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운 교과서로 보면 백제는 작은 나라였으며 기껏해야 의자왕과 삼천궁녀이야기정도로 기억한다.
삼천궁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냥 전설이었다.
백제의 미스테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조그마한 나라로 묘사되는데 중국에서는 '큰' 나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백제는 중국대륙 동북, 동남지방에 걸쳐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여러 군데서 확인 된다.
식민사학자들과 조선조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백제는 수처년간 왜곡되었다.
백제는 죽은 역사가 아니다. 백제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지닌 제국이었다.
중원+일본+한반도 중남부를 잊는 해양네트웍을 가진 제국이었다.
우리민족은 중국놈들 밑이나 딱고 멍청하게 지내다가 일본놈들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이 국사이다.
식민사학의 해악은 우리자신을 바보라는 최면을 시켰다. 식민사학자들과 친일파들의 해악이다.
예전에 친일은 다 할만 한것이고, 좋은 것이 좋다라고 주장하는 새끼들이 요즘 우리나라에는 많다.
그들의 말로 따진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의 또다른 주가 되는 것이 더 좋을것이다.
말만 이쁘게 포장할뿐 자신들의 섬기는 주인의 족보를 치장하기 위해 개처럼 충성하는 것이
언론인 교수 기업인들 중에 많은 것이 오늘 우리민족사의 비극이다.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가장 철저하게 왜곡된것이 바로 백제이다.
백제에 관한 중국의 기록을 보자!
'위가 지금의 북경근처까지 쳐들어와 백제를 공격했고, 동성왕이 막았다.'
(남제서 권58 열전 제39 동남이 백제 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서기494~498))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북위는 남제와 함께 중원을 반분하여 지배하던 강대국이었다. 당시 백제는 글안, 고구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중국의 동북지방을 지배한 강대국 이었다는 사실이 북위와의 전승기사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백제는 처음에 마한54국 중의 하나였다. 진(晉 ) 이후에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마한의 옛 영토를 확보 하였다.”
흠정만주원류고강역 조에 “마한은 북쪽으로 낙랑과 인접해 있었다.” 관할은 진평 복주 영해에 있었다.(여기는 오늘의 요서 지방을 말한다.)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한 군대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중국의 유, 연, 제,노 의 지역을 뒤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최치원 전)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뒤에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해 소유하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 소유하였다.
-송서
백제는 비류·온조형제에 의해 건국됐다. 곰나루에 나라를 세운 비류 세력은 일본 규슈 비(肥) 지역에 분국(구노국)을 세웠다(沸=비=肥=火). 그곳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많은 백제계 유물이 출토됐다.
일본 왕가는 ‘만세일계’(万世一系)임을 가장해왔으나, 사실은 가야계·비류계·온조계 3왕조로 이어졌다. 제1왕조는 가야계 정복 왕조였다. 진구·구노 연합군은 제1기 왕조의 마지막 왕 추아이를 규슈에서 전사시키고 기내(오사카)에 혁명 왕조를 수립한 제2왕조다. 곰나루(應津)의 일본 음이 오진(應神)과 비슷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진 정권이 수립되자 137현의 백성도 일본으로 대규모 민족이동을 감행했다. 이들은 한때 신라의 방해로 신라 땅에 발이 묶였으나, 오진이 군을 보내 기내로 데리고 왔다. 또한 일본 정사는 오진계의 유략왕이 한성 백제가 함락되자 즉시 문주왕에게 곰나루의 영토를 양도했다고 하는데, 오진 왕조가 곰나루 출신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고대국가명은 모두 이두 표시지만 가라어의 이름(이두)이었다. 그러나 유독 백제(百濟)만은 처음부터 한자어다. 그 유래는 십제에서 백제로의 성장(<삼국사기>) 또는 ‘백가제해’(<수서>)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사실은 온조의 이름에서 나왔을 것이다. ‘온’은 가라어의 ‘백’이며 ‘온조 →백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정사는 처음부터 백제를 ‘구다라’(큰 나라)로 읽고 있다. 백제는 삼한 최대 국가 마한의 후신이며, 그 분국 ‘구노’도 ‘큰 나라’를 나타낸다.
웅진에서 건너간 진구(오진)·구노 세력이 스스로를 큰 나라, 즉 ‘구다라’라 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들은 기내에 제2왕조를 수립하자 만세일계의 신화에 따라 제1왕조의 신화와 이름 야마토(倭)를 이어받고 본국의 백제를 ‘큰 나라’라 불렀다.
백제 근초고대왕은 당시 중원에 전진(前秦)이라는 중국 땅의 절반을 차지한 나라가 망하고, 백제는 아시아 최강국이 된다. 요서와 일본을 잊는 대 제국이된다. 이후 백제는 쇠퇴하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천하제일이 되는데 백제는 동성왕 때 다시 고구려보다 강해진다.
오진은 한국에서 태어날 것인데 어머니 진구가 돌로 배를 눌러 억지로 규슈 해변에서 태어나도록 했다. 똑같은 구도의 이야기가 또 있다. 곤지는 형 개로왕의 명으로 “만일 아들을 낳으면 즉시 백제로 보내기”로 하고 산달이 된 개로왕의 후궁과 함께 일본으로 갔으며, 규슈의 한 섬에서 무령을 낳고 즉시 돌려보냈다고 한다(<일본서기>).
같은 역사가가 같은 구도의 두 이야기를 정사에 삽입한 것은 분명히 의도적이다. 이 아리송한 신화들은 공통적으로 백제에서 잉태하고 일본에서 태어난 왕자가 왜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이 될 운명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진은 이 인연으로 천지신기(天地神祇)로부터 삼한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실제 오진 계열인 왜 오왕의 대중국 외교 노선은 이 생각을 따르고 있다.
백제왕이 일본왕을 겸했다는 논리로 일본역사를 보면 일본사기의 허점이 대부분 보완된다.
오진의 5대손으로 위장한 게이타이(실체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백제계 호족의 지지로 오진 왕조를 타도하고 항복을 받는 형식으로 왜왕으로 즉위한다(<일본서기>). 일본 정사에 쓰인 게이타이는 출신 배경을 알 수 없고, 즉위한 뒤에도 20년 동안이나 왕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 의문투성이의 인물이다. 이는 그에 대해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게이타이(繼?)라는 이름도 ‘체제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쿠데타 왕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게이타이(곤지)는 왕이 되자 즉각 적극적인 친백제 노선을 취한다. 가야의 땅 일부를 백제에 양도하고 5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규슈에 있는 신라계 세력 이와이(盤井)를 섬멸하기도 했다.
곤지에게도 게이타이 못지않게 수수께끼가 많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감추기 위한 <일본서기>의 위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개로왕의 동생 곤지는 큰치(大人)로, 게이타이의 왜명 오오토(大人)와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이타이(오오토)는 같은 시기 곤지와 함께 가우치(현 오사카)에서 지낸 셈이니,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봐야 한다.
개로왕의 동생 곤지에 대한 <송서>(宋書)의 기록에는 차기 백제왕 제1후보인 좌현후로 나오는데, 그 아래 격인 문주왕 때 3개월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있다가 죽었다(<삼국사기>).
<일본서기>에는 곤지가 만삭이 된 왕의 후궁과 함께 왜로 가던 중 규슈의 섬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돼 있다. 이 아이가 곧 무령이다. 이때 곤지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인 개로왕이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결하려 동생 곤지를 특사로 파견했다. 곤지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왕의 부인 중 한 명을 달라고 했고,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맡기며 “만약 가는 도중 아이를 낳으면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실제로 개로왕의 부인은 가는 도중 진통을 느껴 아이를 낳았는데 이곳이 현재 규슈의 한 작은 섬인 가카라시마다. 무령왕이 살아 있을 당시 이름이 사마대왕인데 ‘사마’라는 뜻 자체가 섬이란 뜻이다. 가카라시마에는 백제 무령왕의 출생지라는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귀한 분이 아이를 낳았다는 등 현지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무령왕의 출생지로 확실해 보인다.
곤지의 아들을 5명으로 명기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게이타이(곤지)가 죽자 그의 태자와 제2왕자가 이상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왕위를 이은 왕자 긴메이는 처음부터 태자로 기록돼 있다. 이 모순은 왕이 죽자 또 하나의 정변이 일어났으며, 긴메이가 형들을 살해하고 억지 수단으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죽임을 당한 2명과 백제 왕이 된 동성왕, 그의 아우 무령왕, 그리고 긴메이 5명의 실체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처음 곤지의 아들이 다섯이라고 기록한 역사가는 긴메이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썼던 것으로 보인다. 긴메이가 게이타이의 아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며, 실제로는 아들이 아닐 개연성도 있음을 시사한다.
“왜 무령왕의 유물에는 이렇게 외국산 제품이 많을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중국산 도자기, 중국에서 주조된 동전,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리 구슬, 가야식 토기가 있었고 목관의 재료 또한 일본에서만 난다는 금송이었다.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담긴 금속제 장신구는 많았지만 그 흔한 백제 시대 도자기는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는 백제인이었고 그가 살아간 백제는 중국과 일본 한반도를 연합한 연합국가였다.
475년, 백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고구려군의 침공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며 개로왕이 죽고, 연이어 2명의 왕이 귀족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이런 상황에서 동성왕이 14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하며 왕권 강화에 나서는데, 돌연 전 경호실장 백가에 의해 시해당하고 만다.
원광대학교 소진철 교수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 규모에 비추어 당시 곤지계가 규슈, 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왜의 주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녕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왜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 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친형제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 청동제). 이 인물화상경은 503년 무령왕이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위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동경
아래 쓰따하치만궁(隅田八幡宮)에서 발견된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이 화상경에는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이 화상경을 보낸 사람은 사마왕 즉 무령왕이고 503년경의 천황은 바로 게이타이 천황,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이 친형제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게이타이 천황 = 무령왕의 동생 = 곤지왕의 아드님'이라는 가설이 성랍될수있다.
동성왕 당시 백제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가 아니었다. 웅진으로 피난 온 백제 왕실을 토착민들이 반길 리 만무했다. 툭하면 반란이 일어났고 문주왕과 동성왕이 반란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40살의 왕족이던 무령왕은 백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동성왕의 암살 배후에 무령왕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선대왕들과 달리 무령왕은 62살 때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해 천수를 다했다고 전해진다. 서기 523년 무령왕이 죽자 양나라와 일본도 즉시 애도의 뜻을 담아 무령왕의 무덤에 넣을 부장품을 보내왔다. 이미 일본 금송으로 만든 목관은 제작돼 있었고, 양나라의 기술자들은 바다를 건너와 벽돌식 무덤 건축을 도왔으며, 각종 도자기와 물품이 속속 도착했다.
1400여 년 전, 중국 남조-백제-왜 삼국의 기술과 정성, 생전 동아시아의 중심축이던 무령왕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일본은 스스로 만세일계의 ‘신의 나라’로 우기지만 곤지와 그의 왕자들이 같은 시기 백제와 왜의 왕이었음은 상징적이다. 천왕은 성씨가 없음을 내세워왔으나 <수서> 왜인전에는 ‘아마’씨로 돼 있다. 백제 왕성 ‘여’(余)는 일본어로 아마(리)로, 백제와 왜는 동성동본이다.