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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헤스터의 또 다른 모습
얼마 전 기묘한 상황에서 딤스데일 목사를 만나게 되었던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상태가 말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목사의 신경은 극도로 지쳐 있는 듯하였고, 그의 정신력은 아이들보다도 더 약해져 있었다. 지능만이 본디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고 병적인 활력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극도로 무기력해져 거의 땅 위를 기어다닐 정도였다.
헤스터는남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련의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으므로 목사 자신이 당연히 느껴아 할 양심의 가책 이외에 어떤 무서운 음모가 딤스데일 목사의 평온과 휴식을 헤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이 불쌍한 목사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느니만큼, 목사가 직감적으로 발견한 적을 막아 달라고, 세상에서 벌림받은 자기에게 애원하면서 부들무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감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에게 모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하였다.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자기이외의 기준으로 선악 관념을 재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헤스터는 이 목사에 대해서,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나 진배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헤스터를 다른 사람과 연결 짓고 잇는 사슬은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목사와 헤스터, 두 사람 다 죄인이라는 유대의 사슬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다른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무를 수반하고 있었다.
현재의 헤스터 프린은 치욕의 생활을 시작했던 무렵과는 처지가 달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펄도 이제 7살이 되었다. 수놓은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헤스터의 모습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보스턴 사람들에게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남의 눈에 띄는 입장에 있으면소도 공사양면에 걸쳐 이익이나 편의에 아랑곳하지 않을 때에 흔히 그렇듯이, 헤스터 프린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호의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기심이 작용하지 않은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다행한 일이다. 미움이란 본디의 적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여유 있고 조용한 과정을 거쳐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는 새로운 자극도, 성가신 일도 전혀 없었다. 대중과는 싸우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심한 처사에 불평 없이 순종했다. 사회에 대해 자신의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동정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세상의 따돌림을 받고 살아 온 몇 년 동안 나쁜 소문 없이 순결한 생활을 해 온 것이 그녀에 대한 주민들의 호감을 싹트게 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데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희망이나 꿈도 없었으니, 이 불쌍한 방황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덕행에 대한 순수한 열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스터는 남처럼 자유로이 공기를 마시고 착실히 삯바느질로 펄과 자기를 위한 생계비를 버는 것 말고는 세상의 권리를 조금도 탐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도움을 베풀 때면 자기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전심 전력하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을 쪼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이런 일에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선행은 순탄치 않아, 날마다 그들이 문 앞에 갖다 놓아 주는 음식이나 왕후귀족의 옷에 수를 놓을 만한 솜씨로 만든 옷가지를 받고서도, 일부 매은망덕한 빈민들은 그녀에게 악담을 퍼북시가 예사였다. 이 거리에 질병이 만연했을 때에도 헤스터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없엇다. 사실 사회 전체의 경우이건 개인의 경우이건, 참변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곧바로 찾아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일로 침울해 있는 집으 찾아갈 떄는 손님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가진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했으며, 마치 그 집의 침울한 빛으로 말미암아 같은 인간으로서 교제할 자격이 생기는 것 같았다. 거기서는 수놓은 글씨가 빛났으며, 이 세상의 빛 같지 않은 그 빛에 위안이 담겨 있었다. 다른 곳에선 죄의 표시였던 그 글씨가 여기서는 병자의 방을 환히 비쳐 주는 촛불이 되기도 하였고, 병가가 숨을 거두려고 할 때 현세의 경계를 넘어 저승까지 그 빛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세상의 빛은 점차 흐려져 가고, 내세의 빛은 아직 비치지 않는 때에 병자에게 발을 내대딜 곳을 비춰 주는 등불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는 헤스터의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성격이 발휘되었다. 모든 절실한 요구를 일일이 들어줄 뿐 아니라, 아무리 큰 요구도 무궁무진하게 받아들여 주는 인정의 샘처럼 행동하였다. 치욕의 표시가 붙은 가슴이 베개를 찾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폭신한 베개가 되었다. 헤스터는 사회나 본인이 다 이런 결과가 되리라고는 예상치도 않았건망 자진해서
자선의 수도녀 가 되었다. 아니, 어느 틈엔지 사회의 근심어린 손길이 그녀를 이런 직분에 임명하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주홍 글씨는 그녀의 천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필요한 존재였고,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따뜻한 동정심을 발휘했던지, 사람들은 주홍글씨의 A자를 본디의 뜻으로 해석하길 거부했다. 그들은 그것을 유능(Able)'의 뜻이라고 했다. 헤스터 프린의 여인으로서의 힘은 이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그녀가 드나드는 집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햇빛이 들지 않는 집뿐이었다. 그러나 근심이 사라지고 햇빛이 찾아들면, 이미 헤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문지방을 넘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식구처럼 정성어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비록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사의 표시를 받기 위하여 뒤돌아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 삶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맞대고 가리키면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자칫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겸손에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대중의 마음은 변덕쟁이 군조와 같다. 하찮은 정의라도 너무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서면 당연한 공평까지도 거부하나, 관용을 바라고 애원하면, 그 폭군은 공평 이상의 것을 내주는 것이었다. 헤스터 프린의 태도를 이런 류의 애원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세상은 과거의 희생자인 그녀에 대하여 본인이 희망하고 있지도 않은, 때에 따라서는 그녀가 받을 자격이 있는 이상으로 친절한 표정을 보여 주었던 것이가.
헤스터의 이런 선행이 세상에 주는 감화력을 보스터 통치자나 학자와 현인들이 인정한 것은 일반 대중에 비해 훨씬 더디었다.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편견이 이들의 경우에는 논리라는 쇠틀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그것을 탈피하기가 일반 사람보다 훨씬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들의 찌푸린 주름살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바뀔 것도 같았다. 높은 지위 때문에 공중 도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동태는 대개 그러했다. 한편 일반 개개인들은 헤스터 프린의 여자로서의 과오를 깨끗이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주홍 글씨를 헤스터가 오랫동안 괴로운 마음으로 감수한 죄의 상징이 아니라 그 이후로 그녀가 쌓아온 수많은 선행의 상징으로 보게 되었다.
저 수놓은 표시를 단 여자가 보이잖아요? 사람들은 다른 고장에서 온 사람등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헤스터, 이 거리의 헤스터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병든 사람에겐 힘이 되어 주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겐 위안을 주는 헤스터랍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껄이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지나간 옛날의 추문을 속삭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눈에도 주홍 글씨가 수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십자가오 같은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주홍 글씨는 그것을 달고 있는 이 여인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어떤 위험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였다. 설사 도둑 무리가 에워쌌다 하더라도 주홍 글씨가 그녀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 인디언이 그녀의 표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다.
이 상징, 아니 이 상징에 의해 제시되는 헤스터의 사회적 위치가 그녀 자신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사고도 기묘한 것이었다. 헤스터의 명랑하고도 품위있는 성품의 나뭇잎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이 낙인 때문에 이미 시들어 떨어진 지 오래였으므로 남은 것이라고는 거칠고 앙상하게 드러나 윤곽뿐이었다. 가령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혐오감을 느깨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자태도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 옷차림을 일부러 검소하게 한 탓도 있었고, 그녀의 동작이 남의 눈을 끌려 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였다. 말할 수 없이 탐스럽던 머리는 잘라 버렸는지 모자 속에 완전히 감췄는지, 윤기있는 머리채를 한 번도 햇빛에 드러내 놓은 적이 없는 일도 슬픈 변화의 하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위엄에 찬 조상과도 같은 몸에는 열정이 끓어오를 만한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애정의 여신이 베개로 삼았을 풍만한 가슴이 없어진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어떤 특징이 헤스터에게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것은 특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난 여자의 성격이나 자태에서 나타나는 운명적인 것이며, 또 준엄한 발전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헤스터가 부드러운 마음씨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살아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 부드러운 마음씨를 짓밟아 없애거나 아니면 가슴속 깊이 묻어 버려야 했던 것이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전실에 가까운 이론일 것이다. 본디 여자다웠으나, 지금은 여자다움을 잃은 사람도 그녀를 변모시킬 마술의 손길을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여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앞으로 그와 같은 마술의 손길에 닿아 변모하게 될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대리석같이 찬 헤스터의 인상은 그녀의 생활이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부터 사색적인 것으로 바뀐 때문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혼자인 헤스터는 사회와 자신을 연결지어 주던 끊어진 사슬의 파편을 팽개쳐 버렸다. 세상의 법칙은 이제 헤스터의 마음의 법칙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시는 인간의 지성이 새로이 해방되어 수세기 이전에 비하면 한층 자유롭고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무인들은 왕후와 귀족을 쓰러뜨렸고, 그보다 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고대 원칙과 연결되어 있는 묵은 편견에 찬 사회 조직 전체를 허물고 재편성하고 있었다. 헤스터 프린은 이런 정신을 흡수하고 있었다. 헤스터가 몸에 지니고 있던 사색의 자유는 그즈음 대서양 저쪽에스는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주홍 글씨로 표시된 죄보다 감히 찾아들지 못할 새로운 사상이 바닷가에 자리잡은 헤스터의 오두막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같은 이 방문객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서도 그들을 맞이하는 헤스터는 악마의 방문과 다름없는 위험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극히 대담한 사상의 소유자일수록 사회의 외부적인 규칙에는 아주 온손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사상만으로 충분하며, 사상이 행동이라는 혈육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일 펄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앤 허친슨과 같은 사람과 손을 잡을 어느 종파의 창설자가 되어 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헤스터에게는 예언자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청교도 사회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그 무렵의 엄격한 재판관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상적인 정열은 아이의 교육에서 그 발산처를 발견한 것이다. 이 소녀의 형태를 빌어 하느님이 헤스터에게 안겨 준 여성의 싹과 꽃을 그녀는 어떤 난관을 뚫고라도 소중히 키워야만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외시 당한 그녀에게 이 세상은 여전히 악의를 품고 있었다. 아이 자신의 성격에도 뭔가 이상한 데가 있어 어머니의 무궤도한 정열의 소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불쌍한 작은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은 과연 잘된 일인가 아니면 잘못된 일인가 하고 헤스터는 쓰라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사실상 여성 전테의 삶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의문이 헤스터의 마음속에 곧잘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산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도외시해 버렸다. 사색하는 습관은 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침착하게 만들기는 하나, 동시에 마음을 슬프게 하기도 한다. 헤스터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려면 우선 첫째로 사회 조직 전체를 부수고 새로 건설해야만 한다. 둘째로는 남성의 성질이라든가 혹은 본성으로 굳어 버린 오랫동안의 유젖넉인 습성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여자는 정당하고 적절한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또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곤란이 제거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첫째와 두 번쨰의 개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시 강대한 변화를 여성 자신이 경험해야만 한다. 그런 큰 변화를 겅험하게 되면 그 결과 여성에게 가장 여성다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본질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성이 두뇌를 써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이 문제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즉 여성의 감정이 그녀들의 이성보다 우세를 보이게 되면 문제는 깨끗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그 규칙적이고도 건강한 고동을 잃고 있는 헤스터 프린은 아무런 의탁할 곳도 없이 마음 속의 어두컴컴한 미로를 방황하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절벽에 부딪혀 방향을 바꾸는 일도 있으며, 깊은 구렁텅이에서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는 일도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통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뿐이어서, 취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따금 차라리 펄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고, 자기 자신도 정의의 여신이 정해 주는 바에 따라 내세로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무서운 의문이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주홍 글씨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장에서 밤을 새우던 딤스데일 목사를 만난 뒤로 헤스터에게는 새로운 사색이 생겨났고, 어떠한 노력과 희생을 바쳐서라도 달성하여야 할 목적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목사가 몸부림치고 있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이상 몸부림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이 아직 광적인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직전에 놓여 있음을 보았었다.
남모르게 회한의 바늘에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주는 효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구원받아야 할 손길에 의해 더 무서운 독물이 그 주사바늘에 채워지고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원조를 아끼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가장한 적이 늘 그의 곁에 붙어서 손 안에 넣은 기회를 이용하여 딤스데일 목사의 부서지기 위운 성질의 나사를 가지고 장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혹독한 불행을 예감케 하고 행복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곤경 속으로 목사가 빠져들어가는 것을 잠자코 방관했었다., 본디 자기에게 진실이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로저 칠링워드의 계획에 동의하는 일마니, 자기가 당한 파멸 이상의 참혹한 파멸로부터 목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길 중에서 더 처참한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녀는 할 수 잇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책을 보장하리라 결심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혹심한 시련을 겪는 동안, 그녀는 보다 강인해져 이제 로저 칠링워드와 대항하지 못할 일은 없을 듯하였다. 감옥에서 로저 칠링워드와 첫 대면을 하던 날,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고, 생생한 치욕으로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으므로 감히 그와 맞서 싸우는 일은 생각조차 항 수 없었다. 그때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녀는 훨씬 높은 위치에 다다라 있었다. 반면 노인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 비천한 인간이 되었으므로 헤스터와 동등한 지위, 아니 그 이하로 타락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스터 프린은 전 남편을 만나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힘써 보리라 결심했다. 얼마 안 되어 그런 기회는 닥쳐왔다. 어느 날 오후 펄을 데리고 이 반도의 호젓한 곳을 거닐고 있을 때에 한쪽 팔에 바구니를 걸치고 다른 쪽 손엔 지팡이를 짚은 노의사가 꾸부정한 모습으로 약재가 되는 나무뿌리며 약초를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4.헤스터와 의사
헤스터는 펄에게 저쪽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 사람과 애기가 끝날 때까지 바닷가에 가서 조가비나 엉킨 해초를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일렀다. 아이는 새처럼 날아가더니 작고 흰 발을 벗고 물에 젖은 바닷가를 철벅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이따금 우뚝 멈추어 서서 썰물이 남기고 간 웅덩이를 거울삼아 들여다보았다. 웅덩이 속에서는 반짝이는 곱슬머리에 눈에는 요정같은 미소를 담은 어린 여자아이가 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놀아 줄 친구가 없는 펄은 그 여자아이에게 손을 잡고 달음박질하자고 불러 보았다. 그러나 물 속의 여자아이도 똑같이 손짓을 하며
여기가 더 재미있어! 네가 웅덩이 속으로 들어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펄이 무릎까지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웅덩이 속에 있는 자신의 햐얀 발이 보였다. 그때 더 깊은 것에서는 조각조각 부서진 미소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반짝반짝 빛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의사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건넷다.
잠깐 할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늙은 로저 칠링워드에게 얘기를 하자는 분은 헤스터이신가? 하고 대답하며 의사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켰다. 기꺼이 듣겠소! 그런데 헤스터, 요즘 어딜 가나 당신의 평판이 좋은 것 같더군요! 바로 어젯저녁에도 어느 훌륭한 관리 양반이 당신 가슴에서 떼어 버리면 사회의 안녕 질서에 지장이 없을까를 의논했던 모양이오. 헤스터, 나는 그분에게 당장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라고 얘기했소, 그게 사실이니까!
이 표시는 그분들이 마음대로 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헤스터는 침착하게 대답헀다.
내가 이것을 떼어도 좋을 때가 오면 저절로 떨어져 버리든가, 아니면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하든가 하겠지요.
그렇다면 좋도록 달고 있구료. 의사는 대답했다. 여자들이란 몸에 다는 장식품에 있어선 자기 고집대로 하는 모양이니까. 그 글씨의 수가 꽤 화려해서 당신 가슴에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러는 동안에 헤스터는 노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난 7년 동안에 너무나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한편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했던 만큼 놁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모습에는 늙어가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근력 있고 민첩해 보였다. 그러나 헤스터의 기억에 남아 잇는 그 조용하고 지적인 학자다운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열심히 풘가를 찾고 있는 듯한, 그리고 거의 사납다고 할 정도의 경계의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런 표정을 미소로써 감추려고 애썼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치 자신의 그런 의도를 스스로 비웃는 듯한 조소가 얼굴에 어른거려 그것이 오히려 보는 사라믕로 하여금 그 음흉한 배포를 한층 뚜렷하게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이따금 그의 눈에서는 붉은 빛이 번득였는데 그것은 마치 노인의 영혼에 우연히 일시적인 정열의 바람을 타고 붙은 불이 가슴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불꽃을 서둘러 누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을 꾸미고 있었다.
한 마디고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인간이 상당한 기간에 겊쳐 악마의 일을 행하면 바로 그 자신이 악마로 화해 버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본이었다. 이 불행한 노인은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고뇌에 가득 찬 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분석하며 희열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람의 불과 같은 고뇌에 기름을 끼얹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와 같이 변모하게 된 것이다.
주홍 글씨가 헤스터 프린의 가슴 위에서 불타는 것 같았다. 여기 또 한 사람이 파멸하고 있었고 그 책임의 한 부분이 그녀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너무 열심히 쳐다보는데 뭐가 묻었소?
의사는 물었다.
나에게 눈물이 남아 있다면 울어도 시원치 않은 것이 보여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또 한 사람의 처참한 분의 이야기니까요.
그 사람이 어떻다는 거요? 로저 칠링워드는 그것이 대단히 관심 있는 화제이고,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응수했다. 헤스터, 솔직히 말해 나는 방금 그 사람 생각을 이것저것 하고 있던 참이오. 그러니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 보오.
대답해 줄 테니까.
우리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것은 7년 전의 일인데, 그때 당신은 우리의 옛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붙여 달라는 강제 약속을 내게서 받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이나 명예가 당신의 수중에 달려 있었기에 당신의 명령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하면서도 불안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죠.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는 일체 포기한 나였지만, 그분에 대한 의무만은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과의 약속은 그 의무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무엇인가가 내게 속삭였기 때문이에요. 그 이후부터 당신 만큼 그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구분 뒤를 늘 따라다니며 자나깨나 그분 곁에 붙어서 그의 생각을 살피고, 그의 영혼까지 파고들어 헤치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움켜쥐고 매일매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분은 아직 당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했던 약속으로 인해 나는 한 사람의 진실된 분을 배신한 결과가 된 셈이에요.
당신한테야 그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았소? 로저 칠링워드는 물었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놀리면, 그 사람을 설교단에서 감옥으로, 감옥에서 교수대로 쫓아낼 수도 있었단 말이오!
차라리 그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죠!
헤스터 프린인 말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이오? 하고 로저 칠링워드는 거듭 물었다. 이것만은 알아야 하오, 헤스터 프린. 제왕이 의사에게 아무리 최고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해도 내가 그 불쌍한 목사를 위해 베푼만큼 정성어린 치료는 받을 수 없을 것이오. 나의 간호가 없엇더라면 그 사람의 생명은 당신네가 죄를 범한 지 2년도 되기 전에 이미 고뇌의 불길에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오. 그 사람의 정신력은 헤스터, 당신과는 달라. 주홍 글씨와 같은 무거운 짐을 견뎌내는 힘이 없단 말이오. 난 기막힌 비밀을 폭로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 얘긴 그만해 두지! 아무튼 난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소. 그 사람이 지금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땅 위를 기어다닐 수 있는 것도 다 내 덕이란 말이오!
그분은 차라리 돌아가시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그렇고. 당신의 말이 옳소! 로저 칠링워드는 무시무시한 가슴 속의 불꽃을 헤스터 앞에 내보이며 외쳤다. 단숨에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오! 그 사람 만큼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오. 더구나 철천지한 원수가 보는 앞에서 말이오! 그 사람도 어떤 눈치를 채고는 있소. 어떤 저주와 같은 힘이 자기 곁을 늘 따라 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소. 일종의 영감으로 악의를 품은 자의 손이 마음의 끈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다만 그 눈과 손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알지 못하오! 목사들 사이에 흔히 있는 미신이지만, 자신에서 귀신이 들려서 무서운 꿈이나, 절망적인 생각이나, 회한의 바늘이나, 구원에 대한 절망 등으로 인해 무덤저편에서 겪을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나의 그림자였소! 그자 때문에 무참히도 상처를 입고 무서운 복수라는 맹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 한 사나이가 사시사철 따라다닌 것이오! 자신이 악마에게 붙들렸다고 생각한 그의 예감은 옳았소. 악마가 그의 코앞에 있었으니까! 본디는 인간다운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었지만, 고통과 상처 때문에 결국은 악마가 되어 버린 사나이가 말이오!
이와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불행한 의사는 두 손을 번쩍 쳐들었는데,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변한 것을 보고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일생동안 몇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한, 인간의 정신이 숨김없이 심안에 비친다는 그런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지금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이 똑똑이 보인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그분에게 충분히 복수를 한 게 아닐까요? 헤스터는 노인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그도 당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은 셈이 아닐까요?
천만의 말씀이오! 빚이 오히려 늘었을 뿐이오! 하고 의사는 대답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의사의 태도는 사나운 기색이 수그러들고 점차 침울한 빛을 띠었다. 헤스터, 9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그때도 이미 나의 인생의 가을이었고, 그것도 겨울이 다 된 형편이었지.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성실하고, 학문적이고, 사색에 잠긴 조용한 나날이었소. 그런 나의 생활을 나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충실히 바쳤었소. 나의 생활만큼 평온하고 청렴한 것은 없었을 것이오. 그 무렵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나라는 인간이 당신이 보기에는 냉담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남에게 인정을 베풀 줄도 알고 자기를 위한 일에는 조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친절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그리고 비록 정열적이라고 할순 없으나 변함없는 애정을 지녔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렇지 않소?
당신은 그 이상의 분이었죠. 헤스터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이오? 의사는 헤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 속의 모든 악을 얼굴에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의 내가 뭐냐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요! 악마란 말이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런 악마로 만들었단 말이오?
바로 나예요! 헤스터는 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나 때문이에요. 나도 그분이나 다름없는 죄인인데, 왜 나에겐 복수를 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은 그 주홍 글씨에 맡겨 뒀던 거지. 로저 칠링워드는 대답했다. 그 주홍 글씨가 할 수 없는 복수라면, 난들 어쩌겠소!
노인은 주홍 글씨를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분명히 복수를 했어요! 헤스터 프린은 대답했다.
나의 판단에 잘못은 없었소. 의사는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란 뭐요?
나는 이제 그 비밀을 밝혀야겠습니다. 헤스터는 잘라 말했다. 그분에게 당신의 본성을 일러 줘야겠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온 까닭에, 그것이 도리어 그분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분의 명성, 지위, 나아가서는 목숨까지도 죽이거나 살리거나 모두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주홍 글씨로 인해서 진실을, 영혼 속까지 타들어오는 시뻘겋게 달군 무쇠와 같은 진실을 알게 된 나로선 그분이 처참할 만큼 공허한 인생을 계속 살아 보았댔자, 아무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에, 당신앞에 비루하게 무릎을 꿇고서 자비를 구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선 마음대로 하세요! 그분이나 나나 당신이나 구원될 가망은 없으니까요! 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 어두운 미로에서 빠져날갈 길은 없을테니까요!
당신을 가엾게 생각지 않는 바는 아니오! 로저 칠링워드는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말했다. 헤스터의 말에 담긴 절망감에는 뭔가 숭고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훌륭한 바탕을 가진 여자요.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불쌍하오. 그 훌륭한 천품을 헛되이 낭비했으니 말이오!
나도 당신이 가엾게 생각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증오심 때문에 참으로 현명하고 올바른 학자이던 당신이 악마로 변했으니 말예요! 이제라도 그 미움을 쫓아내고 다시 한 번 인간다운 사람이 되실 순 없나요? 그 분을 위해서라기보다 두 배나 더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분을 용서하고, 그분에 대한 응보는 그 권리를 지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겨두세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어두운 미로를 서로 얽혀 방황하며, 제각기 뿌려 놓는 죄악 때문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에게 무슨 이로운 일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아니! 당시은, 당신만은 구원될 길이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셨으니 그분을 용서하는 것은 당신 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 유일한 권리를 그대로 버리실 작정인가요? 그 소중한 특권을 거절하시려는 건가요?
그만해 두오, 헤스터! 노인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소. 당신이 말하는 그런 힘이 내게는 없소. 오래 전에 잊었던 예전의 내 믿음이 되살아나 우리의 행동과 고민을 전부 해명해 주는구려. 당신이 첫발을 잘못 디딘 탓으로 악의 씨를 뿌려 놓은 것이오.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모두가 필연적인 운명이었소. 나에게 상처를 준 당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전형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악마의 일을 악마에게서 빼앗아 왔을 뿐 나도 악마는 아니오. 모든 게 다 운명이오. 검은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내벼려둘 수밖에 없소! 이제 가 봐요. 그 사람의 일도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의사는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다시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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