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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성균관대학 유림회관에서 발표할 원고를 올립니다. 많은 질정을 부탁합니다. 이 원고에 붙인 각주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경인 통신사 黃允吉의 역사적 재조명
정구복(鄭求福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1592년의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전쟁사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전후기로 나누는 분수령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치룬 국제전쟁으로 일본군의 침입에 명군의 동원되었고, 전후 7년간 연인원 110만여 명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 피해는 우리 측의 것이 가장 컸다. 15만 대군으로 침입한 일본군은 약 보름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보름만에 평안도 평양이 점령되고 7월 초순에는 함경도 최북단까지 점령되었다. 일본군을 막아낼 관군이 무참히 무너졌다. 명군의 참전과 의병세력,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 등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런 미증유의 전란은 10만 명의 포로화. 100만여 명의 아사자와 전사자가 나오고, 농토의 황폐화, 기록문화의 단절 등 엄청난 피해를 준 외침이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1~2년 전에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된 것이 오늘 주제로 다루려는 황윤길이 정사로 파견된 일본 통신사였다. 이를 학계에서는 庚寅통신사라고 지칭한다.
1590년 3월에 파견되어 1591년 2월에 돌아온 경인통신사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척된 듯 하면서도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 간 통신사행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척되었으나 황윤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통신사의 정사로 파견된 송당(松堂) 황윤길(1536~1592)은 역사적 인물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조선시대 많은 문무과 급제자를 낸 명문거족 장수황씨로 익성공 방촌 황희의 현손이고 그의 아들부터 파보가 만들어졌는바 그는 호안공파 치신(致身)의 증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자료는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졸년에 대한 기록조차도 아직 학계나 인터넷 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그의 묘지명이나 행장 같은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통신사의 부사였던 학봉 김성일(1538~1592)과 얽힌 사연이 아주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장수황씨 족보기록에도 황윤길 조에는 학봉의 이야기가 얽혀 있고, 최근에 문중에서 만들어진 그의 비문에서조차 학봉 김성일과의 깊은 사연이 실려 있음은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당대인들의 기록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얽혀져 나온다. 예컨대 김육(1580~1658)이 지은 해동명신록에서 김성일을 다루면서 황윤길을 언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사행 중의 일을 다루었기 때문에 의견이 달랐던 것을 기록함은 당연한 것이지만 오직 학봉 측의 자료만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황윤길 측의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중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이지만 본인은 기존 기록을 뛰어 넘는 해석을 하거나 상대방을 폄하하는 논지를 펴지 않겠다. 현재까지의 정보를 자료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면서 사림정권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지금까지 장수황씨 문중에서는 사행 후 정사의 국왕에 대한 보고가 부사 학봉과 달랐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황윤길에 대한 자료의 상호연관성, 신뢰도 등을 살펴 자료의 계통화(지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경력에 대한 연보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후일 이를 보완하기를 바란다,
2, 경인통신사 파견의 배경
15세기 말 서양인들이 인도항로의 발견으로 동양 중국과 일본에 온 것은 16세기 초 중반이었다. 포르트갈 사람들이 마카오에 온 이후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사 가기 위해 멕시코 은을 지불했고, 명은 16세기 중엽 세계은의 불랙홀이었다. 그 결과 명나라는 은본위 화폐제도를 실시하고 군대도 모병에 의한 급료병 제도로 바뀌었다. 일본에 서양인의 전래는 마카오를 가던 포르트갈 배가 풍랑으로 가고시마에 표류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서양식 총포가 전래되어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하는 상황이 벌여졌다.
이처럼 요동치는 세계사의 조류에서 조선왕조는 벗어나 그 정황을 까많게 모르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와 여진과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교린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서양이란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늦어진 것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지배층의 학문과 왕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은 배타와 독선이란 속성 때문에 외부세계에 개방적이지 못하고 쇄국으로 일관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실정은 조선 건국이 200년이나 되는 장기간의 평화기간을 거쳐 전쟁에 대한 개념이 거의 전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병이 2~3개월 교대로 근무하는 군사제도는 실제로 유명무실해졌고, 군역을 피하려고 주거지를 이탈하는 경우가 생기면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친척과 이웃사람이 피해를 입자 이들도 또한 도망을 처 한 마을이 텅 빌 정도로 군사행정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또한 농민에게 지방의 특산물을 거둬들이는 공납제도는 가장 무거운 짐이 될 정도로 증액되었거나 이미 특산물이 아닌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행정의 문란은 헁정의 실제 책임자였던 중앙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에게 일정한 녹봉이 주어지지 않고 부역으로서 담당하게 하여 부정부패를 국가에서 용인하였거나 방조했다.
지배층은 왕실과 결탁되어 자신의 이권을 추구하던 훈구파를 사(私)보다는 공(公)을 강조하고 체통과 예와 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이념이 16세기에 정착되어갔다. 성리학자들이 정계에 크게 진출한 사림정권이 선조 대 이후 형성되었다. 그러나 사림정권은 현실문제의 해결보다는 공론이라는 명분에 잡혀 안일무사의 정치를 지향했다. 공론을 좌주우지함에는 국왕의 결정이 중요했다. 즉 임란 직전의 상황은 중병이 시달리는 중환자와 같았다. 즉 와해직전의 왕조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상비군이 없었다. 선조와 지배층은 이런 상황에서 왕조로부터 이탈하는 민심을 가장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군웅할거의 무장 세력(大名)을 통합 복속시켜 국내를 통일함에 있어서 최후의 승자는 풍신수길이었고, 그는 최고의 군사권과 정치력을 장악하여 관백이란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 1585년이었다.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대마도에 복속한 것으로 잘못 알은 그는 1586년 조선 국왕이 공물을 가지고 와서 관백 취임을 축하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유구 국왕이 복속한 예에 따른 것이었다. 1597년 대마도주를 직접 만난 히데요시는 조선국왕이 입공 알현하지 않으면 응징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이 자신에게 예속된 국가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중간에서 어물쩡하게 일본국왕사라는 허위 특사를 보내 히데요시의 전쟁을 막으려 하였다. 그래서 대마도주의 家臣 橘康廣을 국왕사라 사칭하여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히데요시가 일본 국내에서 불법으로 지위를 찬탈하였다는 이유로 아예 거절했고, 히데요시는 이를 보고한 그를 사형에 처했다. 두 번째의 요구가 구주의 聖福寺 승 玄蘇를 다시 일본국왕사로 부사에 새로 임명한 대마도주 宗義智 등을 파견하여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2품 이상 관료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몇 년 전 전라도 損竹島에 왜구가 침입을 하였을 때 그 안내역을 맡고 일본으로 도망친 沙火同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고, 대마도주가 즉석에서 압송을 약속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1589년 11월 18일에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고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 제술관 차천로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다음해 1590년(경인) 3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1년 만에 돌아왔다.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하여는 하우봉교수의 치밀한 연구가 있으므로 이는 생략하겠다.
3. 경인통신사행
경인통신사 일행은 약 200명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 중에는 정사와 부사가 스스로 뽑을 수 있는 자제군관 2명씩, 서장관에게는 1명이, 심부름꾼으로 반당 1명씩이 정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글씨를 잘 쓰는 사자관(寫字官), 의료를 담당한 의사, 그리고 치악대 50여명으로 편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중 정사 황윤길이 대동한 군관으로는 그의 당질 황즙(黃葺 1560~1613)과 재당질 황진(黃進 1550~1593)을 대동했다. 두 군관은 정사의 신변보호를 맡은 중책이었다, 황진은 시호가 무민공(武愍公)으로 임진왜란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서 통신사 사행 중 돌아올 때 두 자루의 칼을 사 가지고 와서 일본군이 침략해오면 이를 쓰겠다고 하였고, 동복현감으로 있으면서 군사훈련에 혼신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군관으로 따라간 황즙은 7살에 부모를 잃어 당숙 송당 황윤길이 거두어 키워서 아버지처럼 여겼던 5촌 조카로서 그는 황윤길이 죽었을 때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치렀으며 아들이 없는 그의 제사를 받든 분이다. 임진왜란 때에 비인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고, 정유재란 때에 總管使 韓孝順의 청에 응하여 군무담당관으로서 활약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직은 맡지 않고 곡식 600석을 주선하여 내어 전라도 순천에 보냈고, 이로 인해 예빈시 직장직을 받았고 광해군 때에 충청도 巡察使 張晩의 요구에 응해 경복궁을 중건함에 철근 4000근을 바쳤다. 이로 인해 후일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그의 호는 송재(松齋)였다.
사행 도중 황진과 황즙은 단순히 친족으로서의 정사의 호위 임무만이 아니라 두 사람은 정사의 명을 받아 200명의 사행원의 안전에 힘쓰고, 당시 일본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바를 정사에게 보고하는 정보통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귀국 후 사신들의 귀국보고가 엇갈리자 이를 김성일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소장과 수군강화를 통한 왜군의 침입을 준비해야한다는 방책을 건의하려 하였으나 문중의 만류로 중단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무민공의 형 황적(黃迪1541~1591)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않게 하는 사람을 아첨하는 신하로서 군주를 속이는 죄(侫臣誣罔之罪)를 다스릴 것을 항소하였다가 전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에 화병으로 죽었다는 족보의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학봉이 사행 중 상사 송당 황윤길의 시에 次韻한 시가 17수나 학봉집에 전하고 있으며 그에 쓴 글(편지) 5통이 전하고 있다. 옛날에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짓는 차운의 의미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원시를 지은 사람을 존경하거나 시를 아주 좋아하거나 적어도 친밀한 관계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 그리고 제술관으로 뽑힌 황윤길, 김성일, 허성, 차천로는 당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점이 공통되고 모두 당시 사림의 관료로서 활약하였던 인물이었다. 학봉집에는 정사만이 아니라 서장관 허성, 제술관 차천로의 시에 차운한 시가 수십 편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학봉집에 전하는 5통의 편지를 통해 정사와 부사 사이의 의견대립이 생기는 문제의 계기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의견이 대립한 문제는 대마도 국분사에서 도주 종의지에 대한 문제, 경도에서 악공의 연주요청, 사신단의 음식제공을 받은 것에 대한 문제, 국서전달 때 풍신수길을 국왕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국서의 내용에 대한 수정 요구의 문제 등이었는데 그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내릴 수 없으나 그런 견해 차이는 학봉의 성리학과 예학의 깊음, 일본의 소국시하고 야만시 하는 관점, 국가체통을 살리고 통신사의 앞으로의 관행을 수립함을 고려한 데 기인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장관 허성의 견해는 정사의 견해에 거의 동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사와 부사가 모두 정몽주와 신숙주의 사행을 흠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아마도 황윤길은 그들이 당시 해결하려고 한 점을 강조하였을 것이고 학봉이 이 시에 차운한 시를 보면 국체를 높인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아마 정사 황윤길은 당시 국가의 군주에 충성한다는 것보다는 국가적 현실문제의 해결을 중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김성일이 정사 황윤길에게 쓴 서신에서는 의견의 차가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정사의 처사를 잘 못된 것으로 써져 있다. 이는 그가 유교국가적 체통이라던가, 국서를 아직 바치기 전이라는 의례문제를 중시하지 못한 처사를 비판하고 있다. 김성일의 견해는 외교사절은 상호 교섭이라는 유화적 태도는 보이지 않고, 성리학적 예절론에 경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인 통신사의 목적과 임무에 대하여 다섯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1) 일본의 통일과 관백 즉위에 대한 축하, 2) 일본 정세에 대한 파악, 3) 국가의 체통과 국왕의 위광의 과시, 4) 문화의 전파(교류), 5) 피로인 쇄환 등이었다. 이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본과 평화관계를 정착시키려는 교섭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는 점이다. 통신사 일행은 이들의 임무에 어느 것 하나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할 수 없다. 통신사 파견이 대마도주의 중간 조작이었음을 찾아내지 못했다. 즉 조선국왕이 입조하라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통일과 관백 취임의 축하사절로 얼버무려 조선침공에 자신들이 동원될 희생을 줄이기 위해 히데요시의 침략을 늦추거나 막아보려는 계획적인 뜻으로 일본국왕사라는 허위직의 사신을 파견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대마도주를 포함한 사신의 안내역인 선위사의 임무를 맡은 소서행장은 정명향도(征明嚮導)하라는 히데요시의 주장을 征明假道라고 조작하였다. 통신사가 받아온 日本國書에 이미 명을 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그 진위파악을 위한 정보수집에 소홀하고 오직 국가의 체통만을 강조한 것은 사림정권의 기본철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사와 서장관 허성의 견해는 성리학에 이해가 없는 일본인에게 엄격한 예절의 강요는 외교 교섭상 무리한 것으로 보았다. 퇴계의 학문적 수제자인 김성일은 예학과 성리학 이론에 있어서 정사를 압도했다고 판단되며, 이런 견해 차이를 김성일은 정사 황윤길의 비겁함으로 보았고 그가 쓴 사행 중의 일기인 해사록」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정사의 임무는 국가의 체통을 위해 주장하는 김성일의 주장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신단 전원을 무사히 귀환시켜야 하는 총책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황윤길은 부산에서 그 결과를 치계(馳啓)하였고, 국왕의 접견 시에도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말했다. 김성일은 침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으며, 서장관 허성은 침략 가능성을 보고했다. 종래 김성일이 반대한 것은 당파가 달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었으나 같은 동인이었던 허성의 보고가 김성일과 달랐다는 점을 들어 이는 당파가 달랐던 데에서 그런 상반된 보고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되고 있다.
이런 상반된 보고는 그의 학문적 성격, 그리고 민심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였다고 하는 이유를 들고 있으나 일본의 사행 중 숙소(절)에서 나오지 않고 일본의 실정을 소홀히 하여 정보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유성룡이 후일 집필한 징비록에서 김성일에게 일본이 침략해오면 어떻게 할려고 했냐고 물었더니 김성일은 그는 장당할 수 없으나 황윤길이 일본군이 바로 뒤따라 쳐들어올 것처럼 이야기한데 대해 한 말이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민심의 동요을 염려하여 그랬다면 김성일의 보고가 정직한 보고라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김성일의 보고를 정식으로 채택한 선조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고가 다르면 이 문제를 가지고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하나 당시 정권을 담당한 선조는 무사안일을 원했음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선조가 히데요시의 인상을 질문한 데 대한 답변이 정사와 부사의 의견이 달랐음을 말해준다. 이런 차이는 보는 사람의 주관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신들의 보고를 들은 선조는 왜 그렇게 보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대화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년 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사 황윤길의 이런 보고를 先見之明으로 치켜세우는 족보의 기록도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차라리 정세판단을 정직하게 보고했다고 기술하면 좋을 듯 하다. 선조와 당국자들은 침입가능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 후 정직한 보고를 한 것이 일본에서 겁을 먹은 정사의 행위를 감추려는 것으로 보고 정국불안을 야기한다는 책임을 물어 황윤길을 삭탈관직하고 허성을 처벌했으며, 김성일은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에 승진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일본국왕사로 온 玄蘇를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간 오억령이 그로부터 얻은 정보를 그대로 치계하자 그를 좌천시켰다.
학계에서는 사신단의 보고가 있은 후 왜국의 침입을 대비하는 정책을 모두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김성일은 축성을 정지할 것을 제안한 글이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히대요시는 사신이 돌아간 후 그해 8월에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성을 쌓고 징집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침입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를 하지 않은 결과가 임진왜란 초기 부산진과 동래성이 몇 시간 만에 함락되고 경상좌도 수군이 물거품처럼 무너졌으며, 경상도가 초토화되고 일본군이 승승장구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가면서 그 전쟁의 재난에 충격을 크게 입은 것은 이에도 큰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4. 황윤길에 대한 자료 검토
그에 대한 자료는 사적인 자료와 공적인 자료, 그리고 제3자의 자료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찬 자료로는 황윤길 측의 족보자료와 사행록을 남긴 학봉의 학봉집 자료를 검토하고 관찬 자료로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살펴보고 제3자의 자료로는 비록 사찬자료이지만 당시의 역사를 쓴 재야사가들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사찬 자료
족보자료: 장수황씨세보는 첫 편찬이 1723년(계묘)에 편찬되었다고 하나 이 본을 참조하지 못했고, 이는 1935년(을해)에 편찬되어 석판본으로 간행된 세보에 그 서문이 전한다. 이후 60년만인 1783년에 후계묘보를 편찬했다는 후손 황경원(보국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 겸판의금부사 이조판서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의 서문이 전하고 있다. 1848년(무신 重刊本)에 후손이 보충되었고, 1907년(병오)에 중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을해보(1935)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2000년에 출간된 호안공파보를 이용하였다. 호안공은 익성공 황희의 아들 致身의 시호이고 그의 아들은 9명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황윤길의 가계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황희(翼成公) -致身(胡安公) - 事孝 -坦
-塏 - 允恭 -迪
-進
事敬 -憲
-愿 - 允恭(4촌 塏에게 立后됨)
-應 -允宕 -葺
-懲 -允中
- 允孚
- 允吉
족보자료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자와 호, 생졸연월일 그리고 혈연관계와 과거시험의 급제여부, 최종관직 과 묘소, 그리고 배우자에 대한 기록을 담는다. 1935년의 을해보에서 황윤길의 경우 자가 길재(吉哉)와 호가 송당(松堂), 딸만 있고 아들이 없으며, 통신사 정사로 가서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다고 하여 선견지명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졸년은 임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병조판서에 발령되었으나 사령장을 받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고 쓰고 있다.
2000년도 호안공파보의 족보에서는 오직 부사 김성일의 보고사항과 유성룡 등 조정에서 그의 보고를 신뢰하여 방어 준비를 모두 중지했고 그를 파직시켜 서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추가 되었다.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직을 받았으나 취임 전에 화를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파직되었다고 함은 당시 일본의 국왕사 현소의 접대를 담당한 선위사 오억령이 그와 대화하면서 일본이 명을 치겠다고 한 내용을 보고했다고 하여 좌천당한 조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국의 운영상 그랬을 개연성은 있다. 그리고 황진의 형 황적(黃迪1541~1591) 족보에는 당시 정국이 아첨하는 신하의 건의에 의해 일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을 폐지하였다 하여 그를 처단해야 한다는 항의 상소(抗訴)를 올려 전주옥에 투옥되었는데 황진이 급히 달려와 이를 해결하여 석방되었으나 그 화로 인하여 1591년 7월에 사망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사신의 귀국 후 귀국보고가 엇갈리자 이를 규탄하는 항소운동을 벌렸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는 황진의 행장, 신도비문등에 그가 한 것으로 기록되고 문중에서 말려서 이를 포기했다고 하였다. 형의 소식을 들은 그는 동복에서 급히 달려와 해명하여 형을 석방시켰다고 했다. 항소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할 수도 있으므로 황적의 족보기록이 황진의 이야기를 옮긴 것인지, 아니면 형의 일을 자기가 할려고 한 것이라고 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항소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자료는 1652년에 우의정 조익(趙翼1579~1655)이 쓴 황적의 동생인 무민공 황진의 행장, 송시열이 1673년에 쓴 시장(諡狀) 등에 김성일의 목을 베라는 소장을 쓰고 아울러 왜적을 수군으로 방비할 계책을 올리려 하였으나 집안에서 말려 올리지 못했다 한다. 그 행장에는 형이 감사의 막하에 있다가 변을 당하자 동복에서 급히 다달아 구했다고 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족보자료는 무민공의 자료를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는 한 이를 역사학계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 없다.
황윤길의 죽음에 대한 자료는 통신사행에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던 당질 황즙의 묘갈( 의정부좌찬성 이호민(李好閔1553-1534)이 지음)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비문은 그 안의 서술내용으로 보나 그가 죽은 직후인 1615년경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사의 군관으로 통신사행에 동행했던 황즙(黃葺1560~1613)의 아들 廷直이 아버지 비문을 이호민에게 청하면서 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황즙의 비문에서 황윤길이 서울 반송방(盤松房)에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반송방은 현재 서대문 밖의 천연동 일대로 추정되나 그 구체적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황윤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진년(1583) 봄에 죽어서 미처 장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왜적이 침입해 와서 그가 관곽과 의복을 준비하여 사잇길로 몰래 가서 장사를 지냈고 3년간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황윤길이 죽은 사실을 정확히 쓰지 않고 있는 바 이는 본인의 비석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그의 장례를 황즙이 주관하였다는 사실은 황윤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황윤길은 문집을 남기지 못했고, 자신의 묘에 넣은 묘지석이나 비문 등 사망에 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못하였다. 어떻든 확실한 것은 그가 죽을 때에 파직되어 관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임진왜란 발발 이전 즉 1592년 봄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족보에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다시 그에게 병조판서를 내렸는데 이미 죽어서 이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록에는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만약 족보의 이 기록이 신빙성을 가지려면 좀 더 구체적 자료의 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파직과 죽음에는 새로운 자료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사찬자료 중 김성일의 학봉집 자료가 있다. 그는 사신에서 돌아온 후 자신이 지은 기록으로 해사록(海槎錄)을 썼고 그 발문을 서인 택당 이식(李植 1564~`447)이 썼다. 이식은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도했고 임진왜란까지의 기사를 정리한 서인계 학자였다. 해사록은 학봉전집에 글의 형태별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학봉전집에는 사행 중 김성일이 상사 송당 황윤길의 시에 次韻한 시가 17수나 전하고 있으며 그에게 쓴 편지 5통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허성의 문집 악록집이나 차천로의 문집 오산집에는 통신사 사행 중의 쓴 시가 한 편도 전하지 않는다. 차천로는 김성일과 사자관과 같은 배를 타고 건너가 사이가 돈독했던 것 같다.
옛날에 시의 韻을 따서 시를 짓는 차운(次韻)의 의미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원시를 지은 사람을 존경하거나 시를 아주 좋아하거나 적어도 친밀한 관계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 그리고 문한관으로 뽑힌 황윤길, 김성일, 허성, 차천로는 당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점이 공통되고 모두 당시 사림의 관료로서 중요 인물이었다. 차운한 시에서는 황윤길의 원시를 찾을 수 없다.
학봉집에는 정사만이 아니라 서장관 허성, 제술관 차천로의 시에 차운한 시가 수십 편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학봉집에 전하는 5통의 글(書)을 통해 정사와 부사 사이의 의견대립이 생기는 문제의 계기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의견이 대립한 문제는 대마도 국분사에서 島主 宗義智에 대한 문제, 경도에서 악공의 연주요청, 수도 경도에 들어갈 때 사신의 복장문제, 국서전달의 문제, 그리고 국서의 내용에 대한 수정 요구 등이었는데 그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내릴 수 없으나 그런 견해 차이는 김성일이 성리학과 예학의 깊은 조예가 있었고, 그는 일본을 소국으로 보았고 야만시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대에 기인한다고 추정된다. 국가체통을 살리고 앞으로의 통신사 관행을 수립함을 고려한 데 기인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장관 허성의 견해는 정사의 견해에 거의 동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정몽주와 신숙주의 사행을 흠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아마도 황윤길은 그들이 당시 해결하려고 한 점을 은유적으로 강조하였을 것이고 김성일이 이 시에 차운한 시를 보면 국체를 높인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아마 정사 황윤길은 당시 국가의 군주에 충성한다는 것보다는 국가적인 현실문제의 해결을 더 중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사행 황윤길에게 쓴 서신에서는 의견의 차가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정사의 처사를 잘 못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는 그가 체통이라던가, 국서를 아직 바치기 전이라는 의례문제를 중시하지 못한 처사를 비판하고 있다.
2) 관찬자료
그에 관한 정보를 주고 있는 자료는 그가 과거에 급제한 방목류의 자료와 그기 관직생활을 기록한 편년체의 실록 자료가 있다. 그가 사마시에 합격하였을 알려주는 국조방목에는 그의 거주지가 한성 즉 서울이었음과 그의 호가 우송당(友松堂)이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호가 우송당이었다는 근거는 당시 자료에 송당으로 나오고 있어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실록 자료에는 광해군 원년(1609)에 총재관 이항복에 의해 편찬되기 시작하여 북인인 기자헌으로 교체된 후 8여년 만인 광해군 8년(1616) 8월에 완성된 선조실록과 그리고 이를 인조조에 수정한 선조수정실록이 있다.
선조실록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기록은 춘추관에서 준비해 놓은 자료가 전란 중 경복궁이 백성에 의해 불 질러질 때 모두 소실되었다. 그래서 실록 편찬 시에 자료를 주어모아 선조 25까지의 기록은 1년 자료를 1권으로 편찬했다. 선조실록의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는 사관을 지낸 사람들의 기억이나 자료 수집을 통해 새로이 수집해 보충해 놓은 것이다. 이에는 황윤길에 대한 활동에 대해 모든 것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자료가 보충된 것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고자 한다. 이들 사료는 귀중한 정보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에는 사실적인 내용과 평가적인 내용이 함께 곁들여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광해군 때 북인 기자헌의 주관으로 편찬된 선조실록의 부당성이 곧바로 제기되어 인조반정 후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 초기 편찬책임자는 택당 이식에 이루어지다가 그가 사망하자 김육에 의하여 편찬이 완료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시에는 재야의 기록을 널리 수습하여 기사를 보충했다. 경인 통신사의 기록은 주로 김성일의 해사록 자료를 취했음이 그 내용으로 보아 확인된다. 이식은 바로 해사록의 발문을 써준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더구나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로서 큰 공을 세웠던 인물로 선조수정실록에서 그의 자료를 많이 이용하였음은 당연지사였다.
선조실록이 이처럼 당시의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여 경인년 통신사행에 대한 기록이나 보고사항 등도 추후에 보완되었기 때문에 탈락된 내용이 너무나 많다. 황윤길에 대한 실록기사는 74회 나오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 이름만이 나오는 것이고 사관들이 기억하는 것을 임의로 적은 것이 많다. 그래서 병조판서직의 발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황윤길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죽었으므로 그의 졸년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김성일은 임진왜란 직전에 경상우병사에 발령되어 내려 가는 도중 선조는 사행시의 보고의 잘못을 추국하라고 명했으나 유성룡이 그의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옹호로 초유사에 임용되었다. 경상우도에서 전력을 다해 사림을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함에 큰 공을 세웠고, 1592년 10월의 김시민의 진주성 고수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충실하게 기술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의 공적은 사림의 탄탄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선조실록에는 그의 졸년 기사가 두 번이나 실리기도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까지의 내용은 전국의 재야의 기록을 수집하여 내용을 보충했다. 김성일의 해사록 자료와 징비록의 자료가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고가 되었다. 따라서 황윤길에 대한 평도 자연히 비판적으로 실리게 되었으며. 서인의 김육에 의하여 편찬된 해동명신록에서도 김성일의 기록을 중심으로 써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관찬 자료 중에 경주선생안에 황윤길이 통신사로 파견되기 직전 경주부 부윤으로 1588-89년 11월까지 재직하였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여 연보에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제3자의 기록은 재야사학자의 기록으로 조경남의 난중잡록,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사초, 단실거사의 임진록, 신흠의 상촌집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으나 아직 새로운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5. 실록에 보이는 황윤길의 관료생활
앞에서 선조실록이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가 실록편찬을 위해서 전임사관이 기록해 놓은 자료를 매년 연말에 연월일로 정리해 두는 시정기 자료가 경복궁 안에 있던 춘추관에 보존되었다. 이 모든 자료가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임진년 4월 30일 서울 시민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자 성난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 질러 춘추관의 선조 때의 시정기 등이 모두 불타 버렸음을 말했다. 그래서 이항복은 임란이 끝난 직후 사료의 재구성을 위해 사관을 지낸 사람들에게 기억을 통해 실록 편찬의 준비를 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선조 25년 이전의 자료는 광해군 때에 주어 모은 불완전한 자료이다. 선조 이전의 명종실록은 임진왜란 시 전주사고에 있던 왕조실록 한 부가 다행히 전해져 광해군 때에 4부를 더 인쇄하여 5부를 갖추어 놓아 우리에게 조선전기의 실록 자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에는 황윤길의 활동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자료와 기타의 보충 자료를 합쳐 황윤길의 관료생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명종실록의 자료
황윤길이 1558년 명종 13년 식년 진사에 합격하고 26세 때(156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직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 1566년에는 강원도의 재난을 당한 농작물상황 파악을 위해 재상어사(災傷御使)로 파견되었고, 다음해 감찰기구인 사헌부 지평에 승진하였다. 이 언관직에 임명된 것은 그가 사림의 관료로 활동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는 명종실록 편찬 시 기주관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그의 관직이 兵曹 正郞이었다. 이는 선조 때의 관력으로 무관인사에 중책을 맡았음을 알려준다.
2) 선조실록의 자료
황윤길은 선조 원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선조 6년(1573)에는 충청도 해운판관으로서 전라도에서 거둔 세곡을 운반하는 대책을 건의하여 좋은 평을 받았고, 홍문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50세 때(1585선조18년) 황주 목사로 나갔다가 출근 상태가 좋지 못하고, 부당한 세금을 거둬 백성의 원망을 샀다는 사헌부의 상언으로 파직되었다. 실록에는 기록이 없지만 경주선생안을 통해 1588년 경주분윤으로 임명되었다가 농작물 상황 파악의 문제로 다음해 11월 파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1월 18일 통신사 정사로 임명되었고, 현소에게 일본에서 사신의 접대 경위와 풍토병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사행의 건강 문제를 염두에 두었음을 말해준다. 통신사 사행 전에 그가 병조 참판직을 맡았다는 족보의 자료는 그가 통신사 정사에 임용되면서 주어진 직책이라고 판단된다.
6. 맺음말
황윤길은 장수황씨로 유명한 방촌 황희의 현손이다. 조선전기의 명문거족으로 훈구계열이었으나 명종 때 문과 급제를 통해 언관 직에 중용되면서 사림 세력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의 장기는 시를 잘 짓는 문인이었고, 현실정치를 중시한 관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경인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200명의 사행단을 이끌고 다녀온 후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보고했다. 이는 그의 자제 군관으로 따라간 당질 황진과 황즙의 보고를 들고 내린 결론이었다고 짐작된다. 서장관 허성도 같은 견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안일을 좋아하는 선조와 당시 당국자들은 일본의 침입의 가능성을 부정한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정론으로 택해 민심선동이라는 명목으로 정사는 파직을 시켰고, 김성일은 통정대부 성균관대성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전주에 살았던 황진과 그이 형 황적은 김성일을 처단하라는 상소운동을 벌리려 하였으나 당시의 정국의 추세에 밀린다는 주위의 만류로 성사되지 못했다. 선조 때 이런 정국으로 흐른 과정을 실록자료는 부실하여 정확히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김성일은 사행 중의 일기를 남겨 이 자료가 이후 사행의 중요 자료로 활용되고 이는 선조수정실록에 크게 반영되었다. 김성일은 성리학 이론과 예절의 문제에서 황윤길을 압도했고, 이후의 사림정권은 이를 숭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임진왜란이 사신이 돌아온 후 1년 만에 터져 엄청난 국가적 국민적 희생을 치렸다. 황윤길은 왜란 직전에 사망했고, 김성일은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우도에 내려가 의병세력의 규합과 민심을 안정시킴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전쟁의 상황을 선조에게 보고함으로써 사행시의 보고의 잘못을 덮을 수 있었다. 또한 황윤길의 군관으로 따라가 정보의 수집이나 사행단의 호위에 기여한 황진은 동복현감으로 왜군이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왜군의 침입을 이치전투, 웅치전투에서 막아내는 수훈을 세웠고, 1593년 4월 중순 서울에서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할 때 그는 충청병사였다. 그는 관군을 이끌고 6월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8일간 진주성을 고수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그는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올르므로서 장수황씨의 문중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중병을 앓던 조선왕조는 일본침략이 계기가 되어 사림세력이 의병활동을 통해 다시 활력을 찾는 항체 역할을 했다. 당시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여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사회적 기능을 상실했다.
당시 성리학은 군주와 지배층을 위한 통치이념이었다. 황윤길의 사행의 역할과 관점을 오늘날까지 성리학적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황윤길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율곡 이이의 현실개혁론의 입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군관 황진이 돌아올 때 보검 두 자루를 사가지고 오면서 항쟁의 뜻을 밝힌 사실은 이를 방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장수황씨 종중에서 황윤길의 문제를 이제는 김성일과의 관계만으로 보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당시의 정국을 높은 차원에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족보자료나 그에 대한 묘비 문에서 김성일과의 관계를 언급한 태도는 시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바이다.
부록: 황윤길의 연보
중종 丙申(1536)생(족보2000년 ) 자는 吉哉 호는 松堂(友松, 友松堂) 부 黃懲 모 韓씨, 처 김씨, 형 允中 1552년 임자 생원, 1560 별시문과 군수
23세 한성거주 명종13년( 1558)무오년 식년 진사
26세 명종 16(1561) 신유식년 문과급제
28세~ 31세 사간원 正言
31세 1566.12.7. 강원도 災傷御使
32세 사헌부 지평(1567.3.4.) 이상 (명종실록)
명종실록 편찬에 記注官(통덕랑 병조정랑)으로 참가
33세 (1568 선조1년) 6. 13. 예조정랑으로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한 假館官 12명 중 1명
38세 (1573 선조6년) 4.27 충청도 해운판관으로 전라도 곡식을 운반하는 계책을 냄
해운 판관(海運判官) 황윤길(黃允吉)이 조군(漕軍)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여, 충청도의 병선(兵船)에 실을 세미(稅米)를 호남(湖南)의 창고에서 차차로 옮기고, 또 염세포(鹽稅布)·재상 수속(災傷收贖)·노비 공포(奴婢貢布)를 쌀로 바꾼 것 따위는 사선(私船)을 삯내어 날라서 모자라는 것을 채우자고 하였다. 그 계책이 매우 좋으므로 삼공(三公)과 판부사(判府事) 이공(李公) 에게 두루 알리니, 다들 좋겠다고 하였다. 황윤길이 글로 답하여 알리기를 ‘조정(朝廷)의 첨의(僉議)를 얻어 조졸(漕卒)이 소생할 길을 얻는다면, 어찌 비직(卑職)이 터럭만한 책무를 조금 잘한 것일 뿐이겠는가. 실로 국가 백년의 이익이다.’ 하였다.
40세 (1575 선조8년 )12.22 홍문록 간택의 임무를 맡음 (3권을 9명이 맡음)
50세 (1585) 선조 18년 윤9월 11일 무신 황주목사에서 파직됨
사헌부가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유대수(兪大修)는 형벌이 잔혹하여 장하(杖下)에 죽는 사람이 잇따르고 있으니, 하루라도 관에 두어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황주 목사(黃州牧使) 황윤길(黃允吉)은 관사(官事)를 다스리지 않고 관아에 좌기하는 날이 매우 드문데다가 백성에게 부당한 세금을 징렴(徵斂)하여 원망이 길에 가득하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53세~54세 경주부윤: 무자(1588선조 21년)11.7일 형조 참의로 와서 기축년 11월 災傷으로 파거)(경주선생안 府尹선생안 242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2.
54세 1589년 11월 18일 임자 일본통신사 정사에 임명;
1589년 선조 22년 12월 3일 병자 현소와의 대화함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이 아뢰기를, "신이 객사(客使)를 만나 묻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에 통신사를 보내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 첫째는 파도의 험난함을 두려워서이고, 둘째는 해적의 환(患)을 염려해서인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 귀국 신왕(新王)의 신의를 중하게 여기고 객사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 백년 동안 폐지되었던 의례(儀禮)를 다시 행하려 하시니, 이는 성대한 행사이다. 우리가 귀국에 도착하면 반드시 국왕(國王)의 접대하는 의례가 있을 것인데, 그 절차를 우선 자세히 들을 수 있겠는가? 또한 팔방에 풍기(風氣)가 한결같지 아니하며 각기 쉽게 발생하는 병이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처음 귀지(貴地)에 도착하여 수토(水土)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을 것인데, 귀지의 풍기(風氣)에 의해 쉬 얻어지는 병이 무엇인가? 미리 약품을 준비하여 일행의 위급을 구제하려 한다.’ 하였더니, 현소(玄蘇)가 대답하기를 ‘폐방(弊邦)의 접대하는 의례를 지금 내가 정하기 어려우니 폐방에 도착한 뒤에 고하겠으며, 우리 나라의 풍기는 사람을 별로 크게 상하는 바가 없고 병의 발생이야 어찌 귀방(貴邦)과 다르겠습니까.’ 하였고, 부관(副官) 종의지(宗義智)가 통역을 불러 신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국왕(國王)이 보내 주신 물건이 비록 두 가지이나 국왕이 말[馬]과 매[鷹]를 좋아하니 이 물건을 얻어 국왕에게 드리고 싶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일본에 봉명(奉命)한 사신이 으레 당시 문사(文辭)에 능한 선비를 대동하여 어무적(魚無迹)·조신(曹伸) 등이 왕래하였다.’ 하므로 이번에 차천로(車天輅)를 대동할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대는 국사를 위하여 해외에 파견되었으므로 내가 진념(軫念)하는 바이니 잘 다녀오도록 하라. 또한 지금 일행 중에 아뢸 사람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아뢰고, 친계(親啓)할 일이 있으면 면대(面對)를 청하여도 좋다."하였다.
55세 1590 3. 6.통신사 정사로 200명을 이끌고 부산항에서 출발
1591년 2월 귀환
57세 임진년(1592) 봄에 사망
묘소가 호안공 묘소 아래서 최근에 찾아짐
1998. 그의 묘비문이 새로 지어짐
첫댓글 역사란 햇빛과 달빛 중 어느 것에 조이느냐에 따라정의와 불의가 갈라진다.
참으로 좋은 평가이십니다.
종중에서도 그 호를 우송당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좀더 상세한 문헌연구가 필요합니다. 15일 10시 성균관대학교 유립회관에서 발표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