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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창 21:1-7/ 2013. 2. 17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웃게 하십니다. 웃게 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슬픔을 제거하시고 기쁨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하나님께서 한 여인의 슬픈 삶의 현실을 바꾸어 웃게 만드신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여인은 바로 사라였습니다. 사라의 삶은 여인으로서는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시집을 왔지만 여인으로서 누리는 큰 기쁨인 자식을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녀를 얻기까지의 오랜 동안의 삶은 여인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을 얻는다는 것은 여인으로서, 가정을 꾸린 자로서는 아주 중요하고 행복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자식이 없어 힘들어하는 가정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식을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가운데도 자식에 대한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
자식을 주신다는 것,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자손에 대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이런 복이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2번째 계명의 이행 후에 주시는 축복은 이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상징적인 의미의 복이 아니라 후손을 통해 주시는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쫓아 나선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자신은 이미 포기하고 그냥 넘겨버린 약속인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매번 그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확인해 주십니다. 창세기 15장에 가서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람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네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1-5) 자손에 대한 약속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다 결국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때 성급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대를 잇기 위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대를 잇고자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고 약속의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성급한 인간적인 판단을 통해 자식을 얻고자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둔갑시켜도 안됩니다. 제일 우리가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 의지와 판단은 유보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어려움이 임합니다. 몸종이었다가 아들을 가진 하갈의 교만한 행동으로 인해 사라의 가슴은 멍이 듭니다. 그 후에도 그 아들로 인해 나중에 아들 이삭이 태어남에도 여전히 갈등은 계속됩니다. 사라의 아들을 하갈의 아들이 놀리는 것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이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의 아들을 내쫓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갈과 그의 아들을 버리시지 않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후손과 이삭의 후손은 지금도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의 결과가 여전히 계속해서 갈등과 아픔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둘 사이에 평화가 존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실수를 한 아브라함에 하나님은 그의 나이 99세에 다시 나타나셔서 언약을 확인시켜 줍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한 지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 17:2)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후손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6-8)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이렇게 성경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출산하리요하고’(창 17:17)
이 말씀은 ‘하나님, 내 아내의 나이가 90세입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도 웬 참, 농담도 잘 하시네요.’ 이렇게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생각입니다.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냥 넘겨온 아브라함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농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그런 생각을 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19,21)
창세기 18:1-15은 다시한번 하나님의 자손에 대한 언약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가는 천사들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9-12)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웃음으로 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늘 마음속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요? 이미 그들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믿지 않는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도 어의가 없어서 웃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상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그 약속에 대해 마음으로 이미 포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하나님은 이토록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대해 왜 이렇게 관대하십니까? 믿음없는 대로 살게 하다가 망하게 하시지 왜 이렇게 집요하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각인시키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 완전한 그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그를 택하셨음을 보이시고 그들로 약속의 땅과 자손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참으시면서 그들에게 각인시켜 주시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강조해서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곧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내하심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1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창 21: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짐을 여러차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본인이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이 하신다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지 25년만에 모든 약속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창 21:5). 이 때 사라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사라가 웃게 된데는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의 웃음을, 기적과 약속성취를 통해 진정한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순간부터 사실상 25년동안 하나님을 믿고 의지적으로 따르고 순종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가정에서 가장 큰 약속인 자손과 자녀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의심하면서 비웃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의 생각을 의지하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큰 믿음으로 의지하고 나아가지만 반대로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신뢰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큰 일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좇았는지는 모르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앙적인 태도를 견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의 웃음에 대해 예리한 칼을 대셨고 사라가 이삭을 가슴에 안은 후에야 비로소 그 입술로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고 고백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웃음’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을 농담으로 웃어버리고 받아들인 그녀에게 진정한 웃음으로 갚아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불행을 바꾸어 행복한 웃음으로 살도록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한 사람을 웃게 만들기 위해 긴 시간을 씨름하게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 사라는 복받은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비숫한 경험을 한 여인이 또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그녀 또한 자식이 없어 슬픔가운데 지내던 중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귀한 아들 사무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 1:19-20)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하나님이 생각한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기억에 남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듯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확신하십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도 닥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가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경배는 슬픔이 변하여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경배였습니다(삼상 1:28). 바로 자식을 통해 웃음과 기쁨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 원수들의 죽음의 협박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포로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을 소개받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화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2)
부림절은 슬픔이 바뀌어 구원과 기쁨을 경험한 유다인들의 해방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한 죽음의 슬픔을 변하여 구원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보았던 제자들에게 고난주간의 금요일과 토요일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어! 우리 주님과 함께 시간들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어. 다 끝났다’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 그들의 절망과 슬픔은 사라지고 부활의 기쁨과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경험하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슬픔을 제거하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 기쁨을 우리는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재림의 주님이 오시는 날에 그러한 기쁨을 다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
시편의 시인들은 분명히 이점을 고백합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드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0-11)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셨도다’(시 118:15-16)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에는 늘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없는 자리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의인들과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의 삶의 현격한 차이점을 말해 줍니다. 슬픔과 기쁨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슬픔을 변하여 찬양과 감사의 노래가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슬픔과 절망의 땅은 마귀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웃음에 대한 효과
1. 웃음은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
우리 몸에는 내장을 지배하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 등 두 가지 자율신경이 있다. 놀람, 불안, 초조, 짜증 등은 교감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심장을 상하게 한다. 반면 웃음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며 몸 상태를 편안하게 해 준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 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도 예방해 준다. 특히 배가 아플 때까지, 눈물이 나올 때까지 크게 웃으면 스트레스가 진정되고, 혈압이 떨어지며 혈액순환이 개선된다.
2. 웃음은 암도 물리친다.
웃음은 병균을 막는 항체인 인터페론 감마의 분비를 증가시켜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주며 세포 조직의 증식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18년간 웃음의 의학적 효과를 연구해 온 미국의 리버트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에게서 피를 뽑아 분석해 보면 암을 일으키는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킬러 세포(killer cell)가 많이 생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3. 한 번 웃음은 에어로빅 5분 효과
웃음요법 치료사들은 사람이 한 번 웃을 때의 운동 효과는 에어로빅 5분의 운동량과 같다고 주장한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사람이 한바탕 크게 웃을 때 몸속의 650개 근육 중 231개 근육이 움직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크게 웃으면 상체는 물론 위장, 가슴, 근육, 심장까지 움직이게 만들어 상당한 운동효과가 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웃을 때는 배꼽을 잡고 크게 웃는 게 좋다. 20분 동안 웃는 것은 3분 동안 격렬하게 노 젓는 운동량과 같다.
웃음에 대한 많은 명언들이 있습니다.
웃음은 의심을 녹이며, 편견의 벽을 허물며, 사람에게 편안함을 준다.
웃음은 면역계를 강화시킨다. 웃음은 원만한 성품의 필수 조건이다.
웃음은 높은 혈압은 내려주고, 낮은 혈압은 높여준다.
웃음은 소화를 돕고, 노폐물의 제거를 돕는다.
웃음은 침울감에 대한 특효약이다.
웃음은 ‘아토피’를 치유케 한다.
웃음은 조깅의 효과가 있다. 일종의 ‘내적 조깅’이다.
웃음은 감기를 예방케 하고, 치료도 해준다.
웃음은 암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웃으면 살도 빠진다.
웃으면 장수한다. 여자들이 남자보다 7년정도 더 오래 사는 것은 여성들이 남자보다 더 잘 웃기 때문이다.
웃음은 심장을 부드럽게 안마해 주어, 혈액 순환을 돕는다.
웃음은 긴장을 풀어주고 친근감을 주어 많은 친구를 사귀게 도와준다. 맑고 진실한 웃음은 자신이 선한 사람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솔선해서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겸손해 보인다.
웃음은 전염된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웃음이 건강에 특효가 있다는 통계를 보고서, ‘미소요법’또는 웃음치료’라는 용어들을 자주 듣는다. 웃음은 통증도 완화시켜 주고, 정신 질환도 치유케 해 준다.
한 의학 잡지에서는 웃음은 장수의 비결’이라고 강조하였다.
웃으면 복이 온다. (笑門萬福來) 웃으면 젊어진다. (一笑一少)
웃음속에 칼이 있다. 경계해야 할 웃음... * 비웃음은 절대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이다.
웃지 않는 자는 장사를 하지 말아라. - 중국 속담-
웃음은 최고의 마케팅이다. 웃음은 성공의 열쇠이다. 웃으면 예뻐 보인다.
웃음도 일종의 꽃, 웃음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사람뿐이다.
웃음은 가정을 밝게 해 주는 태양과도 같다.
웃음은 세계 공용어와 같다.
봄에는 꽃과 함께 웃고, 여름에는 물과 함께 웃고, 가을에는 열매와 함께 웃고, 겨울에는 눈과 함께 웃자. 웃음이 보약보다 좋다. - 동의보감 -
15초 웃으면 이틀 더 오래 산다. - 미국 의학자의 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나,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17:22)
*월요일- 원래대로 웃자.
*화요일- 화통하게 웃자.
*수요일- 수수하게 웃자.
*목요일- 목 터지게 웃자.
*금요일- 금방 웃고 또 웃자.
*토요일- 토실토실 웃자.
*일요일- 일어나자 마자 아침부터 웃자.
성도들은 웃는 사람들입니다. 그 웃음의 이유와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웃음을 찾고 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을 경험한 자는, 하나님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자는, 이 땅에서 웃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웃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앞에서 웃는 웃음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우리는 활짝 크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 국민에게 큰 웃음을 주셨던 웃음 전도사 '신바람 박사" 황수관 박사(강남중앙감리교회 장로)님이 2012년 12월 30일 향년 67세로 오후 1시경 급성 폐혈증으로 별세 하셨습니다. 평생을 함께했다는 조남수 목사는 “‘신바람 웃음 전도사’ 황수관 장로님은 5대양 6대주를 순회했던 인기 강사였지만 성도가 10명이 못되는 작은 교회도 기꺼이 달려가 행복과 기쁨을 나눴던 진정한 전도자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들 황진훈 씨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황수관 장로님, 당신은 아내에게도,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도 늘 웃음으로 대해 주시던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라며 고인을 회고했습니다. 생전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왕성한 활동을 해온 신바람 전도사였던 황수관 장로는 형제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상 '건강'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최윤희라는 분은 행복전도사로 통합니다. 외환이후에 많은 국민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었던 분입니다. 평소 그녀는 평소 책과 강연 등을 통해 대중에 '긍정의 힘'을 전했고 만나는 이들에게 행복에 대한 강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그녀였습니다. 2010년 10월 7일에 2년간의 투병생활로 갖은 고통을 겪고 있던 가운데 마지막을 자살로 삶을 마무리한 행복전도사로 소개된 최윤희씨의 삶은 많은 이들을 혼란케 하였습니다.
< '행복전도사' 최윤희(63)씨 유서 전문>
떠나는 글...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밧데리가 방전된 거래요. 2년 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 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 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 신고, 추적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서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2010.10.7 (봉투 겉면에 적은 글)
완전 건강한 남편은 저 때문에 동반여행을 떠납니다. 평생을 진실했고 준수했고 성실했던 최고의 남편.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저는 두 분의 삶을 비교해 봅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는가? 죽음이라는 것이 그들모두에게 주어졌지만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웃음을 주었던 분에게 더 마음을 두고 싶습니다. 두 분의 삶은 대조를 이룹니다. 끝까지 웃음을 잊지 않았던 분과 결국 인간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가운데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해버린 분으로 기억이 될 뿐입니다. 행복을 위해 몸부림치며 강한 믿음으로 노력해왔던 인간의 노력은 허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신앙인의 삶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결국 우리의 참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은혜를 통해 웃으며 사는 삶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이며 기쁨이라는 믿음입니다. 또한 성도라면 내세를 보장받았기에 더더욱 더 웃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웃게 되길 축복합니다.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웃음이 충만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라가 그의 삶을 통해 마지막에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웃게 되었을 때 그 웃음을 통해 주변의 다른 이들도 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다른 분들이 웃게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웃음을 그들도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는 자마다 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의 여러분의 웃음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염되어 그들도 복음을통해 웃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가운데 머무르게 되길 소망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그런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축복입니다.
웃음전도사가 되십시오. 복음의 전도사가 되십시오.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웃음을 소개하고 절망과 고통, 슬픔가운데 있는 저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웃음으로 충만케 되는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 한번 웃어 보십시오.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크게 웃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