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CEO란 Chief Executive Officer. 즉 최고 경영자를 말한다.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로 불릴 만한 사람은 누굴까? 그 해답을 찾으러 제주도에 갔다.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모충사에 '최초의 여성 CEO'가 있다.
그녀는 의녀반수 김만덕이다.
거상 김만덕, 제주도의 어머니라 불리는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 의녀반수 김만덕 |
김만덕(이하 만덕)은 양가집 규수에서 기생으로의 삶. 그리고 조선시대 최고의 여상이 됐다.
만덕은 제주의 특산품 미역, 제주마, 양태 등을 이용하여 육지의 쌀과 소금 등 주요 생필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제주 사람에게 있어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한 미역은 그 당시 시절에는 동남해 일부와 제주에서만 채취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 이후 대동법 실시후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장려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돈의 가치와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시장은 각종 특산물로 거래로 활기를 띠었다. 상인들은 이 거래를 통해,
신흥부자로 떠오르게 된다.
만덕은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사고 팔기를 계속해 몇 십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
객주를 시작으로 유통업에 뛰어든 지 30여 년만에 만덕은 제주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오른다
만덕은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였으며 자신이 번 돈을 가치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였다.
김만덕 기념관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것은 바로 '의녀반수 김만덕' 초상화다
의녀반수란? 먼저, 의녀 사전적인 의미로 '조선시대에 부인들의 질병을 구호 진료하기 위하여 두었던 여자 의원'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의녀반수란 여성으로써 최고의 벼슬이다.
이는 정조 16년(1792) 흉년이 든 제주도를 구제한 김만덕에게 내려진 벼슬이다.
▲ 그녀를 기억하고자... |
그녀의 초상화 밑에는 꽃다발이 수북히 쌓여있다.
제사가 있었냐는 물음에 김만덕 기념관 관리인 김동의님은
"아니다.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갖다 놓고 간 것이다"라고 답했다.
김만덕의 후손이냐는 물음에 "후손은 아닌데…
이 분의 일대기를 아는 분들이 이 곳에 와서 꽃을 두고 기도를 하고 간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와서 꽃을 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김만덕의 일대기가 어떻길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올까?
▲ 그녀의 파란만장 했던 삶.
김만덕(이하 만덕)은 1739년에 태어나 1812년에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 2남 1녀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만덕이 10여살이 되던 해에 풍랑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전염병으로 인해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남매들은 의탁할 곳을 찾아 흩어지게 되었고. 만덕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된다.
보통 기녀는 자신의 딸에게 기녀를 되물림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수양 딸이던 만덕이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기녀명단에 만덕의 이름을 올렸다. 기방에서 춤과 노래를 배우게 된 만덕은 15살 무렵부터
관기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한때 제주도에서 유명한 기녀가 되었고, 그녀를 보기 위해 육지에서도 넘어왔다고 한다.
항상 정결한 마음으로 자신이 양인임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만덕의 친척들이 만덕으로 인해 자신들 또한 천한 신분으로 취급받는다 하였다.
그로 인해 만덕은 관청에 찾아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몇번이고 호소한다. 만덕의 호소에 관청에서는 만덕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 기녀명단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
양민이 된 만덕은 객주를 차리게 된다.
객주란?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판매하는일종의 중개상인이다. 객주 초기에 만덕은 관기시절의 인맥을 활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제주 관리들은 물론 육지에서 온 관리들까지 만덕의 객주를 드나들었고 이때 육지와 제주의 물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 후 만덕은 주로 쌀과 소금 등 주요 생필품을 거래를 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만덕은 부를 축척 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정조 16년(1792년)부터 4년 동안 최악의 흉년이 지속되어 제주도 백성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의 시체를 파서 먹고, 자식을 내버리는 경우 등이 비일비재로 생겼다.
당시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된 만덕은 연이은 흉년의 참상을 두고 볼 수 없어 수 십년 동안 모은 전재산으로 경상, 전라 육지에서 쌀을 들여와 제주 관아로 보냈다.
이로 인해 제주 백성들은 배고픔을 잊게 되었고 만덕을 '제주의 어머니'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만덕의 이런 선행을 알게된 조정에서는 만덕의 소원을 묻고 그 소원은 특별히 시행하라고 명했다.
만덕은 임금이 계시는 한양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하는 것이라 답한다. 출륙금지령이 있는 제주도에서 쉬운 소원은 아니였지만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고 내의원 행수로 삼았다.
만덕은 6개월의 짧은 육지 여행을 한 뒤 제주도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마감했다.
▲ 제주도에서는 매년 만덕제가 열린다. |
매년 한라문화제 때 만덕제가 모충사 김만덕 기념비 앞에서 이루어진다.
제주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여성 2명에게 만덕봉사상을 수여하는데 지난해부터 제주도의
모범적인 여성은 물론 전국에서 모범적인 여성을 선정하여 만덕봉사상을 수여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사단법인 김만덕 기념 사업회에서 "김만덕 나눔쌀 만섬쌓기" 행사를 갖고 있다.
행사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는 것과 격려의 메세지를 전해 줄 수 있게 되길 바라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그 시절 김만덕이 나눔이란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듯이 우리도 그 정신을 이어 따뜻한 사랑을 자연스레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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