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수께 대한 오해[3:20-35]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이제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오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가족 및 일반인들의 오해(3:20-21), 서기관들의 오해(3:22-30), 그리고 예수님의 참된 가족(3:31-35)으로 되어 있다.
가. 가족 및 일반의 오해<3:20-21>
“이 기사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고,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에는 생략되었다. 아마 예수께 대한 존경과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조심성에서 이 기사를 제외한 것일 것이다. 초대 교회가 이와 같은 기사를 창작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될 수 없으므로, 역사에 기초하는 전승을 마가가 채용한 것일 것이다. 이런 곳에 마가의 솔직함이 보여진다”(山口 昇). 사건의 발생 시기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대 갈릴리 선교 기간 중에 있었던 일임은 확실하다.
마가는 이 기사를【20】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생생하게 마가적이다”(F. C. Grant).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추측된다(2:1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신 것을 안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다. 예수님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무리의 강렬한 열정 때문에 식사할 겨를이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문을 닫지 않으셨다. 오히려 “환영하고 평화로운 대답을 주셨다. 하나님의 일을 확장하는 데 마음이 부푼 사람들은 큰 불편을 쉽게 견디며, 선을 행할 기회를 잃는 대신에 끼니를 거르는 편을 택할 것이다”(M. Henry).
당시에 많은 정치‧사회‧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가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참 종교가 인생에 절대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상, 벌과 나비는 꽃가루와 향기가 있는 생화를 찾아가지, 겉모양만 아름다운 조화는 찾아가지 않는 법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종교는 절대로 중요하다. 즉, 이 생의 정상적인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만일 때로 일시적 업무가 보다 높은 우리 영혼과 타인의 영혼에 대한 관심에 양보한다면,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동시에 종교가 정상적으로는 세상 업무에 대한 세밀한 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는 세상의 번영에 필수적인 것이다”(A. Barnes).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리의 열렬한 갈망과 달리, 예수님을 오해하여 붙잡아 두려는 사람들에 대해, 마가는【21】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0쳤다 함일러라라고 하였다.
친속들(οὶ παρ’ αὐτού)은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W. L. Lane), “이웃, 대리인들, 친구들”(F. Field),1) “그의 사람들, 그의 사절, 그의 동료, 그의 추종자들”(W. Hendriksen) 등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1) 친구들이라는 설,2) (2) 친척들이라는 설(C. F. D. Moule, J. H. Burn), (3) 친구나 친척들이라는 설(A. Clarke, J. D. Stevens, A. Barnes), (4)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설(C. R. Erdman), (5) 가족들이라는 설3) 등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문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는 점(31절)과 그때까지에는 동생들이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다는 점(요 7:5)을 보아 가족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0쳤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거의 그렇게 믿었으므로, 예수님을 “나사렛으로 도로 데려가”(W. W. Wessel) “보호 감호하려고 한 것이다”(W. Hendriksen). 아마 “이 소문은 예수님의 적들이 낸 것 같다”(A. Clarke, A. Barnes).
예수님의 행동은―집과 직업을 버리고, 정통 지도자들과 계속 충돌하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안식일에 일을 하시고, 종말론적 선교 의식을 가지시고, 소집단을 형성하시고,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시는 행동―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과 갈채의 요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게는 미0친 짓으로 보였다. 더욱이, 어머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으리라고 고지한 천사의 말을 믿었었지만(눅 1:45), 이때에는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레인(W. L. Lane)은 “3:31을 보면, 그녀의 믿음이 자기 아들들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W. Hendriksen. 2) M. Henry, W. Hendriksen, E. Bickersteth, H. E. Luccock, F. C. Grant. 3) J. Wesley, H. Alford, E. Schweizer, D. W. Burdick, W. Barclay, E. P. Gould, J. Gnilka, p. 190.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예수님을 억제하여 집으로 데려 오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하지 못했음을 지시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후에 가족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행 1:14).
아무튼,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해짐에 따라서 오해와 반대가 끊임없이 따랐다”(I. H. Marshall)는 사실은,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가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의 평판에 개의치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어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 때로, 세상의 평판이란 사단에게 속한 것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미0쳤다고 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미0친 자’라는 말을 들었고(왕하 9:11), 설교를 마친 바울은 베스도에게서 미0쳤다는 말을 들었고(행 26:24), 사람들의 전승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방어한 마틴 루터(M. Luther)는 이전의 동정하던 자들에게서조차 ‘바보’ 또는 ‘귀신 들린 자’로 간주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에 대해 웰즈(H. G. Wells)1)가 “이웃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보다 더 크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를 더 크게 들어야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평가인가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평가인가 함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W. Barclay.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