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주의자인 내가 봐도 '불평등 조약' 우리 경제 '낚시 바늘 꿰인 물고기' 신세..." |
김하늘 부장판사 "한미FTA 재협상" 주장...판사들 100명 동의 '파문' 확산
|
"ISD(투자자국가제소권)는 사법주권을 빼앗는 조항이다. 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분쟁에 대해 국내 법원이 아닌 제3의 기관에 권리구제를 맡겨야 하는가? 왜 법원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을 포기해야 하는가?"
한미FTA 관련 판사들의 입장 표명에 대해 대법원이 11월 29일 '신중한 처신'을 권고했지만 판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번엔 수도권의 부장판사가 대법원에 한미FTA 재협상을 위한 TFT(태스크포스팀: 전담부서) 구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순식간에 100여 명의 판사들이 동조하는 등 파문이 일고 있다.
인천지법 김하늘 부장판사는 1일 법원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올린 글을 통해 "한미FTA가 불평등 조약일 가능성이 있고, 사법부의 재판관할을 빼앗는 점에서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라며 재협상을 위해 법률의 최종 해석권한을 갖고 있는 사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신을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소개한 김 판사는 한미FTA와 관련 "나의 입장은 처음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다가 최근 논란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계속되면서 내가 정작 한미FTA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한미FTA는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
김 판사는 토론 프로그램과 자료 등을 보면서 "한미FTA가 불평등 조약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되었다"며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는 신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1500페이지에 달하는 한미FTA에 배치되는 모든 법률과 하위 규범은 개정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무효가 되는 것"이지만 "미국은 불문법 국가로서, 한미FTA 자체가 법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서 통과시킨 이행법률만이 규범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한미FTA로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법률상 장벽은 제거되었는데, 미국의 장벽은 그대로 존속한다는 말이니, 바로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 아니고 무엇인가?"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한미FTA가 ▲ 네거티브 방식에 의한 개방(개방을 유예하거나 제한하는 분야만 협정에서 적시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완전히 개방하는 방식) ▲ 역진방지조항(Ratchet: 한 번 개방된 수준은 그 이하로 되돌릴 수 없는 제도) ▲ 간접수용에 의한 손실보상(상대 국가의 정책이나 규정에 의해 간접적인 피해를 입어도 보상해주는 방식) 등의 조항 때문에 한국에게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한미FTA 이행법률에서의 '역진방지조항'에 대해 "모든 시장에서 한번 개방된 수준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이하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며 "우리나라 정부가 그때 그때 경제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는 시장보호정책을 취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족쇄이고, 그 글자 본래의 의미 그대로 우리나라 시장경제를 낚시 바늘에 꿰인 물고기 신세로 만드는 조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ISD(투자자국가제소권) 조항이 사법주권을 침해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ISD 조항은 정부가 한미FTA를 위반하여 투자자에게 손실이 발생하게 될 경우, 그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이 아닌 세계은행 산하 ICSID라는 중재기구에 직접 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라며 "이것이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법주권을 빼앗는 조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는 조약의 해석에 관하여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권한이 있는 법원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을 포기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줄 것은 다 내주고 받을 것은 하나도 못 받아... 이해 어려워"
그는 한미FTA의 불공정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미FTA는 네거티브 방식에 의해 특별히 협정에서 유보하고 있지 않는 한 모든 분야에 걸쳐 무제한 개방을 하게 하고, 역진방지조항에 의해 우리 정부가 융통성 있는 시장보호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새로운 중소기업보호정책이나 환경보호정책을 하려고 하면 직접적인 손해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피해나 기대수익까지도 배상하도록 규정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ISD 조항으로 그 최종적인 분쟁의 해결권을 우리나라 사법부에게서 빼앗아 미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은행 산하에 있는 ICSID라는 중재기구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줄 것은 다 내어주고 받을 것은 하나도 못 받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을까?"라고 협상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를 방문하여 한미FTA가 비준 동의되더라도 위 ISD 조항에 관하여 미국과 재협상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권한을 갖고 있는 사법부가 어떠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판사는 "아울러 외교통상부에서 사법부의 재판권을 빼앗아 제3의 중재기관에게 맡겨버렸는데, 법원이 그에 관하여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해결 방안으로 "법원에서 한미FTA 재협상을 위한 TFT를 구성하여 여기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면, 국민들의 의구심과 사회적 갈등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이러한 저의 제안에 공감하는 판사님이 100명을 넘어선다면, 정식으로 대법원장님을 만나 한미FTA 재협상을 위한 TFT를 구성해 달라는 청원을 올리려고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상당수 판사들은 즉각 동의했다. 1일 오후 6시 현재 벌써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댓글로 동의 의사 표시를 함으로써 청원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대법원에 TFT 구성" 제안에 판사 1백명 동의
이번 사태는 애초에 <조선일보>가 페이스북에 올린 특정 판사의 글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고 문제삼아 촉발되었다. 그런데 이 사안은 보수언론으로부터 사법권 독립, 법관의 표현의 자유와 SNS(소셜네트워크) 사용 기준을 넘어서 이제는 한미FTA 의 불공정과 관련된 문제로까지 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다.
특히 한미FTA가 불공정하다고 비판한 김 판사는 스스로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밝힐 정도로 자신의 의사표현이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선 판사들 상당수가 TFT 구성에 동의함에 따라 대법원의 자제 권고가 무색해졌고, 보수언론의 기대와 달리 '소수의 편향된 판사들'이 아닌 다수의 판사들이 가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까지 이번 사태에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판사는 최은배 부장판사(인천지법)를 비롯, 이정렬 부장판사(창원지법), 변민선, 서기호 판사(이상 서울북부지법), 송승용 판사(수원지법)에 이어 김 판사가 6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