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시작된 인문학 여행의 첫 방문지는 충남 예산인데, 예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수덕사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수덕사는 여러 번 가보았으며 평택의 오성중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젊은 시절, 가진 것은 없어도 젊음과 미래의 꿈을 안고 열심히 활동하던 때 이*대, 이*성, 이*윤 선생님 그리고 나와 네 명에 방학 때나 농번기에 가정실습으로 사흘 정도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산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속리산, 내장산, 덕유산 등산을 하였고 처음으로 수덕사를 가보게 되었다. 수덕사 뒷산에 올라가면 둥그런 만공탑이 있었는데 그 둥그런 탑을 두 팔로 끌어안고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수덕사의 만공 선사를 기리는 탑이었던 것이다. 특히 수덕사는 여승으로 유명하고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관광지가 별로 없던 1970년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곤 하던 곳이다.
우선 수덕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일엽 스님이신데 본명은 김원주, 일제 강점기 여성 운동가요 시인과 수필가로 잘 알려진 분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한 스님이었다. 그는 일찍이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에서 목사인 아버지 김용겸과 어머니 이말대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등부 2학년 때 부자 집 아들과 약혼을 했으나 얼마 후 파혼을 하고 집 한 채와 토지에 큰돈을 위자료로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에 일본 법대생 오오타 세이죠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으나 양가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미 임신 중이었던 김원주는 세이죠의 친구 집에서 아이를 낳을 후 아이를 포기하고 홀로 귀국하여 24세 때 이혼남인 40세 이노익과 첫 결혼을 하였으나 이노익은 미국 유학을 하고 온 인텔리로 한쪽 다리를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장애인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사실을 친구를 통해서 알고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1921년 이혼을 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26세였다.
일본 유학하는 중에 춘원 이광수와의 사귀었고 一葉이라는 필명은 이광수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임장화와 동거하고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동아일보 기자 국기일과 동거,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백성욱과 연애 그리고 1929년에는 재가승 하윤실과 재혼하였으나 1931년 이혼하는 등 많은 남자들과 동거와 연애를 하였으며 아마도 남성편력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원주가 일본에서 낳은 아들이 훗날 수덕사로 어머니는 찾아 갔으나 만나주지 않다가 아들의 끈질긴 요청에 한 번 만나서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지도 말며 스님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사실을 접하니 마음이 찡하였다.
김원주의 어머니는 남동생을 출산하다가 사망을 하였고 아버지는 과부 한은총과 재혼을 했는데 한은총은 의병장 정원모 장군의 아들 정기찬의 아내였는데 남편과 시아버지가 연이어 사망하여 김원주의 아버지 김용겸과 재혼하였으며 그 때 둘째 아들 정신형을 데리고 재혼을 하였고 두고 온 큰 아들은 훗날 우리나라의 유명한 정치인 정일형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한다.
김원주는 세상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1933년 만공선사 하에 출가를 하여 수도생활을 하는 중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로 유명해졌으며 1971년 수덕사에서 입적을 하여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 평남 용강에서 함께 자란 동네 친구요 일본에 유학한 신여성 윤심덕은 ‘사의 예찬’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졌으며 목표 사람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을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마감을 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고, 일본 유학중에 사귄 나혜석은 같이 신여성 운동을 하던 친구로 화가로 활동하였으며 약혼자 최승구가 죽자 변호사 정우영과 결혼을 하였고 그림 기법에 한계를 느껴 새로운 세계를 찾아 유럽여행을 하는 중 파리에서 최린과 연애문제로 1930년에 이혼을 하고 정조는 강요의 문제가 아니라는 신여성의 정조론으로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던 중에 수덕사 만공 선사에게 출가를 원했으나 받아주지 않아서 수덕여관에 머물며 뇌경색으로 고생을 하다가 2년 후에 행려병자로 부고를 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김원주의 아들인 김태신은 김은호 화백의 양자가 되어 김 씨 성을 가지게 되었고 8,15 후에 양부를 찾아 월북을 했다가 체포되어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다가 탈출을 하였다고 한다. 늘 어머니를 그리다가 1897년 뉴욕 원각사의 오법안 주지 스님 찾아가 머리를 깎겠다고 하였으나 결혼을 하고 나이도 10살이나 많으니 은사가 되겠냐며 거절을 하고 대신 김천 직지가의 관응 스님을 찾아가라고 추천서를 써주어 관응 스님을 찾아갔으나 나이 들어서 중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고 거절을 하자 부인과 자식도 다 설득하였고 어머님의 간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누구냐 물으니 일엽이라고 하자 그 참 회한한 일이구나 내 머리를 일엽 스님이 깎아 주었는데 그 아들이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하니~~~ ‘내가 20세에 중이 되어 26세쯤에 직지사에 어린 아이가 하나가 있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지’ 라고 하자 그게 바로 접니다. 그렇게 묘한 인연으로 관응 스님은 머리를 깎아줄 테니 다시 가족의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여 일본으로 갖다오는 사이에 미국 원각사로 가게 되어 결국 미국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그는 북종화의 대가로 돌가루로 그림을 그리는 스님이 되어 수도생활을 하다가 93세에 직지사에서 입적을 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수덕사를 끼고 간 여행. 예산의 첫 방문지는 예산향교로, 향교는 일찍이 관에서 세운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향교가 세워진 곳은 현이 있고 그 지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산 향교의 위치가 여러 계단을 올라가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옆에 큰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향교의 규모가 상당히 넓고 크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 되었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당 이남규 기념관과 고택으로 조용하고 깨끗한 공기와 집 주변의 나지막한 산이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고택으로 이남규 선생은 고려 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구한말 애국계몽기의 학자요 관료이자 도학선비로 우리에게 학덕과 충절의 교훈을 전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위국의리를 지킨 대장부로 1907년 일본 관원이 포박하여 압송하려고 할 때 ‘선비는 죽일지언정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殺)’라고 하며 일본군을 엄히 꾸짖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1907년 일제 관원에 의해 아들과 노비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아산 평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학문으로는 성호 이익과 허전을 이어 받았고 단재 신채호를 비롯하여 변영만을 길러낸 근대사의 최고 학덕을 갖춘 선비였고 수당가의 애국정신은 1대 이남규에 이어 2대 이충구. 3대 이승복, 4대 이장원과 수당공의 시자(侍者) 김응길을 비롯하여 5대가 현충원에 모셔진 명문가가 되었다.
고택은 울타리가 없으며 입구에 반환대(反還臺)라는 팻말이 서 있는데 이는 들어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하는 뜻을 담은 바깥문을 대신하는 팻말이라고 한다. 건물에 붙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부터 색다른 모습이었는데 문지방 아래 위가 약간 휘어진 반달형으로 각진 전통적인 모습과는 색다른 것이 아마도 원만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보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을 가로 막는 담이 내외 담으로 양반집에서 많이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일행 40명이 모두 대청마루에 앉아 앞뒤로 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서 30도의 더위도 상관없는 자연바람이 너무 상쾌하고 좋았다. 송편과 방울토마토, 앉은뱅이 술로 유명한 한산 속곡주에 오징어포와 새우깡 등 그 많은 손님을 접대하는 성의도 고맙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색의 23대 손이라는 이문원 씨는 고려대학교 교수로 퇴직을 하고 종택을 지키지 위해서 몸이 불편한 아내는 서울에 두고 혼자 집을 지키며 사료를 모아 정리를 하고 번역도 하면서 빈집이었던 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모습이 역사와 가풍을 이어가는 집안의 후손이라는 마음에 든든함을 느꼈다. 그는 또 모금을 통하여 수당 기념관도 멋지게 지어서 많은 유물과 사료들을 전시해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데 84세의 연세를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추사 김정희 생가는 45년 전 쯤에 갔을 때는 한적한 시골에 멋진 기와집이 돋보였고 마당의 해시계 석년(石年)이 신비롭게 느껴졌으며 추사의 무덤과 근처의 백송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주변을 정비하여 넓은 잔디밭과 잘 정비된 모습이 보기는 깨끗하고 좋지만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바로 옆의 기념관은 과천에 있는 기념관에서 보던 것들과 거의 같은 사료들이었다.
추사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배우기도 하였고 과천에 있는 추사 기념관도 가보았으며 3년 전에 국립박물관에서 김정희 특별전시회에서도 세한도를 비롯하여 보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다들 익히 아는 바 세한도가 가장 핵심이요 세인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책을 보내주며 가까이 지내던 제자이자 역관 이상적에게 선물한 문인화로 이상적이 중국에 가지고 가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감상을 덧붙여서 길이가 10m가 넘게 되었고 정인보와 오세창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름난 인물들이 평을 적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아산 송악면 외암 민속 마을은 조선 중엽 명종 때에 이정 일가가 낙향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설화산의 정기를 받아 호를 외암이라 지은 뒤에 그 이름을 따서 외암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판 댁과 건재 고택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민속마을도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의 양동 마을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마을로 나는 네 번째 방문을 하다 보니 힘이 들고 더워서 그늘에서 쉬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오려고 버스를 타고 4행시 발표를 했는데 이번에는 뽑히지 못하였지만 잠시 짧은 시를 쓰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순서 중의 하나로 나에게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의 ; 의료인의 희생으로 코로나를 극복하고
리 ; 이른 시간 새벽을 깨워
기 ; 기쁨과 셀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개 ; 개가를 부르니 발걸음도 가벼워라.
코로나19로 꼬박 2년 반을 마스크에 얼굴을 가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으며 모임이나 나들이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인문학 여행도 멈추었다가 이제 숨통이 조금 튀어서 다시 시작된 인문학 여행을 하게 되니 너무 즐겁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거의 3년 만에 가보니 모두가 낮선 사람들이고 40명 중에 내가 제일 연장자인 것 같아서 앞으로 계속 다녀야 하는가 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내던 분들도 이제는 수술을 하거나 몸이 불편해서 자유롭게 나들이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보니 나만 남은 것 같은 씁쓸함을 지울 수 없지만 세월의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으며 특히 이번 여행을 통하여 기구하고 묘한 사람의 인연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