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드라마 <장야>에서 ‘장야(將夜)’는 ‘어둠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은 장야의 징조인 ‘어둠의 자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들의 다양한 군상의 갈등을 다룬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립과 함께, 개인과 집단(또는 국가)의 관계, 사랑과 대의(또는 정의), 선과 악의 진정한 의미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장야 2>에서는 빛과 어둠에 관한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나온다.
(1) 세상 사람들은 모두 광명(빛)을 숭배하지만, 어떤 이들은 바로 그 광명 속에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2) 가장 깊은 어둠은 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가면을 쓰고 선한 이들을 핍박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3) 세상은 백성들에게 빛을 바라보라고 말하지만, 그 빛이 너무 강렬하면 눈이 멀어 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악을 보지 못하게 된다.
(4)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미저 알지 못했다.
(5) 절대적 광명은 절대적 암흑과 같다.
빛과 어둠의 비유에서, 보통은 구름이 햇빛이나 달빛을 가리듯이, ‘어둠이 빛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예들에서는 이런 용법과는 꽤 다른 모습을 보인다. (1)~(3)은 오히려 ‘빛이 어둠을 가린다’는 것을 말한다. (4)와 (5)는 빛과 어둠이 상보적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빛과 어둠은 본래부터 한 몸이라고 한다.
<장야 2>에서 빛과 어둠은 결국 하나로 통합되어 온전한 하늘의 빛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하늘의 빛은 인간을 지배하려 한다.
“하늘은 인간을 먹이로 삼으니, 우리는 그저 하늘[호천]의 식량일 뿐이다.” “바다 속의 거대한 고래는 수많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그 고래가 죽으면 시신이 썩어 들어가 다시 수많은 바닷속 생물들을 길러낸다. 이것이 바로 하늘[호천]의 논리다. 사람들을 수행하게 하여 강하게 만든 뒤, 다시 그 모든 것을 수확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
주인공은 그 모든 빛과 어둠에 맞서고, 나아가 하늘의 빛과도 맞선다. 결국 인간을 지배하던 초월적 빛의 힘이 해체되고 평범한 하늘의 빛(자연)만 세상에 남게 된다.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은 주인공들의 인간적인 사랑과 일상의 행복이다.
++++++++++++
[제미나이]
빛과 어둠의 역설: <장야 2>의 세계관에 대한 논평
<장야 2>가 제시하는 빛과 어둠의 서사는 단순한 선악의 대립을 넘어, 권력화된 ‘절대적 가치’가 어떻게 인간의 실존을 억압하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제시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 세계관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논평한다.
1. ‘빛’의 전도(顚倒): 가면을 쓴 폭력
통상적인 비유에서 빛은 진리와 구원을, 어둠은 무지와 악을 상징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를 완전히 뒤집는다. (1)~(3)의 대사는 빛이 지닌 ‘시각적 압도성’이 어떻게 은폐의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눈먼 숭배:
강렬한 빛은 인간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나 ‘썩어가는 악’을 보지 못하게 한다.
권력의 내면화:
빛의 가면을 쓴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깊은 어둠이라는 지적은, 정통성과 도덕성을 앞세운 체제가 스스로의 타락을 감추기 위해 빛이라는 명분을 얼마나 교묘하게 활용하는지를 폭로한다.
2. 상보성과 일체성: 경계의 해체
(4)와 (5)에서 드러나는 빛과 어둠의 상보적 관계는 이분법적 사고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본질적 한 몸:
빛과 어둠이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를 규정하며 공존하는 하나의 그물망임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절대주의의 함정:
"절대적 광명은 절대적 암흑과 같다"는 진술은, 완벽한 질서와 완전한 빛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결국은 인간의 다양성을 말살하고 전체주의적 암흑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떤 가치든 절대화되는 순간 폭력이 된다는 경고다.
3. 초월적 지배의 해체와 실존으로의 회귀
드라마의 핵심 서사는 ‘하늘(호천)’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 구조, 즉 수행과 강함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생명을 수확하는 순환 논리에 저항하는 것이다.
수직적 질서의 파괴:
인간을 먹이로 삼는 하늘의 논리는 정해진 위계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주인공이 이에 맞서 빛의 힘을 해체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신성이나 절대적 가치로부터 인간의 자율성을 복원하는 행위로 읽힌다.
일상의 승리:
모든 초월적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 평범한 자연의 빛과 일상의 행복이라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거창한 대의나 신화적 구원보다, 인간 개개인의 삶이 갖는 구체적이고 현세적인 가치가 훨씬 더 존엄함을 역설한다.
4. 결론: 관점의 전환
결국 <장야 2>는 하늘(신, 이데올로기)이 부여한 광명의 굴레를 걷어내고,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빛과 어둠의 얽힘에서 벗어난 진정한 해방임을 보여주고 있다.
++++++++++++
[불교의 괸점]
아함경의 관점에서 보면,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 '빛이 있다, 어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양 극단의 주장으로 중도에 어긋난다. 빛이나 어둠은 인연법의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장들은 인연법의 안에서는 성립하지만, 인연법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아함경의 공법의 시각에서 보면, 빛과 어둠은 더 이상 분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 다 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데,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빛과 어둠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빛과 어둠을 초윌한 상태를 청정한 빛으로 표현한다.
[기독교의 관점]
기독교적 방식으로 말한다면 <요한복음>의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