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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산나물 기행
주 오 돈
저는 틈이 나면 남들이 잘 다니질 않는 들길과 산길을 즐겨 걷습니다. 그때마다 생활 속에 일기처럼
적어가는 글이 있습니다. 글 가운데 창원근교 자생하는 들나물 산나물과 관련된 내용 기운데 일부를 가
려 뽑아보았습니다. 저는 식품학자나 식도락가가 아닌지라 산나물의 영양학적 가치나 맛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한편, 적은 량이나마 들나물 산나물을 채집함이 자연을 훼손한 행위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합
니다. 역설적으로 이 글이 생태환경에 대한 이해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
었으면 합니다. 2001.5.31
나는 일요일 아침나절 북면으로 나섰다. 차창 밖 굴현고개 너머 산과 들은 눈에 익은 풍광이었다. 승산분교 앞에 내려 시골길을 걸었다. 내가 일차로 목표한 지점은 갈전마을 외딴 축사 뒤다.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텃밭이 하나 있다. 서리 맞은 고춧대는 갈색으로 시들었다. 텃밭의 무는 임자가 뽑아갔고 배추는 아직 남겨두었다. 곁에는 축산 사료용 볏짚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겨울이 오기 전 해마다 갈전마을을 찾는다. 감나무 까치밥이 달린 시골동네는 고즈넉했다. 나는 냉이를 캐려고 인적 드문 곳으로 찾아갔다. 냉이는 이른 봄 제 모습으로 제 맛을 낸다만 가을 냉이도 괜찮다. 예상대로 냉이는 너풀너풀 웃자라 아름다울 미(美)자였다. 나는 꽃삽을 꺼내 한 땀 한 땀 포기 밑으로 밀어 넣었다. 냉이를 캘 때는 뿌리까지 살려 조심스레 캐야 한다.
삼십 분 남짓 걸려 냉이를 수북하게 캤다. 나는 꽃삽과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야트막한 고개를 지났다. 백월산 아래 월산마을 어느 집안 재실에선 후손들이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었다. 나는 온천장으로 옮겨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 많은 발바닥은 굳은살이 졌다. 몸을 닦고 바깥으로 나오니 늦가을 오후 햇살이 따사로웠다. 두부에 곡차를 한 잔 마셨다. 10.11.21 <아름다울 미>
친구가 운전한 차는 안민터널을 빠져나가 동진해로 향했다. 우리는 용원 못 미쳐 웅천에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신항만 건설지가 가깝기도 하고 조선시대 왜구가 쌓은 성 터가 남은 웅천이다. 우리는 사도 갯마을 근처 세스페데스신부 공원에 차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찾은 스페인 신부를 기념한 공원이었다. 우리는 바닷가 산책길 따라 걸었다. 따사로운 봄날 잘 나왔다 싶었다.
사도갯가 산책길은 내가 이미 두 차례 거쳐 지난 곳이었다. 마을 앞 산책로로 내려서니 마침 물이 빠질 때라 고동을 줍던 사내가 우리 보고도 함께 줍자고 했다. 우리는 길이 달라 합류하지 못하고 산책로 끝에서 흰돌메공원으로 올랐다. 신항만과 거가대교를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산정에 오르면 군데군데 대리석 돌덩이가 있어 백석산이라 불린 산을 우리말로 바꾸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산길을 걸어 야트막한 산정을 지났다. 마천공단과 영길마을이 내려 보였다. 넷은 볕바른 묵정밭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비웠다. 봄볕에 나른한 식후였지만 할 일이 있었다. 서로는 각자 흩어져 쑥을 캐었다. 산중 검불 속인지라 아주 깨끗한 쑥이었다. 쑥을 캐서 다시 갯가를 걸어 황포돛대 노래비와 와 삼포마을 거쳤다. 돌아오는 길 어느 횟집을 지나다 도다리를 장만했다.11.03.13 <가이곡의>
춘분이 지나간 삼월하순 넷째 주 토요일이었다. 아침 기온이 살짝 얼 듯 말 듯 한 꽃샘추위도 물러간 봄날이었다. 나는 녹색버스를 타고 굴현고개를 넘어 외감마을 앞에 내렸다. 달천계곡 입구를 향해 가다 남해고속도로 우회 창원터널 입구 곁을 올랐다. 산 들머리 감나무과수원 산길부터 등산화 밑창에 와 닿는 촉감이 달랐다. 쌓인 가랑잎이 삭아가는 흙바닥 길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맘때면 볕바른 언덕 잔디에 엉겅퀴 순이 비집고 올라온다. 나는 엉겅퀴를 마련하려고 가끔 들리는 산길로 찾아 들었다. 엉겅퀴 뿌리나 잎줄기는 민간에서 여러 효능이 있다고 전한다. 그 이름에서 유추되듯 피를 엉키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혈압을 낮추어주고 간에도 도움을 준다고 전해온다. 신경통이나 요통을 다스려준다고도 한다. 생즙은 허약한 스태미나를 북돋운다고 알려졌다.
나는 엉겅퀴를 약재보다 봄나물로 무쳐 먹는다. 어린순에 가시가 돋아있긴 해도 삶아 데치면 부드러워져 먹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물거리가 될 만한 엉겅퀴를 장만하려면 채집 시기를 잘 맞추어야한다. 어린순은 너무 보드라워 그렇고 쇠어지면 가시가 억세져서 나물로 먹기로는 거북하다. 엉겅퀴 채집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고 볕바른 곳인가 응달인가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11.03.26 <가시나물>
새봄에 돋는 원추리 잎은 난초 모양인데 도톰하고 널따랗다. 보리 싹보다 굵은 잎사귀는 거꾸로 세워놓은 인(人)자처럼 생겼다. 장마철부터 한여름까지 피는 노란 원추리 꽃은 나리꽃을 많이 닮았다. 도청 인근 도로 중앙분리대 조경으로 심겨진 화초이기도 하다. 용지호수 주변 산책로 꽃밭에도 심어 놓았다. 원래 원추리는 야생초인데 관상용으로 도심공원이나 주택정원으로 옮겨왔다.
근교 산에 오르면 발품 그리 팔지 않고도 절로 자라고 있는 원추리를 발견한다. 천주산이 뻗어 내린 굴현고개에서 구룡산 능선으로 가다보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북면 온천장 뒤쪽 마금산과 천마산 자락에서도 더러 보았다. 외감마을에서 칠원 산정마을로 넘다보면 양미재가 나온다. 양미재 산마루에도 자생 원추리가 있다. 이른 봄 땅거죽을 비집고 녹색 싹이 돋기에 눈에 쉽게 띈다.
산에서 채집되는 나물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이 원추리지 싶다. 이름난 사찰 들머리 할머니들이 쑥과 함께 팔러 나오는 산나물이 원추리다. 원추리는 절간 선식으로도 널리 이용된다고 들었다. 참선할 때 머리를 맑게 하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먹는다는 선식이다. 한방에선 훤초(萱草) 또는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불리는데 춘곤증을 예방하고 우울증 치료에 도움을 준다는 한약재다.11.04.03 <원추리>
원추리 순이 재리시장이나 백화점 식품코너에 나오지 않듯 회잎나무 이파리도 마찬가지다. 봄날 나뭇잎이 돋을 때 반짝 나오는 산나물이다. 회잎나무 이파리는 땅에서 채집하는 산나물이 아니고 나뭇잎이다. 녹차 잎처럼 나뭇잎을 식용으로 하는 것이다. 상록활엽인 녹차는 봄에 새로 움트는 이파리를 따서 덖어 말려 찻물로 우려내어 마신다. 회잎나무 이파리는 나물로 무쳐먹는다.
이른 봄 잎이 돋는 회잎나무다. 관목인지라 그리 높게 자라지 않는다. 어른 키보다 약간 높게 자란다. 혼효림 활엽수림대에 섞어 자라기에 파릇한 잎이 돋을 때만 눈에 띈다. 그러다 있는지 없는지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회잎나무다. 지표면 가까운 곳에서 돋는 새순은 노루나 토끼가 와서 따 먹기도 한다. 녹차 잎을 따듯 회잎나무 이파리를 따서 살짝 데치면 좋은 나물이 된다.
내 어릴 적 어머님은 회잎나무 이파리를 홑잎나물이라 했다. 그냥 홀잎이라 부르기도 했다. 봄날에 따 온 홀잎을 삶아 말려서 명절이나 기제사 때 묵나물로 쓰기도 했다. 당신이 무쳐 주신 홀잎을 기억하는 막내아들은 그간 세월이 흘러 중년에 접어들었다. 비록 내가 오른 산자락이 고향이 아닐지라도 회잎나무 이파리를 딸 때마다 어머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저 하늘 끝 어디쯤일까. 11.04.03 <홑잎나물>
유난히 춥다고 호들갑 떨던 계절이도 물러가고 그새 봄이 무르익어간다. 언 땅이 풀리고 새싹이 돋는 계절이면 농부 손길은 바빠진다. 봄이 오면 나도 여느 농부처럼 바쁘다. 내 이름으로 등기부상 인정받는 지번은 한 평도 없다. 한 뼘 텃밭도 소유하지 못한 주제다. 그럼에도 내가 관리하는 남새밭은 아주 넓다.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산자락까지가 내 남새밭의 경계이니 얼마나 넓은가.
나는 이미 설날이 오기 전 대산들녘으로 나가 냉이를 직접 캐었다. 된장을 풀어 넣은 냉잇국으로 봄을 진작 맞았다. 진해 갯가 청정지역에서 뜯어온 쑥으로 진한 봄 향기를 먼저 맡았다. 양미재 언저리로 올라 엉겅퀴를 캐어 가시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는 원추리와 홑잎나물을 장만해 녹색 밥상을 차렸다. 이 모두 내가 직접 발로 찾아가 손으로 채집한 푸성귀들이었다.
내가 다니는 곳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외진 곳이다. 현지에 사는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임자 없는 야생초라지만 마구잡이로 훑고 뜯어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채집하는 들나물 산나물은 욕심 내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그쳐야 한다. 채집 이후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자연의 복원력에 무리가 가지 않아야 한다. 한 포기 한 포기, 한 잎 한 잎 모두 조심스럽다. 11.04.06 <오는 봄 가는 날>
웅성웅성 여러 사람들이 무리 지은 산행보다 나는 혼자 호젓이 걷는 산행에 묘미를 더 느낀다. 부엽토가 깔린 폭신한 산길이라 좋다. 나무에는 연두색 잎들이 돋는 때라 싱그러웠다. 나는 소답동 갈림길에서 산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었다. 야생 밤나무들이 자라는 곳이었다. 가랑잎 사이로 군데군데 작년에 떨어졌던 밤송이들이 눈에 띄었다. 노루가 다닌 듯 희미한 짐승길이 보였다.
내가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 때는 요량이 있어서다.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봄날 시간을 내어 들렸던 곳이다. 나는 숲에서 밥상에 한두 끼 올릴 찬거리를 장만했다. 가랑잎 검불 사이로 취나물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어 순이 어려 그 양이 많지 않았다. 노루가 뜯어 먹다 남긴 원추리는 제법 되었다. 회잎나무 이파리는 활활 피어났다. 일용할 찬거리로 족했다.
나는 숲에 들어 두어 시간 걸려 세 가지 산나물을 채집했다. 생취 몇 줌과 원추리 순과 회잎나무 이파리였다. 나는 구룡산 정상을 앞둔 바위에 걸터앉아 담시 쉬었다. 그때 인적 없는 산길에 사람소리가 들렸다. 진달래축제가 열리는 천주산을 오르지 않고 구룡산을 찾은 사람이 둘 있었다. 나를 앞질러 구룡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그들은 내 배낭에 들어있는 산나물은 몰랐을 것이다. 11.04.10 <혼자 가는 길>
중방과 감계 두 마을을 에워싼 먼지 차단막이 설치되었다. 중장비가 주변 논밭을 뭉개어 터를 고르는 작업이었다. 나는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올라 조롱산의 잘록한 능선에 닿았다. 잠시 땀을 식히고 가져간 김밥으로 요기를 해결했다. 조롱산 뒤쪽은 무동마을이었다. 무동도 택지가 개발되는 곳으로 아파트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좁은 국토 안은 곳곳마다 개발로 인해 녹지가 잠식되었다.
사월의 숲은 어느새 연녹색으로 번져갔다. 주종을 이룬 오리나무는 잎이 제법 나왔다. 듬성듬성한 산벚나무는 화사하게 피었던 꽃이 질 무렵이었다. 숲 속에는 낮은 키로 자라는 진달래도 있었다. 진달래꽃 역시 절정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가랑잎검불 사이로 장끼 한 마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인적 드문 곳에서 나를 보고 놀란 꿩이 하늘로 날아오를 새 없어 땅위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나는 산길이 없는 비탈을 내려섰다. 아카시나무에서도 잎이 돋아났다. 원추리 순은 노루가 뜯어 먹었는지 몽실몽실 잘려나갔다. 돼지 귀처럼 생긴 생취가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취나물 순을 몇 줌 뜯었다. 작은 능선을 넘을 때 두릅나무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두릅 순을 땄지만 가시에 찔리는 기회비용은 지출했다. 산기슭에는 싸리기 같이 하얀 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었다. 조팝이었다. 11.04.15 <조팝꽃 피는 언덕>
나는 창원 근교 산자락의 웬만한 식생은 꿰뚫고 있다. 옻을 잘 타기에 옻나무를 제일 무서워한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옻나무 잎에 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 해 한두 번은 옻이 올라 약국이나 병원을 찾아간다. 봄철이면 창원근교에서 산나물이 어디 많이 자생하는지도 훤하다. 내 이름으로 가진 땅 한 뼘 없다만 발길 닿는 곳까지가 내가 가꾸는 남새밭이다.
용제봉이나 불모산기슭에 들면 취나 고사리를 만났다. 구룡산이나 작대산 가는 양미재 언저리서도 더러 보았다. 원추리는 취보다 먼저 돋았다. 원추리보다 먼저 돋는 가시나물이라는 엉겅퀴를 채집한 바 있다. 땅에서 바로 솟는 나물은 아니지만 나뭇잎으로는 회잎나무나 다래나무 새 순도 산나물로 먹을 만하다. 이런 저런 제철 산나물 가운데 나보고 으뜸을 꼽으라면 두릅을 들고 싶다.
두릅은 밭둑으로 옮겨 심어 가꾸는 사람도 있다. 그런 두릅보다 산에 절로 자란 야생 두릅은 순이 좀 거칠긴 해도 향은 더 진하다. 등산로를 벗어나 숲으로 들었더니 중년 부부가 두릅과 고사리를 먼저 꺾고 있었다. 아마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이지 싶었다. 나는 송전탑으로 세우면서 임시로 뚫은 길 따라 걸었다. 용암마을에 이르기까지 두세 끼 찬으로 좋을 두릅과 생취를 장만했다. 11.04.23 <도린곁>
산기슭에 앉자 쉬고 있을 즈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문학을 연구한다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일요일에도 책과 씨름하는 친구였다. 늦은 나이지만 박사과정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느 산자락 들머리 있으니 산나물을 장만하면 해거름에 보자고 했다. 나는 통화를 끝내고 산에 들었다. 두릅 순은 쇠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자라는 취나물을 뜯었다. 원추리도 보였다.
산 속에는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한 사람 더 있었다. 그도 나처럼 산나물을 채집하고 있었다. 내야 처음이지만 아마 그는 해마다 들리는 사림인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인기척을 보이면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와 나는 엇갈려 스쳐 지났다. 바깥에서 본 지형과는 다른 산세였다. 깊은 골짝에는 오래전 산사태를 방지하려고 여러 곳에 축대를 쌓아 두었다. 맑은 석간수가 흘렀다.
산중에서 드문 머위도 뜯었다. 송전탑을 세우면서 난 길로 나와 취나물을 골랐다. 바쁘게 뜯나보니 검불이 함께 섞어 있었다. 솔잎과 가랑잎을 털어 내었다. 성묫길로 난 희미한 길 따라 내려가니 용전마을이었다. 용강에서 용암을 지나 용전에 닿았다. 근처는 용잠 용정 용산마을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구룡산에 올랐고 가까이 팔룡산도 있다. 약속대로 지인에게 산나물을 안겨주었다. 11.04.24 <애기똥풀을 찾아서>
평일이다 보니 소목고개 오르는 등산로는 인적이 드물었다. 비가 그친 뒤라 산길에 먼지가 일지 않아 좋았다. 고개 못 미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소목고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어느 방향으로 갈 지를 생각해 보았다. 버섯농장을 지나 봉림사 옛 절터 가면 된다. 하산 지점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는 곳이다. 가끔 틈 날 때 두세 시간 산책 삼아 다니는 코스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정병산으로 올랐다. 산허리 중간쯤에서 서북쪽 능선으로 들었다. 산비탈에 한 할머니가 고사리를 꺾고 있었다. 봄비 오고 난 뒤라 고사리 순이 올라올 무렵이다. 아마 그 할머니는 생업으로 산나물을 뜯어 파는 분이지 싶었다. 고사리는 할머니가 채집하도록 두고 나는 다른 나물을 장만했다. 다래나무에서 보드라운 순이 나오고 있었다. 손쉽게 배낭을 채울 수 있었다.
소목고개 너머 덕산마을로 가니 25호 국도 터널이 빠져나왔다. 밀양으로 근무지를 옮겨간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둘이 가끔 들린 주막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잔을 비우다가 주모에게 배낭을 안겨 다래나무순을 삼등분하라고 했다. 지인과 주모와 내가 나누어 가졌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후에 / 바위 끝 물가에서 슬카지 노니노라 / 그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럴 줄이 있으랴.” 11.04.26 <작은 행복>
그새 나는 미완성인 글을 마무리했다. 초등학교 친구가 시킨 대로 자물통 구멍에다 윤활유를 뿌려 놓고 잠시 기다렸다 잠가보니 찰칵했다. 현관문은 마술 같이 정말 신기하게 잠겼다. 사무실 안에 책 말고는 별다른 비품이 없다만 문을 열어 놓고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산행을 같이 가려고 나타난 친구보고 아침부터 철물점을 찾아 헤매게 해도 문이 잠그고 보니 나는 덜 미안했다.
친구와 함께 시내를 빠져 나가지 전에 김밥을 두 줄 준비했다. 화천리 북면양조장을 지나다가 곡차를 한 통 마련했다. 우리는 동전삼거리를 지나 신동마을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었다. 우리는 무릉산 북사면 응달의 한재고개에 닿았다. 무릉산은 함안 칠북과 창원 북면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고개 아래는 최윤덕 장상 생가 터가 있는 곳이다. 산중에는 사슴농장과 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감나무과수원을 지나 무릉산으로 올랐다. 사람들이 드물게 지나는 산길을 만났다. 조금 쇠어가고 있었다만 생취를 뜯고 고사리를 꺾었다. 누군가 먼저 거쳐 간 두릅나무에선 두 번째 순이 돋았다. 보드라운 원추리와 산 머위도 있기에 몇 줌 장만했다. 해가 중천에 있었다만 일찍 하산했다. 집 앞에 다 와서 도청 문화체육 일을 보는 친구를 만났다. 그래 산나물은 네가 가지게나. 11.05.01. <세 친구>
선배는 내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산에 가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일상에 찌든 피로를 한적한 숲에서 보냄이 좋다고 했다. 고개 너머는 함안 레이크힐스골프장이다. 고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숲으로 들었다. 오리나무를 비롯한 낙엽활엽수들은 잎이 돋아 싱그러웠다. 선배는 나하고 두어 번 산나물 채집 기행을 다녀봐서 취나물은 알아보았다. 좀 늦은 감이 있다만 많이 쇠지 않았다.
우리는 생취를 뜯어가며 산비탈을 올랐다. 예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드물었는데 무릉산으로 가는 등산로에 산악회 깃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무릉산으로 가지 않고 조롱산 정상으로 올랐다. 새장처럼 생긴 산은 그리 높지 않았다. 산꼭대기 못 미쳐 쇠어 가는 땅 두릅도 찾았다. 정상에는 바위 몇 덩이 세워 당제를 지낸 묵은 당산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남은 곡차와 김밥을 먹었다.
산마루에는 산짐승이 다닌 희미한 길이 나 있었다. 우리는 북사면 비탈로 내려서서 생취를 계속 뜯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사람들이 다녀가지 않아 우리는 취나물을 손쉽게 마련했다. 딸기나무 가시를 헤치고 나가니 두릅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었다. 먼저 돋아난 두릅은 누군가 따 갔더랬다. 그 이후 돋아난 두벌두릅 순이 돋아 있었다. 선배와 나는 두릅 순을 넉넉하게 땄다. 11.05.05<황사 걷힌 어느 봄날>
오월 첫 주 토요일이었다. 아침나절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밥을 들었다. 그제 산에 올랐다 따온 두릅 순이 나왔다. 두벌두릅이라 촉감이 거칠게 느껴져도 먹을 만했다. 언제 비가 내리면 휴일나들이를 나설 수 없지 싶어 반나절이지만 길을 나섰다. 굴현고개 너머 북면으로 갔다. 나는 화천리에서 감계지구 부지조성 공사현장 근처로 갔다. 농지들이 잠식되고 가고 있었다.
중방마을 지나 골짜기로 갔다. 개발지역과 녹지공간의 경계지점이었다. 그곳 개울가에서 절로 자라는 몇 그루 뽕나무가 있다. 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묵혀둔 뽕나무를 찾아갔다. 바야흐로 들나물 산나물이 쇠어 갈 즈음이다. 그렇지만 뽕잎의 새순이 이제 막 돋아 보드라운 잎을 펼치는 때다. 나는 개울가 언덕에 서서 조심스럽게 한 잎 두 잎 뽕잎을 따 모았다. 힘들지 않았다.
옛날에 누에를 기를 적이라면 뽕나무는 소중히 관리했다. 이제 누에를 치지 않다보니 뽕나무 효용가치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나한테 뽕잎은 자원을 재활용하는 것과 같다. 보드라운 뽕잎을 데치면 좋은 쌈이 되고 나물거리가 된다. 어느 찻집에서 뽕잎차를 맛보았다. 친환경 식품으로 뽕잎국수도 나왔다. 나는 나대로 뽕잎으로 쌈을 싸 먹고 나물을 무쳐 먹는다. 이러다 봄날은 가고 있다. 11.05.07 <뽕잎>
나는 법당 아래 뜰에서 두 손 모아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어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나는 불제자가 아니면서 구고사를 자주 찾는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법당과 원주실로부터 거리가 있는 절간 입구 세워진 범종루다. 종루에는 종을 비롯한 법고와 운판과 목어가 걸려 있다. 종루에서 바라보면 산 너머 산이다. 구름이라도 떠가는 하늘이면 더 좋다.
종루에서 내려와 절간 옆의 숲으로 들었다. 짐승이 다님직한 희미한 오솔길이었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 숲이었다. 눈에 보이는 생취를 몇 줌 장만했다. 취는 조금 쇠어 가고 있긴 해도 향은 더 진했다. 나는 숲 그늘 바위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그즈음 멀리 떠나 있는 큰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잔정이 없는 아버지라 좀체 전화가 없는 녀석인데 날이 날인지라 반가운 통화였다.
나는 구고사 언저리에서 건너편 산자락으로 향했다. 작대산 가는 길에 넘는 산등선이었다. 두릅나무에선 두벌 순이 나오고 있었다. 수 년 전 곰취를 발견했던 참나무 밑으로 가보았다. 잎이 동그란 곰취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취보다 늦게 돋아나기에 잎은 아직 보드라웠다. 뿌리 부분은 살려두고 살짝 뜯으니 몇 줌 되었다. 일찍 하산하여 영혼이 맑은 원로 한 분을 만나 뵈었다. 11.05.08 <떠가는 구름>
나는 친구보고 고사리를 꺾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고사리는 자생지가 한정되어 있지만 날씨도 거들어야 한다. 간밤에서 오전까지 비가 내려주어 금상첨화였다. 고사리는 용제봉이나 정병산 기슭에 자란다. 구룡산이나 작대산 가는 산등선에도 보았다. 자생지를 아는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 고사리를 꺾어 가버리면 뒤따라 간 사람은 헛일이다. 내가 안내한 고사리 자생지는 외진 곳이었다.
우리는 북면으로 갔다. 동전삼거리와 온천장 사이에서 칠북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갔다. 고개 못 미쳐 사회복지시설 성심원과 시립치매요양원이 있었다. 우리는 고개에는 13번 농어촌버스가 되돌아 나오는 곳이다. 친구가 몰아간 승용차는 고개 갓길에 세워두었다. 나는 산세를 바라보며 우리가 오를 산을 가리켰다. 행정구역은 칠북면 아산마을이었다. 입안 어금니처럼 구석진 마을이었다.
찻길에서 마을을 지나 과수원 끝까지 가는 데는 삼십 분 가량 걸렸다. 아주 비탈진 길이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숲으로 들었다. 어느 집안의 산소도 몇 기 보였다. 내가 보아둔 고사리 자생지는 억새와 잡목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누군가 며칠 전 와서 고사리를 꺾어 간 흔적이 보였다. 억새도 사람 발자국에 짓밟혀 있었다. 그래도 간밤에서 아침까지 내린 비에 고사리는 새로 돋아났다.11.05.10 <푸새엣 거신들>
작대산을 가려면 능선을 하나 내려가 다시 가파른 능선을 올라야 한다. 왼쪽 다리 무릎관절이 사태가 좋지 않다는 신호가 왔다. 나는 작대산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서 중방마을로 내려갈 요량이다. 나는 산정에서 서쪽 비탈 숲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취가 더러 자란다. 취는 이미 쇠어 있었다. 나는 그 산 언저리에 곰취가 자라는 한 지역을 알고 있다. 근동에서 보기 드물게 곰취가 자생하는 곳이다.
다시 산길로 찾아 들었다. 잘록한 산허리에서 중방마을로 내려서는 산길을 찾았다. 사람들이 다니질 않아 묵혀 있어 희미한 길이었다. 그 산자락에는 봄 한 철 산도화가 아름답게 피는 곳이다. 산도화 꽃은 나뭇잎이 돋아나기 전에 산벚나무 꽃과 같은 시기에 피었다 졌다. 돌복숭이라고도 하는 야생복숭아가 산도화다. 가지마다 아까 외감마을 들머리에서 본 매실보다 작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내감마을과 중방마을은 집들만 남기고 논밭은 부지공사가 한창이다. 부지가 정리되면 택지와 산업용지가 될 모양이다. 마을에 이르기 전 녹지와 개발의 경계지점에서 내가 할 일이 하나 있었다. 토사가 밀려온 개울에 맑은 물이 흘렀다. 돌미나리가 여뀌와 섞여 수북하게 자라 있었다. 나는 배낭을 벗어놓고 허리 굽혀 돌미나리를 골라 가려 뽑았다. 식탁에 오를 서너 끼 찬으로 훌륭한 소재였다. 11.05.22 <오월 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