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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바뀌는 시간
매화는 아직 안 피고 큰스님은 감기를 앓아 한 달 동안 고생을 하셨다고 했다.
지난 달 보다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느려지셨다.
선원의 큰 방에 들어가시마자 큰스님은 “따뜻한 물 한 잔 부탁해요.” 하셨다.
보살님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혜명화 이리와 봐. 이거 주머니에 넣어. 잘 간수해.”하시고 봉투를 주셨다.
나중에 노포터미널 커피숍에서 열어보니, 화엄산림을 시작한 해부터, ‘차비다’ 하시면서 은행계좌로 봄, 가을에 보내주시던 일년치 ‘차비’가 한꺼번에 한 봉투 안에 다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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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러 오신 비구니 스님에게 늘 보이다가 안 보이시는 스님의 안부를 물어보셨다.
새로운 소임을 맡아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는 말씀에
“별일이 없으면, 공부하러 오는 거야 딴 데서 공부하면 되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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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한꺼번에 많이 오셔서 절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큰스님께서 “사진 안찍어?” 하시고는 “뭐 할 때 사진찍으면 하는 사람이 하는 것 같아서 좋지.” 하고 합장을 하신채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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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인 불교 포커스에서 큰스님을 취재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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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 신행상담을 진행하시는 원욱스님이 ‘기왕이면 부처님 가르침으로 모닝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매일 <화엄경 문자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면서 홍보물을 가져오셨다.
“원욱스님, 서울서 우리 인기스타.” 하시면서 BBS 불교방송 티비에서 기초교리를 “똑 부러지게 하대.”하고 칭찬하셨다.
법회 전에 스님들께 화엄경 문자서비스를 홍보하라고 하셨다.
원욱스님이 인사를 마치고 나가자 “우리도 신청해서 들어보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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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는 다른 인터뷰건으로 나오지 못했던 BBS 피디가 와서“스님” 하고 크게 부르고는 “한 달을 안 뵙고 뵈니까 뭔가 좋네요.”하면서 큰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얼굴 많이 밝아졌다. 자네는 나를 봐야지, 그게 큰 양식이 되는 거야.”하고 큰스님께서 부드럽게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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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씩씩하신 비구니 스님이 오셔서 삼배를 올리셨다. “또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큰스님 뵙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예.” 하고 비구니스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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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께서 인쇄소로 전화를 하셔서 ‘문수원에 500권씩 내려놓고 2500부는 법공양실에 내려놓으라고’고 하시면서 반야심경과 금강경 사경집 각각 3천부씩을 다시 주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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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소리 사진기자가 큰스님께 인사를 했다. 큰스님은 불교 포커스 기자에게 염화실지를 편집하고 인쇄하는 출판사 사진기자라고 소개하시면서 화엄법회를 꾸리기 위한 “식구들이 적지가 안해.”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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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화엄경 강의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 화엄경 강설 제11권 책을 받아들었다. 이 강설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점안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늘 하듯이 서문을 한 번 크게 마음 담아 읽는 것으로써 점안법회를 대신한다.
서문
부처님의 몸은 우주법계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 중생들 앞에 널리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또 어디에서 무슨 비로자나 부처님을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에 그 삼라만상 부처님 한 분 한 분을 설명해야 할 내용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 우주 만유만큼이나 많습니다. 우주 만유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 또한 오랩니다. 그래서 그 멀고 먼 우주 만유의 역사를 더듬어 가듯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역사를 읽어 나갑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역사뿐만이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의 역사가 그렇고, 바람 한 줄기의 역사가 그렇고, 나뭇잎 하나의 역사가 그렇고, 풀 한 포기의 역사가 그렇고, 무심한 돌맹이 하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천지 사이와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존귀하다는 사람의 역사와 사람 마음의 역사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영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오래고 오랜 비로자나 부처님의 역사를 읽는 일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역사와 함께 역사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읽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찰나에 생겨나고 찰나에 소멸하는 마음의 역사를 읽는 일입니다.
일천 개의 태양처럼 지혜의 눈을 크게 뜨고 그 길고 오랜 역사를 잘 읽어야 하겠습니다.
나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나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나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2014년 7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화엄경 39품 중에서 6번째 품인 비로자나 품이 이 한 권에 간략하게 잘 정리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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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눠드린 신문 맨 뒷면에 보면 스님들이 공부하시는 모습과 신도님들이 공부하시는 사진이 <화엄세계 장엄하는 출재가 공부열기 ‘환희심’> 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나왔다.
스님들은 이미 불교신문을 다 받아 보셨겠지만 신문사에서 이렇게 여러 부를 갖다 줘서 한 부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져가셔서 ‘우리가 이렇게 공부한다’ 고 절의 신도님들에게 자랑하시기 바란다. 늘 말씀드리지만 좋은 일을 하면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자랑이 아니라 그것은 동참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자고 하는 권유의 뜻이다. 좋은 일을 하는데 함께 동참하자고 하는 권선이기 때문에 ‘상낸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알릴 필요가 있다.
또 마음 속에서는 이미 내고 있는데, 좋은 일에 상을 좀 내면 어떤가. 상관없다. 나는 늘 ‘상을 내더라도 보시 좀 해라’ ‘상(相)내는 보시라도 좀 하라’고 한다.
좋은 일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서 권선할 필요가 있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
二十一, 十行品 2
오늘은 대방광불화엄경 제 20권, 새로운 권으로 들어간다.
십행품의 일부가 앞부분에서 나왔고 이번에 두 번째로 십행품이 소개 된다. 80권 화엄경 중에 벌써 20권째다.
100정 이상이 든 약 한 병을 ‘언제 다먹겠냐’ 싶지만 하루에 한 알씩 계속 먹다 보면 어느새 그 약도 다 없어져 버린다. 꾸준히 한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방울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이치가 맞다. 꾸준함이 그렇게 중요하다.
9, 第七無着行 方便波羅密
(1) 世界에 對한 無執着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無着行고 佛子야 此菩薩이 以無着心으로 於念念中에 能入阿僧祗世界하야 嚴淨阿僧祗世界호대 於諸世界에 心無所着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집착 없는 행인가.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집착 없는 마음으로 생각마다 아승지 세계에 들어가서 아승지 세계를 깨끗이 장엄하되 모든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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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무착행(第七無着行) 방편바라밀(方便波羅密) :제 7 무착행
- 방편(方便)바라밀을 닦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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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바라밀 중에서 방편 바라밀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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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世界)에 대(對)한 무집착(無執着):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나 마음에 집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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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도 집착이 없어야 되고, 저런 일도 집착이 없어야 된다. 집착을 버려라.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 제7 무착행 가운데 여러 번 나온다. 스님들이 이 ‘무착행’ 한 부분만 가지고 법문을 해도 한 시간 법문거리는 충분하다.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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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보살마하살(爲菩薩摩訶薩)의 : 보살 마하살의
무착행(無着行)고 : 무착행인가.
불자들 법명에 무착행이라는 불명이 많다. 무착행, 무착심, 무착월, 갖다 붙이기만 하면
이름이 몇 개나 나온다. 무착심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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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이 보살이
이무착심(以無着心)으로: 집착없는 마음으로
어염념중(於念念中)에 : 순간순간 중에
능입아승지세계(能入阿僧祗世界)하야 : 능히 아승지 세계에 들어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모두 능히 아승지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막연한 어떤 세계가 아니라 자면서도, 깨면서도 만나는 상황 상황이 다 하나의 세계다. 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무수한 세계를 접하는가. 일어나서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일이 모두 하나의 세계다. 법당에 가서 예불하고 신도님을 만나고, 가고 오고 하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들, 혼자 택시를 타든지 자가용을 몰든지 버스를 타든지 전철을 타든지 그 모든 것이 전부 하나 하나 아승지 세계 그대로다. 특별히 지구 같은 세계의 숫자가 아승지나 있다라고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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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아승지세계(嚴淨阿僧祗世界)호대 : 아승지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한다.
공자가 동쪽 나라가 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나라에 오려고 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오랑캐가 사는 곳인데 그곳까지 가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중앙에 사는 사람들 외에는 전부 오랑캐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자는 ‘아니다 거긴 군자가 사는 곳이다.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군자가 살면 그곳은 군자로서 장엄된 나라인 것이다.
금강경에도 장엄정토분이 있다.
‘보살이 장엄불토부아’라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가?’ 그 말 속에는 이미 그 당시 상식으로는 보살이 있음으로 해서 그 국토를 장엄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의 값이 올라가고 격이 높아진다.
그것이 장엄이다.
여기도 아승지 세계를 장엄한다고 하였다.
사실 제대로 된 수행자가 가는 곳은 어느 곳이 됐든지 그대로가 장엄이다.
신심있는 신도님들은 저 멀리서 먹물 옷만 펄럭여도 벌써 그 쪽을 향해서 예배하고 ‘어느 절에서 오신 스님인가’라고 생각한다.
신심을 가지고 보면 먹물 옷이 있는 그곳이 이미 장엄세계다.
엄정 아승지 세계는 다른 말이 아니다. 수행자로서 우리가 하루동안 그 많고 많은 세계, 상황들을 접함으로 해서 이 세계가 그대로 장엄이다. 수행자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세계가 그대로 장엄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근사한 자리에 안올 사람이 왔다면 그 자리 버린 자리다. 그 한사람으로 인해서 자리를 버리는 수가 있고, 또 ‘아 그런 스님이 왔더라, 그런 사람이 거기에 왔더라’라고 하는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도 그 상황, 그 자리가 장엄이 되기도 한다.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라고 하는 말이 그런 것을 근거로 하는 소리다.
수행자가 가면 자리가 빛나게 되어 있고 자리가 장엄되게 되어 있다.
어제세계(於諸世界)에 : 그러나 내가 거기에 가서 장엄이 되었다, 그곳을 내가 장엄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심무소착(心無所着)이니라: 마음에 집착이 없느니라. 첫구절부터 이렇게 근사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가서 어떤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마음에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2) 三寶供養에 對한 無執着
往詣阿僧祗諸如來所하야 恭敬禮拜하며 承事供養호대 以阿僧祗華와 阿僧祗香과 阿僧祗鬘과 阿僧祗塗香末香과 衣服珍寶와 幢幡妙蓋諸莊嚴具의 各阿僧祗로 以用供養하나니 如是供養은 爲究竟無作法故며 爲住不思議法故니라 於念念中에 見無數佛호대 於諸佛所에 心無所着하며 於諸佛刹에 亦無所着하며 於佛相好에 亦無所着하며 見佛光明하고 聽佛說法에 亦無所着하며 於十方世界와 及佛菩薩所有衆會에 亦無所着하며 聽佛法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志力廣大하야 能攝能行諸菩薩行호대 然於佛法에 亦無所着이니라
"아승지 여래가 계신 데 나아가 공경하고 예배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되, 아승지꽃과 아승지향과 아승지화만과 아승지 바르는 향과 가루향이며, 의복과 보배와 당기와 깃발과 일산과 모든 장엄거리를 각각 아승지로써 공양하나니, 이렇게 공양하는 것은 지음이 없는 법을 끝내기 위함이며, 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연고니라.
잠깐잠깐 동안에 수없는 부처님을 뵈옵되 부처님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 세계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 잘생긴 몸매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데도 집착이 없으며, 시방의 세계와 부처님과 보살과 모인 대중에게도 집착이 없고, 불법을 듣고는 환희한 마음을 내고 뜻과 힘이 광대하여, 모든 보살의 행을 능히 가지고 능히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함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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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공양(三寶供養)에 대(對)한 무집착(無執着): 삼보를 공양하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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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예아승지제여래소(往詣阿僧祗諸如來所)하야 : 아승지 모든 여래처소에 나아가서
공경예배(恭敬禮拜)하며: 공경하며 예배하며
승사공양(承事供養)호대: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되
이아승지화(以阿僧祗華)와: 아승지꽃으로써 공양한다. 이 탁자에도 꽃을 올려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꽃 한송이가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꽃이 그렇게 중요하다. 화장실에도 꽃 한송이가 꽂혀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식물로 된 꽃도 그러한데 하물며 진짜 꽃인 보살행은 어떻겠는가. 화엄경에서는 보살행을 꽃이라고 한다.
화엄(華嚴)이라고 할 때의 엄(嚴)이 꽃으로 장엄한다는 뜻이다. 보살행으로써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 세상 사람들을 구제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그냥 식물인 꽃으로 장엄하는 것으로 봐도 좋다.
아승지향(阿僧祗香)과: 아승지 향
아승지만(阿僧祗鬘)과 : 아승지 꽃다발
아승지도향말향(阿僧祗塗香末香)과 : 아승지 도향과 말향으로 장엄한다. 도향은 바르는 향이고 말향은 가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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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진보(衣服珍寶)와 : 의복 진보, 옛날에 경에 나오는 의복이라는 것은 천이다.
인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리라고 하는 천 한 장을 몸에 감으면 옷이 된다. 누가 입어도 다 착착 맞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경전에 의복이라고 나오면 그대로 천으로 보면 된다.
천의무봉이라고 하는 아무 손질도 하지 않은 천, 의복, 진보로 정엄하고
당번묘개제장엄구(幢幡妙蓋諸莊嚴具)의 : 깃대 번, 아름다운 일산 이러한 여러 가지 장엄구로써
각아승지(各阿僧祗)로 : 각각 아승지로써
이용공양(以用供養)하나니: 공양에 사용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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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공양(如是供養)은: 이와 같은 공양은
위구경무작법고(爲究竟無作法故)며 : 지음이 없는 법, 무작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구경은 성취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궁국적인 법은 무작법이고 무위법이다. 조작이 있는 유위법, 유작법은 사실 불교에서 권장 사항이 아니다. 유위법은 하는 수 없어서 하는 것이지 오래 못가는 법이다. 본래 무작법이고 무위법이다. 또
위주부사의법고(爲住不思議法故)니라 : 불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까닭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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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염념중(於念念中)에: 염념중에
견무수불(見無數佛)호대 : 무수한 부처님을 친견하되
어제불소(於諸佛所)에 : 부처님 처소에서, 아무리 훌륭한 부처님, 뛰어난 부처님이라 해도 그 부처님에 대해서
심무소착(心無所着)하며 :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서 법당에 부처님을 잘 모셔 놔도 예불을 마치면 촛불이고 전깃불이고 다 꺼버리고 법당문을 착 잠궈 버리고 나온다. 부처님이야 혼자 법당에서 주무시던 좌선을 하든 알아서 하시라고 나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예불하러 다시 가서야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한다. 그게 다 집착이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대해서도 사실은 그렇게 해야한다. 집착없이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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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불찰(於諸佛刹)에 : 부처님의 국토에
역무소착(亦無所着)하며: 또한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어불상호(於佛相好)에 : 부처님의 상호에
역무소착(亦無所着)하며: 역무소착이라. 아무리 32상 80종호가 좋다 하더라도 그건 그 부처님의 것이지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고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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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불광명(見佛光明)하고 :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청불설법(聽佛說法)에 :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매
역무소착(亦無所着)하며: 또한 집착이 없다. 지혜의 가르침 화엄경이야 말로 더 없는 광명이고 더없는 설법이다. 그런데 그 더없는 설법을 일단 집착이라도 했다가 다음 단계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아예 공부도 안하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시방세계(於十方世界)와: 시방세계와
급불보살소유중회(及佛菩薩所有衆會)에 :불보살에 계시는 그 대중모임에
역무소착(亦無所着)하며: 또한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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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법이(聽佛法已)하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나서는
심생환희(心生歡喜)하야: 마음에 환희심을 내어서
지력광대(志力廣大)하야: 뜻의 힘이 광대해서
능섭능행제보살행(能攝能行諸菩薩行)호대 : 모든 보살행을 능히 섭하고 능히 행하되
연어불법(然於佛法)에: 부처님 법에 대해서는
역무소착(亦無所着)이니라 : 역무소착이라. 아무리 환희심을 내어서 열심히 보살행을 하더라도 집착 없이 해야한다. 무집착으로 하라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서 늘 주장하는 바다. 좋은 일은 열심히 해야 된다. 보살행을 열심히 하되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된다. 그런데 중생은 뭘 좀 했다 하면 그저 집착부터 한다.
4년 임기를 딱 살았다면 그 다음에는 집착을 떼어야 하는데 계속 하려니 싸움이 벌어지고 별별 추한 일이 벌어진다. 순전히 집착 때문이다. 사찰이고 종단이고 불교고 집착 때문에 망신을 한다.
(3) 長劫修行에 對한 無執着
此菩薩이 於不可說劫에 見不可說佛이 出興於世하고 一一佛所에 承事供養을 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心無厭足하야 見佛聞法과 及見菩薩衆會莊嚴에 皆無所着하며 見不淨世界호대 亦無憎惡하나니 何以故오 此菩薩이 如諸佛法而觀察故니 諸佛法中에 無垢無淨하며 無闇無明하며 無異無一하며 無實無妄하며 無安隱無險難하며 無正道無邪道니라
"이 보살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심을 보고,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섬기고 공양하기를 말할 수 없는 겁이 다 하도록 마음에 만족함이 없으며,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고 보살과 모인 대중의 장엄을 보더라도 다 집착함이 없으며, 부정한 세계를 보고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나니, 무슨 까닭인가. 이 보살이 부처님 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이니, 불법 가운데는 때 묻음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고 다름도 없고 하나도 없고 진실함도 없고 허망함도 없고 편안함도 없고 험난함도 없고 바른 길도 없고 삿된 길도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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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겁수행(長劫修行)에 대(對)한 무집착(無執着): 장구한 시간을 수행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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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어불가설겁(於不可說劫)에 : 가히 설명할 수 없는 길고 긴 세월에
견불가설불(見不可說佛)이 :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부처님이
출흥어세(出興於世)하고: 세상에 출현하고, 사실 눈을 뜨고 보면 전부 부처님이다.
일일불소(一一佛所)에 : 낱낱 불소에서
승사공양(承事供養)을 :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기를
개실진어불가설겁(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 다 모두 불가설 겁동안 오래오래 하되
심무염족(心無厭足)하야: 마음에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다. 염족이라는 말이 늘 붙어다닌다.
이 일에는 만족하거나 싫어함이 없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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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불문법(見佛聞法)과: 끊임없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듣는다.
공부하는 일 놔두고 다른 무슨 일이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공부하다가 좀 지루하거나 약간 싫증이 난다 하더라도 잠깐 간격을 두면 또 하고 싶고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 자세가 바람직하다.
급견보살중회장엄(及見菩薩衆會莊嚴)에 : 보살 대중이 모여있는 장엄을 보며
개무소착(皆無所着)하며 : 다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견부정세계(見不淨世界)호대 : 부정한 세계를 보되, 훌륭한 세계만 보고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세계를 보되
역무증오(亦無憎惡)하나니: 또한 증오심이 없어야 된다. 좋은 데도 집착하지 말아야 되고, 싫은 것을 또 싫다고 하지도 말아야 된다. 그것이 바람직한 마음 자세다.
우리 중생들은 본색이 탐진치 삼독으로 무장이 되어서 걸핏하면 탐진치 삼독이 발동을 한다. 그래서 싫은 것은 싫다고 집착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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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차보살(此菩薩)이: 이 보살이
여제불법이관찰고(如諸佛法而觀察故)니 : 모든 불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니, 이 보살이 왜 집착하지 않느냐, 모든 불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다. 불법의 이치가 집착한다고, 싫어한다고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법과 같이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상황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거기에 내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내 감정으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지 그 일 자체가 실제로 좋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나쁜 것도 아니다.
괜히 나의 감정으로써 한 생각 일으켜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이다. 불법에는 좋으니 싫으니 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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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법중(諸佛法中)에 : 모든 부처님의 법, 깨달음의 법, 꿈 깬 세계에서는
무구무정(無垢無淨)하며 :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으며
무암무명(無闇無明)하며: 어둠도 없고 밝은 것도 없고
무이무일(無異無一)하며 : 다른 것도 없고 하나도 없고 같은 것도 없으며
무실무망(無實無妄)하며: 진실한 것도 없고 망령된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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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은무험난(無安隱無險難)하며 : 안온한 것도 없고 험난한 것도 없다.
무정도무사도(無正道無邪道)니라 : 정도도 없고 사도도 없다. 정도니 사도니 편안하다느니 험난하다느니 진실하다느니 망령되다느니 하는 차별심은 순전히 삼독심을 근거로 한 우리 중생의 마음 작용일 뿐이고 중생의 판단일 뿐이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을 만났더라도 꿈을 깨고 나면 아주 편안한 침대에 발끝도 꼼짝 안하고 누워있는 것을 많이 경험한다.
내가 전에 봉암사에 살 때, 어바위라는 것이 있는데 겨울이 지나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죽은 노루나 토끼 같은 것을 주우러 어바위 밑으로 간다. 그 바위는 폭이 한 20미터는 되고 길이가 30미터에서 50미터쯤 되는데 보기에는 경사가 별로 진 것 같지가 않아서 누구든지 그곳을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보이기는 평평하게 보여서 누구든지 그리로 지나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지나가다 보면 다 미끌어지고 마는 바위가 어바위다. 봉암사에서 그 바위 이야기를 잘 한다.
‘저게 어바위다. 저기 지나가다가는 큰일난다. 보는 것 하고 다르다’ 동물도 그리로 지나가면 꼭 떨어져서 죽는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날에는 어바위 꿈을 꾼다.
그 바위를 지나가다가, 미끄러져서 나무 가지를 하나 딱 잡고는 아등바등 안떨어지려고 하는 꿈이다. 안 미끄러지려고 애를 되게 쓰다가 꿈을 깬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애를 되게 쓰면 꿈을 깬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애를 되게 쓰면 꿈을 깬다. 정진을 열심히 하면 깨닫게 되어 있다. 꿈도 그렇고 우리 현실도 똑같다. 애를 많이 쓰면 뭐든지 통하게 되어 있다. 꿈에서도 안죽으려고 안떨어지려고 애를 바등바등 쓰다가, 하도 애를 써서 그만 땀을 바뜩 흘리면서 꿈을 딱 깨고 잠에서 깨어난다.
깨고 나면 편안한 요위에 그냥 누워있을 뿐이다. 두려움도 없고 꿈에서 보던 아름다운 산천초목도 없고, 위험한 바위도 없고, 아등바등 살려고 하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다만 안죽으려고 애를 쓰면 꿈을 깬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열심히 하면 꿈을 깨게 되어 있다. 꿈을 못깬다 하는 것은 열심히 아등바등 안해서 그렇다.
(4) 種種萬行에 對한 無執着
菩薩이 如是深入法界하야 敎化衆生호대 而於衆生에 不生執着하며 受持諸法호대 而於諸法에 不生執着하며 發菩提心하야 住於佛住호대 而於佛住에 不生執着하며 雖有言說이나 而於言說에 心無所着하며 入衆生趣호대 於衆生趣에 心無所着하며 了知三昧하야 能入能住호대 而於三昧에 心無所着하며 往詣無量諸佛國土하야 若入若見하고 若於中住호대 而於佛土에 心無所着하며 捨去之時에 亦無顧戀하나니라
"보살이 이렇게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되 중생에게 집착을 내지 않고, 모든 법을 받아 지니되 모든 법에 집착을 내지 않고, 보리심을 내어 부처님 머무시는 데 머물되 부처님 머무시는 데 집착을 내지 않고, 비록 말을 하나 말에도 집착함이 없고, 중생 갈래에 들어가되 중생 갈래에 집착함이 없고, 삼매를 알아서 들어가고 머무르되 삼매에 집착함이 없고,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나아가 들어가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머물기도 하되 부처님 국토에 집착함이 없고, 버리고 갈 적에도 그리워하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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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만행(種種萬行)에 대(對)한 무집착(無執着):온갖 만행(萬行)을 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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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여시심입법계(如是深入法界)하야 : 깊이 법계,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서
교화중생(敎化衆生)호대: 중생을 교화하되
이어중생(而於衆生)에: 중생에게 있어서
불생집착(不生執着)하며 : 집착을 내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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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제법(受持諸法)호대: 모든 법을 받아 가지되
이어제법(而於諸法)에: 모든 법에 있어서
불생집착(不生執着)하며 : 집착을 내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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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리심(發菩提心)하야: 보리심을 발해서
주어불주(住於佛住)호대: 부처님이 머문 곳에 머문다.
발보리심, 발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곧 부처님이 머문 곳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발심만 제대로 하면 곧장 부처님 사는 곳에서 사는 것이 된다. 내가 늘 말하지만 이런 엄청난 가르침이 화엄경에는 꽉꽉 박혀있다. 화엄경의 글이 아무리 많아도 구절구절이 다이아몬드와 같다. ‘발보리심하야 주어불주다’ 라고 하는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제대로 발심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삶이구나, 부처님의 인생이 바로 발심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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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불주(而於佛住)에: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부처님의 삶을 산다하더라도 역시
불생집착(不生執着)하 : 집착을 내지 않으며
수유언설(雖有言說)이나: 비록 언설이 있으나, 거기에 엄청난 가르침이 있지만
이어언설(而於言說)에: 그 언설에
심무소착(心無所着)하며 : 마음의 집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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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중생취(入衆生趣)호대 : 중생의 갈래에 들어가되
어중생취(於衆生趣)에: 중생의 갈래에
심무소착(心無所着)하며 :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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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삼매(了知三昧)하야: 삼매를 요지해서, 그 삼매속에
능입능주(能入能住)호대: 능히 들어가고 능히 머물되
이어삼매(而於三昧)에 : 삼매 가운데서
심무소착(心無所着)하며 : 결코 마음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남해 보리암의 어느 암자에 도반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옛날에 해인사에서 용맹정진도 함께 했던 스님이다. 지금도 해제 때가 되면 연락이 오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도반들이 그 스님을 보면 ‘해인사에서 이십대 삼십대에 보던 그 모습 그 사고(思考)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이물없이 말을 한다. 조금 삿된 기가 있는 스님이어서 우리는 사정없이 ‘여태 그 사고를 버리지 않느냐. 그런 삿된 소견을 버리라’고도 한다.
그러면 그 스님은 워낙 착한 스님이라서 ‘나도 그걸 알고는 있지만, 그거 얻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버리기가 아깝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자기 안목, 어떤 사상, 소견, 불교관이든지 하나가 성립되면 참 쉽게 못 버린다. 얼른 버리고 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 발전도 빠른데,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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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예무량제불국토(往詣無量諸佛國土)하야 : 한량없는 불국토에 나아가서
약입약견(若入若見)하고: 그 불국토에 들어가거나 그 불국토를 보거나
약어중주(若於中住)호대 : 그 불국토 안에서 머물되
이어불토(而於佛土)에: 불국토에 대해서
심무소착(心無所着)하며 :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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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지시(捨去之時)에: 그 불국토, 내가 살던 이상적인 세계를 버리고 갈 때에도
역무고연(亦無顧戀)하나니라: 또한 고연하지 않는다. 집착이라는 말을 고연, 뒤를 돌아본다고 표현했다. 그리워서 뒤를 돌아보는 마음이 고연이다. 참 인간적인 표현이다.
전에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 밑에서 살 때 보면 암자에서 내려가는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에는 커브길이 하나 있어서 마당에서든 커브길에서든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암자에 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커브를 돌고 나서는 미련이 있어서 한 번은 극락암을 돌아본다. 그것이 고연이다. 경봉스님은 그걸 잘 안다. 그래서 스님이든 신도든 돌아갈 땐 꼭 마당에 서있다가 커브를 딱 돌아서 사람들이 다시 뒤를 돌아 볼 때 손을 한 번 착 흔들어 준다. 참 매력있다. 스님이 있든 없든 미련이 있어서 누구든지 돌아보는데 뜻밖에도 큰스님이 딱 계셔서 미소를 착 지으며 손 한 번 흔들어 주시면, 그 모습을 본 누구라도 그만 그곳에 또 안오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경봉스님한테 그런 매력이 있었다. 스님들도 한 번씩 해보기 바란다. 그런 것은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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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心無所着...
어른스님께서 감기로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편찮으시다는 소식 접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_()()()_
_()()()_ 봄, 울퉁불퉁 그어져 못생기게 모아지는 또 한 해의 나이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꽃나무는 가장 오래된 나무가 아름답습니다. 저희 언니는 오래된 나무에 꽃도 잎도 없는 이른 날보다는 혹여 꽃이 다 떨어졌더라도 새 잎이 돋아나 있을 늦은 날이 더 좋다고 하네요. 언니와 지난 봄부터 고대했던 꽃여행의 일정을 짜다가....저에게 나무와 같으신 분들, 오래오래 새롭게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애를 되게 쓰면 꿈을 깬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애를 되게 쓰면 꿈을 깬다. 정진을 열심히 하면 깨닫게 되어 있다...
고맙습니다 _()()()_
저도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아~ 깨달음이란...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글이 올라온 줄 모르고 있다가, 오늘 염화실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요지음 염화실지를 읽으면서... 순간, 제대로 공부하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고맙습니다.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_()_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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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