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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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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란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간행동과 정신과정에 대한 연구는 엄밀한 관찰과 실험 그리고 합리적인 추론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요구합니다.
인간을 연구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분야는 매우 다양하고 넓습니다. 기초가 되는 분야로는 인간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지각 심리학,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습 심리학,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구조물인 뇌의 구 조와 신경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 심리학, 인간의 사고 과정을 연구하는 인지 심리학, 언어 과정을 연구하는 언어 심리학,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발달 심리학, 사회속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 심리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최근 여러 학문 분야가 함께 어우러져 연구하고 있는 인지 과학이나 신경 과학등도 매우 중요한 기초 분야로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적응 행동과 이상 행동을 다루는 상담 심리학이나 이상 심리학,산업 조직 내의 행동을 다루는 산업 심리학이나 조직 심리학,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연구하는 공학 심리학, 건강한 생활의 문제를 다루는 건강 심리학이나 환경심리학, 학교 장면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교 심리학이나 교육 심리학, 소비 사회에서 소비자의 행동을 연구하는 소비자 /광고 심리학 등은 심리학의 기초 지식을 응용한 분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의 역사
심리학의 역사적 근원은 과학과 철학에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과학자들이 마음의 연구에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심리학은 비로소 하나의 독립적인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과학자와 철학자들 모두 지식의 원천으로서 체계적 관찰과 엄격한 추론을 사용하지만 철학자가 상대적으로 추론적인 방법을 더 많이 이용한다. 예를 들어, 철학자는 다른 사람의 행동 경향을 논할 때 추론을 사용하는 반면에 심리학자는 이 문제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의 정서적, 상황적 요인을 연구함으로써 접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의 기원이 철학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적 근원
심리학의 철학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특히 지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군인으로서 또한 지식인으로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용맹하다고 알려진 플라톤은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감각을 의심하였다. 그는 우리 감각은, 곧은 막대가 물속에서 휘어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인간은 지식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추론이 이러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고, 이렇게 추론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철학적 접근을 이성주의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꿈, 지각, 정신질환을 포함한 다양한 심리학적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추론을 사용함에 있어,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렸다. 즉 실제 과학적 사실과는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물체를 볼 때 우리의 눈에서 빛이 발사되어 그 빛에 의해 물체를 본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비록 추론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접근 방법을 택하였고,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감각경험을 플라톤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는데, 예를 들어, 그는 강한 정서적인 경험을 하는 동안에는 뇌보다 심장이 더 민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부정확한 지식이나 방법 등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심리학사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심리학적인 주제에 대해 형식을 갖추어서 깊이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철학자들보다 신학자들에 의해 심리학적인 질문이 연구되었다. 당시 이러한 질문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부(敎父)였다.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일 죽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추종자로, 젊어서는 방탕했고 그의 이러한 생활은 기독교에 귀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자서전인 '고백'에서 자기분석을 통해 기억과 정서, 동기에 대한 자기의 관점을 이야기하였고, 인간 이성과 동물적 열정, 특히 성욕간의 지속적인 갈등에 대한 통찰을 프로이드보다 훨씬 더 먼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을 심리학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연구에 있어 과학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이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중세 시대에는 경험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처벌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는 거의 이슬람 지식인들에게서만 이루어다. 이러한 세류를 극복하고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철학자가 바로 베이컨(Bacon)이다. 베이컨은 오감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강조한 아랍 과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들에게 있어 권위에 대항한 경험주의를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종교학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속되었던 르네상스 시기에는 중세와는 달리 인간이 다시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의 과학자 및 철학자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의존하여 심리학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정신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데카르트 (Decartes)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최초의 현대적 이성주의자인 데카르트는 스스로의 추론으로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는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도의 추론을 사용하였다.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제안된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견해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권위에 대항하는 데카르트를 억압하기 위하여 그의 저서들을 금서로서 금지하기까지 이른다.
한편, 일부 지식인들은 이성주의보다 경험주의를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인질문에 대한 신학자들의 답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다. 베이컨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성격적으로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베이컨은 증명, 체계적 관찰, 회의법 등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과학의 틀을 잡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로크 (Locke) 역시 베이컨과 같이 경험주의 철학의 선구자가 된다. 로크는 인간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 인생경험으로 채워 나가는 백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데카르트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은 지식이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이란 단지 인생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유전과 인생경험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관심은 본성(nature)과 양육 (nurture)의 논쟁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절충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 (Kant)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칸트는 지식이란 물리적 환경으로부터의 감각의 조직화와 이해의 생득적 정신기제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비록 태어난 곳의 언어 경험에 의해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말하는 능력과 언어는 타고난 두뇌기제에 의존하므로, 동물은 언어를 학습할 수는 없지만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의 기제를 지닌 동물들은 경험을 통해 언어의 학습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주제를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는 정신은 직접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더욱이 그 내용은 일정한 흐름에 있기 때문에 정신의 연구는 과학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객관성을 결코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적 근원
19세기 들어서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 어려움을 가졌던 심리적 과정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심리적인 주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에 일반적인 추론에 근거한 믿음은 전기가 선을 통해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신경자극도 신경을 따라 즉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헬름홀츠(Helmholtz)가 수행한 연구에 의해 부정된다.
신경자극 연구에서 헬름홀츠는 신경의 활동이 몇 분의 일 초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동물과 인간에 대한 실험을 통해 발견하였다. 한 실험에서 인간 피험자들로 하여금 발이나 허벅지에 접촉이 느껴지는 순간 즉시 버튼을 누르도록 하였는데, 피험자들은 허벅지를 자극할 때 보다 발을 자극할 때 더 느리게 반응하였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척수를 거쳐 뇌에까지 연결되는 신경의 길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신경자극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또한 헬름홀츠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과학자들은 뇌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발견들을 하게 된다. 그 중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연구자는 프랑스의 생리학자인 플로렌스(Flourens)였다. 그의 연구는 동물을 이용하여 행동과 특정 뇌 부위의 손상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대뇌의 손상이 운동기능의 부조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등이 이러한 연구의 결과들입니다. 이외에도 외과 의사이며 인류학자인 브로카(Broca)는 인간의 뇌 손상에 대해 유사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는 뇌의 앞쪽의 왼쪽 부분이 손상을 입은 환자는 언어능력이 손상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그 영역이 바로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이라 불리는 곳이다.
다른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뇌의 구조와 별개로 정신 과정의 과학적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자는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페흐너(Fechner)를 들 수 있다. 페흐너는 당시 과학자들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베버 (Weber)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물리학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정신물리학은 페흐너로 하여금 물리적 자극과 정신적 경험간의 관계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성취는 심리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믿었던 칸트(Kant)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신물리학은 밝기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빛의 세기 변화는 어느 정도인가, 소음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소리의 정도 변화는 얼마나 되는가 등 정신의 작용을 수리적으로 표현하여 보다 체계적인 연구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정신물리학은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태어난 심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지난세기 동안 심리학에서 중요한 연구 방법의 하나로서 사용되어 왔다. 현대에도 여전히 정신물리학적인 실험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밝혀내는데, 예를 들면 텔레비젼의 화면을 개발한 연구자는 색, 밝기 같은 텔레비젼 화면의 물리적 특성과 보는 사람의 정신의 질적 경험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 정신물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19세기 후반의 심리학자들은 영구의 자연주의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주창한 진화 이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다윈은 5년간 동식물을 관찰한 뒤 그 연구결과를 '종의 기원'에서 발표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동물은 그 선대로부터 진화되어 간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낸 사람이 바로 다윈이다. 다윈의 이 이론은 그의 사촌인 갈톤(Galton)의 연구를 통해 심리학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갈톤은 많은 분야에 관심을 지닌 훌륭한 과학자였다. 다윈의 진화 이론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갈톤은 자연 선택이 인간 능력의 발달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고도로 능력이 발달된 개체는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들간의 지능, 성격, 물리적 특성 등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개인차 심리학 분야의 등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개인차 심리학은 갈톤과 함께 연구를 수행했던 심리학자 카텔(Cattell)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었다. 1890년에 카텔에 의해 시각, 청각, 물리적 기술 등 다양한 검사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 정신검사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그는 1895년 미국심리학회(APA) 회장직을 수행하였고 심리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카텔은 심리학을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서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학문으로서의 위상 확립에도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학의 성장
심리학의 역사에 있어 카텔(Cattell)은 최초의 심리학 교수라고 평가되어진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최초의 교수가 기껏 100년 전에 나올 정도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발전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심리학은 긴 과거를 지니고 있으나 그 역사는 짧다'고 한 에빙하우스 (Ebbinghaus)에 의하면 많은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심리학적인 주제에 관심을 두어왔으나, 심리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적으로 분리된 학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의 출발점을 독일의 생리학자인 분트(Wundt)가 라이프찌히 대학에 실험실을 개설한 시기로 보고 있다. 분트는 1874년 '생리 심리학의 원칙'이라는 역사적인 저서에서 과학적인 심리학을 위한 그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책제목에서 생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생리 심리학 자체가 주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리적인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생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1875년에 분트는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학생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사용되던 작은 방에 연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이전에 있어왔던 분트의 연구실에 대한 요청은 마음이나 파고 따지게 만드는 심리학과 같은 학문이 발전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학교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1879년 초 분트의 연구실은 캐텔과 같이 유럽과 북미의 유명한 심리학자들에게 연구의 장이 되었다. 분트가 라이프찌히 대학에 실험실을 개설한지 꼭 100년 되는 해인 1979년, 심리학자들은 심리학 100주년을 기념하고 각종 행사 등을 통해 분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적 근원으로부터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분트의 실험실 개설까지를 다루어 보았다. 이 후 페이지를 통해 분트의 실험실 이후 어떠한 심리학이 생겨나고 발전되어져 왔는가를 알아볼 것입니다.
초기 심리학파
1. 구성주의
최초의 심리학 학파인 구성주의는 19세기에 생겨났다. 구성주의자들은 물질을 분석하고 세포, 원자, 분자로 분류하는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생겨났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성주의자들은 마음을 구성요소를 통해 분석하고 이러한 구성요소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였다.
구성주의는 Wundt의 제자인 Titchener에 의해 이름 붙여졌고 일반화되었다. 영국인인 Titchener는 코넬대학의 학부 교수가 되면서 미국에 구성주의를 소개하게 된다. 마음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는 정신의 기본 요소라고 생각한 심상, 느낌, 감각의 세 가지 요소로써 복잡한 정신 경험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분석적 내성법 (analystic introspection)'을 사용하였다. 내성법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하는 방법으로써 초창기의 심리학에서 많이 쓰였다. 이것은 그냥 자기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분석적 내성법을 이용한 전형적인 한 연구에서 Titchener는 피험자에게 소리와 같은 자극을 제시한 후에 피험자로 하여금 그 소리로 인해 생겨나는 심상, 느낌, 감각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분석적 내성법은 꼼꼼하고 지루한 절차여서, 피험자가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만 번의 내성을 하여야 했다. 그런 후에 1∼2초간 주어지는 자극에 대한 반응의 내성적 보고를 위해 20분이나 소요되었다.
Titchener의 학문적 기여 중에는 미각을 분석한 연구가 있는데, 이 연구를 통해 미각이 짠맛, 쓴맛, 단맛, 신맛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구성주의는 최초로 등장한 학파인 반면 형태주의(형태주의 심리학은 요소주의적인 심리학의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이후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큰 공헌)의 비판으로 가장 먼저모습을 감춘 학파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연구가 연구실에만 제한이 되었고, 또한 이성적이고 언어적으로 능숙한 성인의 의식적인 정신적 경험을 연구하는데 제한된 내성법에 지나치게 의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일반화의 문제라고 도 하는데, 일반화란, 연구실에서 혹은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들이 실제 생활에서도 비슷하게 예측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특정한 자극에 대한 내성법적 보고가 자극의 변화에 대해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에 내성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마디로 과학의 필수요건인 객관성이 충족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분석적 내성법의 단점이 구성주의자들의 소멸을 초래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많은 심리학자들은 피험자들의 정신과정에 대한 언어적 보고를 이용한 연구 절차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연과학처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기능주의
미국의 심리학파인 기능주의는 구성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났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정신의 구성 요소를 분석함에 있어서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즉, 어린이, 정신장애자, 동물 등은 대상에서 제외했고, 실험실에서의 연구에만 초점을 두었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정신이 인간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느냐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만일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맛에 대한 정신적 요소를 연구한다면,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다른 맛을 구별하는 능력이 어떻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가장 유명한 기능주의 심리학자는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William James이다. 그는 여러 가지의 지능 분야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심리학에 대한 접근을 살펴보면 제임스는 정신을 별개의 조각들로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의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선호했던 일종의 분석적 연구는 정신(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결국 Wundt와의 경쟁을 야기 시키게 된다.
3. 행동주의
기능주의는 Povlov와 Thorndike의 연구와 연결되면서 행동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을 자연 과학의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분야로 보고, 심리학의 이론적 목표를 행동을 예견하고 통제하는 것에 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성법은 심리학적 방법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식에 의해서 그 자체에 제공하는 자료 또한 과학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대표적 행동주의 심리학자로 미국의 심리학자인 Watson은 기능주의 심리학자들과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공유했던, 정신이 심리학의 적절한 연구대상이라는 점에 반대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저명한 심리학자 Pavlov는 그의 연구소에서 정신에 대한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해고시킬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Watson과 Pavlov같은 심리학자들에게 심리학 연구의 올바른 대상은 관찰 가능한 행동이었으며, 정신의 경험과는 달리 행동은 측정되어지고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증명되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심리학자들은 배고픔에 대한 정신적 경험을 연구하는 반면에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관찰 가능한 섭식 행동을 연구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비록 Watson은 정신 과정이 행동을 야기시킨다는 것은 부정했지만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고픔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경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했던 반면에 섭식을 야기시키는 정신적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배고픈 느낌 같은 정신에서 섭식의 원인을 찾는 대신에 저혈당과 같은 신체 혹은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 같은 환경에서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세계보다는 환경이나 행동에 초점을 맟춤으로서 과학적인연구를 진행하고자 하였으며 실제 인간 행동의 변화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행동주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국에는 행동주의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차츰 인간의 내부 정신과정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 새로운 학파가 등장하게 됩니다.
4. 형태주의
마음을 구성 요소들로 분석해 내려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의 시도와 인간을 환경적 반응에 대한 수동적인반응자로 보려 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형태주의 혹은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을 창시한 독일의 심리학자 Wertheimer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Wertheimer는 인간이란 개별적 부분의 조합을 인식하기보다는 전체로 인식하는 존재라는 그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게슈탈트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영어에서의 Form 혹은 Shape에 해당된다. 형태주의 혹은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였고, 이런 기본적인 가정 때문에 Wertheimer는 정신적 경험을 그것의 각각의 부분으로 분석해 내려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의 시도를벽돌과 시멘트의 심리학이라고 비웃었다. 이같이 게슈탈트 심리학은 감각들을 의미있는 지각들로 조직함에 있어서 정신의 활동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심리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게슈탈트 심리학이 Wertheimer에 의하여 주창되었지만 그의 동료인 Koffka와 Kohler에 의하여 대중화되었다. 이 두 사람은 나치가 사라진 후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에 소개했다. 쾰러는 형태주의자들과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최고의 측면들을 포함한 심리학을 만들어 내야한다고 했으며, 인지주의적 관점을 선호했던 심리학자들은 쾰러의 조언을 따랐다. 또한 독일의 심리학자 Lewin은 미국으로 이민한 후 게슈탈트 심리학의 원리들을 리더쉽 형태, 소수 그룹 행동의 원칙 그리고 사회 충돌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활용하는 연구를 활성화시키게 되었다.
5. 정신분석
다른 초기의 심리학파가 대학에서 시작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신분석은 의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Sigmund Freud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경과 의사였다. 그는 스스로 정신의 정복자라고 말할 정도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사람이었다. 인류를 우선 동물로 보았던 프로이드의 견해는 다윈의 진화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은 신체적 고통을 겪는 호환자 예를 들어 마비, 실어증, 신체 감각의 상실같이 명백하게 병인을 알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프로이드의 치료 시도에서 발전하였다. 전환성 히스테리(conversion histeria)의징후를 겪는 환자들에 대한 그의 치료에 기초하여 프로이드는 정신 장애란 성적 흥미에 대한 사회의 금기에 의하여 야기되는 성에 대한 무의식들의 충돌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충돌들은 때때로 환자들에게 금기 행동에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구실을 제공하는 전환성 히스테리에서 볼 수 있는 신체적 증후들로 전환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무의식적 동기들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생각들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을 심리학에 포함시킨 최초의 연구자였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행동이 정상이건 비정상이건 간에 때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학적 동기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은 주로 성과 같은 무의식에 의하여 동기화 된다고 함으로써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동 초기의 경험들이 성격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펴기도 하였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에 저장된 아동 초기 경험의 기억들이 인생을 통하여 행동에 지속적으로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으며,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런 무의식적 영향은 많은 인간 행동의 비논리성과 심리학적 장애의 기원을 설명해준다고도 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프로이드는 심리학 역사상 가장 영향있는 인물 중 명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많은 학자로부터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무의식이 아무런 명확한 원인이 없는 행동을 설명하는 데 너무 쉽게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정신분석가들은 성적 추동, 무의식적 과정, 그리고 아동 초기의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합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프로이드는 그의 이론을 실험적으로 측정한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환자들과 면담을 한 후에 적었던 그의 기록에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게다가 프로이드는 심리적 장애 상태에 있는 소수의 사례 연구 결과를 모든 이들에게 일반화시킴으로서 과학적 접근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드의 견해는 꿈, 창조, 동기, 발달, 성격, 그리고 심리요법 등과 같이 다양한 주제들은 심리학적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와 함께 프로이드의 생각은 예술, 문학, 영화 등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심리주의적'이라는 말은 바로 프로이드 심리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
1, 2 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다른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심리학도 미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심리학은 뚜렷하게 여러 분야로 나뉘게 되는데 행동주의(Behaviorism), 정신분석(Psychoanalysis), 인본주의(Humanism), 인지주의(Cognitive Psychology), 그리고 생리심리학(Biopsychology) 등이 대표적인 분야들이다.
1. 행동주의
행동주의적 관점은 행동주의로부터 나왔다. 행동주의를 이끈 사람은 미국의 심리학자 B. F. Skinner이다. Watson과 같이 Skinner는 정신적 과정을 무시하고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의 연구로서 심리학을 제안하였다. 극단적 행동주의자들은 여전히 심리학적 연구에 있어 정신적 경험에 대한 보고는 적절한 주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무시하였다. 그러나 Watson과는 반대로 Skinner는 행동 조절에 있어서 환경에 대한 자극보다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Skinner는 동물과 사람은 긍정적 결과가 따라오는 행동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여러분이 공부한 결과 'A'라는 성적이 나왔다면 나중에도 공부하는 행동을 증가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Skinner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의 이러한 행위는 '긍정적으로 강화를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Skinner는 1948년에 Skinner는 'Walden II'란 저서를 통해 유토피아에서의 사회란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 긍정적 강화를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을 조절하는 행동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묘사된다. 여기에는행동주의적 이상형은 없을지라도 행동주의적 관점은 아이들 교육이라든지 산업 현장에서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심리적 장애의 치료 등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Skinner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적 관점의 영향은 극단적 행동주의자들의 정신과정에 대한 무관심에 반대하는 경향으로 확대되어 갔고, 이러한 영향으로 최근에는 점차 쇠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인지적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반대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인데, 그 중 Albert Bandura 는 인지 행동주의는 기본적으로 행동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행동주의와 비슷하나 행동의 결정 등의 과정에서 인지(Cognition), 즉 마음의 작용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2. 정신분석
행동주의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적 접근도 초기 심리학의 학파 중 하나였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쇠퇴는 그의 제자 두 명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두 제자는 각각 칼 융 (Carl Jung)과 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였으며, 그들은 프로이드가 주창한 이론의 중요한 측면과 반대되는 정신분석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융과 아들러 같은 소위 신프로이드 학파는 성과 공격성 같은 생리적 측면을 프로이드보다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였고,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융은 내향성과 외향성 개념을 포함한 그 나름의 성격 이론을 발전시겼고, 한편 아들러는 우월감에 대한 투쟁에 의해서 본능적으로 아동기의 열등의식을 과잉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다른 신프로이드주의 또한 정신분석적 접근에 기여하게 되는데, 프로이드의 딸인 안나 프로이드 (Anna Freud)는 아동 정신분석의 분야를 주도하였고, 그녀의 경쟁자였던 멜라닌 클라인 (Melanie Klein)은 역할치료 기법을 발전시켰다. 에리히 호니 (Erich Horney)는 우리의 나약하고 의존적인 유아기 경험의 불안정감에서 오는 불안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성격 발달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Horney는 인간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사회적 순종에 대한 경향성으로 얼마나 잘 설명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유사한 이론을 제안하였다.
해리 스택 설리반 (Harry Staek Sullivan)은 정신분열증의 이해와 치료에 대한 정신분석적 기법의 적용을 이끌었다. 그리고 에릭 에리슨 (Erik Erikson)은 인생을 통한 발달 이론에 기여하였고, 특히 전체 인생에 있어서 해결해야 하는 위기를 강조했다.
정신분석적 관점은 생리적 추동의 중요성은 무시하였으나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나 무의식의 중요성은 강조하였다
3. 인본주의
인본주의적 접근을 심리학에 있어 제 3의 세력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분석적 접근과 행동주의적 접근에 대한 최초의 대안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 접근은 1950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이브라함 매슬로우 (Abraham Maslow)와 칼 로저스 (Carl Rogers)가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무의식적인 동기와 환경적 자극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태어나게 되었다.
1967년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맡았던 매슬로우는 처음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자였으나, 후에 관찰 가능한 행동과 환경의 영향에 대해서만 초점을 두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인 자아 실현에 대한 욕구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의 잠재력의 실현에 대해 적용되는 용어이다.
매슬로우의 견해는 로저스에 의해 계승된다. 두 사람은 심리학의 주제는 개인의 고유한 정신적 경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그들은 기능주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와 학문적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개인은 자유 의지를 가졌으며,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가정은 실존주의 심리학과의 유사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의 접근은 우리의 정신적 발전은 우리의 궁극적인 유한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의 자각에 달려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유한성을 무시하기도 하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하루하루 순간을 위해 살고 나머지 시간을 즐거움을 찾는데 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로저스에 의해 심리치료의 분야의 변화에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개인 중심적 치료는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지만 개인적 성장경험과 의식의 성장과 같은 인본주의 심리학의 다른 측면은 과학적 기반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받아 왔다. 이러한 과학적 정확성의 부족은 인본주의 심리학이 심리학에 있어서 학문적인 영향을 비교적 적게 미친 원인이 되었으며, 로저스는 생의 말기에서 이를 해석하였다. 이러한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 심리학은 사랑, 이타성, 건강한 인격의 발전과 인간 경험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연구를 진작시키는데 가치 있는 공헌을 하게 된다 노련한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실험으로 입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왔다
4. 인지주의
최근 10년간 심리학에 있어 인지적 관점에 의해 주도되는 소위 '인지 혁명'이라 불리는 변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인지적 접근은 게슈탈트 심리학과 행동주의 심리학의 결합이라고 도 볼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처럼 인지 심리학은 유기체의 지각과 정보 처리, 경험의 해석 등 활동적인 정신의 작용을 강조한다. 그리고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이 인지 심리학은 객관적이고 잘 통제된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지심리학은 언어적 보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관찰 가능한 반응을 통해 정신적 과정을 추론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과 같은 정신적 작용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엄격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과는 달리 많은 인지 심리학자들은 정신 작용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인지 심리학은 아동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면담에 기반을 두고 아동의 정신적 발달에 대해 인지발달 이론을 제시한 스위스의 생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장 삐아제 (Jean Piaget)의 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지적 관점은 또한 뇌를 정보처리기로 시물레이션한 지난 30년간의 컴퓨터 혁명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자는 노벨상을 받은 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몬 (Herbert Simon)이다. 어떤 인지심리학자는 인간 사고 과정 모델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기도 하고, 컴퓨터 체스 게임과 같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향상시키기 위해 인간의 사고 과정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지적 관점은 심리학의 대부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인지 심리학자인 조지 켈리 (George Kelly)는 성격과 심리치료, 정신 이상에 대한 연구에 적용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켈리는 우리가 개인적 구성 개념이라고 부르는 인지 구조에 의해 행동한다고 믿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을 뜻한다.
5. 생리 심리학
20세기 초기의 대부분의 심리학파는 19세기의 생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심리학에 있어서 엄격한 의미의 생리학적인 학파는 없다. 최근 10년간 복잡한 연구 기기들과 더불어 증가된 행동과 정신 과정의 생리학적 기반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생리 심리학적인 관점이 나타났다.
생리 심리학은 뇌를 연구하며 호르몬 체계, 심리학적인 기능의 유전에 관심을 두었다. 비록 생리 심리학의 연구자들이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중요한 연구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의 신경외과 의사인 펜필드 (Penfield)는 간질 환자의 발작을 줄이기 위한 외과적 수술 도중에 약한 전류로 뇌의 표면에 자극을 주어 뇌의 지도를 완성하고, 뇌의 한쪽의 특정 부위에 대한 자극은 반대편의 신체 일부의 움직임을 유발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발견의 결과를 정리하여 뇌의 부위가 담당하고 있는 신체 부위를 표시한 뇌 지도를 만들 수가 있었다.
1981년에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로저 스퍼리 (Roger Sperry)와 그의 동료는 각 대뇌 반구는 특정 심리적 기능에 대해 다른 한쪽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생리 심리학적 관점의 영향이 증가함으로 인해 심리학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정의될 수 있다.
"심리학은 행동과 정신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생리적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