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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에서의 구원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의 세상을‘현세(現世)’라고 말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이생’이라고도 하고, 같은 뜻으로 말하는 지금 살고 있는 세계란 뜻에서‘이승’, ‘금생’, ‘금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에 의해 세상이 존재합니다만, 세상 창조가 있기 이전 영원부터 존재해 왔으며, 세상 마지막 날 이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된 세상에서 또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있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다음 세상을 대하는 것에서 ‘내세(來世)’의 생각을 갖고 그 내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세만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현세와 함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다는 사실은 비단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에 있는 이방종교에 있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그들의 신앙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세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과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본성과 본능에서 갖는 ‘막연한 것’, 곧 뚜렷하지 않고 어렴풋한 것으로 기독교의 내세 신앙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저런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희미하나마 사후 세계를 생각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대체적으로는 현세만 존재한다고 보지를 않으며, 이 세상과 연계해서 내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서 현세에서의 자신의 삶이 올바르게 살았음에 미덥지 못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어 죽음 이후 내세에서 받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데 따라 자신들이 존재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냄에 있는 선함과 의로움에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 따라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사람이 존재하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인데, 성경적 태도 대신에, 이 세상을 무익하고 악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경향에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 나가지 않고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있어 그와 그의 모든 후손이 영적인 존재의 특성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상실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단지 육적인 존재의 특성만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는 내세가 있음을 의식하나 내세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세를 바라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세를 바라보며 그 내세를 맞이할 기다림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선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그를 통해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하늘의 참생명인 영생에 있는 구원 얻는 믿음을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은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 예배 –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날을 고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우리의 삶을 단순히 기다림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로 간다고 생각하며, 이는 그리스도가 다시 세상에 오시는 재림에 의해서 있게 된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가 죽어서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셔아만 비로소 하늘에 간다고 여기며, 그날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임하면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악한 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악한 죄에 있은 것에 따라 심판을 받아 지옥에 들어갈 것이며, 의로운 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시인하고 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산 의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하시는 판결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하늘의 하나님께로 가는 까닭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죽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의 한 단면만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 대한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고, 죽어서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지만 이것은 단지 구원에 대한 성경적 설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한 것에서만 아니라 구원을 받음으로써 이생(현세)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있게 되는 이생에서의 구원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왜냐하면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너희 안에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빌 2:12-13)
이는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제공된 피의 구속에 의한 사랑에 깊이 들어와 있게 하였지만 이제 그들을 떠나고자 하는 시기에 이르러서 자신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바울의 몸은 비록 그들로부터 떠나있게 되나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에 의한 사랑은 남아 있어 그들과 여전히 함께 하며 그들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두고 견고하게 할 것이기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에게 주신 구원을 이룸에 있을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품으신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을 온전히 마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이는 무서운 사망(죽음)의 큰 해로부터 우리들을 건지셨으며 그리고 아직도 건지실 것을 바라는 자를 향하여 건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에 관하여 단지 미래에 보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구절은 우리가 걱정의 지속적인 상태에 머무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구원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받은 것이라면, 바울은 이 구원이 단지 내세 신앙에 있는 것에서만 아니라 이생에서 하나님을 높이 받들어 큰 경외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통해서 우리 삶의 전 부분을 그와의 관계 속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비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 일백 마리의 양떼로부터 이탈해 있어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마 18:10-14; 눅 15:3-7)이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산 한 아들(눅 15:7-24)에서 구원은 목자가 양을 찾아 양우리로 데리고 오거나 탕자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받아들여져“잃었다가 찾았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요한에 의해서 이 구원은 곧 영생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는 “바로 이것이 영생이다.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내세 천당을 누리는 것에서 전부가 아니라 이생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알 때, 이생에서 무엇을 하는 것 – 셀러리맨의 직장 생활, 전문 기술자, 사업가, 예체능인, 공무원 등 등 - 에 있든 그 모두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하게 되는 일에 있는 것으로 이 모든 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 가져나갑니다. 하여, 무슨 일을 하는 것에 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온 마음과 온 생각이 집중되며 온몸으로 가져나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져나가는 것일 뿐인데, 이 세상이 사라질 때 죄의 본성과 본능에 의해 발휘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사라지고 말 것에 마음을 품고 뜻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한데 만일 구원을 단지 지옥으로부터 피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만 알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주로 우리가 죽으면 직면하게 될 분노의 심판에 관한 생각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목자의 감독을 받으며 안전히 보호를 받으면서 그분이 제공한 꼴을 먹으며 물을 마심에 있으며 즐거이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알려주고, 또한 아버지의 품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제공하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즐거이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고 우리가 그분을 가까이하며 그분의 주위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서 영생이 뜻하는 바 영원히 지속되는 것에서 이생에서 내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목자와 더불어, 아버지와 더불어 살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히브리서 기자가 본향을 바라봄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죽음 너머 바라보고 소망 중에 있는 그 본향을 향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것이기에 이생에서 우리의 삶을 쉽게 허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주님과 주님이 맡기신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며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한 선한 싸움에 있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한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내게 씌워줄 나를 위하여 준비된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내게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열심히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하여 말합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 기회가 좋든지 좋지 않든지 -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기다리면서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성도들에게 허물이 있을 때는 바로잡고, 책망해야 할 때는 책망을 하며, 옳은 일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십시오.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따라다니는 때가 올 것이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의 말일지라도 귀를 즐겁게만 해 주면 선생으로 따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맡은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마치 운동 경기장에서 ‘경주 : 달리기’에 임하는 선수를 연상하게 됩니다. 100m, 500m, 1000m, 1500m, 3000m 또는 그 이상의 각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서 경주에 임하는 달리기는 0m에서 출발하여 각 골인점에 도달하며, 면류관을 쓰는 목표에 이릅니다. 구원은 면류관을 쓰는 그 순간에 있게 되기까지 온 힘을 다하여 달리기를 마치는 전 과정, 곧 이생에서의 구원을 다룹니다. 기독교의 구원론 교리에서는 이를 구원의 서정에서 ‘영화’에 이르는 ‘성화’로 다루는데 믿음을 구원의 서정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이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에서는‘성령에 속한 사람의 삶’ 곧, ‘성령으로 사는 삶’으로 다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한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믿음이 내세 천국만을 염두에 두고 이생에서는 육체의 욕망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고 재물이든 권세이든 명예이든 그것들을 취함이 자랑으로 채워져야만 하겠는지요. 그 모두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 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한정해서 기쁨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요일 2:16). 베드로는 그 모두는 단지 허탄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벧후 2;18). 그런데도 믿음을 내세 천국에만 염두에 두고 정작 이생에서의 삶은 의미 없는 것에 마음과 뜻을 두고 온몸으로 사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내세 천국을 생각하며 다가오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림에 있는 구원에 있는 자는 이생에서 구원 얻은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으며, 그에게서 영생은 그의 믿음에 견고히 붙들려 있을 것입니다. 하여 디모데전서 6장 12절은 말합니다.
“네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영생을 붙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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