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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의 홈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2006년에 개장한 신축 경기장으로, 중동 항공사의 스폰서십으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유럽을 비롯한 축구계에서 경기장 신축은 당면한 과제처럼 여겨지고 있다. <출처: (cc) Ed g2s at en.wikipedia.org>
경기장 신축(혹은 증개축)은 현재 유럽 축구산업계의 필사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 유럽 각국의 축구장은 대체로 지난 1980년대에 지어진 ‘올드 모델’이다. 긴 타원형의 관중석 아래에 푸른 잔디, 보도석과 귀빈석, 라커룸과 간이 매점 그리고 협소한 주차장이 전부다.
그러나 이제는 ‘축구장’이라고 하면 축구라는 고전적인 ‘상품’에 더하여 영화와 쇼핑과 레저가 복합적으로 연출되는 21세기형 대규모 스포츠타운을 상상한다. 극장의 팝콘처럼, 이 부대시설들이 축구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짭짤한 수익을 올리게 해줄 뿐만 아니라, 역시 극장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시설의 완비 여부에 따라 경기장 입장료를 인상할 요인까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TSG 1899 호펜하임 구단이다. 이 구단은 단 6,350명을 수용할 수 있던 기존의 디트마르 홉 스타디움 대신 3만여 명 수용 규모의 카를벤츠 스타디움을 각고의 노력 끝에 성취해냈는데, 이 경기장은 구단의 수익이나 성적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0년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지난 80년대 후반에 대체로 신축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각 지역 구단들(팔레르모, 피오렌티나, 라치오 등)도 구장 신축에 앞장서고 있다.
구장 신축의 방법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 구장 명칭권 판매다. 이는 특히 미국 프로 스포츠에서 흔한 일이다. 1993년 미국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 이름은 맥주회사 쿠어스에 10년 계약으로 1500만 달러에 팔렸는데, 지금도 이 야구장은 ‘쿠어스 필드’라고 불린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의 이름도 통신회사에 5000만 달러에 팔려 ‘팩벨 파크’라 불린다. CNN 회장의 이름을 딴 ‘터너 필드’처럼 기부자의 이름으로 된 구장도 많다. 잉글랜드 명문 아스널의 신축 경기장 역시 중동 항공사를 스폰서로 하여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코트디부아르의 경기 당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로 향하고 있는 축구 팬들. 경기장은 불시착한 거대한 비행물체처럼 모던하면서도 가볍게 느껴진다.
그리고 뮌헨의 스타디움이 있다. 2006 독일 월드컵의 개막 경기가 열린 뮌헨의 신축 경기장 명칭은 ‘알리안츠 아레나’. 독일의 세계적인 보험회사 알리안츠가 4200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지었다. 그 대가로 알리안츠는 자사 로고를 15년 동안 내걸 수 있게 되었다.
그해 6월, 쾰른에서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가 빛나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무득점의 무기력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을 때, 같은 시각 나는 뮌헨에 있었다. 이미 조별 리그 탈락이 확정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코트디부아르의 마지막 경기를 위하여 뮌헨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경기를 위하여 경기장에 가까이 가면서 나는 거대한 우주비행물체가 불시착한 것처럼 기이하면서도 장엄한 광경을 보았다.
다이아몬드 쿠션 모양의 반투명 플라스틱 유니트 2700개가 감싸고 있는 알리안츠 아레나는 모던시대의 압도적인 위용이나 마천루의 기상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경이로우면서도 기이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으며, 전 세계에서 몰려든 팬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이 현대의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진지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로 유명한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촉 & 드 뫼롱이 설계한 이 경기장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빨아들일 만큼 거대한 몸체를 지녔으면서도 그 질량감은 이제 막 새로운 항해를 위해 이륙 준비를 마친 첨단 비행물체처럼 가볍게만 느껴진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미지와의 조우>의 한 장면처럼 관중은 지루하고 고달픈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신비롭게까지 느껴지는 경기장으로 아름답게 이동한다. 지하철과 경기장 사이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관중이 입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조차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연출돼, 이를 경기장의 상단에서 내려다 보면 가히 축구라는 종교를 위해 순례를 떠나온 수많은 신도들의 즐거운 행렬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기장은 어떨까.
철거되기 전의 동대문운동장 전경(왼쪽)과 정문(오른쪽)의 모습. 이곳의 철거와 함께 20세기 과거의 기억이 사라진 우리에게 이제 축구장은 어떤 의미일까.
2008년 4월, 동대문운동장에 갔었다. 이미 그 전해인 2007년 12월 18일에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의 철거가 시작되어 드넓은 규모의 절반이 공사판으로 변한 다음이었는데, 그해 봄에는 축구장 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운동장 내에서 장사를 하던 풍물시장 상인들도 모두 이전한 다음이었고, 그래서 운동장은 경비용역 회사에 의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완전히 철거되어 맨 땅을 드러내고 있는 야구장.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찾지 않는, 포크레인만이 작업 중인 축구장.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가 성곽을 허물고 훗날 히로히토 일왕이 되는 ‘동궁(東宮)’의 결혼을 기념함과 동시에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근대적 체육시설로 삼고자 1926년 3월에 건립한 시설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제 역할을 하던 동대문운동장은 1984년에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고,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최신 경기장들이 속속 들어서는 바람에 철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야구장은 2008년 4월 10일에 철거가 완료되었고 축구장까지 포함하여 그해 6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에 따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가 조성되었다. 20세기의 기억이 말갛게 사라진 21세기의 테마파크를 보며 오늘날 축구장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방패연과 황포돛대, 전통 소반을 골자로 설계한 서울월드컵 경기장. 거대하지만 압도적이지 않은, 유연하고 여유로운 경기장은 2003년 <월드사커>가 선정한 ‘세계 10대 아름다운 경기장’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출처: (cc) bryanh at ko.wikipedia.org>
하늘공원에 올라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내려다본다. 거대한 스케일이다. 현대 도시에서 이만한 스케일의 공간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내면적 합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2002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지어진 이 경기장 역시 1997년의 IMF 사태에 의하여 기획 자체가 폐기될 운명이었으나 대한축구협회의 실행력과 당시 정부의 결단에 의하여 또 하나의 상전벽해를 이뤘다.
이 경기장을 설계한 건축가 류춘수는 방패연과 전통 소반, 그리고 황포돛대의 이미지를 설계의 기본 개념으로 활용하였다. 물론 이 셋은 그 자체로는 상호 연관성이 희박하다. ‘한국의 전통 문화’라는 큰 범주에 묶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일상에서 연과 소반과 돛대가 한 자리에 겹쳐질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러나 하나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 세 가지는 적절한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하늘공원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우선 장려(壯麗)한 것은 경기장의 지붕, 그러니까 방패연과 황포 돛대가 어울리는 광경이다. 6만여 명이 운집하였다가 빠져나가는 건축물임에도 이런 형상은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한 운동감을 내재하고 있다. 아틀라스 같은 거인이 있어 슬며시 밀어내면 한강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듯한 경이로운 가벼움이 느껴진다. 거대하지만 압도적이지 않은, 공기의 울림을 살며시 안고 있는 볼륨감은 경기장 안팎의 둔중한 산업화의 물질적 압력이 아니라 21세기의 창의와 열정을 언제든지 담아낼 수 있을 듯, 유연하다.
지난 2003년 세계 최고 권위의 영국 축구 전문지 [월드사커]가 이 경기장을 ‘세계 10대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의 하나로 선정한 까닭 역시 보는 이를 질색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유연하고 상쾌한 기운을 너그러이 품고 있는 여유 때문이다.
건축가 류춘수는, 처음에 경기장을 상상할 때 원형 관람석을 몇 번이고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방패연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야말로 등줄기에 전율이 흐르는 착상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가운데가 여유 있게 뚫어져 있는 방패연의 공간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기존의 설계안은 모조리 휴지통으로 던져졌다.
전통의 소반은 경기장 안팎의 콘크리트 구조와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들, 그리고 6만여 명을 수용하는 관중석의 밑그림이 되었다. 소반은, 그것이 일상적으로 쓰이던 과거에는 제철 과일이나 약식이나 조촐한 술 대접의 용도로 기능했다. 이제 그 기능은 사라졌으되 우리 모두의 내면에 뿌리내려 있는 그 이미지만큼은 경기장의 안팎을 두루 감싸는 형상이 되어 6만여 명의 열정을 담아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경기장은 외딴 곳에 정박된 둔중한 배가 아니라 서울 서북부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며, 상암 지역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 자체로 복합문화공간의 기능까지 훌륭하게 치르고 있는 이 경기장은 인근의 상암 DMC를 쌍두마차로 하여 서울 서북부 부도심의 중핵이 되었다.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자유로, 북부간선도로, 지하철 6호선, 경의선, 신공항철도, 성산대교 등이 모두 월드컵경기장을 향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6만 여 관중석 스탠드는 무채색으로 꾸며졌다. 경기장 안팎의 이런 크고 작은 디테일에는 한국적 실사구시의 정신이 투영되었다.
물론 그 공사 과정은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패스트 트랙(fast track: 설계와 시공의 병행)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토목 공사 설계도가 나오면 곧바로 시공에 들어가는 것을 패스트 트랙이라고 한다. 대규모 공사의 경우 더러 설계 오류나 시행착오 혹은 특별한 사유에 의하여 설계 및 시공의 변경이 이뤄질 수도 있는데,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축 경기장은 그러한 여유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대규모 건축물의 ‘패스트 트랙’ 시행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일은 ‘패스트’하게 완료되었다.
비평적 관점에서 월드컵 경기장의 시공 과정을 검토했던 건축가 함인선은 경기장 완공 이후 <문화일보> 2002년 3월 5일자 기고문에서 “경기장의 지붕은 건축가의 창의력, 시공자의 기술력, 그 나라의 부품 산업 능력 등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전제하면서 “관중석을 담는 기단은 소반처럼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통상 타원형인 여타 축구장과 형태적인 차별성을 가질 뿐더러 직선화된 부품화가 훨씬 용이하여 공기와 비용을 상당히 절약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평가를 마저 들어보자.
“지붕 역시 직사각형인 방패연의 모서리를 따서 팔각형으로 만들어 기단과 형태적 일치를 이룬다. 더욱이 위로 도톰한 팔각형이기에 밑에서 보면, 기와 무게로 자연스레 처진 한옥의 추녀선을 연상시킨다.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공법이지만 배의 돛대가 그렇듯이 훨씬 경쾌하며 경제적인 방식이다.”
방패연과 돛배와 소반으로 시작된 이 경기장의 ‘전통 이미지 효과’는 그 내부로까지 실속 있게 이어진다. 단순히 외관만 과거의 문화적 원형을 덧씌워놓은 게 아니라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안전시설이나 보행시설까지도 전통의 점과 선이 콘크리트의 면들을 여유있게 채우고 있었다.
서측 주출입구의 귀빈석 로비는 한눈에도 대청마루의 응용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국내산 대리석을 유연하게 깔아놓은 로비의 짙은 빛깔과 대청마루식 안치는 안동의 병산서원이나 지리산 화엄사의 각황전 마루를 떠올리게 한다. 그 마루 위로 성벽이 응용된 묽은 색의 벽이 흐르고 맨 위의 천정으로 서까래가 탄력 있게 가로지른다.
6만여 석의 관중석 스탠드는 ‘무채색의 행렬’이다. 국내외의 여러 경기장에서 좌석에 형형색색의 색깔을 입혔지만, 이 경기장에는 오직 콘크리트의 무채색에 가까운 좌석으로 세팅되어 있다. 무채색은, 얼핏 보면 특별한 개성이 없고 둔탁해 보이지만 차분하고 음전하다. 사실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에 온갖 색까지 입히면 크기만 과장되어 위압적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천박하게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이 경기장은 과감히 무채색으로 통일하였고 지붕재로 쓰인 테프론 막이나 스탠드, 그리고 경기장 안팎의 사인보드까지도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음전한 색을 유지하고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한 단면이다.
설계 과정의 한 에피소드로, 당시 설계팀은 기본 설계안을 제출하면서 이 경기장의 이름을 ‘우리세움(Wooriseum)’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 ‘우리’가 직접 세운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로마의 콜로세움이 갖는 경연장으로서의 역사적 상징성까지 고려한 작명이었다. 물론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 경기장이 IMF 이후의 사회심리적 상태와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이라는 대규모 행사에 응하는 자긍심의 표현으로 여길 만한 일인데, 그러한 신념이 실제적으로 ‘우리세움’으로 불리지는 않게 되었다 할지라도 경기장 안팎의 크고 작은 디테일에 유연하게 적용되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경기장에서 꿈을 꾼다. 코치와 선수, 축구 관계자와 귀빈, 진행 요원과 볼보이들. 그리고 수만 명 관중들이 저마다의 꿈을 꾼다.
북측 스탠드에서는 서포터스들이 열렬히 응원한다. 경기가 소강 상태에 빠졌을 때는 ‘대~한민국!’을 유도하는 박자를 두들기고 우리 팀 선수가 흥분했을 때는 적절한 템포로 두들긴다. 상대 팀의 공격을 차단하여 얻어낸 속공 찬스 때에는 북이 산산조각 날 만큼 강렬히 연타를 한다. 그 연타는 선수를 향한 열렬한 성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격려의 난타이기도 하다.
경기장은 그런 곳이다. 6만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사분란하게 수행 지침을 따라 구호를 외치고 돌아가는 연병장이 결코 아니다. 6만여 명이 운집했지만, 그 숫자는 저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6만 개의 행렬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에 이 아름다운 열정의 용광로가 없다고 상상해보자. 그 얼마나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이겠는가. 경기장은 세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려는 현대인의 합창 무대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스포츠를 통하여, 좀 더 진전된 의미의 집합적 열정을 느꼈던 것은 2002년 월드컵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월드컵의 광장이었으며 대체로 그 당시의 광장은 단순히 16강을 넘어 4강까지 진출한 축구의 효과만이 아니라 정치적 민주화, 경제 성장, 문화 다양성과 새로운 세대의 문화 등이 여러 층위로 결합된 사회적 광장으로 요약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시청 앞에 펼쳐진 붉은악마의 응원 물결. 당시의 열정과 광장 문화를 두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선들이 존재했다. <출처: 연합뉴스>
그리하여 우리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2014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2002년을 성찰해야 한다. 당시의 열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선이 있었다.
첫째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를 ‘민족주의’로 수렴하려는 시선이었다. 당시 이어령은 “서양 사람들이 2백년 동안 닦아서 이룩한 산업주의 문명을 불과 20년 동안에 뛰어넘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그 문명-문화를 발신하는 월드컵”(중앙일보, 2002, 5, 30)이라고 썼고, 김지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의 ‘대~한민국’과 ‘짝짝짝 짝짝’ 5박자 박수가 “태극기의 원리와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 의식에서 나온 무의식적 물결이며 멀리는 동학농민전쟁, 가까이는 6월항쟁에 이르는 ‘자발적 역동성’이라는 역사의 연장선상으로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라 면면히 내려온 역사적 전통이 스포츠를 통해 나왔다”(한국일보, 2002, 7, 2)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이어령이 월드컵 4강과 올림픽 10권 이내 연속 진출이라는 승전보가 얼마나 가혹한 스포츠 현실에 기반한 애국주의인가를 생각한다면 위와 같이 쉽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또한 김지하가 유럽의 축구장에서 ‘짝짝짝 짝짝’ 같은 박수나 구호가 얼마나 자주 울려퍼지는 축구장의 보편적 언어인가를 알았다면 “붉은 악마 응원의 역동적 균형은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의 전 세계적인 문화적인 승리”라는 분석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시선은 이러한 국가주의의 환호성 사이를 지나 직접 광장 안으로 들어가서 담담히 그 열기를 성찰한 기록들이다. 당시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대한민국’, ‘태극기’, ‘애국가’라는 기표들과 애국주의, 국가주의라는 기의 사이에 일정한 ‘미끄러짐’, 즉 불일치 현상을 기록한 적 있고, 역시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이것은 월드컵이 만들어낸 가짜 욕망인가? 월드컵은 민족주의 또는 국민주의 열정을 부추켜 상업화의 텃밭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정체성을 정의할 가능성이 허약해지면 질수록 ‘나’와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향수와 욕망은 더 커지는가?”라고 성찰한 적 있다.
이런 맥락과 연관되면서도, 당시의 열정을 국가와 자본과 스포츠 권력과 시민적 저항이 골고루 분점하여 해석(독점)하고자 하는 흐름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그것이 앞으로 한국 사회의 어떤 열망으로 이어질 것인가를 성찰한 세 번째의 시선이 있다.
정치학자 정대화는 월드컵의 열기를 “넓은 의미에서 이 혁명은 자유와 해방의 계열에 속하는 것이지만 정체불명의 모호함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혁명의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무채색”(한겨레, 2002, 6, 26)이라고 썼고, 사회학자 김종엽은 “너무 거대한 에너지, 너무 많은 수의 군중이 참여한 사건이었기에 누군가가 마련한 수로를 따라 이 에너지가 단번에 쓸려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한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상징은 ‘대~한민국’ 이외에는 여전히 없을 것이고, 그것은 너무 무정형적이어서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썼다.
그 후, 1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그 ‘광장’이 얼마나 ‘무정형적’인가를 실감했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장만이 아니라 의미로서의 광장 또한 다양한 세력의 다양한 갈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충돌하는 10여 년이었다.
그 기울어진 광장에서는 축구공도 평탄하게 구를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전개가 안팎의 여러 문제와 상충되면서 아슬아슬한 평균대 위를 걸어야 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의 스포츠 또한 비록 흐릿해지긴 했으나 강력한 국가주의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새롭게 떠오른 시장 권력에 확실히 포박 당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월드컵의 광장 문화가 적어도 한국 스포츠의 국가주의, 상업주의, 승리 지상주의라는 기형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거의 작동하지 못했음을 여러 차원에서 확인한 바 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모순은 스포츠계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지도자의 폭력이나 금품 수수, 3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승부 조작의 여파, 승리 지상주의와 애국주의라는 블랙홀로 모든 가치와 눈물과 노력이 빨려 들어가는 현실은 축구와 스포츠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물리적 공간으로서 경기장은 실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안에서 뛰는 선수와 팬의 열정은 진실로 소중하다. 그러나 열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 열정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에밀 뒤르켐은 근대 사회를 해부한 역저 [자살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삶은 때때로 가혹하고 믿을 수 없으며 공허하기도 하다. 집단 감정도 역시 이러한 측면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에 자신 있게 대처하게 만드는 낙관주의가 있어야 하고, 그보다는 정도가 좀 약하더라도 그 반대의 경향도 있어 낙관적 경향을 어느 정도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경향은 스스로를 제한하지 못하고 반대 경향으로만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경기장에 대한 관심, 곧 축구에 대한 사랑은 사회와 단절된 ‘진공 상태’의 어떤 스펙터클이 아니라 21세기 현실과 점선으로나마 잇대어 있는 열정이며, 따라서 그것은 풍요롭고 건강하게 발산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축구’란 파괴적인 정념의 폭력적 발산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축구장은 그러한 아름다운 축구를 원하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