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대마도를 가다
중국의 현인은 책 만권 읽는 것보다는 만리 길의 여행을 하라고 했으나,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땅을 팔아 남의 땅을 구경다니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행이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에 맞고, 우물 안의 개구리를 벗어나고, 해외에 다녀와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통해서 어느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만으로는 부족하고, 독서를 통하여 즉 세계 여러 나라의 인문학(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심도깊은 연구가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기>(사마천)와 <용수의 사유>(2012년)와 <도교사>(분도출판사)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몇 년 전에 북경의 자금성을 다녀왔으나, 보물의 껍질만 보고 왔다. 특히 청나라의 서태후(중국의 3개 악녀. 한나라 유방의 여태후와 당나라 고종의 측천무후 포함)의 이화원(서태후 말년에, 영국군이 파괴한 여름별장을 다시 보수한 별장 이름임)의 기억만 생생하다. 그런데 자금성의 속 알맹이는 대만의 국립 고궁 박물관(세계 4대 박물관. 약 62만점의 유물)에 있는데, 매일 다녀서 4년간 전시실을 다녀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침 기회가 있어서, 지난해 가을에 3박4일로 대만(타이완, 수도는 타이페이)을 다녀왔다. 아열대의 더운 나라로서, 2모작 이상(화련의 남쪽은 3모작)을 하는 나라였다.
대만은 과거에 중화민국(대표인물은 쑨원과 장세스임)의 나라이다. 장세스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과 중화민국의 장세스(부인 송미령 포함)의 사진이 장세스 기념관에 걸려있었다. 특히 송미령은 남편 장세스의 사후(1975년)에, 미국에서 살다가, 100세 넘어서 서거하였다. 대만에는 장세스 기념관 주위의 도로에 있는 거대한 백천목이란 나무가 있었다. 백번 천번 불타도 속만 살아있으면 다시 산다는 나무로서, 장세스가 좋아하였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나무의 줄기가 여러 겹으로 뭉친 거대한 나무들이다. 우리나라의 상징인 소나무는, 대만에서는 희귀 식물로 분류되는데, 아마도 화련의 호텔에서 서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타이페이의 룽산 사원에는 같은 건물에 속하는데, 앞쪽은 불교사원이고, 뒤쪽은 도교사원이 함께 있는 종교사원이었다. 도교에는 토속신과 6신들을 모신 방이 있었다. 그런데 두 개의 작은 초승달 모양의 나무를 (2개를 동시에) 던져서 자신의 사업을 점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초승달 모양의 나무로, 윳놀이로 치면 도는 좋다(ok)이고, 윳도 좋은 것이지만, 모는 부정(no)를 나타낸다고 했다. 따라서 3/4은 좋다를 나타내고, 1/4은 거부를 나타내어, 일반 민중들이 도교를 좋아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꼈다.
중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일치일란(一治一. 한번 통일되면, 한번 분열되는 정치가 반복됨)이라고 한다. 중국종교는 세 종교가 결합되어 우세한 시대(난세냐 평화시냐에 따라서)에 맞추어 종교가 정해진다. 즉 중국에서 평화시에는 유교를 믿다가 정세가 불안정하면 도교를 믿는데, 불교는 항상 믿는 종교이다. 중국과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생긴 일본에서는,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가 의식에 많이 쓰인다. 젊어서는 삼강오륜을 따르다가, 결혼식은 기독교식이며, 장례식은 불교식이다. 종교의 정체성이 모호한 나라가 중국과 일본이다.
며칠 전에 대마도를 다녀왔다. 떠나기 몇 달 전부터 혹시 배멀리로 죽을 욕을 보는 것이 아닐까 무척 고민을 하였지만, 하나의 기우였다. 수년 전에 D고등학교에서 보내주는, 뉴질랜드 출장(방송 통신고등학교 시찰. 9박 10일)을 갈 때, 나리따 공항에 잠깐 들려 본 것이 일본과의 첫 인연이었다. 지난해에 작은 부부모임에서 대마도를 가보자고 하였더니, 노인들이라서 그런지 후쿠시마 방사능 때문에 난색을 표해서, 무산되어 섭섭하였다. 처와 사위와 딸이 함께 부산의 항만으로 이동하여, 9시에 제트 엔진을 단 쾌속선을 타고 1시간 정도 달렸더니, 하카타항(북쪽의 제 2항구. 제1항구는 남쪽의 이즈하라)가 나왔다.
H투어를 이용하여 하루 여행길에 오른 27명은, 가로(85km)와 세로(12km)이며, 제주도의 1/2(울릉도의 10배)인 대마도에서 한국 전망대(바로 아래 섬에는 자위대 기지가 있음)에는 1700명의 조서 역관(외교관)이, 대마도주의 취임 축하차 왔다가, 거센 풍랑으로 몰살한 108명의 사람의 이름 적혀 있었다. 슈시거리(편백나무)에서 음이온을 15분간 쐬고(나는 다리가 불편하여 버스에 타고 갔음),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갔다. 작은 백사장에서 바위위의 작은 소나무와 곁에 있는 잠수함 바위 그리고 지중해 바다같은 에머랄드 색을 구경하였다. 여름에 특히 8월 중순부터 해파리 때문에 수영이 금지되고, 다만 7월말과 8월 15일 사이만 수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대마도의 중간(상대마도와 하대마도의 중간)에 있는 만제키(한문으로 만관교)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때(서태후의 중일전쟁 이후) 대승한 이유가, 러시아의 발틱함대(36전승)가 한국의 진도와 만제키에 숨겨둔 배의 협공으로 몰살시킨 이후에 일본이 승리하였다고 했다. 대마도의 특이한 점은 비릿한 바다 냄새(환경관리가 철저함)가 전혀 없었다. 바닷가에는 갈매기 대신에 매(솔개)가 날고, 야생 삵괭이가 상징적인 동물이었다. 고기잡이는 1m의 길이를 무진장 잡히는데, 30cm 고기를 잡거나 혹은 항구에서 잡는 것은 20만엔의 벌금이 부과된다고 했다.
한편 일본의 정권의 망언은 극에 넘치고 있는데, 2차대전후에 A급 전범인 히로히토와 아베의 외조부를 사형시키지 못한 미국의 단호하지 못한 입장(공산권과 민주진영의 냉전에 유리하도록)도, 일본의 역사왜곡의 부작용을 가져온 원인의 하나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자살로서 죄를 씻고, 독일 역사의 왜곡을 막았다.
더 나아가 쇄국정치의 폐단은, 먼저 서태후(후궁)가 동태후(정부인)를 사살한 이후,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쇄국정치를 감행하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비극을 맛본 장본인인데, 그리고 내전의 작당과 함께 황제(아들)를 공격한 것은 청나라를 망하게 하는 웃기는 일이었다. 역사가들은 아들의 대외 외교정치에 찬물을 부었던 잘못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대원군의 행동에도 서태후 비슷하게 농민 반란에 가담하는 일과 대외 정치에 찬물을 붇는 처사를 통하여, 일본이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낮추어 부르고 사살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고 본다. 비라고 하면 중국에서 대부의 아내를 부르는 말이지, 황후를 부르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처는 서민의 부인인데, 기제사때에 사용하는 지방에서 현비유인이란 말은 자신의 조상을 높인 것이며, 실제로는 양반과 서민의 도리로 보는 과거 봉건제도하에서는 맞지 않는 호칭이다.
첫댓글 아이고~ 배쌤..안녕하세요? 우리 카페에 붉은 불이 켜져 있길래 들어와보니..역쉬~~~배쌤께서 불을 좋은 글로 켜놓고 계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대만과 대마도 참 좋은 곳을 다녀오셨네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한번 다녀오면 대충 "거기 좋더라" 등으로만 표현하고 마는데, 이처럼 역사적 배경까지 세심하게 꼼꼼하게 잘 적어주셔서 제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시간 나시면 영화구경 같이 즐깁시다. 범어도서관 6시 30분(매월 2째와 4째 수요일 저녁)을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