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오해가 많은 로마서 13장을 의도에 맞게 이해하자
송병주 목사 (LA 선한청지기교회)
1. 바울은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는가?
일본 제국주의는 오늘 이 본문을 근거로 일본 총독부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이유로 설명했다. 물론 이 일에 많은 선교사님들도 개입이 되어있었다. 당시 조선 선교사 협의회 대표로서 미국과 일본 사이의 카쓰라 테프트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해리슨 감독은 롬 13장에 근거하여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일본 정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독립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조선 기독교인들은 일본정부에 순종하되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3.1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용되는 것이 정당하다면, 바울은 로마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바울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황제의 명을 거역하다가 참수를 당했다. 그렇게 따지면 바울도 황제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서 자신도 죽음을 당했는데, 그렇다면 그의 순교는 비성경적인걸까?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울의 의도가 그런 종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권력의 절대성 부여와 정치적 침묵주의(Political Quietism)”를 정당화 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서 13장은 단순히 국가의 폭력과 독재 앞에서도 침묵하라는 메시지로 좁게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권세가들을 향한 순종만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권세가들에게 권력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13장은 권력자의 통치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정당성을 도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13장은 권력에 대한 충성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권력이 원래의 목적을 벗어났을 때에는 통치의 정당성을 소멸시키고 저항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준다.
2. 롬 13:1 / 권력의 절대성을 주는걸까?
먼저 1절부터 보자.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이 말은 악용하면 권력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말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완전히 오역이다. 이 말은 권력의 절대성을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본문이다. 바울의 의도는 절대적 권력을 오히려 상대적 권력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황제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왕도 하나님 아래에 있는 상대적 권력에 불과하다 말이다.
원독자의 관점에서 보자. 당시 로마시대는 황제를 신으로 여기는 황제숭배 사상이 있을 때다. 질문을 던져보자. 소위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들”인 황제들 입장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바울의 로마서 13장 메시지를 그들이 좋아했을까? 아니면 분노했을까? 당시 모든 권력은 황제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던 로마의 황제 입장에서는 이것은 황제를 모욕하는 도전이었다. 말 그대로 권력의 근원을 권력의 변방으로, 권력의 수여자를 권력의 수혜자로, 권력의 왕을 권력의 종으로 바꾼 모욕이었다. 바울의 로마서 13장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황제숭배 사상을 향해 “신이라 불리는 황제여 그대들은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함으로써 황제를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반역'을 시도한 것과 같다. 로마서 13장은 로마인들이 생각하던 하늘과 지존을 황제에서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린 말이다.
중세이후 왕과 독재자들은 로마서 13장을 악용하여 절대적 권력을 얻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일본교회와 친일파에 경도된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 군국주의와 총독부에 충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데 로마서 13장을 이용했고, 해방이후에도 군사독재와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자리에서도 정치적 침묵과 독재 부역을 정당화하는데 로마서 13장을 악용했다. 하지만, 살펴본 받처럼 로마서 13장은 부패 권력의 바램과 달리 절대권력을 강화하는 의도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절대 권력인 황제조차 상대적 권력임을 명시하는 말씀이었다.
3. 롬 13:4/ 다스리는 자는 심부름꾼이다.
이제 4절을 보자.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4절은 권력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나온다. 4절은 권력은 군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즉, 국민 복지를 위해서 세워진 존재임을 밝힌다. 여기서 "사역자"는 원어적인 의미에서 “종”이라는 단어다. 왕과 같은 절대권력을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 시대의 로마 황제에게 치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여기서 절대적 권력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동번역은 4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즉, “네게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자"를 “너의 유익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번역한다.
결국 권력을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이 권력자를 세우시는 것은 “권력이 사적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적 유익 곧 공익을 위해 세운 존재다”는 의미이다. 고대 사회가 생각해 본 적 없을 가르침이다. “권력의 유익을 위해 백성이 존재한다”는 권력적 사고에 대해 “권력은 국민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던져 놓았다. 권력은 단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권력을 주었기에 칼을 사용하는 공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않고, 불의를 처벌하지 않고 복지를 시행하는 공익을 유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순종해서 안된다. 롬 13:1-7은 부패 관료와 독재권력을 향해 주어진 백지수표가 아니다. 공익을 위해서 주었더니 공공연하게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다면 스스로 그 직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사익을 추구하는 순간 공직은 스스로 존재이유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4절은 “권력의 유익을 위해 국민이 존재한다”는 로마적인 개념을 오직 “국민의 유익을 위해 권력이 존재한다” 것으로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를 통해 공직은 국민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임을 천명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공직자들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또한 볼 수 있다. 공직자들 또한 왕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공직은 왕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이기에, 공직은 왕이 아니라 국민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 권세를 준 이유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불의를 처벌하고, 백성을 보호하며, 복지를 시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라는 도전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일때 순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도 순종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울 왕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왕으로 부르시는 역모를 사무엘에게 시키신 분이시다. 로마서 13장은 겉보기는 순종만 강조한 듯 하나, 내적으로는 로마적 공직 개념을 혁명적으로 뒤집고 있는 메시지였다.
4. 롬 13:5 / 순종할 이유는 불순종 할 이유가 된다.
5절을 보자.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여기서 권세에 순종해야 할 이유를 “양심에 따라”야 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모든 청교도 종교개혁가들은 이 5절의 "양심에 따라"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이유이면서 동시에 불순종할 수 있는 이유로 이해했다. 기억하자. "양심에 따라 순종하라고 했지, 양심을 거스르면서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놀랍게도 영국에서 피의 여왕 메리 (Bloody Mary)와 투쟁했던 청교도들은 롬 13장5절을 저항의 근거로 설명했다. 청교도 목사였던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는 웨스터민스터 교회 총회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런데 그들이 불법적인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을 명령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롬 13:5에 근거하여 양심에 따라 불순종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인해 청교도들은 이 미국 땅에서 영국에 불순종하고 무력저항이 포함된 독립운동을 일으켜 미국을 건국한 것이다.
사무엘 러더포드 (Samuel Rutherford) 는 스코틀랜드 청교도 목사로 <법과 왕> (The Law and the Prince) 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왕도 법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절대 권력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직접 주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사울과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사무엘이 기름을 붓고 난 이후 백성들이 동의할 때까지 왕이 되지 못했다. 다윗도 동일하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그는 사울이 죽고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 일때까지 싸우고 기다려야 했다. 즉 왕으로 세워주셨지만, 백성들의 동의와 추대가 있었을 때 이스라엘의 1대, 2대 왕이 세워지는 과정을 거쳤다. 하나님은 “왕권신수설"을 “주권재민론”을 통해 실현하셨다. 이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이 투표와 추대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개인의 권리를 공직자에게 위임함으로 공직자가 "공권력(public power)"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즉, 국민의 유익을 위해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불의를 막기 위해 복지를 위해, 곧 공익을 위해 공직자를 세우고 이 일을 하라고 공권력을 위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과 공직자 사이에는 우리가 권한을 주는 대신, 공익을 추구하라는 계약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사회 계약 사상의 기초"이다. 그런데, 그 공직자가 이 계약을 어기고 불의를 행하면 계약을 어긴 것이 공직자이기에 국민은 공직자에게서 그 공권력을 소환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Recall, "국민 소환권"이다. 그런데 공직자가 군대를 동원하며 자기를 보호하고 공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버티면 국민은 "시민 불복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의 근간이 되는 것이 로마서 13장과 성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근대 민주주의의 사상상 기초를 누가 제시했는가? 바로 청교도 개혁파 목사들, 곧 사무엘 러더포드, 크리스토퍼 굿맨(Christoper Goodman), 존 낙스(John Knox) 같은 이들이 성경적 원리에 기초하여 설명했다. 이 원리에 따라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했고, 신대륙에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5. 의도적 오해에서 의도에 맞는 이해로
우리는 로마서 13장을 의도적으로 오해해 왔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거스르며 순종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오해 했기에 권력에 부역했는지, 권력에 부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해 했는지 그것은 하나님이 아실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의도적 오해를 넘어서 바울이 도전한 로마서 13장의 의도에 맞는 이해를 히야 한다.
교회와 국가는 영역 주권이 있고,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정상적 국가 기능에 간섭보다는 존중과 순종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떠나면 바로자아야 하는 것처럼,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떠나면 바로 잡아야 한다. 로마서 13장은 순종의 이유와 불순종의 이유를 정확히 보여준다.
세상 속에서 교회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적절히 해야 한다. 하지만, 순기능을 해야 할 자리에 역기능을 하고, 역기능을 해야 할 자리에 순기능을 한다면,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악기능’에 불과하다. 혼돈과 어둠의 시대에 로마서 13장을 아직도 의도적 오해를 시도하는 모습이 아프다. 의도에 맞는 이해가 깊어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