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생들과의 대화와 모임에서 한동안 멀리 있었습니다. 사람구실 조차도 못하고 지난 것을 알게 됩니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하나 옮겨 놓으며 그런대로 설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
아래
병실을 찾아 주었던 정재성 전우의 수고로 제 변고는 알려졌었으나 “전우들의 테라스” (rokfv.com) 탄생을 축하하는 대열에 함께 했다가 돌연 절필, 두문불출함으로서 불필요한 걱정과 오해의 여지가 있어 그간의 신변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은 자랑하고 좋은 약은 나누라’는 격언에 따라 전우들의 건강생활에도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엉치의 종기를 무시한 게 변고의 출발이었습니다. 작은 종기 하나에 별 신경을 쓰지 않다가 주변의 J외과를 찾은 것은 7월 10일, 의사도 단순종기로 진단, 농을 제거 후 거즈하나를 붙여주기에 저는 준비했던 강연을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천안함 격침을 바라 본 예비역 장교의 제언”:용인 기흥구청: 7.14일)
2. 그 후론 영문판을 갖춘 rokfv.com 이 나라의 안보에도 좋은 역할을 하리란 기대에서 이 곳 저 곳을 찾아 환영과 축하의 글을 남기며 제법 바빴었습니다. 이 때 보름이 지나도 종기가 낳지를 않자 의사는 치루의 결론을 내리고 수술을 제안했습니다. (7.26일)
3. 수술제안을 받은 다음날 서울의 D전문병원을 찾았습니다. 이 병원의 첫 번째 의사는 ‘복합치루’로 진단하고 복합치루 담당 전문의가 출장 중임으로 돌아오는 대로 수술일정을 잡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다림 끝에 만난 전문의는 괄약근의 보호를 위해 2차의 단계적 수술이 필요한 바, 1차에서 농을 제거 후 3-5주 후에 2차 수술을 하기로 하고 1차 수술을 했던 것입니다.(8.4일)
4. 1차 수술 후엔 심신의 절대안정이 필요 했습니다. 하반신 마취에 이어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천안함 격침이후에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꼬리를 물었고 집으로 돌아 온 후에는 한 사이비 목사가 북에 잠입하여 펼치는 경거망동을 보게 되면서 도저히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과 망동은 북한 대남공작의 연장선에서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어야만 나라가 지켜질 텐데, 북한이 스스로 공식인정했던 대남공작(1997.5.26일 노동신문 특집보도: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히 싸운 통일혁명렬사”) 에 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 문제제기도 중단요구조차 없이 지난 13년간 모두 함구해 왔다는 엄청난 사실의 상기를 위해 수술부위의 통증을 참고 글쓰기를 계속해야 했었습니다.
5. 통증을 참고 글쓰기를 계속했던 시간의 연장이 패혈증의 원인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2인 1실 병실에서 있었던 룸 메이트와의 대화”란 제목의 글을 8월 7일, rokfv.com과 vietnamwar.co.kr의 ‘인강칼럼’에만 올리고 다른 곳에는 옮기지 못한 채 119에 실려 S대 분당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8월 8일 저녁)
집 사람에 의하면 S대 병원의 응급실 의사들은 응급조치 후 고열로 인한 패혈증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위한 절대시간이 시급함으로 중환자실이 즉각 가용했던 동수원 병원을 주선해 주어 이튿날 새벽에 다시 옮겼다고 하며 저는 그곳에서 2주간의 치료를 받고 살아서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8.21일)
6. 패혈증의 후유증은 2차 수술을 지연시켰습니다. 체력과 근력의 회복 없이는 수술이 불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차 수술 결과로 패혈증이 발생했으니 소송을 제기하고 2차 수술은 다른 병원을 택하라는 주변의 주문도 있었으나 근본책임이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음을 알고 있는 집 사람은 D병원에서의 수술을 원했으며 저는 10월 29일, 2차 수술을 받고 5박6일의 치료 후 다시 퇴원을 했던 것입니다. (11.4일).
7. 2차 퇴원 후에는 1차 퇴원 후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집 사람의 감시가 더욱 엄해졌고 저는 콤퓨타를 멀리 해야 했고 두문불출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전우들의 열정과 함성에 답 글 하나 못 쓰고 지내왔다는 자책감이 생겨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8월 8일 저녁, 실신 직전의 비명 소리를 집 사람이 못 들었다면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으며 S대 분당병원과 동수원 병원이 없었더라도 오늘의 저는 없습니다. 지난 4개월의 고비를 치루와의 전투기간으로 여기게 된 저는 고비마다에서 생명을 지켜주신 하느님께도 무한히 감사하면서 심신의 평온을 찾고 있습니다.
8. 이제 수술부위가 아물게 되면 정상인의 활동도 가능해 지겠으나 저로 인해 지병이 더욱 악화된 집사람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서 앞으로도 인터넷상의 글쓰기와 외부활동은 제한할 각오입니다. 여러 동지들의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집 사람과도 이미 약속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동안 “인강칼럼”이란 글쓰기 공간을 마련해 준 vietnamwar.co.kr의 서현식 전우와 금번 새롭게 동일칼럼을 열어준 rokf.com의 정재성 전우의 특별한 관심과 성원에 영원히 감사하며 글을 못 올리는 동안도 칼럼은 열어둘 것을 당부합니다. 당분간은 “대한민국 구국의 길이 빨리 열렸습니다”라는 저의 최근 글 이외에 더 보탤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9. rokf.com과 vietnamwar.co.kr의 발전으로 베트남 참전 전우들이 더욱 크게 뭉쳐지고 많은 지혜도 모아 과거 정부로부터 받은 홀대를 자랑스러운 명예회복으로 바꾸는 계기가 더욱 빨라질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아울러 기원합니다.
2010. 11. 19
첫댓글 인강께 언젠가 내가 忠言한 적이 있지요. 내가 눈감으면 온 우주가 없어진다고.. 4 년전 지만원 아우님과 우리 셋이 선릉의 한 호프집에서 토로했던 울분을... 그리고 구례 화엄사로 휴식여행 떠나자고...2010년이 다 갔으니 2011년에는 꼭 함께 갑시다. 완궤를 빌며 忠雨拜
건강할 때에 건강을 지켜야한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어쨋든 다행입니다. 부디 건강 회복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 감사 합니다. 저는 이번에 완전히 저 세상엘 갔다 왔답니다. 저 세상에서 우주의 일부같은 것도 보았고요---, 그러나 충우인형의 말씀대로 내가 눈을 감으면 이 세상엔 아무 의미가 없고 불쌍하게 남는 것은 집사람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답니다. 패혈증은 30대에 걸려도 치사률이 30%라는 통계가 있다고 의사가 알리면서 생환을 축하하더라고요. 이제는 살아 났으니 충우형의 계획에 따라 화엄사 여행도 가고 싶고 윤경형이 계획하시는 해외여행에도 따라서 나설 것입니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의 설정해준 인강칼럼이라는 공간에 앞으론 절필을 한다고 선언을 하고 나니 해방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젠 오랜 동안의 두문불출을 깨고 분당지역 동기생 모임에 나가 즐거운 시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표된 홍걸희 회장님의 명언 하나 소개합니다. -우리가 나이 70에 이렇게 건강한모습으로 만나며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우리들 집 사람들 덕아닙니까? 맞지요?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內 者之 德(내자지덕)이란 말이지요. 또다시 박수가 터졌답니다.- 새해부터는 저도 "內 者之 德"으로 테니스도 다시 시작하고 오래 멀리했던 골프도 치면서 살아 갈 것입니다. 가끔 불러 주시기를
이 기회에 부탁을 드립니다. 內 者之 德 만세! 총총 한광덕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