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에 관하여
김 범 용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다. 갑자기 자동차의 에어컨이 말썽을 일으켜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고장 난 노트북을 고치러 다니느라 부산하다. 모든 게 시간의 힘 앞에 모두 무력하다.
퇴직 후, 십여 년이 지나 옛 직장 동료를 다시 만나게 됐다. 사출 공장을 다니다가 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마침 공장에 주문량도 늘고 관리자가 필요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바쁜 현장을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국숫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주문한 파전에 탁주를 몇 잔 마시고 나니 취기가 올라왔다. 시간이 흐르고 밀려오는 손님들을 보자 나는 일어서자고 말했다, “나 아직 덜 마셨어. 왜 그래? 앞으론 연락하지 마라. 이상한 놈 다 보겠네.” 그날 이후 우리는 소통이 끊어졌다. 연락을 해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처럼 관계는 작은 오해로 약해지거나, 순간의 실수로 무너진다. 그전에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쌓인 불만이나 성마른 기질 때문에 그 관계는 예상치 못한 날 끊어지기도 한다.
평소 과학을 신봉하는 친한 교수와 남도 여행을 함께한 이후 소통이 끊어졌다. 어떤 가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라는 나의 언사가 비난으로 비쳐서인지 모든 사회관계망을 차단당했다. 그동안 쌓은 친분이 한순간의 실수로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자존심을 건드린 걸까. 그날 이후 우리의 운명은 되감기는 영화 필름처럼 되고 말았다. 뒤엉킨 실타래 같은 심정이 여러 날 지속하였다.
구상 미술가 장 미쉘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관계라고 할까.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그를 자신의 스튜디오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워홀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 덕분에 바스키아는 단번에 유명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1987년 앤디 워홀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큰 상실감에 빠진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두 예술가의 친분처럼 남도의 섬을 여행하며 소통했던 지난날이 허망하게 새겨진다. 그 단절이 주는 공허감은 여러 날 계속되었다.
포용의 넓이와 깊이를 알고 만나는 교류라면 헤어짐이 줄어들까. 대개 상대방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다 알지 못할 수 있다. 서로를 다 이해하기도 전에 헤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고 단절하며 살아간다. 타인의 속성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상처를 내 보아라. 서로 주고받은 포화를 통해 숨겨진 모습을 아는 것이다. 좋은 관계 속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리라.
박용하 시인은 「생활의 실패」라는 시에서, “믿음은 하루아침 같고 / 우정은 하루 저녁 같고 /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이승을 등에 업고 저승을 벽에 안고 / 아주 딴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사람의 변덕스러움과 관계의 허망을 달래주는 시어다.
나이가 육십이라면 그 연륜만큼 인생 경험이 쌓인 책이 아닐까.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인人과 간間 즉, 회중會衆 속에서 숨을 쉬고 자양분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직 돈독하다고 생각하는 교류는 얼마나 잘 유지될 수 있을까? 관계는 잦은 소통을 통해 단단해진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신선함이 흥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끌림이 있는 이성일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포용으로 관계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 하지만 사소한 오해나, 실망감이나 매너리즘으로 단절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란 참으로 모호하다.
주말에 농막을 짓느라 체중은 줄고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다. 무리한 탓일까. 침상에 누우면 금방 잠이 든다. 숙면을 선사하는 노동처럼 아쉬운 단절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간밤에 보았던 영화 ‘유랑의 달’의 자막이 스쳐 지나간다. “당신 할아버지 것일 수도 있어요. 물건도 사람과 같아요. 만나고 헤어지고…….” 골동품 가게 주인이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신기한 듯 바라보는 여주인공에게 던진 말이다.
‘시절 인연이 다하고 이별을 할 때 지나치게 붙들려고 애쓰거나 슬퍼하지 마라. 꽃잎처럼 낙엽처럼 사람의 인연도 오고 가는 이치이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 시구를 받아들이기에 나는 아직 덜 성숙한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