피해온 여인”이 전쟁 이전의 상태를 다시금 만끽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총소리가 들리지않은 과거를/수태하며 뛰여다녔다”는 표현을 통해 이 시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그 이후의 정치적 상황들을 암시하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제목으로 사용된 ‘단층’의 사전적 의미도, 이 시가 세계사적 전환과 그 단면을 포착하는 동시에 난해시의 한 특징으로서의 시적 의미의 단절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반면 해방기 대표적인 좌익 계열의 잡지인 『신조선』에 수록된 그의 두 번째 시 「인천항」은 아시아의 고난과 해방 조선의 재식민지화의 우려를 분명한 메시지로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박인환은 이 시에서 “유니언잭이 날리던/식민지 향항의 야경”과 “성조기가 퍼덕이는” “조선의 해항海港 인천의 부두”가 “소리 없이 닮아 간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반자본적·반제국주의적 인식은 이후 발표되는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로 가면서 더욱 확장된다. 「남풍」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경험과 이에 대한 항쟁의 기억을 호명하면서 아시아의 연대를 강조하며,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역시 네덜란드에 맞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쟁에 대한 응원과 연대를 표명하고 있다.
이처럼 박인환의 해방기 시편들은 난해시적 성격과 반제국주의적·반자본주의적 경향의 시들이 혼재하고 있었고, 그는 진영을 넘나들며 시를 발표하고 자유로운 문단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47년 남한에서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열풍이 불면서 좌익의 활동이 극도로 위축된 후에도 박인환은 이 같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듯하다. 한 예로 1949년, 김경린·김수영 등과 함께 ‘신시론’ 동인 2집에 해당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그는 「인천항」,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 소위 반제·반자본적인 성격의 시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이 동인지의 서문 격인 「장미의 온도」에서 당시의 사회를 “증오와 안개 낀 현실”만 있는 장소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不均整)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 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었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 더욱 멀리 지난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地區)에 가라앉아 간다.
그러나 영원의 일요일이 내 가슴속에 찾아든다. 그러할 때에는 사랑하던 사람과 시의 산책의 발을 옮겼던 교외의 원시림으로 간다.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겼던 시의 원시림으로 간다.
아, 거기서 나를 괴롭히는 무수한 장미들의 뜨거운 온도.
―「장미의 온도」(『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서문), 『전집 2』, 39면.
해방기의 인식과 시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이 글에서 박인환은 당대의 현실을 “불모의 문명”이라 규정하고, 그 불모성의 원인을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에서 찾는다. 1947년 미군정의 대대적인 좌익 검거와 이후의 지속적인 탄압을 연상케 하는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불균정’이라는 말의 의미에 있다. 글의 맥락에서 볼 때, ‘불균정’이라는 표현은 대립적 상황이 아니라 외부적 힘에 의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공정하지 않은 싸움을 뜻한다. 박인환이 원한 것은 사상과 자본의 공정한 경쟁이었지만, 현실은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 즉 자본주의의 일방적이고 전면적인 확산과 이로 인해 형성된 “증오와 안개 낀 현실”만 있었던 것이다.
박인환은 자본과 사상의 불공정한 싸움이 야기하는 “불모의 문명” 위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 작용만” 내세우는 문학의 한계를 깨닫는다. 역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시민정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호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시는 단순한 언어작용의 산물이 아니라 시민정신의 표출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 위에서 그는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겼던 시의 원시림”이라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곳은 지역성으로서의 “풍토”, 고유성으로서의 “개성”, 불균정하지 않은 “사고의 자유”라는 세 조건이 충족되는 곳, 즉 시의 영토다. 이 같은 논리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장미들의 뜨거운 온도”란 “증오와 안개 낀 현실”과 대비되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이자 시민정신의 육화인 셈이다. 그가 말하는 시민정신과 원시림의 구체적인 모습은 짧은 지면과 비유적 표현으로 분명하게 표명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박인환은 나름의 비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미의 온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박인환의 시적 기획 — ‘자본과 사상의 공정한 싸움으로 확보되는 시민정신의 육화로서의 무수한 장미들의 뜨거운 온도로 가득한 시의 원시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1949년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는 같은 해 9월 30일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하는 성명서를 제출하고 11월 30일에는 전향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0년 1월 보도연맹에서 주최하는 ‘국민예술제전’에 참여하게 된다. 일련의 활동이 그의 자의인지, 타의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해방기 남한에 남아 있던 좌익 계열 문인들이 겪게 되는 검거와 조선문학가동맹 탈퇴, 전향과 보도연맹 가입, 그리고 동원을 통한 선전의 루트를 박인환 역시 그대로 밟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마리서사에서 그가 구현하고 직접 체험했던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행보는 ‘강제적으로’ 중단된다.
이 좌절의 흔적은 1950년 5월 16일 『경향신문』에 발표된 「1950년의 만가挽歌」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안한 언덕 위로/나는 바람에 날려 간다/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나는 죽어 간다/아 행복에서 차단된/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불안한 언덕에서/나는 음영처럼 쓰러져 간다/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나는 죽어 간다/지금은 망각의 시간/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아름다운 연대(年代)를 회상하면서/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 간다
—「1950년의 만가挽歌」 전문, 『전집 1』, 83면.
이 시에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시는 주체의 불안과 무기력함의 파토스로 가득차 있다. 시의 주체는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그리고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 간다”. 「장미의 온도」에서 비판했던, 그의 내면에서 들끓던 “사상과 자본의 불균정한 싸움”은 이제 ‘자본’의 완전한 승리와 독점으로 끝난다. ‘무거운 고뇌’ 대신 ‘단순’만이 자리한 세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아름다운 연대(年代)”는 무로 돌아간 세계에서 주체에게 남은 것은 오직 ‘모멸’뿐이다. 우애와 연대, 그리고 자유를 빼앗긴 자에게 ‘난해시’와 ‘반제’, ‘반자본’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나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이 시는 마리서사로 상징되는 자유와 시의 원시림에 대한 일종의 ‘만가’처럼 들린다.
이렇게 자본과 사상(思想)이라는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시의 원시림’에서 청춘을 되찾으려 한 박인환의 첫 번째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가 좌와 우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적 자유를 구가하던 시기는, 마리서사의 폐업, 검거와 전향, 그리고 동원의 과정 속에서 종결된다. 「장미의 온도」에서 꿈꾸었던 시의 원시림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다른 바위에 의해 가로막혔다. 첫 번째 허물을 바위에 남긴 채, 박인환은 두 번째 바위틈, 즉 전쟁이 강제한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욕구 사이의 간극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3. 부재와 현존의 바위 틈
1950년 서울에서 9·28 수복을 맞은 박인환은 이듬해인 1951년 1월 1·4 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다. 그해 2월에는 경향신문사 특파원 자격으로 서울 재탈환 작전에 참여해 현장 기사를 쓰는 한편 5월에는 ‘육군종군작가단’ 결성에도 참여한다. 적 치하의 서울에서, 특파원과 종군작가단 활동 등을 통해 본 전선에서 그는 전쟁의 처참한 광경들을 목격한다. “길 위에 쓰러진 자유의 군대···. 이름 모를 젊은 군인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박인환, 「암흑과 더불어 3개월」, 『전집 2』, 414면) 보거나, “기총 소사로 어린애를 업고 쓰러져 있는 어머니의 참혹한 시체”와 “보기 좋게 사살된 중공군의 산적山積된 최후의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박인환에게 이 같은 장면들은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이상 박인환, 「서울 재탈환」, 『전집 2』, 408면) 경험이었다고 말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박인환은 여러 산문에서 전쟁의 비극과 잔인함을 순치해 표현하는 대신 전쟁의 ‘교훈’을 더 강조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지금 6·25를 회상할 적에, 참으로 좋은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전까지는 막연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만 해 왔고, 이북에서 남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솔직한 것으로 듣기에는 나의 하나의 편협된 개념이 수긍치 못했다”며(박인환, 「암흑과 더불어 3개월」, 『전집 2』, 419면), 6·25를 두고 “참으로 좋은 체험”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기 박인환의 행적 및 시적 이력과 대비할 때, 이 같은 발언은 우리의 인식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고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해방기에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고 전향한 전력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까. 전쟁 직후 ‘반공’이란 이념적 판단 이전에 격렬한 분노를 수반하는 ‘적대적 감정’이었기에 ‘반공의식’의 자각과 고취를 위한 수사적 차원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해당 글이 ‘수기’ 형식으로 『여성계』(1954. 6. 1)라는 잡지에 게재되었고, 이 시기에 발표된 대부분의 수기들이 그러했듯, 증언과 교훈의 도출이라는 일련의 공식을 그 역시 따라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박인환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반공과 탈환, 쟁취의 서사로 이루어진 공적 보고가 아니라 그의 실존적 고민과 분투가 담긴 시를 살펴보는 데 있을 것이다.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일 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인간을 대신해서 세상을 풍설(風雪)로 뒤덮어 주시오.//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꽃이 피지 않도록.
― 「검은 신이여」 부분(『전집 1』, 94면)
질문은 신에게 향하는 인간의 가장 겸손한 발화의 하나이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하지 않는 경우 질문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니라 한탄과 호소처럼 들린다. 신에 대한 연속된 질문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 시가 전쟁의 참상에 대한 분노와 고발처럼 들리는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시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묘지, 파괴된 건물, 검은 바다는 모두 누군가가 죽었거나 죽음을 품고 있는 장소이며, 심지어 인간의 ‘내부라는 장소’에도 ‘사멸’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나의 친우”의 죽음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은 그들에서 우리로, 나아가 나에게로 확장된다. 시의 모든 장소와 사물에 깃든 사멸의 고통과 슬픔은 죽음의 크기를 오히려 능가한다.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달라는 호소는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슬픔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비애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검은 신’에게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꽃이 피지 않도록”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 꽃이 피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자연적 질서를 거부하고 죽음 그 자체를 ‘그대로’ 두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애도도 불가능하며, 어떤 순환도 불가능한 상태에 놓아둠으로써 전쟁의 참혹이 망각되거나 순치되기를 거부하는 이 같은 태도를 통해 박인환의 상실과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이 사라진 자들의 자리, 사멸한 것들의 흔적 쪽을 향해 있다면,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시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은 시선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놓는다. 바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 보다 정확히는 ‘살아남은’ 자의 자리와 그 비애를 향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더한 냉혹하고 절실한/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중략)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철없는 시인/나의 눈 감지 못한/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부분(『전집 1』, 110~111면)
이 시의 화자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묻는 대신,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라는 가정의 형식을 통해 살아남은 자가 떠맡아야 할 것들, 남겨진 것들의 목록을 차례로 호명한다. “회상과 체험”, “고뇌와 저항”,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裸女)”, 그리고 마지막에 호명되는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철없는 시인/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가 그것이다. 대조를 통해 화자는 전항(前項)의 죽음과 살육보다는 후항後項에 위치한 회상과 체험, 고뇌와 저항이 더 고통스러움을 강조하고, 자기 호명의 끝자리에 이르러서는 살아남은 자신이란 결국 “눈 감지 못한” 시체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진술한다. 살아 있다고 부를 만한 것은 그저 ‘단순한 상태의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시체뿐인 세계, 그러나 그 시체조차 끝내 ‘눈을 감지 못한’ 상태로 머무는 세계 ― 이것이 박인환이 그려낸 전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풍경인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을 단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의 표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박인환의 시 세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부재’와 ‘현존’의 길항이라는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전쟁 이후 박인환 시의 화자는 죽은 자는 이미 죽었기에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살아남은 자는 살아 있지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달라고 호소할 만큼 무력하다. 그렇다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어떤 자리, 산 자의 무력함과 죽은 자의 부재 사이에 가까스로 자신을 세우는 자리가 필요할 터이니, 그것이 곧 “눈 감지 못한 시체”이다. 죽은 자처럼 어떤 것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나, 산 자처럼 여전히 이 세계를 응시하는 자. 박인환이 자신의 임무로 호명한 “회상과 체험”, “고뇌와 저항”은 바로 이 위상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검은 신이여」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은 같은 사건의 양면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난다. 전자에서 박인환이 사멸된 것들의 흔적을 그 사멸의 형태 그대로 보존하고자 했다면, 후자에서 그는 살아남은 자가 그 사멸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고 견디는 자세를 모색한다. 두 시편을 가로지르는 박인환의 시적 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부재’와 ‘현존’의 길항이라 할 수 있다. 부재라 함은 전쟁이 빼앗아 간 것들, 즉 “나의 친우”, 파괴된 건물, 사라진 묘지,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들이다. 다시 말해 곧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의 자리이다. 그리고 현존이라 함은 그 부재를 기억하고, 직시하고, 이야기하고, 또 그 이야기를 듣는 자의 자리이다. 부재가 일방적인 침묵의 형식이라면, 현존은 그 침묵에 응답하여 발화하고 청취하는 형식이다. 전쟁이라는 사건은 박인환에게 이 둘을 갈라놓는 동시에, 이 둘을 잇는 매개를 모색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부재와 현존, 침묵과 발화, 사멸과 기억, 이 대립과 매개의 인식이 가장 정련된 시적 형식으로 결정(結晶)된 작품이 「목마와 숙녀」이다. 보통 「목마와 숙녀」는 전후 센티멘털리즘의 대표작 혹은 도시적 우수의 표본 정도로 거론되어 왔다. 또한 ‘난해’의 표찰을 붙일 정도로 이미지와 이미지, 사유와 사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일종의 순환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혐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분석한 두 편의 시가 가리키는 시적 좌표 안에 이 작품을 다시 놓게 되면, 「목마와 숙녀」는 일정 부분 사뭇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부재와 현존이 가장 농밀하게 부딪치고, 서로 이야기하고, 듣는 시 ― 그것이 「목마와 숙녀」라고 해보면 어떨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중략)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중략) /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마와 숙녀」 부분(『전집 1』, 151~152면)
「목마와 숙녀」의 처음과 끝은 모두 ‘술’을 둘러싸고 짜여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면서 시작된 시는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가을바람 소리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왜 술이었을까. 이 술잔과 술병의 수미상관은 단순한 형식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술’은 박인환 시 세계 전반에서 거듭 출몰하는 핵심 시어인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도시적 우수와 낭만성, 의식의 경계 흐리기, 몽환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지로 작동한다. 술은 ‘센티멘털리즘’의 가장 직접적인 상징이며, 박인환 시의 그 유명한 우울과 비애가 흘러나오는 가장 손쉬운 통로이기도 하다. 만약 「목마와 숙녀」가 이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면, 박인환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즉 ‘감상의 과잉’ 혹은 ‘유행에 대한 값싼 숭배’ 정도로 취급되는 비판을 그대로 정당화하는 작품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술’은 단지 도취의 매개로만 머물지 않는다. 시의 도입에서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신 뒤에야 비로소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술’은 떠난 자, 사라진 자, 부재의 자리에 놓인 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 출현한다. 그리고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선언할 때, 술은 ‘눈을 뜨는’ 행위와 결합한다. 도취가 아니라 직시直視의 매개로서, 망각이 아니라 기억의 매개로서 술이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추가로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은, 이 직시와 기억의 매개인 술이 동시에 부재와 현존을 잇는 매질媒質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술은 분명히 센티멘털리즘의 전형적인 기표이지만, 동시에 부재가 현존에게 말을 걸 수 있고, 현존이 부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로 기능한다. 화자가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들음’의 자리에는 술잔이 놓여 있다. 떠난 자의 옷자락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각,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은 술이 빚어낸 의식의 미세한 길 속에서 비로소 열린다. 술은 부재와 현존 사이의 굳건한 벽을 일시적으로 통과 가능한 막으로 바꾸어 놓는 매질인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만약 박인환의 술이 단순한 도피의 일반적 도구였다면, 그것은 부재를 망각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목마와 숙녀」의 술은 정반대로 작동한다. 그것은 부재를 또렷이 듣고, 보고,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이며, 그렇게 작동하는 한 그것은 단순한 감상의 기호를 넘어 시 안에 삶과 죽음을 동시적으로 존재케 하려는 박인환의 의지의 표상이다. 시의 마지막 행에서 화자가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가을바람 소리를 끝까지 듣고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술병이 쓰러진 자리, 모든 ‘떠남’이 완성된 자리에서도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 소리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부재하는 자가 남겨 놓은 흔적의 진동일 것이며, 술이 깰 때까지 들릴 것이다.
박인환에게 ‘부재’는 거대한 바위처럼 무겁고 단단하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으며, 사라진 친우는 어디서도 만날 길이 없다.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들은 그 사멸의 형태 그대로 남는다. ‘현존’ 역시 거대한 바위처럼 압도적이다. 살아남은 자는 매일의 폐허를 살아내야 하며, ‘눈 감지 못한 시체’로 ‘모멸의 오늘’을 견뎌야 한다. 그 사이에는 가느다란 틈이 있다. 부재가 현존에게 가까스로 말을 건네고, 현존이 부재의 이야기를 가까스로 들을 수 있는 그 좁은 통로. 박인환은 그 바위 틈을 발견했고, 그 틈을 통과하는 자의 형상을 “청춘을 찾은 뱀”이라 명명했다. 뱀은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면서 옛 껍질을 벗고 새로운 살을 얻는다. 사멸과 생존, 두 운명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죽은 표면을 벗어 두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박인환이 전쟁 이후 보여준 시들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4. 한국과 미국의 바위 틈
1955년 3월 5일 정오, 박인환은 대한해운공사 소속 화물선 남해호南海號의 사무장 자격으로 부산항을 떠난다. 일본 고베에 닷새간 기항한 뒤 13일간 태평양을 가로질러 3월 22일 미국 워싱턴 주의 주도州都 올림피아에 입항한 그는, 이후 19일간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 일대의 항구 도시들인 터코마, 시애틀, 에버렛, 아나코테스, 포트앤젤레스, 포틀랜드를 순회하고 4월 초 한국으로 돌아온다. ‘해외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생경하던 시절,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이 예외적인 19일의 체험을 통해 박인환은 후일 『선시집』에 ‘아메리카 시초(詩抄)’라는 표제로 묶이게 되는 「태평양에서」, 「십오 일간」, 「여행」, 「에버렛의 일요일」,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 「수부水夫들」, 「다리 위의 사람」, 「새벽 한 시의 시」, 「투명한 버라이어티」 등 일련의 기행시편과, 「19일간의 아메리카」(『조선일보』, 1955. 5. 13~17), 「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월간 희망』, 1955. 7),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 「몇 가지의 노트」 등의 여행 산문을 남긴다.
이 짧은 여행은 박인환에게 단지 새로운 풍광의 발견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지로서의 미국’과 ‘실재로서의 미국’이 결정적으로 어긋나는 자리, 그리하여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또 하나의 바위틈을 인식하게 되는 자리였다. 해방기의 ‘자본과 사상’의 바위틈, 한국전쟁기의 ‘부재와 현존’의 바위틈을 차례로 통과해 온 박인환에게, 미국행은 그가 마주해야 할 세 번째 바위틈 ― 곧 ‘문명적 격차’의 바위틈을 열어 보였던 것이다.
미국행 이전 박인환이 가지고 있던 미국 인식의 골격은 일찍이 그가 발표한 「아메리카 영화 시론」(『신천지』, 1948. 1)에 정식화되어 있다. 이 글에서 박인환은 유럽 영화가 “내향성”의 예술 정신과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반면, 미국 영화는 “전통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 더욱 비참”하며 “예술성보다 오락성”에 치우쳐 있다고 단언한다(「아메리카 영화 시론」, 『전집 2』, 117면). ‘유럽 = 철학·예술·전통’, ‘미국 = 오락·대중·물질주의’라는 이 이항의 도식은 박인환이 미국을 ‘문화적 후진성’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인식 틀이었다. 그러나 1955년 봄, 그가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의 항구 도시들에서 마주한 미국은 이 도식 자체를 흔들었다. 그것은 영화관 스크린 너머의 미국이 아니라, 일상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물질문명’의 압도적 실체였기 때문이다. 시 「에버렛의 일요일」에서 그는 “텔레비전도 처음 보고/칼로리가 없는 맥주도 처음 마시는/마음만의 신사”(『전집 1』, 162면)로 자신을 그리고, 「투명한 버라이어티」에서는 “녹슬은/은행과 영화관과 전기세탁기”(『전집 1』, 189면)를 무심히 늘어놓는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한국에서 개국하기 일 년 전이었고, 전기세탁기가 국내에서 제조되기까지는 십수 년이 더 필요했던 시점이다. 「여행」에서 “비가 내리는 주립 공원을 바라보면서”(『전집 1』, 153면) 화자가 잠시 멈춰 서는 장면이나, 산문 「19일간의 아메리카」에서 “창해와 같은 삼림은 아메리카의 웅대성을 말하는 동시 그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전집 2』, 434면)라고 적는 대목에서 박인환의 목소리는 더 이상 해방기 ‘자본주의의 비판자’가 아니라, 첨단 문명 앞에 갓 도착한 후발 국가 청년의 그것에 가깝다.
이 같은 경이의 정점에서 박인환은 한 문장을 남긴다.
물론 아메리카 전반의 대가(大家)의 문화 수준은 우리가 비할 수가 없으나, 그러나 우리들이 조금도 정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고는 믿고 싶지가 않다. 그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할 때 우리들은 열심히 지식을 흡수한다면 아메리카 문화와 다른, 새로운 문화가 우리나라에 생기고 사회와 가정의 생활이 높아질 것이다.
― 「19일간의 아메리카」(『전집 2』, 436면)
이 문장의 표면은 자긍의 어조이지만, 그 자긍은 “비할 바가 없으나”라는 양보절 위에 가까스로 세워진다. “믿고 싶지가 않다”는 말 역시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의지의 표명,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격차를 이미 인정한 자가 자기 자존을 지키기 위해 끌어들이는 마지막 수사에 가깝다. 미국이 “노래하고 춤추고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는 동안 한국이 “열심히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그 격차를 메울 수 있으리라는 전망 역시 어떤 구체적 경로도 동반하지 않는, 막연한 바람의 차원에 머문다. 격차의 실상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직시한 자신의 무력함을 견디기 위해(혹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전파하지 않기 위해) 박인환이 손에 쥔 마지막 끈은, 결국 ‘정신적으로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한 줄의 자기 위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자기 위안의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는, 문장 자체가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등감’이다. 압도적 격차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비가시적이고 비계량적인 ‘정신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이 발화는, 박인환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195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타자 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자세의 한 표본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흔들림이 가장 사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자리가 기행시편에 깔려 있는 ‘향수’이다.
분란인(芬蘭人) 미스터 몬은/자동차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왔다./에버렛의 일요일/와이셔츠도 없이 나는 한국 노래를 했다./거저 쓸쓸하게 가냘프게/노래를 부르면 된다/……파파 러브스 맘보……/춤을 추는 돈나/개와 함께 어울려 호숫가를 걷는다.//텔레비전도 처음 보고/칼로리가 없는 맥주도 처음 마시는/마음만의 신사/즐거운 일인지 또는 슬픈 일인지/여기서 말해 주는 사람은 없다.//석양./낭만을 연상케 하는 시간./미칠 듯이 고향 생각이 난다.//그래서 몬과 나는/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이젠/헤져야 된다.
―「에버렛의 일요일」 전문(『전집 1』, 162~163면).
박인환이 핀란드 출신 미국 가족과 보낸 일요일에 부른 노래가 ‘파파 러브스 맘보’가 아니라 “한국 노래”라는 사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자신이 “와이셔츠도 없이”의 상태라는 자각은 의미심장하다. 호숫가의 산책과 텔레비전이라는 가장 평화로운 일상의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이 그 일상에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즐거운 일인지 또는 슬픈 일인지/여기서 말해 주는 사람은 없다”는 진술은 단순한 외로움의 표명이 아니라,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여 줄 모국어 자체가 부재하는 곳에 선 자의 자각이다. 그러므로 “미칠 듯이 고향 생각이 난다”는 토로는 흔한 향수병의 외양을 띠지만, 그 안에는 압도적 격차 앞에 홀로 놓인 한 개인의 절대 고독이 자리한다. 같은 시기의 시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에서 그가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그래서 뒷길을 걸으며/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고/센티멘털한 소리를 한다”고 발화할 때, ‘중량이 없는 억압’이라는 모순 어법은 그 고독의 무게를 정확히 가리킨다. 손에 잡히지 않으나 분명히 짓누르는 어떤 것, 화자로 하여금 ‘뒷길을 걷게 만드는’ 것, 그것은 곧 미국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한국이라는 작은 바위 위로 드리운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박인환은 이 세 번째 바위틈을 어떻게 빠져나가려 했는가. 시 「여행」의 한 대목이 그 시도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거룩한 자유의 이름으로 알려진 토지/무성한 삼림이 있고/비렴 계관(飛廉桂館)과 같은 집이/연이어 있는 아메리카의 도시/시애틀의 네온이 붉은 거리를/실신한 나는 간다/아니 나는 더욱 선명한 정신으로/태번에 들어가 향수를 본다.//이지러진 회상/불멸의 고독/구두에 남은 한국의 진흙과/상표도 없는 ‘공작(孔雀)’의 연기/그것은 나의 자랑이다/나의 외로움이다.
―「여행」 부분(『전집 1』, 154면).
여기서 박인환은 두 자아의 분기를 인상적으로 진술한다. 시애틀의 네온 앞에서 “실신”하던 자기와, “더욱 선명한 정신”으로 깨어 있는 또 다른 자기를 겹쳐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명한 정신’이 끝내 호명하는 것은 “구두에 남은 한국의 진흙”과 “상표도 없는 ‘공작’의 연기”이다. 진흙은 그가 떠나온 전쟁 직후의 조국의 흔적이고, 상표 없는 담배는 그 폐허 위에서 그가 피우던 가난의 흔적이다. 미국이라는 첨단 문명의 한복판에서 이 흔적들은 부끄러움의 표지가 되어 마땅하지만, 박인환은 그것을 거꾸로 “자랑”이자 “외로움”으로 끌어안는다. 부끄러움의 정확한 자리에 자랑을 놓는 이 역설은, 격차의 바위틈을 통과하기 위해 그가 발견한 좁은 통로였다. 귀국을 앞두고 쓴 시 「새벽 한 시의 시」에서 그가 “나는 돌아가도 친구들에게 얘기할 것이 없고나”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침묵의 자리를 끝내 시로 옮겨 적은 까닭, 그리고 같은 시의 마지막에서 “부식腐蝕된 과거로/돌아가는 것이다”라고 적으면서도 그 ‘부식’을 자기 자리로 받아들였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압도적 격차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조국의 진흙을 끝내 자기 구두에 묻혀 둠으로써, 다시 말해 조국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박인환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바위 사이의 좁은 통로를 가까스로 통과하려 했던 것이다. 그 통과가 격차 자체를 해소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그 격차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으려 한 한 시인의 분투의 흔적이 ‘아메리카 시초’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5. 다시, 뱀이 지나간 자리
이 글은 박인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통과해 간 세 개의 바위틈을 추적해 왔다. 해방기의 ‘자본과 사상’의 바위틈, 한국전쟁기의 ‘부재와 현존’의 바위틈, 그리고 미국 기행기의 ‘한국과 미국’의 바위틈이 그것이다. 이 세 국면은 각기 다른 시기, 다른 사건, 다른 언어로 펼쳐졌지만, 그 한복판에는 한결같이 일방적 질서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두 거대한 바위 ‘사이’를 가까스로 통과하려 한 한 시인의 태도가 자리한다. 「장미의 온도」의 ‘시의 원시림’, 「검은 신이여」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의 ‘눈 감지 못한 시체’, 「여행」의 ‘구두에 남은 한국의 진흙’. 박인환의 시 세계가 남긴 이 세 형상은 그가 통과해 간 세 바위 틈의 자리에 각각 벗어놓은 세 겹의 허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목마와 숙녀」에서 명명한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이라는 형상은 따라서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박인환의 시 쓰기 전체를 관통하는 자기 인식의 가장 정련된 결정結晶이라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박인환을 ‘경박한 모더니스트’ 혹은 ‘값싼 유행의 숭배자’로 단정해 온 오랜 평가는 그가 통과해 간 이 세 바위틈을 끝내 보지 못한 평가이기도 했다. 박인환은 어느 한 진영에 안착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어느 진영에도 안착하지 않으려 한 자였으며, 일관된 노선을 갖지 못한 자가 아니라 일관된 노선이 강요되는 시대에 ‘틈’을 자신의 자리로 선택한 자였다. 1956년 3월 20일, 채 서른 해를 채우지 못한 생애를 마감한 그는 결국 마지막 바위 틈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한 채 길 위에 멈춰 서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통과의 도중에 남겨 놓은 시편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포즈’에 잠재된 실천과 방향성을 가르친다. 전진하는 뱀의 순간적 ‘포즈’(Pose이건, Pause이건)는 언제나 좌, 혹은 우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뱀은 사실 앞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바위 사이의 좁은 통로를 향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옛 껍질을 벗어 두고 청춘을 다시 찾으려는 자세.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인환을 우리가 새롭게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자세를 통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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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호|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수유리에서」로 등단. 시집으로 『무서운 속도』가 있음. 2007년 김달진 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