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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채무-예속과 토지에서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권리의 상실에서 부터의 자유에 기초한 사회갱신 의식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경제적 질서를 되찾았다. 이런 전통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가치에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신약과 구약의 틀을 규정했다.
빚을 면제하고 민중들의 생계수단을 복원한다는 이 아이디어는 2000년간이나 청동기 시대 메소포타미아의 보수적인 전통이었다. 근동의 보병들과 생산 기초를 이루었던 농촌 가장들의 자급자족이 보존되었다. 고대에는 제약되지 않은 부의 추구는 지탄받았다. 진보의 관념이 농부들의 토지와 개인적 자유들을 박탈할 수 있는 부자들의 자유를 함축하게 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다.
이들 법들은 예수가 나자렛의 회당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신전들을 접수한 환전상들을 비난했을 때 그의 근거가 되었다. 중세시대 스페인에서도 희년(he Jubilee Year)의 전통은 Maimonides와 Ibn Adret에 의해 살아 있었다.
기원전 2400-1600에 걸치는 청동기 시대 근동의 왕들의 선포에 대한 최근의 발견들은 이들 법들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칙령은 빚을 면제하고 , 채무-종들을 해방시키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토지를 상실했던 경작자들에게 그 토지를 돌려주었다.
바빌로니아의 법적 전통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언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들은 없다. 아마도 바빌로니아 유수(586-539 BC) 동안에 이 청동기 시대 유산들의 많은 것을 재발견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610 BC에 예루살렘의 신전들을 혁신하던 사제들에 의한 신명기( Deuteronomy ) 두루마리의 재발견과 함께 요사야 아래에서 가속된 이자 대금업과 지주제의 경제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깨끗한 판(Clean Slates)는 너무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왕의 칙령(simdat)”과 동의어가 될 정도였다. 이것은 또한 모세5경에서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모세의 전통에 의하면 이 법들은 주에 의하여 성약(sacred compact)의 입부로서 이스라엘 인들에 의해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은 토지를 자유로운 농톤 사람들을 지탱할 주의 선물로서 토지를 규정함으로써 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성약을 하였다. “토지는 영구히 팔릴 수 없다, 왜냐하면 토지는 나에게 속하고 너희들은 단지 이방인이며 손님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너희의 토지 재산에 대한 되찾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50년마다 그것을 원 경작자에게 돌려 줄 것이다(레위기, 25:23-28) 이스라엘의 채무 종들도 그 희년(the Jubilee Year)에 주기적으로 자유로워 질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주에게 속하기 때문이다.(레위기, 25:54)
아주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성경 역사가들은 이들 정책들이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에 비슷한 경제적 재조정이 수메르, 바빌로니아 그리고 그 주변부에 기원전 2400-기원전 1600까지 전통적이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왔다. 출애굽기의 성약 법(the Covenant Code)과 신명기의 7년마다의 해방 그리고 레위기의 성스런 코드의 희년들에 의해 옹호된 자유가 추상적인 문구가 아니라 농촌 사람들을 빚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토지들을 부재 유질에 의한 몰수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체적인 법적 관행이었다. 이 해방들을 이스라엘에서 혁명적으로 만든 것은 그것들을 지배자들의 손에서 떼어 놓아 신성한
민중의 계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가능한 많은 청중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극적인 이야기들과 전설들 속에 사회 행동의 법들과 의례 전통을 끼워 놓고 있는 유일한 복합체이다. 이러한 민간 전파는 알파벳 쓰기의 전파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그러나 최대의 혁신은 초기 근동 사회들에서는 신전의 사제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전례학 교본을 대중화 하였다는 것이다. 신명기 31:10에는 법들이 7년마다 빚을 면제시키는 해(shemitta)에 공공에게 큰 소리로 읽혀져서 민중들이 예속에서 풀려났음을 알게 하라고 적혀 있다.
주축시대가 청동기시대의 질서 선포를 왕들의 손에서 어떻게 가져갔는가?
채권자들의 권리와 사유재산이 공공 신전과 왕궁들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됨에 따라, 규칙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복원하는 정책은 전반적 사회 균형과 상치되는 부의 사적 축적에 길을 내주게 되었다. 경제적 자유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으로 환영받기는커녕 , 여태까지의 공유지와 공공 산업의 사유화는 많은 민중들에게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 채무 면제들(BC연대) Bronze Age Mesopotamian Debt Cancellations
(All dates are BC)
수메르(Lagash의 도시국가)Sumer (city-state of Lagash)
2400: Enmetena proclaims amargi upon winning regionwide suzerainty.
2350: by Uruinimgina, as part of his "reforms" upon becoming war-leader.
2130: by Gudea, upon rebuilding Lagash's city-temple.
Ur III
c.2100: The Third Dynasty's founder, Ur-Nammu, proclaims nig.?? (as part of his legal compilation?).
c. 2090: by his son, Shulgi.
Ashur
c. 1900: Ilushuma and Erishum proclaim andurarum, accompanied also in the 19th century BC by cancellations in its Cappadocian trade colony, Karum Kanesh.
The Isin and Larsa dynasties
1974: Iddin-Dagan, third ruler of the Isin dynasty, proclaims
nig-??, probably upon taking the throne.
1953: By Ishme-Dagan, fourth ruler, probably upon taking
the throne.
1934: by Lipit-Ishtar, fifth ruler.
1923: by UR-Ninurta.
1800: Rim-Sim of Larsa frees his realms’s debt-servants by
“purifying their foreheads.”
Babylonia
1880: Sumulael, second ruler of the Babylonian dynasty,
proclaims misharum.
1812: by Sin-Muballit. I
1803: again by Sin-Muballit.
1797: also by Sin-Muballit.
1792: by his son, Hammurapi, upon taking the Babylonian
throne.
1780: again by Hammurapi, after winning local victories.
1771: again by Hammurapi, after winning another military
victory.
1762: by Hammurapi on the thirtieth "Jubilee" anniversary of
his rule, after defeating Rim-Sin.
1749: by Hammurapi's son Samsuiluna, upon taking over the
throne from his ill father.
1741: again by Samsuiluna.
1711: by his son, Abi-Eshuh, upon taking the throne.
1683: by his son, Ammiditana, upon taking the throne.
1662: again by Ammiditana.
1647: again by Ammiditana.
1646: by his son, Ammisaduqa, upon taking the throne.
1636: again by Ammisaduqa (the longest misharum act on
record.
NUZI
1500-1400: Various rulers proclaimed shudutu debt
cancellations.
NOTE: Chronology of the dynastic rulers from J. A. Brinkman in Leo Oppenheim, Ancient Mesopotamia (1977), and of the early Lagash rulers from Joan Oates, Babylon (1979). Chronology of Babylonian debt cancellations from F. R Kraus, K?igliche Verf?ungen in alt-babylonischerZeit (1984), and Otto Edzard, Die `ZweiteZwischenzeit"Babyloniens (1957). See Bibliography.
Page 9
레위기의 핵심은 P("사제") 기록인데, 17장에서 28장까지를 구성하는 신성 코드(the Holiness Code )가 부록으로 있다. 그것의 법들은 경제 정의와 그것을 지원하는 순결 의식을 보존하기 위해 디자인 되었는데, 시내 이야기에 삽입 됨으로써 모세 율법에 흡수되었다. (구약성서 권두 5편The Torah는 모세의 5경으로 오래 동안 알려졌다.) 레위기와 신명기 법들에 대한 신의 재가는 빈번하게
나타나는 문구들에 의해 알 수 있다. “나, 주는 너의 신이다 ,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 노예의 땅에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자급하기 위해 데려 왔다.
The Holiness Code는 the Torah의 가장 고대의 부분과 최신의 부분들을 결합한다. 희년의 deror 천명까지 포함하는 등 그 뿌리가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까지 추적할 수 있는 많은 관행들을 보존하는 면에서 고대적이다. 신성한 법들을 단지 리스트 할 뿐만 아니라 (레위기의 처음 16장들의 초기 P-원천에서처럼) 그러나 그것들을 설명하는 전대미문의 혁신을 하였다. “개별 조항들의 이유들을 진술한데 덧붙여 , 이들 장들은 이스라엘 인들의 성스러움을 유지하려는 목적을 누차에 걸쳐 강조한다. 그리고 성스러움은 제례의 순결성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정의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레위기의 독려들, 무엇보다도 빚 면제를 다루는 독려들은 바빌로니아의 손에 의해 유다가 패배하기 전인 기원전 6세기에 활동했던 사회 선지자인 Ezekiel을 떠 올리게 하는 문구들을 사용한다. 유태 종교의 도덕적 가치들은 사제에 단지 근거한 것이 아니고, 더더구나 왕궁에 근거한 것은 아니고,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한 신성한
성약에 의해 민중 전체에 근거했다.
새로운 쐐기 문자 발견들로 근동의 씨줄날줄에서 발생했지만 , 기원전 1200년경에 청동기시대 사회들이 붕괴하면서 400년간의 암흑시대에서 발전된 부의 횡포에 대한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항의가 어떻게 성경의 법들이 신학적 수준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사야에서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회 선지자들이 번성했던 기원전 800-600 두 세기 동안에 그 문제가 전면에 부상되었다. 바빌론 유수(586-516) 동안에 그리고 기원전 444 후에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따라서 유태인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 아 온 후에 되살아난 유태교의 저자들은 구약성서의 처음의 5경 (the Torah 또는 Pentateuch)에 부재지주들로서
이득을 꾀하는 대 채권자들로부터 농촌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들을 짜 넣었다.
유태인들은 세속적 지배자들과 그들의 사제들이 후견하리하고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규칙적이고 보편적인 경제 갱신을 선포하는 신성한 협약에 묶였다.
청동기시대 지배자들은 주기적으로 “경제 질서와 형평성을 선포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의 리듬을 감독하여 태양신에게 봉사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러한 지배자들은 종교와 사제직을 점점 더 협소한 목적에 사용한 고전 귀족들에 의하여 내쫓겨났다. 이들 귀족들의 침범으로부터 민중의 복지를 방어하기 위해, 유태교의 저자들은 도덕적 질서를 그들의 회중의 손에 넘김으로써 민족 성약(national covenant)의 관념을 정식화 하였다. 이 대중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민법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유태 대중주의는 세속 권력의 고전적 위계질서들을 뒤집었다. 신전 내부의 귀족적 바리새 요소들이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걸쳐 자신의 이해를 내세웠지만,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사채업자들의 탁자를 엎고 떵에 형평성과 자유(deror)를 선포하겠다는 예레미야의 약속들을 새로이 설교함으로써 고대 윤리를 복원하려고 하였다. 기독교가 구원의 아이디어를 정교화 한 것은 채무 노예들의 자유를 복원하고 대지의 짐을 벗긴다는 비로 이 원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영혼을 구속함에 덧붙여 ,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동-신앙인들을 세속적 속박으로부터도 구속했다. Handel 이 1742년에 더블린에서 그의 메시아를 처음 공연했을 때, 그 공연이 채무자들을 감옥에서 풀러주는데 사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 사람들과 토지를 채무에서 구속하는 것은 구속의 가장 우선적이고 구체적인 형식이었다.
구약성서는 기원전 6-5세기에 그 최종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은 고전적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경제적 개인주의와 재산-추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많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지중해 지역들은 개인 빚을 면제하고 , 채무-종들을 해방시키고 경작자들에게 그들이 유질 채권자들에게 포기하거나 강박 하에 팔린 땅들을 돌려줌으로써 질서와 자유를 복원하는 왕들이 더 이상 없었다. 따라서 , 즉위하거나
그들의 재위 13년 차에 “희년” 기념식을 가질 때에 사회 질서와 경제 형평성을 선포하여 , 정의의 태양신들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지배자들의 우주론은 상속 귀족제와 토지의 부재 소유의 새로운 맥락 속으로 이식되었다. 왕들이 귀족들에 의해 전복되지 않은 곳에서는 , 그들은 통치하는 상원 가족들의 대표로 향동하든지(스파르타), 폭군이 되었다. 그 결과는 이자를 낳는 빚이, 남부 메소포타미아 중심지에서 전통적이었던 질서를 복원하는 왕의 길항력 없이 번져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의 선포는 부와 경제력이 수메르에서처럼 신전과 왕궁에 의해서 장악되지 않고 개인 가구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지중해 지방들에서 가장 약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이자를 낳는 채무와 이윤-추구 대규모 무역과 다른 형태의 사업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혁신되었던 곳은 수메르였다. 농촌 이자 대금업과 부제 채권자에 의한 공유지의 유질이 많은 농촌 인구를 채무 노예로 전락시킨 곳도 또한 여기이다.
청동기 시대 계획자들은 이런 경향들에 반대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배자들은 그들의
사회 구조를 자연의 리듬을 반영하고 , 경제적 균형이 군사, 금융 또는 환경 압력 하에서 깨졌을 때에 복원하도록 패턴 지었다.
최초 천년의 중반에 , 토지의 사유화-그리고 그에 수반한 많은 민중들의 채무-예속과 토지의 상실-에 대항하는 사회적 항의가 종교적 결렬에 의해 촉매 되었다. 기원전 800-600 사이에 . 이스라엘의 사회 선지자들은 강력한 묵시록적 상에 의거하여 , 전통적 근동의 신년 재질서화(풍년 의식들과 의식적 교접 또는 지배자들과 여사제들과의 “신성한 결혼”으로 가득 했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고, 시민들의 철학적 토론으로서도 아니고 신성한 계명으로서 경제적 갱신과 형평성을 옹호하였다. 사회 형평성 원리를 이렇게 종교적으로 포장함으로써 초기 가나안과 이스라엘을 형성하였던 근동의 유산이 변모되었다. 그것은 사회 혁명은 아닐지라도 문화적 혁명을 알렸다.
성경의 채무와 토지-보유 법의 중요성
구약성서의 최초 5경의 중요성은 기원전 5세기 말 경에 최종 형태를 갖게 되었는데, 이때는 아테네에서 그리스 민주주의가 전성기를 이룰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이 이야기들이 채무, 토지보유 그리고 채무 예속으로부터의 자유와 분리되어 왔는데 , 성서의 원래의 목적은 그것들을 종교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나중의 선지자들과 성경 편집자들에게는 , 가장 중요한 법들은 채무-종들을 해방시키는 신명기의 안식년(shemitta)과 빚을 면제시키고 50년마다 토지를 원주인에게 재분배하는 희년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 그리고 모슬렘 인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에 대한 안내서로 구약성서를 찾지만 , 이 경제적 구속은 유토피아적 감상이라며 거의 무시되어 왔다.
성서학자들은 오래 동안 초기 이야기들이 역사에 어떻게 근거한 것인지를 확인하거나 부정할 기록들이 없어서 고전하였다. 경제 법률들에 대한 혼란이 특히 심했다. 그들의 역사적 실재를 확인 해준 것은 청동기 시대 메소포타미아의 법적 선례들의 발견이다. 이 발견들은 최근의 성서 연구에 혁명을 가져 왔다. 참으로 , 근동의 법적 관례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아이로니컬한 것은 지금까지 가장 의심받아 왔던 성서의 이야기들-빚을 면제하고, 채무 종들을 해방시키고 원주인들에게 토지를 되돌려주는 법들이 가장 명백하게 기록된 청동기시대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 그것들은 이스라엘에서 보다 바빌로니아 핵심부에서 더 증언되고 있다.
BC444년에, 느헤미야(Nehemiah)는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바빌론의 유태인 관리로서 Artaxerxes 밑에서 성배 관리자의 직위까지 올랐는데,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그곳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빚을 면제하고 그 지역 채권자들에게 포기되었던 토지들을 돌려줌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할 때에 그는 필경사이며 그의 동료 편집인이던 에스라( Ezra)의 초안을 공고히 했는데, 에스라는 레위기의 신성 코드를 대지에서의 경제정의를 촉진하기 위한 주와의 성약이라는 아이디어로 재구성하였다.
이 성서의 새로운 해석자들은 이집트의 불공정에 대항하여 출애굽을 주도하였던
모세와 여호수아(Joshua)를 따라서 가나안을 정복하였던 이야기와 재판관에서 왕들로의 이행 이야기와 그 왕들의 타락으로 주가 이스라엘과 유다(Judah)가 아시리아인들, 바빌로니아인들 그리고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서 정복되도록 한 이야기들을 성직하였다. 이스라엘이 신에 의하여 처벌받은 이야기는 경제 정의 체제를 따르면 처벌받지만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받게 놔두면 처벌받는다는
우화로 작용했다. 토지는 공통의 복리를 위해 신탁된 것이지 경제적으로 공격적인 자들이 그들의 백성들에 대한 주인이 되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도록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I. 성경 법들에 대한 청동기시대 설정
미국의 자유의 종의 고대 의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람은 기원전 2400-1600년 사이에 이자를 낳는 채무가 쌓여 지급불능이 될 정도가 되었을 때 그러한 경제적 혼란을 되돌리는 왕들의 선포와 경제적 기록들의 보고를 남겼다. 쐐기문자 학자들은 오래 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성경의 관례들에 대한 열쇠를 발견하였다. 그 증거는 채무 예속과 토지의 몰수의 결과들을 되돌려 놓은 것은 경제적 “질서와 정의”에 대한 왕의 주기적 선포였다. 근동의 법정 소송의 기록들은 이 질서의 원상복구는 실제로 집행되었고, 경제 정의를 유지하는 그들의 맹세의 일부로서 지배자들에 의해 선포되었기 때문에 정혀 혁명적이 아니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한다.amargi 와 nig.?? in Sumerian, misharum in Babylonian, andurarum in Assyrian, shudutu in Hurrian
자유의 종은 레위기25:10의 인용문에 나온다: “모든 땅에 그리고 모든 거주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 수년 간 이 단어들은 방문자들에게 우리의 민주적 투표권과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미국 혁명의 슬로건과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암시해왔다. 그러나 레위기의 시 전문은 채무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50주년을 신성하게 하라. 그리고 모든 땅에 그리고 모든 거주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그것은 너에게 희년이 될 것이다l 그리고 모든 남자들이 그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독려한다.
토지들은 그 원주인들에게 되돌려지든지 모든 채무가 면제되었다. 이 50주년 일에
상징적으로 숫양 뿔이 울려 퍼짐으로써 , 희년은 채무의 누적적 악영향들을 없앰으로써 형평성 있는 경제적 균형을 갱신하였다.
레위기에서 ‘자유’라고 번역된 헤브라이어는 deror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셈족의 아카드어의 andurarum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그 어근의 의미는 흐르는 물이나 채무 때문에 종이 되었다가 가족에게 돌아가게 해방된 채무-종의 경우처럼 ,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기원전 2400에도 수메르 용어 amargi도 비슷하게
빚질 때 담보로 맹세되어서 채권자들에게 몰수되었던 엄마들(또는 딸들 , 또는 엄마들에 대한 친척들)이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럼에도,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이 단어들이 채무 면제나 경제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한 면제가 실제로 선포되지 않든지 또는 사회생활을 어지럽히지 않고는 최소한 집행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선입견이 있었다. 채권자-지향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들을 무해한 식으로 추상적 의미에서의 자유 또는 자유무역으로 해석하였다.
수메르의 amargi와 nig.?? 채무면제 2400- 2125 BC
오늘날에는, 과부들과 고아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인플레에 대한 반대와 연관 지어진다. 그러나 , 보호되는 과부들과 고아들은 운이 좋아서 연금으로 살든지 또는 그 소득의 구매력이 인플레에 의해 잠식당하는 채권이나 다른 블루칩 금융 채권들에 투자된 트러스트 펀드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상속녀들과 그 자식들은 은행, 보험회사 그리고 대형 기관 투자자들의 퍼블릭 릴레이션스를 위해 내세우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에는 대부분의 과부들과 고아들은 가난한 채무자들이었지 금리생활자들이 아니었다.
Enmetena는 기원전2404-2375의 Lagash의 지배자였는데, 그의 이웃 도시 국가 Umma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후에 2400 BC에 빚의 면제를 천명한 기록된 수메르 역사상 최초의 지배자이다. 그 후의 수많은 기록들처럼, 이 칙령은 그가 헌납한 지역 신전의 주춧돌에 새겨져 있다. 이 빚들은 주로 작물-임대나 다른 공공 징수원들에게 갚아야 하는 지불들이었다. 상업적 채무들은 그 칙령들에 의해서 영향 받지 않았다. 상인 채무자들은 빚이 면제되지 않았다.
우르의 제3왕조가 라가시의 왕조를 대체하다 2112-2004 BC
우주질서의 영원불멸의 일면인 kittum은 성경의 `met (from * amint)와 의미론적으로 같은데 Amen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지배자의 독립적 기능은 신적이든 인간적이든 misharum 즉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실행에 국한된다. 고정되고 아마도 아득한 영구한 정의의 규범을 복원시키는 이 경제 질서 칙령들은
개혁이 아니라 오래 동안 확립된 전통의 일부였다.
함무라비 왕조 지배자들에 의한 빚의 면제 1900-1600 BC
Misharum 법령은 경작자들을 채무 예속에서 풀어 주었다. 이것은 그들이 넓히기 위해 싸우고 있던 사회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게 하였다.
함무라비 법들은 기원전 1782 즈음에 새겨졌는데, 그 시기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진 비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법전(code)”을 구성하는 것으로 더 이상 기술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구속력 있는 법률이 아니라 모범적 판결들의 성격을 띠었다. 함무라비의 진정으로 구속력 있는 칙령들은 세금들과 농업 채무를 면제하는 정의와 경제 질서의 선포였다. 바빌로니아의 빚진 병사-농민들을 토지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채무자의 손에 영구히 들어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광범위한 토지-보유를 유지한 것은 이 misharum 칙령이었다.
바빌로니아의 금융 판을 깨끗이 하는 지정된 일자는 봄에 열리는 신년 잔치였다. 바빌로니아 지배자들은 “판을 깨뜨리는” 의식 즉 채무기록을 삭제하여 자연의 순리와 더불어 계절에 맞추어 사회를 갱신하는 의식을 감독하였다. 함무라비와 그의 동료 지배자들은 횃불을 올림으로써 이것의 선포를 알렸는데, 아마도 정의의 태양신 Shamash를 상징했을 것이다. 빚으로 팔렸던 사람들은 가족에게 돌아가게 해방되었다. 다른 채무자들도 모기지 담보권이 얼마이든 간에 다 면제되고 자기 토지를 다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아이디어는 정의의 태양신들이 지배자들을 그들의 행정관으로 추인하는 청동기시대 우주론을 반영했다. 바빌론의 태양신은 Shamash 이었는데 함무라비는 그로부터 법들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Shamash는 두 명의 자식들 kittu and misharu, "“바름”과 “정의”가 있었다. 태양신으로서 Shamash는 신년 축제의 보호자였는데, 신년축제는 청동기시대 최고의 태양 휴일이었고, 새 지배자가 즉위하여 형평성과 질서를 천명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시작하는 행사였다.
청동기시대 사회 재 질서잡기의 우주관과 신년 축제
함무라비는 1780,1771 그리고 1782년에 채무들을 다시 면제하였는데, 그러한 행사는 정복 전쟁을 수반한 것으로 보인다.
쐐기문자 학자들은 바빌론 신년 축제 때 행해진 왕의 경제사회적 행위들과 창조신화 사이의 평행성을 주목해 왔다. 창조신화는 공공에게 2번 큰소리로 읽혀졌다. 창조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의 관념은 물질과 생명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혼돈이 모양을 갖추는 것이었다. 창조 서사시의 마둑(Marduk)처럼 새 지배자는 일종의 혼돈과 마주쳐서 새로운 코스모스를 만들어야 했다.
지도 정신은 사회 정의와 결합한 주기적 자연의 재탄생-자연과 사회의 재생이었다.
어떤 신년축제들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새 지배자가 즉위하여 처음으로 태양신의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 사면을 선포하여 세계의 질서를 다시 돌려놓았을 때가 가장 중요하였다. 다른 중요한 행사는 새 신전 또는 기존 신전의 재건이나 증축의 헌정이었다. “신전의 개장은 신년 일에 행해졌는데, 새로운 시작이 새 삶의 흐름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함무라비 이후의 Misharum 법령들
Ammisaduqa (1646-1626)가 즉위할 무렵에는 misharum 법령들은 채권자들이 그 법령을 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자세해졌다. 전 상태의 이러한 주기적 복원들은 토지가 담보되거나 팔리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채무자들에게 양도될 때에도 그 채무자들이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웠다.
수메르의 amargi와 ng???, 아시리아의 andurarum , 바빌론의 misharum, 헤브라이의 deror 등등의 관념들은 혁신적 개량주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보수적인 의미-기존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복원하는 사회 코스모스의 의미에서 사회 정의를 나타낸다.
함무라비는 42년간 통치한 후에 1749 BC에 죽었다. 그의 아들 Samsuiluna의 편지가 말해주듯이, 즉위하면서 그는 그의 나라가 온통 빚에 쪼들리는 것을 알게 되고 왕의 소작인들에 대한 현물 지불을 다 면제시켰다. 그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세금을 감면하고 비-상업적 채무를 기록한 모든 평판을 부수라고 명하여
“대지의 질서(misharum)를 복원하였다.” 그의 즉위(두 번째) 해는 따라서 “Samsuiluna가 수메르와 아카드에 자유(amargi) 를 확립한 해 ”로 명명되었다.
그의 선포는 13년 전의 그러한 마지막 misharum 법령 이래로 축적되어 왔던 모든 농촌 채무들을 면제하였다. 함무라비는 지방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지지에 상응하여
상당한 경제 권력을 그들에게 이양하였지만, Samsuiluna와 그 후의 지배자들은 경작자들을 희생하여 이들 관리들, 상인들 그리고 다른 채권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서 이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전 상태(status quo ante )를 복원하지 않았으면 훌륭한 지배자들이 감독하도록 되어 있는 바빌로니아의 경제 코스모스 뿐만 아니라 사회 평온까지 흐트려 놓았을 것이다.
Ammisaduqa (1646-1626)가 즉위하였을 무렵에는, misharum 법령들은 채권자들이 그것을 회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아주 세밀해졌다. Ammisaduqa는
즉위하면서 그리고 다시 10년 후인 1636에 misharum을 다시 선언하였다.
그의 법령은 메소포타미아 지배자들의 그것 중 가장 길고 가장 상세하였다.
그것은 기록된 유일하게 완전한 mishaum 법령이고 Amorite 왕조의 마지막 주요 문서이다. 청동기시대 경제 코스모스를 이해하는 핵심 문서로서 그것은 기원전 18-17세기의 여러 타입의 금융 관계들과 토지 보유 조치들에 대한 지도를 제공한다.
Ammisaduqa의 지배 후에 어떠한 misharum 선포도 발견되지 않는다. 1595 BC에 바빌론은 이란의 산악 부족인 Kassites에게 들어갔는데, 이들은 1155 BC까지 거의 500년이나 지배했다.
그 당시의 속담들은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바빌론 사회가 얼마나 빈궁하게 되어 가고 있었는지를 반영한다. “강자는 그의 힘으로 살고 약자는 그의 자식들에 대한 대가로 산다.” 즉 채무 노예가 되었다. “부유한 졸부들은..재화를 산처럼 쌓으며 그의 재산을 몇 배나 증식시켰다.” “부자들은 도둑과 마찬가지로 빈자들에게 해를 가하고 화염과 같이 그를 몰살시킨다.”
경작자들의 토지몰수를 하여 hapiru가 되게 함
"정의와 바름"이라는 줄인 말은 “자유”라는 무해한 추상적 아이디어도 유토피아 철학의 다른 세계의 표현도 아니고 ,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 세계를 궁극적으로 집어 삼켰던 약탈적 경제 귀족주의의 공고화를 좌초시킴으로써 매우 구체적인 일반 자유를 갱신하려는 의미를 가진다.
기원전 2000년 직전에, 메소포타미아의 인종적 섞임은 도시들을 진입점, 신전들을 상업적 형평성의 후견자들로 형성하고 표음 쐐기문자(주로 이방인 이름들을 표기하기 위해) 같은 문화적 돌파구들에 대한 촉매 역할을 하였다.
토지들은 점점 더 많은 농촌 사람들에게는 닫혀 버렸다. 자유노동을 흡수할 만 한 어떠한 도시 산업도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을 떠나 hapiru가, 땅 없고 가진 것 없는 때때로 이주 계절노동이나 용병들로 일하던지 또는 단지 강도떼에 가담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집트와 그의 종자 축제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그들이 “Hallelujah”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그들은 바빌로니아 채무-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불러지던 의식 용어인 alulu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 의식은 면제된 개인의 머리에 기름을 붓은 후에 행해졌다.
우리는 설형문자에 대한 근대적인 이해를 로제타석에 힘입는다. 1799년에 나폴레옹의 나일 삼각주 원정 동안에 그의 군인들에 의하여 발굴된 로제타석은 13살 된 지배자 Ptolemy V (196 BC)를 기리는 3개 어로 된 세레모니 교과서이다. 그리스어, 설형문자 그리고 이집트의 민용 문자를 비교함으로써 프랑스의 상폴리옹은 그 고대 기록을 번역할 수 있었다. 그 이래로 “로제타석”이라는 용어는 퍼즐을 푸는 지적 열쇠에 대한 상징이 되어 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로제타석의 내용이다. 그것은 어린 왕에 의한 빚 면제를 기념한다. 그러한 선포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프톨레미에 의한 이집트의 정복 이전에는 파라오들에게는 전통적이었다. 프톨레미는 305 BC에 그의 왕조를 세웠다. 1세기 이상의 지배 후에, 프톨레미 왕조는 고대 전통으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Ptolemy V는 사제들에 의해서 “제우스/아몬, 태양의 아들의 살아 있는 형상”으로 환영받았다. 그 비문은 “그는 이집트 민중이 왕에게 빚진 채무들을 면제했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였다”고 기록한다.
바빌론 관례가 어떻게 성경의 채무 변제와 토지 재분배에 영감을 주었는가?
이스라엘인들은 바빌론으로부터 깨끗한 평판이라는 아이디어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 deror는 아시리아어 andurarum와 같은 어원을 갖고 바빌로니아의 misharum과는 어원이 다른 면은 있다. 최초의 전달 시기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관행들의 일반적 전파의 일부로서 청동기시대 동안에 있었고, 두 번째 전달은 1세기 반 동안의 바빌론 유수 시기 586-444 BC에 일어났다.
misharum/andurarum/deror의 확산의 매체 중의 하나는 바빌론의 신년축제였다.
그 영향은 너무나 만연하여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Hallelujah,"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그들은 바빌론의 채무-노예들을 해방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불러지던 의식 용어 `alulu 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utam ... ullulu 라는 용어는 전- 노예의 이마를 기름으로 깨끗이 하는 것을 지칭하였다.
II. 기원전7-6세기 채무 위기와 성경의 대응
여호수아 통치 기간 610 BC 동안에 신명기 두루마리의 발견
비슷한 채무 긴장이 예루살렘을 휩쓸고 있었다. 기원전 639년에 8살 된 여호수아는 유다의 왕좌에 올랐다. 그는 사회 선지자들 특히 이자 대금업과 그 동종 사회적 불의를 규탄하는데 앞장섰던 626-586 BC에 활동적이었던 예레미야에 연계된 조언자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사태는 610년에 신전을 수리하던 사제들이
신명기의 기초가 된 고대법 두루마리를 발견했을 때 최고조에 달하였다. 26살의 여호수아는 어른들과 모든 사람들을 신전에 불러서 그들에게 법을 읽어주고 그 규정들을 큰 소리로 확인하라고 종용하였다.
바빌론의 영향
이 개혁들은 여호수아가 604 BC에 이집트 파라오 Neco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었을 때 중단되었다. 몇 달 후에 Neco는 여호수아의 아들 Jehoahaz를 체포하고 다른 아들(Eliakim)를 몸값과 교환하여 왕으로 삼고 이름을 Jehoiakim으로 변경하였다. 바빌론이 다시 침입하여 Jehoiakim은 봉신 왕이 되었으나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고 신전과 왕궁의 보물들이 약탈되었다., 다음 왕
Zedekiah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바빌론 인들은 예루살렘의 신전과 왕궁과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이것이 “유수” 시기이다. 586-539까지 지속되었다가 바빌론이 페르시아 왕 사이프러스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 끝났다.
백미는 그 후 150년간 가장 성공적인 유대인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적응하여 바빌론의 전통에 익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5경의 최종 편집을 형성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희년과 신명기의 7주년 채무-종의 해방의 계보는 아마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법들과 우주론적 상 그리고 그들의 대수적 수비학은 수메르 시대까지 올라가는 바빌론의 전통을 반영한다.
444년의 느헤미야의 채무면제
느헤미야는 그의 채무 면제와 그와 연관된 개혁들을 에스라의 종교적 분리주의에 연계시켜 유태인들이 다시는 그들의 과거 즉 야훼와의 성약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기원전5세기 중반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융성할 때에, 느헤미야라는 유태인이 Artaxerxes에 대한 성배 보유자의 지위에 올랐다. 느헤미야의 자서전에 의하면 페르시아 지배자는 그에게 예루살렘을 재건하라고 승인을 하였다.
느헤미야가 유다에서 발견한 상황은 바빌론 핵심부에서보다 한층 더 극단적이었다. 바빌론 핵심부에서는 노예제도가 소멸하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주요 노예 소유자는 신전들과 왕궁들이었다. 개인들은 그들의 진짜 노예들에게 그들 땅 한 조각을 내주어서 물리적 강제력을 사용하기보다 이자 대금업을 통해서 경제적 잉여를 뽑아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페르시아 인들은 전통적으로 채무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들은 왕궁의 이익보다
채권자-지주로서의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이방인 지배 계급의 손에 그들의 땅이 넘어가는 것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페르시아 종주국 시대에는 채권자들은 제3자에게 채무자를 노예로 팔 수가 없었다. 보통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antichresis(무임노동)을 제공하여 빚을 갚았고 그럼으로써 그의 자유를 보존하였다. 채무 잠보로 사람을 저당 잡히거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관습은 페르시아 시대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느헤미야 5:3-5에는 유다의 거주자들이 그들의 밭과 포도밭 그리고 집들을 빵을 사기 위해 담보로 잡히고 자식들을 노예로 위탁하고 그들의 자유를 되살 수 없었다고 기술된다. 444년과 11년 후인 433년에 느헤미야는 신명기와 레위기까지 포함하는 그의 유명한 개혁들로써 반응하였다. 444년 가을에 예루살렘의 벽을 완성한 후에 경작자들이 지역 향신들과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갚아야 하는 수확철 의무를 지고 있는 경작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토지를 상실하게 되는지를 느헤미야는 전한다. 이 결과를 막기 위해 느헤미야는 모든 채무를 면제시키고 토지들을 돌려주었다.
느헤미야는 사령관과 그의 참모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에 부과되었던 세금들을 면제하였다. 그의 휘하 식솔의 비용을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대었다.
느헤미야는 그의 융합 파(assimilationist party)의 중요한 동맹자이면서 예루살렘의 신전에 대제사장의 직위가 주어진 Tobias를 추방하였다. 비록 평인이었지만 , 느헤미야는 Tobias가 오염시킨 신전의 방을 정화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채무 면제에서 종교적 성약으로
지배자들이 경제 정의와 올바름을 보호하지 못하면 토지는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실될 것이다. 느헤미야, 에스라 그리고 다른 유태교 창시자들을 독특하게 만든 것은 사회정의의 정신을 성약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키기 위해 이 고대의 우주론적 전통을 새로이 짠 방식이었다.
느헤미야는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이교도 신의 경배를 유태인의 정체성을 묽게 하는 것이라 하여 죄악시 하였다.
성경의 전통은 기원전 9세기 말에는 이미 반-왕국이 되었다. 자유와 질서의 선포를 지배자들에게 맡기지 않고 성경의 입법자들은 그것들을 성약으로서 자동적으로 주기적이 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어떠한 그리스나 이태리 대중 지도자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하였다:그들은 깨끗한 평판을 유태교의 날줄과 씨줄에 짜 넣고 바름의 관념을 종교에 도입하였다. 대부분의 최초 cus년의 채무 면제들은 군사적 전술에 속하지 형평성의 정치 철학에 속하지 않았다.
7세기 그리스 폭군들은 지역의 구 과두 체제를 추방하고 토지를 재분배하고 빚을 면제해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이것은 명시적인 강령이나 시민 철학이 되지는 못하였다. “tyrant”라는 용어는 이 프로그램들의 반대자들에 의해서 조어 되었는데,
이 정책들이 민주적이거나 다른 정치 이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솔론의 시는 명시적 시민 프로그램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부자와 빈자들을 극단주의자들로 묘사하면서 , 그는 중도를 찾았다고 기술한다. 그의 채무 노역의 면제는 비상사태에 대한 반응이었다(비-그리스인에 대한 노예제는 유지되었다.)
모세 이야기는 건국 신화로 정교화 되었고 hapiru에 대한 기억과 이어져서 메소포타미아 도피자들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성경의 히브리 인들로 변모되었다.
이런 유의 행동은 기원전 5-6세기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모세가 입법자로 이해된 것은 이런 사회 입법의 어떤 것도 느헤미야 시대 이전에는 집행된 적이 없었다. 행동은 기존 귀족들에 대항하여 민중의 지지를 구하는 개혁자에게서 나왔다.
이사야가 몇 번 이집트에 대해 언급하긴 하지만, 그나 미가(Micah)도 출애굽 전통이나 심지어 모세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시나이 계시의 요체는 주가 모세에게 법을 주고 성약을 하는 것인데, 기원전 6세기 전까지는 이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 독재자들도 또한 그들의 시민 숭배를 개혁했지만, 느헤미야와 그의 동료 유태 개혁가들은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이룩했다. 그들은 빚을 면제하고 채무-노역자를 해방시키고 토지를 그 경작자인 소작인들에게 돌려주는 청동기시대 질서의 선포를 완전히 새로운 맥락에 놓았다. 이것들은 도덕적 안내지침으로서 종교의 경지로 승화된 민중주의 사회 프로그램들이 되었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순환적이고 수비적인 우주론을 초월하였다.
모든 종교는 밥과 현존하거나 희망되는 사회구조들을 신성하게 한다. 이것들은 “최초에” 신에 의하여 명해졌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 수천 년이 지나면서 질서의 이런 관념들은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 되고 깨끗한 평판의 주기적 재질서 라는 관념이 없어졌다. 그리스의 대중 폭군들은 낡은 귀족적 축제들을 덜 귀족적인 호머와 디오니소스적인 축제들로 교체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스파르타의 위대한 개혁자 왕들인 Agis와 Cleomenes는 반-신화적인 Lycurgus를 입법자로 다듬었는데, 이것은 후-추방 유태인들이 모세를 승화시킨 것과 흡사하다.
아놀드 토인비가 강조했듯이, 고대 정치 지배자/입법자/종교 창시자의 이런 이미지들은 후대의 재구성으로서 과두제에 의한 토지의 전유와 많은 인구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고 민중의 복리를 회복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려고 과거를 역투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국내적인 자기-보존 정책으로서 사회혁명을 후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빚 면제가 내국인들의 충성심을 얻거나 유지하려는 군사적인 전술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은 정의와 바름의 주와의 민족적 성약에 호소하였다.
재산의 채무자에서 채권자로의 시장 평형 이전과는 대비되는 경제 갱신의 성경 법들
출애굽기 21-23(성약서)의 법들, 레위기의 신성 코드와 신명기의 법들은 이자를 낳는 채무와 토지 보유 그리고 채무로부터의 경제 자유의 주기적 갱신을 그들의 경제 프로그램의 중심에 놓는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청동기시대 왕의 선포의 중심 요소: 행정 명령에 의한 경제 형평성의 주기적 복원을 간직했다.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은 시장이 사태를 해결하게 놔두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지배자들은 농민-경작자들의 권한을 박탈하고 빈자를 희생하여 부자에 이득이 되게 하고, 부유한 자들이 왕국에 대비 더 강화되게 하는 등의 역행적인 새로운 평형을 창조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결과는 농민 군대의 경제적 기초를
잠식하고 나라를 외부의 침입과 내부의 해체에 취약하게 만들 것이었다.
고전적 고대의 말기가 되자 귀족들은 너무나 강해져서 경제적 갱신을 막았다. 그 이후로는 사회들은 채무자들의 줄어드는 지불능력에 대해 채권자의 요구를 대치시키는 “시장균형(평형)”에 의존하였다. 이 균형은 전형적으로 재산 소유권 패턴 그리고 따라서 토지 사용의 이전으로 이끈다. 채무자에서 채권자로 소유권의, 자신의 식량을 재배하는 경작자들에서 방대한 토지들을 모으는 부재지주들에게로의
그리고 노예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수출 작물로의 토지 사용의 이전이 전형적으로 일어났다.
힐렐의 prosbul이 어떻게 권력을 채권자들과 담보권자들에게 주었는가?
힐렐이 prosbul 포기를 유태교의 일부로 확립했다는 사실은 고대를 암흑시대로 휩쓸고 갔던 사유화의 물결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멀리 끌려갔는지를 보여주었다.
근동에서의 채무 종들과 토지를 채무에서 풀어주는 것의 신성함은 지위 상실을 영구하게 만드는 로마의 원리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채무가 신성불가침이지 그의 면제는 아니었다. 기독교 시대가 되자 채권자/지주 계급은 너무나 강해져서 어떠한 대중 지도자도 더 이상 채무 면제에서 성공할 수가 없었다.
존재하는 사회 불의를 비난하는 것에서 구속과 사회적 형평성을 세속적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고 영적 은유로서 파악하여 영혼의 궁극적 재판에 대해 설교하는 천년주의자들에게로의 이전이 일어났다. 이 저세상주의는 성경의 법들이 실제로는 절대 실행될 수 없는 천상의 이상, 문학적 성격으로의 성경 해석에 의하여 보강되었다. 신성한 도덕적 가치들을 일상생활과 정치적 정책-결정에 적용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근동의 종교들은 신년축제와 “정의와 올바름의 지배자들”이라는 왕의 타이틀은 유지했지만 수메르와 바빌론 시대에 그렇게 중심적이었던 깨끗한 판 “질서 선포”는
빼버렸다. 그래서 그 축제는 맥락이 없어지고 영국의 즉위식 기념식과 로마의 승전 기념식과 같이 그 형식만 살아남고 경제 재질서화의 선포는 없어졌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유대교는 부자들의 대표-그 위대한 선지자들과 개혁가들이 기원전 8-5세기에 대항하여 설교하였던 바로 그 계급의 대표들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다. 신전 직위에서 배제된 에세네( Essene) 같은 약자와 빈자의 옹호자들은 주류와는 다른 분파를 만들었다. 농촌 빚을 면제하고 부재 소유자들에게 유질되었던 토지를 재분배하는 성경의 계명들은 랍비 힐렐의 prosbul, 채무자들이 희년의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합법화하는 법조항에 의해 대체되었다.
힐렐의 prosbul은 2천 년간의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용이 사유화되자마자 , 채권자들은 경제 질서를 복원하는 왕의 선포에서 자신들을 면제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000년 이래로 채권자들은 빚 면제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여러 가지 전략들을 구사하여 왔다.
수세기 동안 근동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선포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러한 시도들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기원전 최초의 천년에 왕들이 민중들이 아니고 귀족들과 동맹하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희년을 성약에 근거함으로써 반응하여 부유한 회피자들이 단지 시민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이단에 가까운 죄를 짓는 자들로 만들었다. 힐렐이 prosbul, 포기 각서를 유대교의 일부로서 확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사유화의 물결에 멀리 실려 갔는지를 보여주었다.
왜 그 전통이 상실되었는가?
첫째로, 고전시대가 되자 공공부문은 더 이상 주요 채권자가 아니었다. 기원전 최초 천 년간 부유한 개인들은 주요한 산업과 금융 기관으로서 왕궁과 신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기원전 3천 년의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의 빚들은 왕궁과 신전-그리고 점점 더 그들의 징세원에 대한 공납의 체불이었지만, 기원전 최초 천 년에는 빚은 고전적 이자 대금업을 나타냈다: 수지를 맞추지 못하는 경작자들과 다른 개인들에게 대여된 소액의 돈. 주로 무역 벤처에 대한 투자인 상업 대출은 그러한 질서 복원에는 언제나 제외되어 있었다. 단지 소비자 대출-즉 경제학자들이 비생산적 대출(이자 대금업)이라 부르는 것만이 책에서 지워졌다.
III.근대세계에서의 기독교적 시각
채무 면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누가복음4:17ff.에는 예수가 나사렛에 돌아온 후의 처음 행동이 기술되어 있다. 회당에 가서 두루마리를 받은 후에 그는 그것을 펼치고 이사야 61에 있는 문구를 읽는다. 그 선지자는 주가 “죄수들에게 자유 (deror)를 선포하고 억압받는 자를 풀어주고 주의 해를 선포하도록 ” 그를 보냈다고 선언한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그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왔다고 알린다.
빚 부담에 관한 더 좋은 구절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신적 예속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풀어야 할 진짜 문제로 빚 예속을 취급하면서 그는 은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속(redemption)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의 무자비한 하인의 비유(마태18)는 빈자들이 빚을 사해져야 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를 없게 한다. 베드로에게 그의 형제들의 죄를 사하라고 타이르면서 예수는 천국에의 허용은 자신의 생활을 얼마나 레위기 19:18;“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에 따라 영위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오늘날 황금률:우리가 그들이 우리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아야 된다는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자(the Redeemer)라는 타이틀은 채무자들을 채무-예속에서 구한다는 관념을 반영한다. 세속적 족쇄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영혼들이라면 , 채무자들에 대한 금융 권력은 채권자의 도덕적 선에 대한 궁극적 테스트를 제기했다. 요점은 채무자들과 다른 빈자들에 대한 자선은 그들의 채무를 사하는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대출은 하늘나라에의 입장허가에 대한 최고의 테스트로서 제시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동료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든지 또는 관대함을 베풀든지 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6:35에는 “되갚아진다고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라”는 권고가 인용된다.
예수는 예루살렘 신전의 금리업자의 탁자를 뒤엎는 그의 유명한 행위에서 유대 종교 가치들과 채권자들의 이기적 세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들을 극명하게 노정하였다. 그 이야기는 모든 4 복음서들(누가19, 마태21, 마가 11, 요한 2)에서 말해진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예수는 곧바로 신전으로 가서 환전상들의 벤치를 뒤엎고 그들의 돈 가방을 비워버린다. 그는 또한 동물들을 파는 상인들의 탁자도 엎어버리고 “그들과 양들 그리고 황소들을 신전 밖으로 내몰았다.”
4세기 전의 예레미야의 말을 읖조리면서 그는 “나의 집은 예배자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
예수의 예레미야 인용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그 선지자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이방인들과 고아들과 과부들 즉 가장 고통 받는 채무자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들의 땅과 신전들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주가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약자를 약탈하고 토지와 부를 독점하는 것은 주와 그의 공동체에 속한 것을 강탈하는 것이다. 적절한 계명은 8번째 계명이다: 도둑질 하지 말라. 대 부재지주들은 이스라엘인들의 토지와 자유 따라서 그들의 운명을 도둑질하고 있었다. 민중들이 주의 전신을 상기하여 사태를 교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민족적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첫댓글 어제 '자게판"에 실렸던 글, 너무 길어서 일단 미뤄뒀다가 오늘 아침 차분하게 읽어봤습니다. 내용과 길이도 그렇지만 옮긴이의 문제의식과 열정이 없으면 결코 쓰기 힘든 글이라 봅니다. 고맙게 잘 읽었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일전에 어느 신부님한테 두머 님이 댓글을 썼을 때, 그때의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 하는 글로 생각합니다. 전체 내용이 쏙쏙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핵심이 되는 내용이랄까, 신비하게만 바라보기 쉬운 성약과 관련, 그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해낸 저자의 성실함이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세속의 프로그램이 영적 은유로 탈바꿈하는 과정 같은 게 대표적이겠지요.
오늘날 울 나라에서 횡행하는 민영화의 본질도 실상 사유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면 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덮어놓고 미개한 문명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새삼 들게 하는군요. 저도 모세 5경을 읽을 때, '여기 뭔가가 있다' 라는 생각이 내내 들면서도 깨알 같은 '법조문'에 압도되어 건너 뛰곤 했는데 마이클 허드슨 같은 학자는 역시 다르네요. 참고사항: 어색한 우리말 표현이 군데군데 많이 보이고(영문이라 공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향동, 성직하셨다 같은 표현이 아리송하고요, 명사화와 피동태를 특징으로 하는 영문을 옮긴 데서 가독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여 두 세번 되풀이해 읽어야 하는 곳도 많으네요.
마이클 허드슨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시면 고맙겠고요, 출처를 여쭤봐도 되겠는지요? 가톨릭 수녀 소희숙 님도 이번 12월에 "희년"이란 저서를 내겠다고 하시던데 아직 못 봤습니다. 이 분, 미국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하지요. 잘 알아서 하시겠으나 종교 전문지에 글을 올리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건필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마이클 허드슨은 이번 금융 위기를 예측한 경제학ㅈ로 유명합니다
그의 사이트는 www.michael-hudson.com 입니다 그는 고대 중동의 빚과 이자 그리고 돈 전문가로도 유명합니다
이 이외에도 많은 고대 중동관련 들들이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