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부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책이 출간되면 꾸준히 찾아보고 있다.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에 이어 최근에 나온 <아름다운 구원>까지 매년 한권 정도 출판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의 책들은 '현재 그리고 우리'에 대한 진단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원인 분석도 명료하다. 다만 해답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그리 친절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유의 지평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편에 가깝다. 한병철은 자신의 이론을 새롭게 정립한다기보다는 기존의 학자들이 제기한 명제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프리즘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래서 각 책은 문고판처럼 작고 얇지만 논의하고 있는 내용은 깊이 있고 다루는 문제는 묵직하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피로사회>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성과주의와 긍정주의를 비판한다. 무한경쟁과 과잉된 긍정성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도록 강요하고 그로 인해 우울증, 강박증 같은 신경성 질환들이 만연한다고 진단한다. 각 시대마다 특징적인 고유의 질병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의한 병이 아니라 신경성 질환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핍박하는 성과주체의 피로가 만성질환을 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아렌트의 <활동하는 삶>,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엘렝베르의 탈갈등화, 니체의 <우상의 황혼>과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등의 텍스트를 끌어들여 분석하고 있다.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전작이면서 동시에 이 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모든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오직 활동하고 일하는 시간만이 의미있고, 여가시간도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의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라기 보다는 방향없이 날아가 버리는 분산과 원자화, 즉 반시간성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반시간성의 원인과 징후를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며 사색적인 삶(비타 콘템플라티바)을 복원해아 한다. 그는 그 가능성을 헤겔, 마르크스, 니체, 푸르스트 , 하이데거 등 주요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투명사회>의 저자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디지털사회에서 투명성이라는 것이 신뢰의 덕목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제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표출시키며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SNS가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부활이며 여기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심리정치>는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라는 모토를 내걸고, 우리의 욕망과 무의식까지 분석해서 최적화하는 스마트 권력에 대해 강한 비판을 시도한다. 우리의 욕구는 나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자본의 계획된 욕구이며 자기계발서는 자본가가 노예를 다루는 신자유주의시대의 착취 기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자아 최적화가 노예 최적화와 동일시된다. 또한 빅데이터를 강요하는 풍토는 야만적 데이터주의를 낳고, 강박적 힐링을 조장하는 분위기는 결국 킬링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푸코의 생명정치학과 일루즈의 감정자본주의 시각이 설명의 틀로 쓰이고 있다.
<에로스의 종말>을 통해 분석하고 있는 대상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저자는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사라지거나 파괴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즉 현대사회의 극도의 나르시즘 경향 때문에 에로스가 퇴색되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비롯되나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가 소멸되고 보편적인 유사성으로 회귀하는 수많은 동일자 사이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또한 타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자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성과사회에서 투명한 방식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구조에서는 주체적 자아가 형성될 수도 없다. 오로지 혼자서 노력하고 혼자서 책임지는 원자화된 사회가 있을 뿐이다. 타자와 자아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려 하며 사회적인 성공에 메달리게 되어 성공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에로스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인 셈이다. 레바나스의 동일자/타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토피아/헤테로토피아, 바따이유의 에로티시즘 등의 개념을 알고 있으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신작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저자는 미가 경배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 소비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매끄러움과 건강함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는 긍정성의 미학에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가 철폐되어가는 시대로 간주한다.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지닌 건강한 삶은 죽음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미학관을 제시하기 위해 칸트와 헤겔의 미학, 일레인 스캐리의 미와 정의론, 그리고 아도르노의 부정성의 미학,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푼크툼/아펙툼 등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아마도 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예술은 아름다움만 추구해오지 않았으며 추함과 기괴함, 숭고함을 같이 묘사해왔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미학은 미와 윤리와 인식을 통합하고 우리가 아름다움을 통해 성찰과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첫댓글 책이 두껍지는 않지만 행간마다 생각을 하며 읽어야할 책일 것 같습니다.
무식하게도 한병철교수님...처음 듣습니다.
그러나 소개해 주신 내용으로 보아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사회를 역설적으로 잘 짚어주는 책이 되겠군요^^
관심이 갑니다.
푸어님~~~~글~~~~짱!!!
무식하게 이렇게 쓰고 갑니다...ㅎㅎㅎ
로즈님 별말씀을요...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한병철의 책들은 진짜로 얇은데 내용은 정말 깊고도 넓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시대의 문화현상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책들입니다. 책을 가까이 하시는 로즈님께서는 척보면 바로 아실 내용입니다만...
피로사회라는 제목만 듣고 있었는데 퓨어님 덕분에 한병철 선생의 여러 저작물에 대한 요약을 이리 잘 해 주시다니 퓨어님의 숨겨진 새로운 능력을 잘 봤습니다^.^ 독일원문을 한글로 번역한 점도 특이하군요. 글로만 봐서는 현대문명비판서로 보이는데 서구의 주류문명에 대한 비판과 한국사회에 대한 문명비판이 같이 언급되는 건가요? 아니면 어느 한쪽을 더 중점적으로 진단,비판하는 건가요? 아무튼 관심깊게 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한권만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책을 권해주고 싶은지?
고맙습니다. 율리시즈님처럼 인문, 철학적 기반이 튼튼한 분들이 읽으시면 훨씬 깊이있게 써주셨을텐데 저는 그냥 제가 이해한 수준에서만 적었습니다. 책을 읽어보시면 훨씬 더 심오하고 풍부한 논의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병철은 독일에서 먼저 인정을 받고 국내에 알려진 학자이고, 그의 저작들은 모두 원문이 독일어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책들이죠. 물론 제가 원문과 대조해 본 것은 아니지만 번역도 나쁘진 않아요.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이 책들은 일관되게 관통하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대부분 서구의 주류 문명에 대한 비판이고 한국은 아주 조금만 언급되지만 그 내용들은 모두 우리 사회에도 바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예를 들면 스펙쌓기, 자기계발서 유행, 힐링열풍, 스마트폰 확대, 셀카 중독, CCTV 보급, 빅데이터 분석, 인스타그램, 페북과 같은 SNS, 성형과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 등을 인문, 철학, 미학적으로 분석하고 있어요.
저는 우선 <피로사회>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국내에 소개된 그의 첫 책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논의의 시발점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되거든요. 지배와 착취의 구도에서 이제는 지배자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어요. 대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착취하도록 만드는 기제들만 촘촘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공하기 위한 스펙쌓기와 자기계발로 이어지는 이 질주 현상들 속에서 소진되고 낙오되고 잉여가 계속 일어나지만 다들 멈출수 없잖아요. 게다가 다들 행복하지도 않고 더 나아지지도 않고 의미부여도 할 수 없고...이런 현상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신선했어요. 다른 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pure 그렇군요.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피로사회는 바로 구입했습니다. 진작에 읽었어야 했을텐데 인연이 없다가 퓨어님 덕분에 이제 보게 되네요. 읽고 소감 남기겠습니다.
@율리시즈 멋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한병철의 책을 즐겨 읽으시는군요. 저는 투명사회,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을 읽었어요. 철학 이론들 뿐만 아니라 영화, 그리고 바그너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 일상에서 늘 접하는 미시적인 소재들(페이스북 등)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멜랑꼴리하게 통찰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저같은 일반인에게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게 한병철의 글이 갖는 매력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권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르시시즘과 인정욕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타인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그 힘으로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는 '에로스의 종말'을 저는 추천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