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성지순례 마지막 날이다. 오늘 계획된 순례 일정을 마치고 나면 저녁에 다시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 아쉬운 마음이 벌써 든다. 하지만 무사히 마지막 날까지 오게 된 것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첫 방문지인 성 바오로 대성당으로 출발했다. 순교한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바오로 대성당은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세워져 있다. 바오로 사도의 유해는 어제 방문했던 바오로 사도 참수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안치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이지만 로마의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아침 햇살이 비추는 성 바오로 대성당의 하늘과 정원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정원 중앙에는 성경과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석상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석상이나 그림에 거의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칼이 상징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가 선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의 칼이라고 표현하여 성령의 칼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칼로 참수를 당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정원은 성당을 포함하여 4면이 모두 웅장한 화강암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성당의 정면부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자이크의 맨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두 기둥이자 로마의 주보 성인들이신 베드로와 바오로가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어린양과 4 복음을 상징하는 4개의 물줄기를 나타내고 있고, 12사도를 상징하는 12마리의 양이 있다. 맨 아래에는 구약의 4대 예언자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당의 중앙문에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베드로 사도, 오른쪽으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 와서 순교를 당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행적들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문
중앙문 오른쪽에는 성 그레고리오 7세가 만들었던 것을 교황 바오로 6세가 청동제로 복원한 희년에만 열리는 커다란 성문이 있다.
성문
성 바오로 대성당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큰 성당이다. 성당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웅장한 규모와 엄숙함에 분위기가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성 바오로 대성당이 봉헌된 것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이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오늘날의 규모로 크게 증축된다. 그러다가 1823년 대화재로 성당의 3분의 2 정도가 파괴되었다. 화재가 난 후 교회에서 전 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아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서 다시 완성된다.
우리는 대성당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 베네딕토 경당에서 성지순례 마지막 파견 미사를 봉헌했다.
성 베네딕토 경당
김승호 요셉 신부님 강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을 찬양했던 성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얼마나 큰 사랑을 지니시고 그 사랑으로 많은 성인들과 함께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그 삶 속에서 내가 어떠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 안에 같이 할 것인지를 또한 찾았고 이제 그 찾은 삶을 우리 삶 안에서 그대로 드러내는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성지순례를 위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짜주신 여행사 이사님께 감사드린다. 또 그냥 단순히 있었던 일을 전달하는 인솔자가 아니라 영성적인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면서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준 현지 가이드 가브리엘 형제님께도 감사드린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고 바랐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축복으로 다가오는 삶이었다. 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셨는데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그분을 만났고, 그전부터 함께 해주시고 인도해 주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삶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감사드리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지순례를 통해 느낀 감동과 기쁨과 감사로 우리의 영혼이 무척 행복했다.
이제 그 행복을 가슴에 새기며 이제 우리는 더 기쁜 모습으로 오늘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해주시고 거룩한 삶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우리 순례를 그분께 봉헌하고 앞으로 새로 시작되는 우리의 삶이 그분 안에서 더욱 기쁜 삶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켜 가는 아름다운 축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청하자.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곳은 중앙 제대를 장식하고 있는 발다키노 아래쪽에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다. 1823년 대화재 때 놀랍게도 무덤이 있던 제대와 발다키노 그리고 아치와 몇 개의 모자이크는 타지 않았다.
발다키노, 쇠사슬, 무덤자리
그리고 중앙제단 아래쪽에 보면 바오로 사도를 묶었던 쇠사슬이 있다. 쇠사슬 아래에는 바오로 사도의 무덤(석관)을 발굴하여 순례자들이 사도의 무덤 자리를 유리판을 통하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
쇠사슬
쇠사슬 아래 바오로 무덤 자리
또 바닥에는 과거 바오로 사도의 유해를 안치했던 5세기의 바오로 성당 앱스 부분의 바닥 일부를 순례자들이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덮어 놓았다.
5세기의 성당 바닥
무덤이 있는 곳의 오른쪽에 365일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 등불을 볼 수 있다. 등불은 9세기 때부터 당시 교황의 주문에 의해서 이곳에 머물면서 성당을 관리하고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가 현재도 바오로 등불이라고 부르는 등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식 중 특별한 것은 성당 돌기둥 윗부분에 역대 교황님들의 얼굴을 묘사한 원형의 모자이크다. 동그란 메달 모양 안에 초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부터 시작하여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역대 교황들의 얼굴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에만 조명이 비치고 있다. 이것을 처음으로 제작했던 것은 5세기 성 레오 1세 대교황 때부터 시작을 했다. 1823년도에 화재가 난 이후에 복원되면서 원래 있었던 프레스코화를 모자이크로 대체해 놓았다.
성당 천장과 역대 교황님들의 모자이크
중앙 제대 뒷부분 후진에 있는 천장의 모자이크는 13세기 교황 호노리우스 3세(1216-1227)의 주문으로 당시 가장 유명했던 베니스의 성 마르코 대성당 모자이크를 만든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모자이크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자에 앉아서 축복을 내리시는 장면이고, 왼쪽부터 성 루카,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 성인이 묘사되고 있다. 좌우 양쪽 끝에 있는 종려나무는 순교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모자이크 작품에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포대기에 감싸여 마치 아기처럼 묘사되어 있는 호노리우스 3세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교황은 국가권력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강조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는 마치 갓난아이와 같이 묘사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에게 겸손함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중앙제대 뒷부분에 자리한 제대와 천장 모자이크
교황 호노리우스 3세
발다키노 오른쪽 회랑입구에 부활 촛대가 세워져 있다. 1170년 니콜로 디 안젤로와 바살레토의 공동작품으로서 현재까지 부활촛대로 사용하고 있다. 길이는 약 6m로 로마에서 가장 큰 부활촛대이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부조 조각을 볼 수 있다.
부활 촛대
중앙제단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는 4개의 작은 경당들(성 스테파노 경당,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경당, 성 로렌조 경당, 성 베네딕도 경당)이 있다. 특히 현재 성체가 모셔져 있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경당"은 폴레티(Poletti)가 건축한 경당으로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다가 기도할 때 십자고상의 예수님이 브리짓다 성녀를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예수회의 창설자이신 이냐시오 성인이 로마에서 첫 미사를 이곳에서 집전했다고 한다.
성체 경당
대성당에서 뒤를 돌아본 중랑구의 모습
이어서 도미틸라 카타콤베로 갔다. 카타콤베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약 250년간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서 지내다가 죽은 지하공동묘지이다. 종교의 탄압을 피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지하무덤 지역으로 숨어든 이유는 로마법에 묘지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사나 집회를 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60여 개의 카타콤베가 있는데 일반인에게 공개된 곳은 여섯 개의 카타콤베라고 한다. 그 중에서 유명한 곳은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베, 성 도미틸라 카타콤베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성 도미틸라 카타콤베다.
도미틸라의 카타콤베는 1세기 말에 시작되었으며, 4세기 말에 건축된 성 네리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성당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카타콤베는 황제 가문인 플라비우스가(家) 출신 귀부인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도미틸라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종교 벽화와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들을 볼 수 있다.
카타콤베로 내려가는 길
순교자 성 네리우스와 아킬레우스를 모신 묘 위에 4세기 말에 세워진 성당
무덤 위의 대리석 비문들
도미틸라 카타콤베에 도착하니 우리와 순례 온 다른 한 팀밖에 없어서 한가하고 조용했다. 카타콤베 중에서 가장 작은 카타콤베라고 하는데도 길이가 14Km이고 깊이가 30m나 되며 지하 5층 규모의 묘지다. 우리는 공개된 지하 1층 일부분만을 돌아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니 좁은 지하 돌벽에다 사람 길이만큼 서랍장처럼 층층이 직사각형의 구멍을 내어 시신을 안치시켰던 무덤이 보인다.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석관과 함께 매장하기도 하고, 정사각형 형태의 한 방안에 가족들을 함께 매장한 공간, 작은 어린이 무덤 등 크기와 형태가 다양했다. 지상과 가까울수록 더 오래된 과거에 형성된 공간들이고 지하로 내려갈수록 후대에 형성된 공간이다. 무덤이 더 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이 땅을 깊게 파서 지하로 계속 무덤을 확장 시켰는데, 지금도 무덤이 완전히 발굴되지 못한 상태여서 카타콤베는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지하에서 태어나고 죽으면서 수백 년 동안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박해시대에 지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죽으면 무덤을 봉한 대리석 비문에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표시해 두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상징들은 착한 목자, 물고기, 키로(☧), 비둘기 등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고유한 상징을 새겨 넣었다.
착한 목자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서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오시는 자비롭고 착한 목자로서 받아들였다.
물고기(ⅠΧΘΥΣ, 익투스)는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로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다’의 어절 첫 글자를 따로 모으면 물고기(ⅠΧΘΥΣ)라는 단어가 된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키로(☧)는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의 앞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따서 꾸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선한 목자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은 형상은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서 사는 영혼을 의미한다.
항해하는 배에 꼭 필요한 닻의 상징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 항구에 안전하게 도달한 영혼의 상징이다. 이는 신자들에게 내세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상징한다. 당시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을 일종의 먼 여행으로 생각했으며, 그 시대의 여행 수단은 배 밖에 없었다. 닻이 주는 의미는 배의 안전과 천국에 도착해서 여행이 끝남을 의미한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 온 비둘기의 상징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상기시키며 하느님의 구원과 평화 안에 머무는 영혼을 상징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카타콤베의 일부분을 둘러보는데도 지하의 어둡고 음습한 기운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버릴 듯했다. 믿음 하나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공포도 극복하고 그 어두운 지하 공간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했다.
이어서 프라세대 성당으로 향했다. 프라세대 성당은 성 마리아 대성당 건너편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프라세대 성당
성녀 프라세대 성당은 5세기경에 처음 지어진 성당으로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녀 프라세대의 집 위에 지어진 성당이다. 이 프라세대는 1세기경의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녀의 아버지 푸덴스는 당시 로마의 귀족이면서 원로원 의원이었다. 푸덴스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집에 그리스도인들을 숨겨주었고 사도 베드로도 이곳에 잠시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일로 그도 순교를 당했다.
프라세대 성당 내부
푸덴스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푸덴시아나와 프라세대이다. 이 두 여인이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프리실라 카타콤베에 묻어주고 순교자들의 피를 전부 모아서 자신의 집 우물 안에 두었다고 한다. 전통상 로마인들은 죽은 자의 피도 그 사람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법을 어기고 순교자들을 매장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체포되어 165년에 순교하였다. 그 후 프라세대와 푸덴시아나의 유해는 프리실라 카타콤베에 안치되었다.
피를 모으는 프라세대
491년 프라세대 성녀를 기념하는 성당이 그녀의 집터에 세워지고, 성녀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겼다. 817년 파스칼 1세 교황이 현재의 성당을 다시 지어 초기 2300여 순교자들의 유해도 함께 모셨다. 프라세대 성당 중앙 제대 아래 지하에 성녀 프라세대와 푸덴시아나의 유골이 안치된 석관이 있다.
중앙제대 아래 지하에 프라세대와 푸덴시아나의 무덤이 있다.
프라세대와 푸덴시아나의 무덤
프라세대 성당 중앙 앱스에 817년 성 파스칼 1세 교황의 주문으로 제작된 모자이크 작품이 있다. 모자이크는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계시는 만물의 주관자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앙에서 한 손에 복음서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주님의 양쪽에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프라세대와 푸덴시아나 성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종교 미술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했던 비잔틴풍으로 만들어 로마에서는 예술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는 작품이다.
순교자 성 제노 경당에는 성 파스칼 1세 교황이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를 위해 지은 영묘가 있다. 제노 경당 제대 뒤편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양옆의 성녀 프라세대와 성녀 푸텐시아나 모자이크는 13세기에 만들어졌다. 아기 예수는 왼쪽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데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요한복음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성 제노 경당
제노 경당의 천장은 9세기 파스칼 1세 교황 때 만들어진 모자이크인데, 아치 형태로 네 명의 천사들이 받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성 제노 경당 안쪽으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경당에 돌기둥 하나가 보관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로마 병사들에게 채찍질 당할 때 묶여있던 돌기둥이라고 한다. 조반티 콜론나 추기경이 1223년에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돌기둥
프라세대 성당에 이어 성모 마리아(설지전) 대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로마의 4대 성당 중 유일하게 성모님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교황 리베리우스(352-366) 시대에 세워진 성당이다. 이 성당을 성모 설지전 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설지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는 이러하다.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신자인 귀족에게 자식이 없었다. 연로해진 이들 부부는 자식을 포기하고 막대한 재산을 성모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몰라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렸다. 무더운 여름 8월 5일 이들 부부의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워라. 그곳은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 하고 말씀하셔서 리베리우스 교황과 함께 가보니 정말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8월 5일 삼복더위 중에 내린 기적적인 눈을 기념하여 성모설지전 성당이라고 부른다. 성모 설지전 성당은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로마의 성당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한다. 서기 431년에는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종탑은 75m의 높이로 14세기에 아비뇽 유수 이후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 가운데 가장 높은 종탑이다.
성당 입구에 여러 개의 청동문이 있는데 맨 왼편에 희년 때만 열리는 성문이 있다. 이 성문은 2001년 10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에 의하여 축성된 성문으로 성전기사단이 기증한 성문이다. 성문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토리노에 보관되어 있는 예수님 수의에 드러난 얼굴을 모델로 하여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모님 부조 아래에는 431년 에페소공의회, 오른편 예수님 부조 아래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특별히 에페소 공의회 때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고 그때부터 마리아 공경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성문
성당 내부는 5세기 바실리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길이는 85m이고 삼랑식 구조를 하고 있다. 천장은 15세기 알렉산더 6세 교황 때 복원이 되었다. 천장의 금빛 장식은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보내온 금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기증을 하여 장식하였다고 한다. 천장의 격자무늬 금장식이 무척 아름답고 화려하다. 주님께 항상 최고로 좋고 훌륭한 것을 봉헌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대성당 내부
대성당 천장
중앙제단 아래쪽에는 이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인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 누우셨다는 말구유 중 일부분이 청동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베들레헴에 있던 말구유가 이곳에 보관된 이유는 642년경 당시 예루살렘 출신의 테오도시우스 1세 교황 때문이다. 642년부터 구유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 불리며 테오도시우스 1세 교황이 성탄 자정미사를 거행함으로써 그 전통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말구유의 일부 조각이 보관된 함
말구유 제대 앞에는 성모 신심이 각별했던 교황 비오 9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의 석상이 있다.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성모님이 원죄 없이 태어나셨음을 교리로 인정한 교황이다.
중앙 제단 우측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시스티나 경당이 있다. 식스토 5세 교황의 주문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체경당이다. 경당 내부는 화려한 석재들로 장식되어 있다. 경당 내부 중앙에는 성체를 모셨던 감실을 아름다운 황금빛을 띤 네 명의 천사가 들고 있는 제대가 있다. 감실은 이 경당의 모습을 그대로 축소한 형태라고 한다.
시스티나 경당
경당에 들어가면 왼편에 식스토 5세 교황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 유리관 안에는 교황의 실제 유해가 모셔져 있다.
식스토 5세 교황과 그의 유해
식스토 경당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천장의 벽화와 돔이다. 햇살이 관통하는 아름다운 돔이 마치 하나의 눈부신 보석 같아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시스티나 경당 천장
발다키노 바깥쪽 바닥에 천재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무덤이 있다. 17세기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최고의 칭송을 받으며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원했던 대로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무덤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계단 아래 묻히기를 희망한 대로 낮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계단 아래에 있다. 그는 또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에는 어떤 장식도 하지 말아 달라며 겸손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베르니니의 무덤
중앙제대 왼편에 위치한 바오로 경당은 1605년~1611년 교황 바오로 5세 재임시 플라미니오 폰지오(Flaminio Ponzio)에 의해 건축되었다. 제단 오른쪽 액자에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의 이콘이 있다. 제단 위쪽에 모셔져 있던 이콘이 수리 중으로 제단 오른쪽 액자로 옮겨져 있다. 루카 복음사가가 그렸다는 아주 오래된 이콘이다.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 때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그때 성모님 이콘을 이곳으로 모셔 오는 기도 행렬을 했는데, 기도 행렬이 끝나고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이콘의 성모를 건강의 성모로 부르게 되었다.
바오로 경당
바오로 경당 제대 오른쪽 액자에 성모님 이콘이 있다.
루카 사도가 그렸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는 성모님 이콘
성당 왼쪽 중간에 '평화의 모후(Ave Regina Pacis)'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1차 세계대전 종전에 대한 감사로 봉헌하였다. 그 이전 191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성모호칭기도에 공식적으로 평화의 모후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평화의 모후 조각상
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우리 한국 교회 역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선교사들이 아닌 평신도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 한국 교회는 1801년 신유 대박해 때 유일한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님을 잃게 되자 1825년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정하상 바오로의 이름으로 이곳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이 우여곡절 끝에 2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당시 그 서한을 받았던 포교성성 오늘날 인류복음화성 장관이었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이 서한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31년도에 카펠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우스 16세라는 이름으로 제254대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때 마침 파리 외방 선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파견을 자청한다. 그렇게 하여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우스 16세 교황이 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조선대목구 설정과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칙서를 발표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처음 탄생되게 되었다.
이 카펠라리 추기경이 당시 선교 지역을 담당했던 책임 장관으로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한국 교회 실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러한 분이 교황으로 선출되었기에 우리 교회가 바티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오늘날 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우리 한국 교회와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를 떠나기 전 트레비 분수와 나보나 광장, 콜로세움 등 이탈리아의 명소를 들르기로 했다. 로마 시내에서는 대형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아서 유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주로 걸어 다녀야 하는데, 트레비 분수와 나보나 광장 역시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성지순례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로는 쌓이고 체력도 떨어진 상태라 함께 간 라파엘 여행사 순례 팀장이 벤츠 밴 투어를 마련해주었다. 카니발 크기의 벤츠 밴 다섯 대에 7명씩 나누어 타고 트레비 분수로 갔다.
트레비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주문으로 니콜라 살비(Nicola Salvi)가 설계해 1762년 피에트로 브라치(Pietro Bracci)가 완성한 바로크 양식의 분수로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장소에 분수대가 있었던 것은 2천 년 전이다. 2천 년 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던 아그리파 장군이 처음으로 비르고 수로를 만들어서 로마 시내까지 끌어들였다. 비르고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처녀라는 의미이다. 당시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수원지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한 소녀가 나타나서 물이 샘솟는 수원지를 알려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로마 사람들이 그 소녀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수원지의 이름을 비르고(처녀) 수로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분수대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 만들어진 분수는 세 개의 관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단순한 형태였다. 이 분수대 이름을 트레비 분수라고 한다. 트레비란 말은 우리말로 세 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현재도 과거 로마 시대 때의 그 수도에서부터 물이 공급되어지고 있다.
벤츠 밴에서 내려 트레비 분수가 있는 골목길에 들어서니 많은 관광객들로 좁은 골목이 꽉 찼다. 분수 가까이에 이르자 관광객들의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분수에 도착하니 분수를 둘러싸고 많은 관광객들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물 반 사람 반으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분수 가까이로 가려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관리를 잘해서인지 분수 안에는 동전만 그득하고 물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트레비 분수는 비르고 수로가 끝나는 부분이라 주변에 비해 지대가 낮아서 뿜어내는 물줄기가 강해서 물 떨어지는 소리도 아주 크게 들렸다.
트레비 분수 앞 골목
처음엔 평범했던 분수가 유명해진 것은 1732년 화려하고 웅장한 조각상을 세우면서부터라고 한다. 사실 제일 먼저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을 형상화해 제작한 높이 26m 규모의 섬세한 조각상들이었다. 또 분수대의 배경으로 서 있는 건물은 분수와 함께 조성된 게 아니다. 배경 건물은 폴리 궁전(Palazzo Poli)으로 트레비 분수가 완성된 후 분수에 맞추어 가운데 부분을 부수고 다시 건축했다. 즉, 폴리의 궁전 앞면만 분수와 어울리게끔 만들어져 있다.
또한 분수대 배경으로 서 있는 폴리 궁전 맨 오른쪽 최상단의 창문은 실제 창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림으로 창을 묘사해서 실제 창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후기 바로크 건축물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하나의 묘미다.
건물 맨 오른쪽 발코니가 있는 최상단 창문은 그림이다.
이 분수가 유명한 것은 ‘트레비분수를 등지고 서서 오른손으로 동전을 왼쪽 어깨 너머로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던지는 동전 수입이 하루에만 약 3000유로의 동전이 수거 된다고 한다. 수입이 상당히 짭짤해서인지 여기저기에서 소원 들어주는 분수랍시고 패러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분수에서 수거된 동전은 가톨릭 자선단체 카리타스에 보내서 빈곤 가정과 알츠하이머 환자를 돕는 데 사용된다. 나도 한 번 동전을 던져 보았는데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가 아니라 오른쪽 어깨 너머로 잘못 던졌다. 로마에 다시 가긴 틀렸나 보다.
친구들과 앉아 한가로이 분수를 바라보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관광객들로 트레비 분수는 한 마디로 왁자지껄 잔치였다.
트레비분수를 관람하고 나보나 광장으로 갔다. 나보나 광장은 3개의 분수와 성 아녜스 성당이 있는 예술가들의 거리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기장이 있던 자리를 17세기에 와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주문으로 아름다운 바로크식 광장으로 만든 곳이다. 광장이 크고 자동차가 없는 거리여서 다른 곳보다 조금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보나 광장
광장에는 3개의 분수가 있는데 넵튠 분수, 모로 분수, 피우미 분수이다. 이 중에서도 제일 큰 분수는 광장 가운데에 있는 피우미 분수로 각 대륙의 4대 강을 의인화시켜 만들었다. 남미의 라플라타강, 유럽의 다뉴브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아시시의 갠지스강을 상징하는 4명의 거인이 높이 17m의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 예술가인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피우미 분수
베르니니는 피우미 분수 바로 옆에 모로 분수를 더 만들었다. 모로 분수는 무어인의 분수라고도 하는데, 무어는 아랍인이고 이들이 돌고래와 싸우는 모습이다. 모로 분수는 나팔 같은 걸 부는 형상이 독특했다.
모로분수
광장 북쪽에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뜻하는 넵튠 분수는 문어와 싸우는 포세이돈이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종탑 두 개가 있는 ‘성녀 아녜스 성당’이 있다.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딸인 ‘콘스탄티나 공주’가 성녀 아녜스를 위해 세운 성당이다.
성 아녜스 성당
로마의 명문 귀족인 클로디아 가문에서 태어난 아녜스 성녀는 일찍이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미모의 성녀 아녜스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그리스도께 완전히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동정을 서원하였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303년 그리스도교의 마지막 대 박해를 감행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박해가 심해지자 집을 떠나 피신했는데, 청혼자였던 고위공직자(프레펙투스)의 아들이 앙심을 품고 그녀를 고발하여 붙잡히게 된다.
총독은 그녀에게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베스타 신전에 제물을 바치도록 명했으나 거부하자 성녀를 배교시키려고 사창가로 데려가 옷을 다 벗겼을 때 갑자기 머리카락이 자라나서 성녀의 몸을 감싸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총독에게 끌려와 베스타 신전에 있는 불에 던져졌으나 불이 그녀를 피해 갈라지는 기적이 또다시 일어나 아녜스가 죽지 않자, 총독은 그녀에게 참수를 명해 결국 순교했다.
성녀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졌던 작은 경당 위에 위대한 건축가 보로미니에 의해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지게 된다. 성당 내부는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를 가지고 있고 정면의 중앙제대와 양편으로는 한쪽에 3개씩 작은 제대들이 봉헌되어 있다.
성녀 아녜스 성당 내부 중앙 제대
성녀의 유해 중 두개골은 이 성당에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 유해는 로마의 성벽 밖 성녀 아녜스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성녀 아녜스 두개골이 모셔진 제대
성당 중앙제대 오른쪽으로 성녀 에메렌시아나 제대와 성녀 아녜스 제대가 있다. 성녀 에메렌시아나와 성녀 아녜스는 혈육의 자매가 아닌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수양 자매였다. 성녀 에메렌시아나는 성녀 아녜스의 순교 이틀 후에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먼저 순교했던 성녀 아녜스의 묘를 찾아가 슬퍼하며 기도하는 도중에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성녀 아녜스의 묘지 위에 세워진 성당과 나란히 성녀 에메렌시아나의 무덤 위에도 성당이 하나 세워졌는데, 그것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고 한다.
성녀 에메렌시아나의 제대(좌)와 성녀 아녜스 제대(우)
성녀 아녜스의 제대. 불이 양쪽으로 갈라진 기적을 표현했다.
성 아녜스 성당을 나와 우리는 시원한 물줄기가 콸콸 쏟아지는 피우미 분수 주변에 앉아 쉬면서 사진도 찍고 광장 풍경도 감상하며 여유로운 기분을 잠시 가졌다.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마지막 방문지가 남아있어서 일어나야만 했다. 마지막 방문지는 대전차 경기장,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대전차 경기장을 조망하러 갔다. 처음 경기장을 세운 것은 4세기경이며 549년까지 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대전차 경기장은 지금은 비록 황량한 공터 같지만, 가로 624미터, 세로 124미터, 트랙의 길이 1000미터로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이 떠올려지는 이곳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도 있었다고 한다. 경기장에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곳이 오벨리스크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왼쪽에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곳에 오벨리스크가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공터지만 오른쪽 끝에는 망루 같은 옛 구조물의 잔재가 남아있다. 당시 로마 인구는 백만 명쯤 되는데 경기장 수용 인원은 2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경기장 건너편 로마 탄생의 기원지인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의 옛 왕궁터가 남아있다. 이 경기장에서 4륜 마차 경기, 경마, 맹수와의 검투 시합 등이 열렸고,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화형으로 순교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의 옛 왕궁터
오른쪽 끝에 망루 같은 옛 구조물이 남아있다
이어서 콜로세움으로 이동했다. 콜로세움 내부는 보지 못하고 외부를 바라보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통치하에 시작되어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콜로세움은 둘레 527m 길이 180m 높이 52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최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원형 극장이다. 52m에 달하는 높이는 오늘날 아파트 17층이나 18층과 맞먹는 엄청난 것이다. 고대에 콘크리트와 모래를 사용하여 관중이 쉽게 접근하고 나갈 수 있도록 80개의 아치형 입구와 지하부터 지상 4층의 좌석을 갖춘 웅장한 타원형의 건축물을 현대의 기술이 아닌 고대 시대에 지었다는 것은 건축학상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한다.
콜로세움 벽면을 보면 구멍이 굉장히 많이 뚫려 있다. 구멍이 뚫린 이유는 게르만족이 로마에 쳐들어오면서 가져갈 것이 많은 로마에서 모든 걸 다 가져가려다 보니까 콜로세움 건물을 고정하던 청동 핀까지 다 뽑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민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민심을 얻기 위해 인기가 많은 검투를 보여줄 수 있도록 경기장을 제공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건설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 대회, 동물 사냥, 모의 해전 등 로마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다양한 공개 공연의 장소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맹수의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한 순교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콜로세움은 유적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교회가 서 있고, 그 굳건한 반석 위에 우리가 서 있을 수 있음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콜로세움 바로 앞 광장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세워져 있다. 개선문은 312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라이벌이었던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서기 315년 7월 25일 완성했다. 폭 25.7미터 높이 21미터 규모의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과 전투 장면을 묘사해 놓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고대 로마 1200년 역사에서 로마의 심장부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현재 로마에 남아있는 세 개의 개선문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 상태도 가장 양호하다. 나폴레옹이 로마 원정 당시 이 문을 보고 탐을 냈지만 운반이 어려워서 프랑스로 가져가지 못하고 파리개선문을 만들 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9박 11일간의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마쳤습니다. 11일 동안의 여정을 다시금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성지순례 동안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남은 삶의 여정을 어떻게 주님의 딸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순례에 동행해 주시어 기도와 미사를 봉헌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순례단을 챙겨주신 김승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은총의 햇살 아래 순례의 길을 함께 걸었던 순례단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성지순례에 다녀온 체험을 삶에서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은총의 시간으로 엮어가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젬마 회장님 정리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탈리아 성지순례 여정 생생히 전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사진과 글 정리하느라 고생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